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황우석, 대통령, 회장님 다함께 "과학기술 독립 만세!"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황우석, 대통령, 회장님 다함께 "과학기술 독립 만세!"

<제보자>가 말하지 않은 황우석 사태의 진실 ④·끝

<제보자>가 말하지 않은 황우석 사태의 진실

<제보자> 윤민철 PD는 사실 외롭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날아온 혈서, "개양구, 너는…"

"고래 싸움이 끝나고, 새우 혼자서 칼을 들었다"

황우석, 대통령, 회장님 다함께 "과학기술 독립 만세!"


2005년 12월 15일, 그날은 아침부터 숨 가빴다. 황우석 박사의 2005년 <사이언스> 논문에 실린 복제 배아 줄기세포 사진이 미즈메디병원에서 발표한 논문에 실렸던 일반 배아 줄기세포 사진과 같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미즈메디병원의 논문에는 김선종 연구원이 공동 저자로 참여했었다. 사건의 전모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순간이었다.

논문을 조작하는 과정에서, 김선종 연구원이 실체가 없는 복제 배아 줄기세포 대신에 미즈메디병원의 일반 배아 줄기세포 사진을 논문에 가져다 썼을 가능성이었다. 진실에 또 한 걸음 다가갔다. 이 의혹을 <프레시안>이 처음으로 기사로 내보내고, 몇 시간 뒤 노성일 미즈메디병원 이사장이 폭탄선언을 했다. "줄기세포 지금은 없다."

이른바 '줄기세포 조작 스캔들'은 노성일 이사장의 이 선언으로 사실상 끝이 났다. 그 뒤에도 황우석 박사가 "줄기세포 바꿔치기" 의혹을 제기하면서 검찰 수사를 의뢰하는 등의 변죽이 계속되었지만, 그조차도 한 번 바뀐 물줄기의 흐름을 바꾸지 못했다. 2006년 5월 12일, 검찰은 "줄기세포는 처음부터 없었고, 현재도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황우석 박사는 그 시점에 왜 검찰을 끌어들였을까? 그는 끝이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자신을 구해줄 두 개의 동아줄을 믿었다. 하나는 바로 2004년 <사이언스> 논문의 근거가 된 1번 줄기세포였다. 그는 이 줄기세포만큼은 인간 복제 배아에서 뽑아낸 것이라고 확신했던 모양이다.

그가 12월 16일 "줄기세포가 11개면 어떻고 1개면 어떠냐"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인간 복제 배아 줄기세포를 1개라도 만들 수 있는 "원천 기술"이 존재하는 한, 대한민국이 자신을 버리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던 것 같다.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믿음이었다.

그런데 결국 이 1번 줄기세포조차도 황우석 박사를 배신했다. 서울대학교 조사위원회 등은 이 1번 줄기세포가 인간 복제 배아에서 뽑아낸 것이 아니라, 복제 배아를 만드는 핵 이식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만들어진 처녀생식(parthenogenesis) 배아에서 뽑아낸 줄기세포라고 판단했다. (이후 추가 검증에 나선 세계 과학계도 이런 판단을 지지했다.)

(이런 서울대학교 조사위원회의 판단은 많은 사람들의 생각처럼 뜬금없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 복제 배아를 만드는 과정에서 처녀생식이 나타날 가능성은 해당 분야 과학자 사이에서는 꼭 한 번씩 검토하고 넘어가야 하는 지점이었다. 나중에 제보자(류영준 박사)와의 대화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황 박사도 2004년에 이미 이런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황우석 박사가 검찰을 끌어들인 또 다른 이유는 그 때까지 자신의 편이었던 권력에 대한 신뢰였다. 그는 권력이 끝까지 자신을 비호해주리라고 믿었다. 돌이켜보면, 처세의 달인이었던 그 조차도 그 시점에는 감각이 무뎌졌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권력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후일담 하나 : 부끄러움을 모르는 기자들

ⓒ연합뉴스
12년째 기자로 밥벌이를 하고 있지만, 친하게 지내는 기자가 거의 없다. 12년째 과학기술 또 환경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지만, 한국과학기자클럽이나 한국환경기자클럽 근처에 가본 적도 없다. 몇 년 전, 기자를 꿈꾸는 대학생 앞에서 이런 얘기를 했더니 한 친구가 물었다. "그렇게 살면 외롭지 않나요?" 나는 이렇게 답했다. "한두 번 있는 일인가요?"

