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황태성 넘겨 얻은 밀가루, 박정희 당선 '숨은 공신'?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황태성 넘겨 얻은 밀가루, 박정희 당선 '숨은 공신'?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62> 제3공화국의 탄생, 아홉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일곱 번째 이야기 주제는 제3공화국의 탄생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사상 논쟁이 1963년 대선 결과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짚었으면 한다. 해방 후 좌익세가 강했거나 1956년 대선에서 조봉암 지지표가 많이 나온 곳에서는 윤보선보다 박정희에게 호감을 보인 경우가 많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서중석 : '조봉암 지지표가 많았던 지역에서 박정희 표가 많이 나왔다', 이런 얘기는 김형욱 회고록에도 나오고 어떤 정치학자가 연구 논문을 내기도 했다. 이 부분엔 더 생각해야 할 게 있다.

1956년 대선 결과를 보면 경상남북도에서 조봉암을 지지한 게 많은 지역도 있지만 표가 적게 나온 지역도 있다. 이건 뭘 얘기하느냐 하면, 여러 다른 요인도 있을 터인데, 그때 개표가 정말 부정 개표였다는 것이다. 부정 개표를 심하게 한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 간에 차이가 있었다. 말하자면 덜 부정하게 한 데가 있고 아주 심하게 한 데가 있었다. 이런 건 1960년에 내무부 장관으로서 3.15 부정 선거에 앞장섰던 최인규의 옥중 자서전에도 잘 나오지 않나. 이런 걸 감안해야 하는데 감안이 잘 안 됐다. 그런 점을 하나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다음에 경상도하고 전라도는 해방 직후 좌익이 제일 센 곳이었다. 브루스 커밍스 연구만이 아니라 어느 논문을 보더라도 그렇다. 그에 비해 중부 지방은 보수 세력이 센 곳이었다. 충청도도 그렇지만 서울, 경기 지역이 그런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색깔 논쟁 같은 게 있으면 어떻게 되겠나. 더구나 전쟁이 났을 때 대구에서 부산에 이르는 좁은 지역과 그 외곽 지역에서는 군경에 의해 보도연맹원 학살이 많이 일어났다. 그런데 여기는 국군이 장악한 지역이 많았기 때문에 좌익에 의한 학살 같은 건 적게 일어났다.

4월혁명 이후 제일 많이 들고일어나고 유족회가 가장 많이 만들어지는 것이 경상도 지역이다. 그러니 색깔 논쟁이 날 때도 제일 크게 반발할 수 있는 것이 이 지역이었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프레시안 : 전반적으로 볼 때 사상 논쟁은 어느 쪽에 유리하게 작용했나.

서중석 : 미국 측 자료나 그 당시 신문 등 여러 자료를 보면, 박정희가 여순사건 후 재판을 받았고 무기형이 언도됐다고 폭로한 1963년 10월 13일 <동아일보> 호외를 봤을 때 사실 민주공화당은 망연자실했다. '이건 이제 끝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억지소리를 해댄 것이다.

그리고 9월 말까지만 보더라도 윤보선이나 허정이 얘기한 것에 그렇게 과한 건 없었다. 다만 박정희를 잘 몰랐던 것이다. 박정희가 이질적 사상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 애매하긴 하지만 '당신이 이런 사건에 관련된 것 아니냐'라고 몰고 들어간 것은 윤보선 쪽에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난 본다. 중부 지방에서 유리했을 것이다. 그런데 윤보선 쪽 인사인 김사만이 나중에 "부산과 대구는 빨갱이가 많은 곳"이라는 등의 발언을 한 건 특히 전라도와 경상도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사상 논쟁이 양자에게 플러스로 작용했느냐 마이너스로 작용했느냐 하는 점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일부 학자들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진 않다. 그러나 김사만 발언은 분명히 악재였고 이것이 전라도와 경상도에 영향을 끼친 건 확실하다는 점은 얘기할 수 있다. 연좌제를 풀겠다고 박정희가 발언한 것도 난 남도 지역에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본다. 얼마나 바라던 것이었나. 그러나 박정희는 이걸 지키지 않았다.

박정희, 15만 표 차이 신승…유달리 많았던 무효표, 95만

프레시안 : 박정희는 가까스로 윤보선을 눌렀다. 이 선거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 건 사상 논쟁만이 아니었다.

서중석 : 이 선거에서 과연 누가 이겼느냐, 박정희가 정말 승리했다고 볼 수 있느냐 하는 부분과 관련해 상당히 어렵게 하는 측면들이 있다. 당시 여론도 그런 게 있다. 사상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이 선거에는 몇 가지 우연한 현상도 있었다.

