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라면 알 것이다. 몇 년 전 정부가 지원하는 각종 연구 프로젝트에 갑자기 '다문화' 관련 과제가 엄청 많이 선정되었다는 것을. 그래서 다들 그랬다. "다문화는 이제 많이 했으니 더 이상은 안 뽑을 것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다음 해에도 '다문화'는 또 많이 선정되었다. 그 이후로도, 실로 다문화는 상당히 오래갔다. 그런데 왜 우린, 보수 정부 하에서 다문화 과제가 많이 선정된 것에 의문을 품지 않았을까. 다문화는 정작 진보의 관심사인데 말이다. 저자가 말하듯, 연구가 생계인 우리는 그저 뽑힐 만한 주제에 촉을 곤두세우며 앞다퉈 프로젝트 신청을 했고, 선정되면 그만인 것이었다. 강미옥의 <보수는 왜 다문화를 선택했는가>(상상너머, 2014년 8월 펴냄)는 우선, 나에게 이런 뼈아픈 반성을 하게 했다.
연구 과제뿐만이 아니다. 저자가 말하듯, 집권 세력은 이자스민을 국회의원으로 내세웠고 인요한, 박칼린 등을 요직에 배치했다. 한때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대통령도 외국에서 모셔오잔 말이 돌기도 했었다. 실로 너무나 개방적인 태도이다. 말도 우리말만 할 것이 아니라 영어도 같이 쓰자는 영어 공용화론도 제기되었다.
저자는 외국인 유학생에 대한 정부의 특혜도 지적한다. 실로 요즘 대학에서는 외국인 학생을 자주 볼 수 있다. 정부는 매년 최소한 1000명 이상의 외국인 유학생에게 특혜를 주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왕복 항공권, 대학 등록금, 월 생활비 80~90만 원, 정착 지원비, 귀국 지원비, 의료보험료를 지급받는다. 또한 정부는 이들의 공직 채용을 확대하고 인문계 학사 학위를 받은 유학생이 경영, 금융 등 전문 직종에 취업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저자에 의하면 이는 미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적극적인 유학생 유치 정책이다. 이는 해외 우수 인력을 확보하겠다는 목표 하에 진행된 것인데, 정작 이들은 학위를 마치면 한국에 머물지 않고 미국이나 캐나다로 가려 한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 대학생들은 턱없이 비싼 등록금 때문에 대출을 받고 시간을 쪼개 아르바이트를 하며 졸업 후에도 취업하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요즘 청춘들은 다 아프다. 안녕들 하지 못하다.
이 같은 외국인에 대한 특혜는 '역차별' 주장이 나오게 만든다. 예컨대 저자도 사례로 든, '다문화 가정 아동 외갓집 보내주기'를 보자. 내가 알던 한 분이 이 일의 실무를 맡았었는데 한 이주 여성이 왜 자신의 첫째 아이는 보내주고 둘째 아이는 보내주지 않느냐며 온갖 기관에 진정을 하는 바람에 결국 형제를 다 같이 보내줬다고 한다. 지침에 의하면 일정 연령 이하의 아동은 해외에 보내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실무자의 말이, 해외여행은 꿈도 못 꾸는 가난한 한국 아동이 많이 있는데 왜 다문화 가정의 아동은 이 같은 특혜를 누리느냐는 것이다. 이 일을 하면 할수록 역차별이 아닌가 하는 회의가 많이 든다고 했다.
정부뿐만이 아니다. 보수 언론과 기업 역시 다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다문화는 사실상 진보의 관심사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보수주의자들이 소리 높여 다문화를 외치고 있을까.
왜 보수-우파는 다문화를 주장하는가
당장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값싼 노동력의 대량 확보이다. 삼성경제연구소도 다문화주의를 전파하는 데 주력했는데 그 논리는 일단 비용 측면에서 유리하다는 것이다. 또한 값싼 외국인 노동자를 채용하여 비용이 절감되면 그 여력으로 신규 고용 창출이 확대될 것이라는 논리도 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저자도 지적했듯이 오히려 정규직을 비정규직화해서 제대로 된 일자리는 더욱 줄어들었다. 한국 젊은이들이 힘든 일을 기피하기 때문에 외국인 노동자를 들여온다고 많은 이가 말하는데, 환경미화원 모집에 석사 학위 소지자까지 몰리는 것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일이 힘드냐 아니냐가 아니라 안정된 일자리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언제 잘릴지 모르는데 일은 힘들고 게다가 월급까지 적다면 그 일을 누가 하려고 하겠는가. 외국인 노동자라면 물가 차이로 인해 그 돈을 가지고 본국에 돌아가면 그럭저럭 살 수 있지만 한국에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저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인구 증가 논리도 다문화 논리와 마찬가지의 이유로 주장되고 있다. 세계 인구는 2011년에 이미 70억을 넘었고 현재 한국 인구는 5000만이다. 작은 땅덩어리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인구는 세계에서 26위이다. 그래도 정부와 언론은 인구가 줄어든다며 출산 장려 운동을 펴고 있다. 조선시대 말기 인구가 약 1500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우리 조상들은 그럭저럭 우리 땅에서 나는 쌀로 먹고살 만했다. 인구는 왜 늘어나야 하는가. 기업의 입장에서는 노동자가 늘어나므로 인건비가 줄어들고 소비자가 늘어나므로 이윤이 늘어난다. 인구는 기업의 식민지이다. 노동을 짜내고 상품을 강매하는 대상이다. 그러므로 인구 증가는 결국 기업 노예의 증가이다.