엄청난 고립감. 2005년 11월부터 12월까지 내가 느낀 감정의 정체는 고립감이었다. 특히 12월 10일 '김선종 녹취록'을 보도하기 전까지 언론계에 우군이 보이지 않았다. 뭔가 쥐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피디수첩(PD수첩)>이 자기 앞가림하기도 어려운 처지가 되면서 이런 고립감은 더욱더 깊어졌다.

진보, 보수, 오프라인, 온라인 매체 할 것 없이 황우석 박사를 옹호하거나, 나중에는 그의 해명을 전달하기에 바빴다. 당시 한국 언론이 처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가지 일화가 있다. 12월 4일 이후 마음이 급해진 한학수 PD는 몇몇 매체 기자를 은밀히 불러 모아 <피디수첩>이 그간 취재해온 사실(fact)을 공유할 기회를 가졌다.

나중에 듣기로 그 자리에 통신사, 오프라인 매체, 온라인 매체 등 대여섯 군데의 기자들이 모였다. ("강 기자는 알아서 잘 하고 있어서 따로 부를 필요가 없었다." 나중에 한 PD가 사석에서 그 때 일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그렇게 <피디수첩>의 취재 내용을 공유하고서도, 언론의 보도 내용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럴 법했다. <프레시안>과 같은 작은 언론은 '기자의 관점'을 최우선에 둔다. 하지만 그날 한학수 PD와 사실을 공유했던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언론은 '데스크의 관점'과 '사내의 평가'를 최우선에 둔다. 설사 기자 개인이 <피디수첩>의 입장에 동조한다고 하더라도, '데스크의 관점'과 '사내의 평가'를 극복하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인 것이다.

아무튼 이런 엄혹한 상황에서도 힘이 되어주는 기자들이 있었다. 먼저 한 방송사의 K 기자와 한 보수 언론의 C 기자. 이들은 내가 기사 한 꼭지, 한 꼭지를 써서 세상에 내놓을 때마다 마치 자기 기사인 양 꼼꼼히 챙겨서 보고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자기가 속한 언론사의 보도에 절망하면서 말이다.

당시 <동아일보>의 이성주 기자(<코메디닷컴> 대표)가 보낸 격려도 잊을 수 없다. 이 기자는 의학 담당 기자로,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교 연수를 다녀와서 엉뚱하게 서울시교육청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황우석 사태 보도를 놓고서 갈등을 빚다가,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황우석 사태의 전모를 나름대로 추적한 <황우석의 나라>(바다출판사 펴냄)를 펴냈다.

그럼, 황우석 사태로 한국 언론이 바뀌었을까?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나서, 어느 날 밤에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술에 취한 목소리였다. "강양구 기자? <○○○○>의 아무개입니다." <침묵과열광> 등을 통해서 실명 비판했던 과학 담당 기자 중 한 사람이었다. "강 기자 지적에 부끄러워서 기자를 그만뒀소."

전화를 끊고 나서 마음이 무거웠다. 그랬다. 이 기자를 포함해 몇몇이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황우석 사태 때의 책임을 지고서 기자 생활을 그만두었다. 그런데 아무도 묻지 않은 책임을 지고서 기자 생활을 그만둔 이 기자들은 그마나 평소에 양질의 과학 기사를 쓰려고 노력했던 이들이었다.

정작 황우석 박사와 엉겨 붙어 희희낙락대던 이들은 지금도 여전히 과학 '전문' 기자 행세를 하면서 활보하고 다닌다. 마치 자신은 그 때 진실의 편에 섰었던 것처럼 시치미 뚝 떼고서 말이다. 이와 관련한 후일담 하나. 황우석 사태가 한창 정리 국면이던 2006년 초에 과학기술부 산하 기관의 한 관계자가 전화를 걸어 왔다.