예컨대 무효표 문제가 있었다. 허정의 경우, 투표지를 보면 공란으로 취급됐다. 송요찬은 너무 늦게 사퇴해서 그렇겠지만 그 이름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내 제자 이병준의 논문을 보면 여러 선거의 무효표 현황을 조사한 대목이 있다. 무효표가 1967년 대선에서는 전체의 5퍼센트인 58만 표, 1971년 대선에서는 4퍼센트인 49만 표, 이런 식으로 나오는데 1963년만 8.7퍼센트로 95만 표나 나왔다. 박정희와 윤보선이 15만 표 차이밖에 안 났는데, 송요찬 후보가 일찍 사퇴했다면 어떻게 됐을 것인가 하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라디오로 모든 걸 중계할 때인데 처음에는 윤보선이 계속 이겼다. 나는 잠을 빨리 자는 편이어서,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다가 밤 10시쯤 잠들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이 라디오에 귀를 열심히 기울였다. 왜냐하면 윤보선이 계속 승리하더라, 이 말이다. 다음 날인 16일 3~4시 무렵까지도 이겼다고 그런다. 그래서 5.16쿠데타 주동 세력 내부에서 '이거 어떻게 할 거냐'며 심각한 논의가 있었다는 게 김형욱 회고록에 나오지 않나. 하여튼 그다음에 둘이 계속 엎치락뒤치락하다가 15만 표라는, 우리 대선 역사상 가장 근소한 차이로 끝났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이다.

송요찬 얘기를 했는데, 또 하나 생각할 건 정민회 후보 변영태가 끝까지 사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 이런 얘기가 있다. '존경하고 지지한다'는 편지가 전국 도처에서 변 후보한테 왔다고 한다. 그게 사퇴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라고 쓴 글이 있다. 이 '전국 도처'가 무엇이겠는가. 변영태 후보는 22만 표를 얻었다. 그렇게 많이 득표한 건 아니다. 40만 표를 얻으며 3위를 한 추풍회 후보 오재영보다도 훨씬 적은 표를 얻었다. 그렇지만 변 후보가 얻은 22만 표가 적은 표는 아니다. 박정희와 윤보선이 15만 표 차이밖에 안 났다는 것을 볼 때 그렇다.

▲ 1963년 제5대 대선 투표지.


삼분 폭리의 해, 선거 앞두고 영호남에 대량으로 풀린 밀가루

프레시안 : 밀가루 문제가 대선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는 시각도 있다.

서중석 : 이병준의 연구에 따르면, 밀가루 영향이 컸던 것 아니냐고 볼 수 있다. 미국이 선거 기간에 구원투수로 등장한다고 전에 얘기했는데, 선거에 돌입하기 직전인 8월 16일에 제4차 한미 잉여 농산물 도입 추가분 협정이 체결됐다. 이 협정이 발효해 소맥 11만5000톤 추가 도입이 확정됐다고 한다. 그러면서 박정희 의장 쪽에서 재량으로 쓸 수 있는 밀가루가 21만5000톤이나 됐다. 대통령 선거가 막 벌어질 때 엄청난 밀가루를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형욱은 황태성을 미군 정보 당국에 인계한 대가로 이 협정이 발효됐다고 증언했다. 그렇게 해서 들여온 11만5000톤에다, 일본 미쓰이 물산과 맺은 비밀 계약을 통해 들여온 10만 톤을 더해 21만5000톤의 소맥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김형욱은 이 밀가루를 박정희 표가 약하다고 판단한 영호남에 집중적으로 무상 배포했다고 증언했다. <편집자>)

사실은 재벌들의 삼분(三粉, 설탕·밀가루·시멘트) 폭리 사건, 참 악명 높고 우리 역사에서 뼈아픈 것들 중 하나인 그 사건도 이때 일어났다. 이승만 정권 때도 없던 일이 이때 일어났다. 이런 미국의 원조가 들어오기 직전에 주로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우리나라 재벌들을 보면, 이 삼분이 면방직을 제외하면 제일 컸다. 밀가루 같은 게 아주 컸다. 제분업자가 정상적이면 10억 원 이익을 봐야 할 경우 폭리가 6억 원이나 됐고 시멘트도 포대당 150원 하던 것이 400원으로 올랐다고 한다. 그래서 동양시멘트 김성곤은 3억 원 이상의 폭리를 취했다고 돼 있다. 설탕도 한 근에 40원 하던 게 160원이나 됐다. 22만 톤이 이때 나간 걸로 돼 있으니까 약 10억 원이나 번 것이다. 얼마나 큰돈인가. 폭리를 맛본 것이다.