중세 유럽에서 흑사병이 쓸고 지나간 후 인구가 대폭 줄자 노동력이 부족해졌다. 그에 따라 기술이 발전하고 기계가 발명되었다. 늘 식량이 부족해 곡물만 심던 땅에 과일도 심게 되어 사람들의 삶의 질이 높아졌다. 그러나 지주, 귀족, 기업으로서는 당시 위기를 맞았던 셈이다. 현재 이렇게 인구가 늘어났어도 먹고살 만하니, 인구 증가에 따른 식량 고갈을 예언한 맬서스의 말이 틀렸다고들 한다. 그런데 사실상 현재 굶어 죽는 사람도 많거니와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이 환경 문제이다. 화석 연료는 줄어들고 탄소 배출은 늘어나고 밀림은 없어지고 온난화로 수면은 높아져 땅덩어리는 점점 없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기업과 정부는 단기간의 이익을 위해 인구 증가를 외치고, 그래도 안 되자 외국에서 노동자를 데려오고 있다. 이를 통해 낮은 수준의 인건비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혹시 그 결과 일자리가 부족해졌다는 사회적 불만이 있을까 하여 이를 사전에 방지하고자 '다문화'를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다.
다문화 강조는 선거와도 관련이 있다. 보수-우파들의 다문화 논리에는 이주 노동자에 대한 논의가 별로 없다. 거의 다문화 가족에 한정되어 있다. 저자에 의하면 '다문화 정책'이란 곧 '다문화 가족 정책'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이유 중 하나는 이주 노동자의 경우 투표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외국인은 합법적으로 5년 이상 거주해야 영주권이 나오고 영주권을 가진 후 3년이 지나야 투표권이 생기는데, 외국인 노동자들이 영주권을 얻지 못하도록 한 번에 최장 4년 10개월만 머물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다문화 가족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이주 여성과 그 자녀까지 일찌감치 포섭해 놓아야 앞으로 있을 선거에서 유리해진다. 실로 다문화 가족의 수는 크게 증가했다. 2012년 기준으로 초등학생 입학생 10명당 1명이 다문화 가족의 아동이라고 한다. 2020년대에는 5가구 중 1가구가 다문화 가족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보수-우파가 다문화를 강조하는 것은 이렇듯 노동력 확보와 선거 승리를 위함인데, 저자에 의하면 그것 외에도 민족주의 해체 및 친일 정당화와도 관련이 있다. 보수-우파들은 '식민지 근대화론' 등 친일적 역사 인식을 정당화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폄하하고 '세계사적 시각'을 강조한다. 민족 담론을 해체하자는 주장이 담긴 책이 삼성경제연구소 총서로도 발간되었다. 저자에 의하면 미국의 보수-우파들이 백인 중심적 다문화주의를 주장한 데 반해 한국의 보수-우파는 '한민족 중심'이란 말을 절대 하지 않는다. 또한 저자가 특별히 주목한 것은 '식민지 근대성론'의 등장이다. 이 이론의 주창자들은 자신들이 식민지 근대화론과 수탈론을 동시에 극복했다고 주장하는데, 저자가 보기에 이들은 수탈의 역사를 최소화하고 번영과 발전의 이미지를 찾아내는 데 주력하며 식민 지배를 위한 자발적 동의를 얻은 메커니즘에 주목한다. 저자는 그 주요 학자 중 하나인 마이클 로빈슨이 한국어를 몰라 영어로 쓰인 글만 읽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런데 한국의 근현대사 전공자나 진보적 학자가 영어로 글을 쓰는 경우는 별로 없다. 따라서 그는 비전문적이고 또한 대단히 제한적이고 편향적인 자료만을 참조하여 식민지 근대성론을 주장한 셈이다.