"4월에 '대한민국과학문화상' 시상식이 있는데 신문 및 잡지 부문에서 강양구 기자가 여럿으로부터 추천이 되었습니다. 공적 조서를 내서 후보자로 이름을 올리시죠."

과학기술부는 황우석 사태가 이렇게 엉망이 된 데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정부 부처였다. 그런데 황우석 사태가 아직 채 정리가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과학기술부 장관이 주는 상을 받으라니! 이런 내용을 담아서 답장을 보내고서 잊어버렸다. (더구나 과학기술부를 감시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과학 담당 기자들이 돌아가면서 이 상을 받는 꼴사나운 행태도 역겨웠다.)

그 해 4월, 과학기술부에서 날아온 보도 자료를 보고서 어이가 없었다. 혹시, 2005년 11월에 처음으로 '제보자를 색출하라' 뉘앙스의 보도를 했던 그 기자 생각나는가? 바로 그 기자가 '대한민국과학문화상' 신문 및 잡지 부문 수상자(상금 1000만 원)로 선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공중파로 자리를 옮겼다.

그 때나, 지금이나 대한민국 과학 언론은 이렇게 부끄러움 따위는 내던진 이들이 지배하고 있다. 내가 여전히 기자들 사이에서 '왕따' 기자를 자처하는 이유다.

후일담 둘 : PD 저널리즘, 진화에 실패하다

2005년 12월 15일, 노성일 이사장의 폭탄선언 직후에 <피디수첩>의 'PD수첩은 왜 재검증을 요구했는가'가 시청자를 만났다. 존폐 위기까지 몰렸던 <피디수첩>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순간이었다. 그 순간에 <프레시안> 편집부는 정신이 없었다. 독자들로부터 '축하' '격려' 그리고 '사과'의 메시지가 폭주했기 때문이다.

임순례 감독은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영화 <제보자>를 보고서 "한학수 PD가 굉장히 좋아했다"고 전했다. 나는 이 인터뷰를 보고서 '설마…' 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한학수 PD는 영화를 보고서 굉장히 부끄러워했을 테니까. 아마도 의례적인 칭찬을 임 감독이 진의로 받아들인 게 아닐까?

물론 'PD수첩은 왜 재검증을 요구했는가'는 지금 봐도 굉장히 잘 만든 프로그램이다. 만약 이 프로그램이 2005년 11월에 방영이 되었더라면, 언론사에 한 획을 긋는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이 방영된 시점은, 줄기세포 조작 스캔들이 정리되고 나서인 12월 15일 오후 10시였다.

그러니 이 프로그램은 한학수 PD를 비롯한 <피디수첩> 팀의 작품이 아니다. 12월 4일 <피디수첩>의 방영이 무기한 금지되고 나서 한학수 PD를 비롯한 <피디수첩> 팀의 손발이 꼭꼭 묶인 상태에서, 그들 대신 진실을 밝히고자 노력했던 모든 이들의 협업 혹은 연대의 결과물이라고 봐야 마땅하다.

그러고 보니, 이런 일도 있었다. 황우석 사태가 끝나고 나서, 몇 개월 뒤에 한학수 PD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조만간 MBC 시사교양국에서 PD를 공채할 테니 지원을 하라는 권유였다. 한 PD가 "정당한 채용 과정"을 강조하긴 했지만, 누가 봐도 '보은(報恩) 스카우트'였다. 하루 이틀 고민하다가 이런 내용을 담아서 답장을 보냈다.

