삼성 반도체 공장에 이어 삼성전자서비스에서도 수리 기사들이 루게릭 등 희귀 난치성 질환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 '삼성 직업병 논란'이 확산될 전망이다.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와 삼성노동인권지킴이, 반도체노동자의건강과인권지킴이(반올림)는 20일 근로복지공단에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 전 직원 이현종(43) 씨의 산재 신청서를 제출했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과 LCD 공장 노동자들의 희귀병 발병 신고 사례는 160여 건에 달하지만, 생산라인 외에 전자 기기를 수리하는 삼성전자서비스에서 희귀병이 공개적으로 보고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씨는 지난 1993년 삼성전자서비스 동대전서비스센터에 입사해 지난 2012년 루게릭(근위축성측삭경화증) 확진을 받고 퇴사할 때까지 20여 년간 내근직 OEM(소형가전) 수리 기사로 일했다.
루게릭은 서서히 몸이 굳다가 호흡근 마비로 사망하는 신경계 퇴행성 질환으로, 인구 10만 명 당 0.6~2.6명이 발병하는 희귀병이다. 이 씨 역시 지난 2012년 확진 후 대부분의 근육에 마비가 와 눈동자 정도만 움직이는 상황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 씨의 가족들과 노조는 그의 루게릭 발병이 삼성전자서비스 수리 업무와 연관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노조에 따르면, 이 씨는 하루 14시간 씩 환기 장치가 설치되지 않은 밀폐된 작업 공간에서 신나 등의 유기용제를 사용하며 납땜 작업을 해왔다.
루게릭의 정확한 발병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여러 환경 요인 중 납·수은 등의 중금속과 유기용제, 전자기장 등의 노출에 의해 발병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역학조사에서도 납과 유기용제, 전자기장 노출과 루게릭 발병의 인과관계가 인정된 사례가 있으며, 2007년 부산지방법원은 납 사용 허용 기준치를 초과하지는 않았지만 오랜 기간 납에 노출된 상태에서 근무하다 루게릭이 발병한 노동자의 사망이 '업무상 재해'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특히 이 씨가 일하던 동대전센터는 전국 1위의 실적을 자랑하지만, 이 씨 외에도 올해만 2명의 노동자가 뇌출혈로 쓰러지는 등 수리 기사들의 업무 강도가 높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 씨의 부인 서모 씨는 "남편이 입사 이후 2012년 발병할 때까지 한 번도 여름 휴가를 못 갔다"면서 "발병 후 처음으로 휠체어를 타고 여름휴가를 갔을 때 남편이 정말 좋아했었다"고 했다.
문제는 삼성전자 반도체 및 LCD 생산 공장 노동자 뿐만 아니라 전자 기기 수리 기사들 역시 이 씨처럼 유해 환경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다.
라두식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수석부위원장은 "전국 서비스센터 내근 수리 공간 중 환기 시설이 제대로 돼 있는 곳은 거의 없으며, 작업 환경에서 어떤 유해 물질이 있는지 설명조차 없는 상황"이라며 "이윤 추구에 눈이 먼 삼성전자가 제품 서비스를 외주화하면서 노동자들에 대한 안전 관리까지 외면했다"고 밝혔다.
이 씨와 같은 희귀병 발병 사례도 속속 알려지고 있다. 백혈병(부천센터 수리기사), 루푸스(광안센터 수리기사), 백반증(이천센터 수리기사) 등 직업병 의심 질환이 보고됐으며, 이들은 공통적으로 유기용제에 장시간 노출된 상황에서 근무를 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일부 수리 기사들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발암 물질로 알려진 TCE(트리클로로에틸렌)를 사용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TCE는 백혈병으로 숨진 고(故) 황유미 씨 등 삼성 반도체공장 노동자들이 노출됐던 발암 물질로, 법원은 이들에 대한 산재 재판에서 TCE를 백혈병 유발 물질로 인정한 바 있다.
하지만 수리 기사들에 대한 안전 교육은 미흡한 것으로 나타났다. 금속노조가 지난 1월부터 두 달간 전국 48개 삼성전자서비스센터를 상대로 실태 조사를 벌인 결과, 최근 3년간 21만여 건의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들 중 대부분 산업 안전 및 보건 교육을 제대로 실시하지 않은 사례였다. 이 씨 역시 유해 물질 사용에 대한 주의 사항조차 알지 못한 채 20여 년간 근무를 해 왔고, 유해물질 제거 설비 없이 맨 손으로 남땜과 세척 작업 등을 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노조와 반올림 등은 이날 산재 신청에 앞서 연 기자회견에서 "삼성전자가 조속히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의 작업 환경을 개선하고, 직업병 의심 질환에 대한 실태 조사와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리 기사들은 삼성전자서비스가 아닌 협력업체 소속이지만, 임금과 근로조건, 업무와 인사 관리 등을 원청업체인 삼성전자서비스가 관리하는 만큼 책임지고 이 문제를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삼성전자서비스센터의 수리 기사들은 지난해 7월 노조 설립 뒤 삼성전자서비스를 상대로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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