저자는 진보 인사로 분류되던 황석영, 백낙청 등에게서도 '민족을 털고 가자'는 주장이 있는 것을 주목했는데, 내가 보기에 이는 다른 차원의 얘기이다. 이는 민족을 더 넓은 시각에서 보자는 것이다. 일찌감치 친일 사관에 맞서온 강만길이나 동학 연구자인 박맹수 등 민족을 중시해온 학자들이 '민족'을 넘어서서 더 보편적인 '평화'와 '동아시아'를 얘기하는데 이는 민족의 중요성이나 일제의 만행을 축소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를 보편적 수준에서 더 강하게 주장하기 위함이다. 즉 예컨대 일제의 만행이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세계에서 행해진 것을 고발하는 것이며 이로써 항일을 위한 아시아적 연대를 꾀할 수도 있다.
기업 이익, 선거 승리, 민족 담론 해체 노리는 보수-우파의 다문화
이렇듯, 보수-우파가 주장하는 다문화는 결국 기업의 이익, 선거 승리, 민족 담론 해체를 위한 것이다. 이런 '사심 가득한' 이들의 다문화주의는 결국 자신들을 위한 것이지 사회 소수자인 이주민들을 배려하기 위한 것이 아니므로 그 부작용에도 무심하다. 저자는 보수-우파의 다문화 강조가 오히려 다문화 가족을 구별 짓고 소외시킨 결과를 가져왔다고 지적한다. 다문화 가정의 아동은 "야, 다문화"로 불리고 놀림을 받는다고 한다. 보수-우파의 다문화 가족에 대한 과도한 구별 짓기와 과도한 지원은 이들을 한국민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한다. 그러나 과연 보수-우파는 이러한 것에 관심이나 있을까. 세월호 사건이나 교황 방문에서도 보이듯이 이들은 오로지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하여 자신들의 치적이 드러나는 데에만 관심을 갖는다. 이들의 다문화주의는 그저, 고통받는 피해자들 앞에서 웃으며 찍는 '인증샷'이다.
다문화의 부작용이 우려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현재 우리 사회가 대단히 위계적·서열적이라는 것 때문이다. 서열주의는 경쟁을 중요시하는 신자유주의의 위세와 더불어 강화되었다. 고졸·대졸로 사람을 나누는 것도 조심스럽던 시대에서 이젠 학교별로, 본교·분교별로, 대학 내 전공별로 등급을 나눠 사람을 차별하는 시대가 되었다. 내가 대학 다닐 시절 학교를 나타내는 옷을 입거나 배지를 다는 행위는 암묵적으로 금기시되었다. 위화감을 조성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생각 있는' 대학생의 행위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요즘은 그렇지 않다. 또한 우리 때에는 영어가 쓰인 옷도 잘 입지 않았다. 서구 중심주의, 백인 우월주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모든 것에 영어가 쓰인다. 홈쇼핑 광고를 보면 "주얼리에 핑크 빛이 도는 아이템"이 그득하다. '분홍색 보석 상품'은 사라졌다. '터널'은 좋은 것이고 '땅굴'은 나쁜 것이 됐다.
이런 환경에 다문화가 들어온다면 그것은 '서열적 다문화'이다. 그것은 이미 보수-우파에 의해 노골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저자에 의하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외국인 정책 기본 계획'을 통해 외국인 노동자를 이중적으로 대한다. 우수 인재와 단순 노동 인력을 분류하여 그 혜택과 지원 범위를 차별화하는 것이다. 인재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거의 선진국의 백인들이다. 이들은 비자도 쉽게 취득하며 체류 기간도 길어진다. 반면 주로 저개발 국가의 유색인종인 단순 노동 인력에겐 그런 혜택이 거의 주어지지 않으며 영주권이나 가족 동반의 기회도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저자에 의하면 이러한 단순 노동 인력의 체류 기준이 강화되면서 이들에 대한 인권 침해 가능성도 같이 높아졌다.
따라서 다문화도 어떤 철학을 가진 자들이 주장하는지 봐야 한다. 다문화에서 중요한 것은 '문화 서열주의'가 아닌 '문화 평등주의'여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듯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이다. 다문화가 상대주의이면서 보편주의일 수 있는 이유는 다른 색깔, 다른 소리를 냄으로써 전체적으로 더욱 아름다운 그림과 음악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빨간색과 파란색 사이에, 바이올린과 피아노 사이에 우열은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다르고 또 달라서 아름답고 또한 평등한 것이다. 우린 이런 생각으로 다문화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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