"좋은 제안은 고맙습니다. 하지만 가장 힘든 시기에 나를 믿어주며 함께했던 <프레시안>의 선배, 동료 기자들을 이렇게 떠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을 겪으면서 <피디수첩>도 밖에서 뜻을 같이하는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피디수첩>과 밖에서 연대하는 것으로 인연을 이어가겠습니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 한때 'PD 저널리즘'의 매력에 마음이 움직인 적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 때 <피디수첩>은 최승호 PD, 한학수 PD가 중심이 되어 PD 저널리즘의 진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프레시안>을 선택했다. 그리고 어쭙잖은 평가를 덧붙이자면, PD 저널리즘은 진화에 실패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피디수첩>을 비롯한 PD 저널리즘이 말하는 '진실' 혹은 '정의'는 지극히 상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피디수첩>이 그간 고발해온 대상을 살펴보면, 누가 봐도 '나쁜 놈'이거나 (혹은 사이비 종교 집단처럼) '(나쁜 짓도 하는) 이상한 놈'이다. <피디수첩>이 (이해당사자의 격렬한 반발 속에서도)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온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착한 놈'과 '나쁜 놈'의 선악 구도로 나뉘지 않는 중요한 문제가 갈수록 늘고 있다. 윤리, 복지, 환경 등 가치에 기반을 둔 문제가 그렇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다룰 때, 저널리즘은 때로 대중의 상식에 반하는 문제 제기도 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격렬한 반발도 감수해야 한다.

황우석 사태, 특히 난자 출처를 둘러싼 윤리 문제가 바로 그런 예였다. '세계적인 과학 업적 앞에 윤리 문제 따위는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대중의 반발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피디수첩>과 한학수 PD는 바로 그런 문제를 들춤으로써 PD 저널리즘의 진화를 시도했다.

그런데 이런 <피디수첩>과 PD 저널리즘의 시도는 그 이후에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가끔 고약한 질문을 던진다. 만약 제보자가 난자 출처를 둘러싼 윤리 문제만 놓고서 <피디수첩>을 찾아갔더라도, <피디수첩>과 한학수 PD는 기꺼이 나섰을까? 아니 그 때 이른바 '황까'였던 사람들도 이렇게 대답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줄기세포는 있잖아요?"

후일담 셋 : 새로운 <제보자>가 필요하다

2010년 6월 18일, 서울 구로구 오류동에서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약 3000명이 참가한 가운데 황우석 박사의 수암생명공학연구원 연구동 기공식이 개최된 것이다. 이곳은 2005년 황우석 사태 이후에 과학계에서 퇴출된 황우석 박사가 재기의 발판을 닦으리라고 기대를 모으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황우석 박사의 재기를 바라며 참석한 3000명 가운데는 노무현 대통령에 이어서 2007년 야권의 대권 후보로 나섰던 정동영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 그리고 지난 6·4 지방 선거 이후에 야권을 이끈 박영선 의원 등도 있었다. 박영선 의원은 가슴 뭉클한 격려사도 남겼다(<시사뉴스> 2010년 6월 21일).

"정치를 하다보면 상처를 많이 받으며, 때때로 진실이 세상에 왜곡돼서 전달된다." "신은 진실을 안다. 그러나 때를 기다린다." "앞으로 황우석 박사의 시대가 열린다." "우리 구로에서 (황 박사가) 재기에 성공해서 구로의 기적이 대한민국의 기적으로, 세계의 기적으로 열리기를 바란다."

박영선 의원의 이 격려사가 과연 진심을 담은 말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마음에 없는 말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내뱉을 줄 아는 이들이 바로 정치인이니까. 설사 진심에서 우러난 말일지라도, 한 때 최고의 지위까지 갔다가 몰락한 한 과학자를 향한 연민의 표현일 수도 있다. 진실은 본인만이 알 것이다.

내가 수년 전의 이 일화를 꺼내는 것은, 어쩌면 황우석 사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2004년, 2005년 <사이언스> 논문은 조작으로 판명이 났고, 인간 복제 배아 줄기세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이 밝혀졌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은 황우석 박사의 재기를 바란다. 도대체 그들은 왜 미련을 버리지 않는 것일까?

<제보자> 전에도 안면이 있는 영화인 몇몇이 사석에서 황우석 사태의 영화화 가능성을 물어온 적이 있었다. 그 때마다 한학수 PD와 제작자 한둘이 접촉해 영화화를 진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한 가지 걱정은 영화에서 내가 미모의 여기자로 바뀌어서, 한 PD와 로맨스 라인이라도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러면서, 나는 질문을 바꿔볼 것을 제안했다.

