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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박정희가 민주주의 내세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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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박정희가 민주주의 내세운 이유

[프레시안 books] 강정인 <한국 현대 정치사상과 박정희>

근대는 여러 얼굴을 지닌다. 영국과 프랑스를 전형으로 하는 서구 근대가 있고, 그것에 저항·분리하여 형성된 미국의 근대가 있으며, 서양의 충격을 거친 다음 아시아 침략을 지렛대 삼아 구성된 일본의 굴절된 근대도 있다. 또한 중국과 같은 반(半)식민지가 근대의 주변에 위치하고, 그 끝자락 어딘가에 일제 시기 조선과 같은 '식민지 근대'가 위태롭게 자리하고 있다.

이렇듯 서구 근대를 중심으로 하고, 식민지 근대를 가장자리로 밀쳐버린 중심부, 반(半)주변부, 주변부의 수직적 근대 속에서, 해방된 조선은 최대한 빨리 서구 근대를 따라잡아야만 하는 승산 없는 마라톤의 최후발 주자 같은 존재였다. 게다가 대량 학살, 전쟁, 분단의 공고화와 군사 독재로 이어진 반세기의 한국 현대사는 한국인들의 '명백한 (불행한) 운명'을 예고하는 듯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놀랍게도 고도 경제 성장과 정치적 민주화라는 쉽지 않은 목표를 반세기 만에 상당 정도 달성해냈다. 엄청난 구심력을 품은 채 근대의 중심을 향해 질주해간 한국인들의 근대는 분명 고도성장의 '압축 근대'라는 개념으로 표현할 만하다.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강정인의 신간 <한국 현대 정치사상과 박정희>(아카넷, 2014년 8월 펴냄)는 한국의 압축 근대에 대한 또 하나의 보고서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지난 수년간 여러 학술지에 게재했던 강정인의 한국 현대 정치사상에 관한 논문들의 총합이자, 논리적 정리 과정의 일환으로 출간되었다. 강정인은 민주화 운동의 절정기였던 1987년에 미국 유학길에서 돌아온 후, 이제껏 줄곧 서양 정치사상과 한국 정치의 상관성, 한국의 정치사상, 서구 중심주의 극복 문제 등을 다루어왔다. 그는 한국 정치사상의 다양한 주제들을 주도적으로 연구해온 대표적 국내학자로서, 이번 책은 한국 현대사나 정치사상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이유로든 꼭 읽어봄직한 연구서임에 틀림없다.

우선 이 책의 핵심 주장들을 살펴보자. 강정인은 이 책을 통해 현대 한국 정치사상의 가장 대표적인 성격으로 '비동시성의 동시성'과 '민족주의의 신성화'를 제시한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형용모순적인 용어는 한국 정치사상의 '구조적 조건'을 설명하기 위한 핵심 개념이고, '민족주의의 신성화'는 한국의 이념 지형의 가장 대표적인 '내용적 조건'으로 제시된 것이다. 더불어 그는 '자유주의', '보수주의', '민족주의', '급진주의'를 한국 현대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서구의 4대 이념으로 소개하며, 4대 이념이 서로 각축하면서 한국 '민주주의'의 현재적 모습을 조형해온 과정을 한국 정치사상사의 주요 흐름으로 간주한다. 이 때문에 그의 시기 구분은 일반적인 한국 현대사 시기 구분과는 달리, 민주화 이전(1948∼1979), 대전환기(1980∼1992), 민주화 이후(1993년 이후)로 이뤄진다. 이는 1987년을 한국 민주주의의 주요 분기점으로 구분하는 기존 연구의 시기 구분법과 매우 상이하다. 동시에 이 책의 주요 분석 대상 중 하나인 박정희 정부 시기 정치사상의 위상과 성격은 위와 같은 주요 주장들의 핵심 내용을 그대로 수용한 채, 사실상 '비동시성의 동시성'과 '민족주의의 신성화'가 어떤 방식으로 박정희(시대)의 정치사상에 영향을 주었는지 설명하는 방식으로 제시된다.

