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물론 조선 시대에도, 로마 제국 시대에도 입양은 있었다. 그런데 당시 입양은 오늘날과 달리 가계를 계승하거나 재산을 물려주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오늘날의 입양은 가계를 계승하거나 재산을 물려준다는 개념보다 '고아'가 된 아동에게 '사랑'을 주는 행위가 강조되며 아동의 권익과 복리를 위한 최선이란 이해 하에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과거 입양된 아이들은 자신의 친생부모가 누구인지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가족 관계를 유지하며 살았다. 하지만 오늘날 입양된 아이들은 자신의 친생부모가 누구인지 모를 뿐 아니라, '알고자 하는' 의지는 사회적 장치들에 의해 좌절되는 단절 속에 살아가게 된다. 즉, 입양은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그 의미와 실천 방식에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럼 언제부터 친족 공동체 안에서 길러지던 아동이 생면부지의 '부모'와 '물질'을 갖춘 '그럴듯한 가정'으로 이식되어 길러지는 것이 아동을 위한 최선의 이익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일까? 그리고 '부모'와 '물질'이란 조건의 '완비'가 왜 아동이 태어난 '친족 공동체'와 '관계' 등을 대체하며 아동 복지의 개념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된 것일까? 그리고 '부모'와 '물질'이란 조건의 '완비'는 진정 아동의 권익과 복리를 위한 최선의 조건들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저명한 탐사 저널리스트인 캐서린 조이스의 <구원과 밀매>(뿌리의집, 2014년 6월 펴냄)는 우리가 어디에서도 배운 적이 없는 놀라운 답을 알려주고 있다. 이 책은 오랫동안 기독교에 대해 심층 취재를 해왔던 저자가 국제 간 아동 입양에 대해 밀착 취재한 결과다. 우리는 이 책을 덮을 즈음엔 "아동의 권익과 복리를 위한 최선"이라는 입양의 정의는 "입양 부모와 입양 기관, 그리고 국가의 권익과 복리를 위한 최선"으로 수정되는 것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입양을 구원이자 선교의 일환으로 이해한 복음주의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신앙적 근거는 이렇다.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에게 입양되기 전에는 누구나 똑같이 고아이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게 입양되어 다시 태어났으며 자신도 이 지상에서 아이를 입양함으로써 이를 그대로 재현해야 한다"(102쪽)고 본다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성서적 계명과 교차하며,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비기독교 국가나 가정의 아이들을 입양하고자 하는데 책에서 소개하는 가장 빠른 사례는 1830년에서 1850년대 자메이카 선교단의 활동이다. 이들은 자메이카의 성인들을 개종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 "(이 지역에서) 선교가 가능한 유일한 방법은 아이들을 부모들과 그들의 문화에서 떼어내어 선교사들의 집에서 키우면서 개종시키는 데 초점을 두는 것"이라고 선언한 뒤, 아이들을 그들의 부모와 공동체로부터 떼어내어 백인 기독교인 가정에 배치했다. 이렇게 보면 서구의 제국주의 확산은 자본과 문화의 식민화뿐 아니라 가장 취약한 '어린아이'의 일상에도 관통했다는 것을 우리는 입양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복음주의자들은 입양을 통해 성서의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계명을 실천하고자 했다. 1854년에서 1929년까지 '고아 열차(Orphan Train)'가 미국 동부에서 서부를 가로지르며 달렸는데, 이는 가난한 이주민 가톨릭 가정과 유대인 가정의 아이들을 모집하여 열차에 태워 개신교 농부 가정에 입양시킬 목적으로 운행되었다. 아이들은 도착하는 마을의 예배당에 나란히 세워졌고 농부들은 원하는 아이들을 골랐다.
그런데 '고아 열차'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계급의식'이 관통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가난한 이주민 사회는 아이들에게 '비도덕적 영향'을 끼치는 위험 요소가 잠재되어 있다고 치부되었다. 당시 사회는 이러한 비도덕적 영향을 완화하기 위해 가난한 이주민에게 복지 혜택과 사회적 기회들을 제공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아이만을 빼내어 중산층 가정에 배치함으로써 사회적 비용을 절감하는 간편한 방식을 취한 것이다. 따라서 생면부지의 가정에 아동을 이동 배치하는 오늘날 입양의 관행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그 근저에는 제국주의적이며 계급주의적이며 인종차별적인 잘못된 믿음들이 녹아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고아 열차'에 실린 아이들의 절반 이상은 부모가 모두 있거나 부모 중 한쪽과 살고 있는 아이들이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입양 대상이 되는 아이들의 상황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저자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입양되는 아이들은) 실제로 가족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회 복지 제도나 시설이 부족해서 아동 복지라고는 고아원밖에 없는 나라에서 일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빠진 부모들의 아이들"이거나 "혼외 임신으로 사회적 편견과 차별, 경제적 위기에 직면하게 될 여성들이 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입양이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고아'라는 용어의 정의는 자연적 상태로서가 아니라, 계급적이며 성차별적으로 정의된 용어라는 것을 다시금 환기하게 된다.
친생부/모가 아이 포기하지 않도록 사회 안전망 강화해야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며 입양은 다양한 공존에 정면으로 대치하며 계급 차별과 성차별을 지속적으로 용인하는 것이란 생각을 다시금 확신하게 되었다. 입양인들은 입양 가족 안에서 자라면서 지속적으로 "감사하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고 한다. 하지만 누가 감사해야 하는가? 복음주의 신앙에 기초한 한 입양 운동가는 "아이는 지상의 비행기를 타고 입양되고, 그 아이를 입양한 부모는 천국의 비행기로 (하나님께) 입양된다"고 믿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가난한 가족을 돕고 비혼 여성의 임신이 위기에 몰리지 않도록 그들을 도와야 할 국가의 비용과 수고는 아이 하나가 중산층 가정에 입양되며 간단히 해결된다.
더구나 입양을 둘러싼 수수료는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에 아이를 보내면서 입양 기관이 받는 입양 수수료는 1만 달러에서 2만5000달러 사이라고 한다. 미국에서 가장 큰 입양 기관인 베다니복지회의 2011년 총 수입은 7500만 달러였다고 한다. 이쯤 되면 해외 입양을 주선하고 있는 국내 입양 기관의 수익은 일일이 따지지 않아도 대충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누가 누구에게 감사해야 한단 말인가? 입양인은 자신의 부/모와 단절되고 자신이 속했던 가족 공동체를 부정당한다. 그런 입양인을 먹이고 입히고 입양인에게 계급 상승의 기회를 부여하긴 하지만, 입양인은 그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누릴 수 없다. 그런 입양인이 오히려 입양 부모로부터 또 국가로부터 감사하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설사 이들이 감사하다는 말을 듣는다 하여도 그것으로 충분할까?
입양은 입양인과 입양인의 친생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최선'이 아니라 많은 것을 잃게 되는 '최악'일 수 있다. 그리고 입양이 입양 부모와 입양 기관, 그리고 관련된 국가에 주는 이익을 따져봤을 때는 입양을 '사랑'이니 '선의의 행동'이라고 말하는 것은 입양을 호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간 필자는 선의의 입양은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선의의 입양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입양은 친생부모와 아이의 희생 없이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가 제안하듯 어려움에 처한 아이를 구하려 하기보다는 어려움에 처한 친생부/모가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자신의 아이를 포기하지 않도록 사회적 안전망을 강화해 나가는 데 마음을 썼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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