"만약 12월 4일 <피디수첩>이 존폐 위기에 빠졌을 때, <프레시안> 또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의 소장 과학자를 비롯한 다윗들이 아무도 나서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바로 그 질문에 답하는 영화가 이 시점에 더 의미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서 나는 이성주 기자가 쓴 <황우석의 나라> 도입부를 내 식으로 변주한 아래와 같은 가상 시나리오를 들려주곤 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제보자>가 필요하다.

2006년 1월 2일, 표류하던 문화방송(MBC) <피디수첩>은 결국 침몰했다. 전국 곳곳의 MBC 사옥 앞은 연일 촛불 집회를 벌이는 황우석 박사 지지자들 때문에 몸살을 앓았다.

가수, 탤런트 등 연예인들이 MBC 출연 거부를 선언하는 바람에 방송 파행 사태가 계속되었다. MBC의 시청률은 급강하했다. 결국 MBC의 최문순 사장은 전격적으로 사퇴를 선언했다. 검찰은 한학수 PD를 협박죄, 업무 방해죄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여론 조사 결과 국민의 90퍼센트 이상이 이런 일련의 상황에 동조했다.

황우석 박사 복귀 여론이 들끓었다. 신문, 방송들은 1월 내내 황 박사의 복귀 시점을 놓고 왈가왈부했다. 설 연휴가 시작되기 하루 전날인 1월 24일 새벽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황 박사가 서울대학교에 모습을 드러냈다. 밤새 그를 기다리던 수천 명의 지지자들은 교문부터 수의과대학까지 노란 손수건을 들고서 일렬로 늘어서 그를 환영했다. 수의대로 들어가기 전 황 박사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큰 절로 국민의 성원에 답했다. 국민도 같이 눈물을 흘렸다.

황우석 박사는 2월부터 매달 한 가지씩 장밋빛 구상 또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 황 박사의 고뇌에 찬 표정이 신문, 방송에 나왔다. 실제 환자를 대상으로 한 줄기 세포 임상 시험을 해야 하는데, 식품의약품안전청의 까다로운 절차와 일부 학계의 반대 때문에 벽에 부딪쳤다는 것. 여론은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환자의 애끓는 사연이 폭주했다. 정부는 마침내 우선 100명에 한해 '응급 임상'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황우석 박사의 응급 임상이 결정되자마자 그동안 지켜보기만 했던 국내 대기업들이 황 박사에게 수백억 원의 지원을 약속하면서 공식적인 협력 관계를 요청했다. 여기서도 역시 삼성그룹이 돋보였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황우석 박사와 함께 '제2의 반도체 신화'를 열겠다"며 황 박사에게 수천억 원의 전폭적인 지원과 함께 새로 만들어질 가칭 '삼성 바이오'의 대표 이사를 제안했다. 몇 번 고사하던 황 박사도 삼성의 제안을 승낙했다.

2006년 8월 15일, 황우석 박사는 삼성병원에서 줄기 세포 첫 임상 시험을 실시했다. 그 자리에서는 동시에 '삼성 바이오'의 창립 선언과 황우석 박사의 대표 이사 취임식도 동시에 거행됐다. 전격적으로 그 자리에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은 "오늘 이 자리는 61년 전 광복절보다도 더 감격스러운 날"이라며 "이로써 대한민국은 과학 기술 식민지에서 독립했다"고 '과학 기술 독립 선언'을 선포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일부 참모들의 반발에도 이건희 회장과 황우석 박사의 손을 잡고 "대한 독립 만세"를 세 번 외쳤다. (끝)
이전의 세 글을 포함한 이 연재는 당시의 기사, <침묵과 열광>, 취재 메모, 이메일, 비공개 인터넷 게시판의 글 등에 근거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기록만이 유일한 '진실'이라고 강변할 생각은 없다. 가능한 한 왜곡 없이 사실 관계를 전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은 나의 관점에 따른 구성이기 때문이다. 진실을 찾는 일이 어려운 또 다른 이유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