주변부의 숙명, 비동시성의 동시성

ⓒ아카넷
강정인은 한국 정치의 이론적 지형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이중적 정치 질서의 중첩적 병존'과 '자유민주주의의 조숙한 보수화'를 지적한다. 여기서 말하는 이중적 정치 질서란 주로 '권위주의'로 표상되는 시대 역행적 보수주의와 서구적이며 원론적인 '자유(민주)주의'의 오랜 공존을 의미하며, 자유민주주의의 조숙한 보수화는 해방 직후 사회주의의 조숙한 등장에 의해 조형된 것으로 설명된다. 그리고 이상과 같은 두 가지 중요한 이론적 지형 형성의 원인으로, 일방(서구)에 의한 타방(한국)의 압도, 세계사적 시간대와 일국사적(한국사적) 시간대의 불일치를 제시한다. 소위 그의 책에서 제시된 핵심 개념인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한국 정치사상의 이론 지형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원래 '비동시성의 동시성(simultaneity of the non-simultaneous)'은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에 의해 제시된 것으로, 서구와 다르게 전개된 한국 현대 정치사상의 흐름을 설명하기 위해 강정인에 의해 차용된 개념이다. 블로흐는 유대계 독일 철학자로서, 1935년에 펴낸 <우리 시대의 유산>을 통해 국가사회주의(나치즘)라는 반동적 극우 민족주의가 대두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개념을 고안해냈다. 블로흐에 따르면, 1918년까지 독일의 정치·경제적 변화는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덜 근본적이었기 때문에 이질적이고 반동적인 세력들이 허약한 독일 부르주아지와 병존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렇듯 낡은 심성을 가진 계층들은 당대의 위기에 반응하면서 신성한 신화와 비합리적 설명에 사로잡혔으며, 나치는 전 자본주의적 과거를 이상화하여 대중적으로 호소함으로써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 이상과 같은 블로흐의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개념은 오늘날의 '문화적 지체(cultural lag)'나 '토대와 상부구조의 엇갈림' 등과 비슷하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강정인은 이상과 같은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현상이 제2차 세계대전 후 한국과 같은 신생 독립국에서 훨씬 더 격렬한 양상으로 분출했다고 주장한다. 그가 한국 정치의 이론적 지형의 전제로서 강조한 '이중적 정치 질서의 중첩적 병존'은 바로 해방 후 비동시성의 동시성에 의해 부여된 것이다. 예컨대 자유(민주)주의의 경우, 자유(민주)주의를 정당한 정치 이념으로 신봉하고 부과하는 세계사적 시간대의 압도와, 이를 적절히 운영할 수 있는 사회구조와 정치 문화를 결여한 한국사적 시간대의 반발과 충돌을 역사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강정인은 이중적 질서의 중첩적 병존의 근거로 (서구와 다른) '뒤늦은' 과거 청산 시도, (서구와 다른) 4대 이념 발전상의 경로 역전 현상, 이념에 대한 진정성 논란 등을 들고 있다. 더불어 그는 이상의 개념과 논리 구조 속에서 박정희 정부 시기의 행정적·민족적·한국적 민주주의, 반자유주의적 근대화 보수주의 등의 성격을 일관되게 해석된다. 강정인은 권위주의와 자유주의라는 이중적 질서의 중첩적 병존 현상이 1987년 민주화의 진척과 함께 거시적 차원에서 해소되고, 비동시성의 변증법 또한 1987년 이후 현저히 약화되는 것으로 평가한다.