(1963년 전국에서 때 아닌 삼분 사재기 열풍이 불었다. 업자들이 농간을 부려 매점매석이 횡행한 결과 웃돈을 주고도 물품을 못 구하는 품귀 현상과 가격 폭등이 연일 이어졌다. 서민들의 원성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삼분이 실생활과 직결되는 품목일 뿐만 아니라 1963년은 농산물 파동으로 많은 국민이 고통을 겪은 해이기 때문이다. 1964년 1월 야당 의원이 '박정희 정권이 정치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몇몇 삼분 재벌에게 특혜를 줬다'고 폭로하면서 이 문제는 정치 쟁점이 됐다. 야당은 그해 2월, 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한 특별 국정 감사 결의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민주공화당의 반대로 결의안은 폐기됐고, 숱한 의혹만 남긴 채 사건은 서둘러 봉합됐다. <편집자>)

경제가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 쪽에서 밀가루를 대량으로 풀었다. 이게 선거 판도를 바꿔놓는 데 영향을 끼쳤다. 전에도 얘기한 것처럼 태풍 셜리 피해, 폭우 피해가 전남에서 아주 심했고 경남도 피해가 컸다. 1963년 7∼12월에 각 시도에서 정부에 보고한 월평균 구호 대상자 수를 보면 전남이 192만 명을 넘었다. 그다음으로 충남이 125만, 경북은 99만, 경남은 91만, 경기는 75만을 각각 넘은 것으로 돼 있다. 10월에 대선, 11월에 총선이 있었으니 7∼12월이면 선거 시기다.

군정은 영세 농가의 보리 흉작과 이재민 상황 같은 것도 고려해 책정했다면서 경남에는 51만여 석의 식량을 풀었다. 단위는 쌀을 기준으로 석이라고 돼 있다. 그리고 전남 45만여 석, 경북 26만여 석, 전북 19만여 석, 이렇게 경상도와 전라도에 주로 풀었다. 반면 충남은 16만여 석밖에 안 되고 경기는 12만여 석, 충북과 강원은 더 적어서 각각 7만여 석, 6만여 석씩만 풀었다고 돼 있다. 이 부분이 선거에 상당히 영향을 끼친 게 아니냐고 볼 수가 있다.

▲ 1963년 10월 16일, 각 신문사에서 집계한 대선 개표 상황을 지켜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 ⓒ연합뉴스


"박정희는 신라 임금님 후손…1000년 만의 임금님으로 모시자"

프레시안 : 이 문제는 농촌에서는 박정희가, 도시에서는 윤보선이 우세했던 것과도 관련 있어 보인다.

서중석 : 이 선거 전체를 놓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서울에서 박정희 후보가 30퍼센트를 득표했고 윤보선 후보가 65퍼센트를 얻었다. 경기도에선 박정희 33퍼센트, 윤보선 57퍼센트였다. 서울에서 이렇게 집중적으로 많이 나온 건 1971년 호남에서 김대중 후보가 얻은 표보다 더 많으면 많았지 비율 면에서 낮은 게 아니다. 무지무지한 몰표다. 비교적 중립적이고 지식인도 많고 정치 감각이 상대적으로 높지 않느냐는 얘기를 듣는 서울과 경기에서 이렇게 엄청난 야당 표가 나왔다.

물론 경상남북도에서 박정희 후보 표가 많이 나왔으니까 박 후보가 앞선 것이다. 그런데 전남에서도 박정희 표가 많이 나왔다. 박정희가 57퍼센트를 차지한 반면 윤보선은 36퍼센트밖에 차지하지 못했다. 제주도에선 박 후보가 70퍼센트, 윤 후보가 22퍼센트였다. 이건 제주도가 레드 콤플렉스에 얼마만큼 주눅이 든 사회였느냐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숫자는 얼마 안 되어서 당락엔 영향을 못 끼쳤다. (박정희는 전남은 물론 전북에서도 윤보선을 앞섰다. 선거 전 예상을 뒤엎는 결과였다. 대선을 나흘 앞둔 1963년 10월 11일 자 <동아일보>는 "대체로 공화당이 경남북·강원 지구에서, 민정당이 전남북·충청 지구에서 우세하며 경기 지구 및 충청 일부에서 맞먹을 것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인 관측"이라고 보도했다. <편집자>)