근대의 주변부에서 냉전적 갈등의 중심부로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저명한 사회과학자들이 한반도로 대거 몰려들었다. 이들은 결코 해외의 현장 연구를 통해 부나 명예를 쌓고자 했던 풋내기 연구자들이 아니었다. 전쟁 당시 일리노이대학교 언론학부장이었고 후에 스탠퍼드대학교 언론연구원장을 지낸 윌버 슈람(Wilbur Schramm), 럿거스대학교 사회학과장 존 라일리(John Riley), 하버드대학교 존 펠젤(John Pelzel) 교수 등은 그 대표적 예이다. 이들이 1950년의 한반도를 발 빠르게 방문한 이유는 냉전기 한반도의 정치적 특수성 때문이었다. 이들은 약 3개월의 공산 점령 기간 동안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남한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직접 보고 싶어 했고, 유엔군의 북한 지배가 북한 사람들의 일상과 사상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관찰하고자 했다. 당시에는 오직 한반도만이 그 같은 연구를 가능케 해주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냉전기 한반도는 세계적 냉전 질서와 갈등의 주변부라기보다는 명백한 중심부에 있었다. 대한민국의 정치·경제적 생존은 미국에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해방 직후 냉전의 양대 세력이 분할 점령했던 한반도는 일면 냉전 질서를 선도해나가기도 했다. 1947년 '세계사'적으로 냉전이 본격화되기 이전에, '한국사'적으로는 이미 1946년 초 미소공위를 전후한 시점부터 냉전기의 양극적이고 폭력적인 좌우 대결이 시작된 사실을 볼 수 있다. 이는 다시 말해 한국이 근대의 끝자락에서 있는 힘을 다해 서구 근대를 쫓아가야만 하는 후발 주자이기도 했지만, 냉전 질서의 한가운데에서 세계사적 갈등과 변화의 제일선에 있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한국인들은 냉전이라는 전 지구적 갈등 한가운데에서 세계적 규모의 군사 충돌을 치르며 세계 최빈국으로 추락하기도 했고, 미·소의 상호 공존 모색과 경제적 경쟁 구도 속에서 단기간에 세계적인 경제 강국으로 성장할 수도 있었다.

냉전적 갈등과 변화의 제일선에 있던 한국은 정치사상의 측면에서도 기형적인 '양극적' 형태를 띠지 않을 수 없었다. 1949년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보도연맹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사회주의 경력을 지닌 이들에 대한 교육과 선전, 즉 '전향'이라는 방식을 통한 특정 사상의 '절멸'을 시도했다. 그러나 1950년 전쟁이 발발하여 전향 정책의 현실화가 불가능해지자, 대한민국 정부는 대량 학살을 통해 과감한 '인적 절멸'을 시도했다. 그리고 이 같은 시도에서 상당 정도 성공했다.

이렇듯 내가 대한민국의 냉전적 질서와 사상적 갈등에 대해 구구절절하게 설명한 이유는 강정인의 책에서는 현재 시점에서조차 한국 정치사상의 대표적 특징 중 하나로 거론되는 '양극적 갈등'과 '폭력성'이 거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냉전기 한국인들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반공주의(혹은 사회주의)는 서구에서 유래한 4대 이념의 부차적 담론이나, 하위적 정치사상으로만 거론된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반공주의의 극단화는 보수주의 세력의 극우 반공주의화, 자유주의 세력의 어용화, 진보주의 세력의 비합법화 등을 낳았고, 서구적 자유주의는 남한에서 반공주의에 짓눌린 '불구화'된 모습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개념으로만 한국 정치사상을 살필 경우,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담론의 헤게모니 장악을 위해 분투했던 지배 세력과 저항 세력의 정치(담론)적 갈등 양상은 상당 정도 설득력 있게 해설되지만, 상대를 극단적으로 악마화했던 냉전기의 폭력적이고 양극적인 이데올로기는 갈 곳을 잃을 수밖에 없다.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헤게모니 쟁탈전

이 책의 가장 큰 기여는 한국의 보수 세력과 진보 세력이 1948년 이후부터 줄곧 자유(민주)주의와 민족주의 '담론'을 장악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는 사실을 생생히 보여준다는 점이다. 강정인은 독재 정권도 최소한 외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할 수밖에 없는 현실, 반민족적 정책을 추구하는 세력일지라도 외적으로는 민족을 최우선으로 내세울 수밖에 없었던 한국적 현실을 '비동시성의 동시성'과 '민족주의의 신성화'라는 개념을 통해 흥미롭게 제시한다. 그는 최소한 1987년 민주화 달성 시기까지는 이 같은 성격이 강하게 유지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응당 이 책에서 위와 같은 현상의 대표적 사례처럼 제시된 박정희(정부) 또한 그 독재적 정국 운영과 반통일적 정책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자유(민주)주의와 민족주의를 표방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실제 한국 현대사의 몇몇 중요한 정치적 사건들은 자유(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헤게모니 장악을 위해 한국의 보수와 진보가 치열하게 싸웠고, 그 싸움의 결과로서 특정 정치 진영이 다른 진영을 압도하는 현상을 보여주곤 했다. 예를 들어 해방 직후 신탁 통치 논쟁 과정에서 불거진 우익 세력의 좌익 세력에 대한 '반민족' 꼬리표 붙이기, 친일파가 민족주의자로 분식(粉飾)하는 과정 등은 그 대표적 예가 될 수 있다. 해방 직후 일제 감옥에서 출소했던 다수의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대중의 높은 신망을 받았고, 친일파들은 대중들의 적대감을 경계하며 자기 활동의 돌파구를 조심스럽게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모스크바삼상회담의 핵심적 결정 사항이 국내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신탁 통치 논쟁이 발생하며, 찬탁 세력으로 간주된 사회주의자들은 순식간에 반민족주의자로 낙인찍혔고, 반탁 진영에 투신한 친일파들은 자신을 민족주의자로 분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소위 '민족주의의 신성화'가 대대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던 해방 정국에서 친일파들은 신탁 통치 논쟁을 통해 정치 활동의 돌파구를 마련했고,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주의 헤게모니 장악 실패와 함께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상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상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강정인의 신간은 한국현대사의 주요 정치사상의 흐름뿐만 아니라, 그 주요 정치적 사건의 진면목을 파악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준다. 물론 사상이라는 것은 살아 있는 생물처럼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이고, 압축 근대의 한국은 더욱 복잡다기한 사상의 흐름을 포용하고 있기 때문에, '비동시성의 동시성'과 같은 특정 이론이나 개념으로 단순화한다는 것은 적잖은 위험을 수반함에 틀림없다. 실상 그 같은 위험성을 반영하듯, 지금 내 책(강정인 신간)의 수많은 여백들과 학습 노트에는 다수의 질문들과 비판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동시성의 동시성', '민족주의의 신성화'를 통해 조망 가능한 서유럽발 한국 정치사상'들'의 변화 과정은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이해를 풍성하게 만들어줌에 틀림없다. 물론 서구 중심주의의 극복을 오랫동안 강조했던 강정인이 왜 굳이 서유럽의 근대를 최상의 근대로 설정한 독일 철학자의 이론을 중심으로 한국 정치사상사를 설명하려 했는지, 왜 이 책에서는 독재라는 표현을 찾아보기 힘든지, 왜 '반공 민족주의'나 '근대화 민족주의' 등과 같은 표현 대신 굳이 형용모순적인 '분단 유지적 민족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했는지, 그리고 왜 이승만과 박정희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강조하면서도, 동일하게 민족주의 담론을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북한에 대해서는 "민족주의를 인정하기란 불가능하다"(개인적으로 이 저서 전체에서 가장 도드라졌던 표현)고 했는지 여전히 많은 의구심이 남아 있다. 그렇지만 위와 같은 수많은 학문적 사유를 촉발하고 자극했다는 점만으로도, 이 책은 의심의 여지없이 훌륭한 학술서라고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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