어쨌건 다시 한 번 조사해보면 박정희는 농촌에서 50.8퍼센트를 얻었고 도시에서는 37.8퍼센트밖에 못 얻었다. 반면 윤보선은 농촌에서 39.5퍼센트, 도시에서 57.1퍼센트를 얻었다. 윤보선은 도시에서 압도적으로 더 많은 표를 얻었다. 당시 농촌은 687만 명, 도시는 321만 명으로 계산돼 있다(1967년 5월 5일 자 <동아일보> 자료). 도시화가 한창 진행 중일 때인데, 이 도시와 농촌의 비율은 그 당시 몇몇 자료에 나온 것과 대체로 일치한다. 하여튼 대구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에서 박정희보다 윤보선이 더 많은 표를 얻었다.

이건 뭐냐 하면, 박정희가 전라도에서 얻은 표도 농촌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나온 것임을 얘기하는 것이다. 전라도에서 박정희 표가 많이 나온 게 이상하다고 사람들이 이야기하면서 색깔 문제와 곧잘 연결하지 않나. 색깔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195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여촌야도 현상이 일어나는 큰 이유 중 하나가 색깔 문제에서 농촌은 주눅이 들어 있었다는 점도 있지 않나. 특히 1950~1960년대엔 그런 면이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도 그렇지만, 역시 관권 같은 게 여촌야도에서 제일 큰 영향을 끼치는 건데 그런 관권이 유력하게 작용한 것이다. 그다음엔 아까 얘기한 밀가루 문제 역시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이것도 주로 농민들한테 간 것 아니었나. (구호 대상 인원을 책정하는 여러 기준 중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영세 농가 중 맥 흉작으로 인한 이재민'이었다. <편집자>)

프레시안 : 한국의 선거를 멍들게 한 대표적인 요소 중 하나로 지역감정 선동이 꼽힌다. 이 문제가 두드러지는 건 경제 개발이 본격화한 후이지만, 1963년에도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낯 뜨거운 일이 벌어진다.

서중석 : 우리나라 선거가 대개 (여당과 야당의 우세 지역이 동서로 나뉘는) 동서 선거인데 이 선거는 남북 선거이기 때문에 지역감정이 약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래도 대체로 윤보선은 선조가 충청도 사람이고 선산도 거기에 있다고 돼 있지 않나. 보수적인 충청도에 윤보선이 연고가 있었던 것이 선거 결과와 관련은 있을 것이고 경상도는 또 박정희와 연고가 있는 지역 아닌가 하는 점을 조금은 생각할 수 있다. 지역감정의 영향력은 그다음 선거로 갈수록 더 커진다.

그런데 이 선거에서도 지역감정 선동이 있었다. 대구 유세에서 이효상이라는, 일반인들이 얼굴을 잘 모르던 사람이 나타나서 "박정희 후보는 신라 임금님의 자랑스러운 후손이며, 이제 그를 대통령으로 뽑아 이 고장 사람으로 1000년 만의 임금님으로 모시자"고 하니 박수갈채가 나왔다고 한다. 이 양반은 1963년뿐만 아니라 1971년 대선에서도 지역감정을 선동했다. (이효상은 1971년 대선에서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은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된다", "경상도 사람으로서 경상도 정권 후보에게 표를 찍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라며 노골적으로 지역감정을 부추겼다. 이효상은 1969년 3선 개헌안 날치기 통과 당시 국회의장이기도 하다. 이효상은 의사봉이 아니라 주전자 뚜껑으로 3선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편집자>)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아슬아슬했던 1963년 대선 경험과 박정희, 그리고 유신 체제

프레시안 : 박정희 후보는 엄청난 조직과 자금을 동원하고도 마지막까지 가슴을 졸여야 했다. 이는 박정희 후보에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을 것으로 보인다.

서중석 : 이 선거는 누가 이겼다고 얘기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이런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 당시만 해도 관권이 작용할 수 있는 게 학자들에 따라선 5퍼센트 또는 그 이상으로 보고 그러더라. 그런데 15만 표 차이였지 않나. 또 박정희 쪽이 조직과 자금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그런 점까지 생각해볼 때 진짜 승자가 누구냐고 보기가 더더욱 어려운 부분이 있다.

이 선거는 박정희한테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말할 것도 없고 민주공화당 간부들도 얼마나 가슴이 탔겠나. 정말 아슬아슬한 맛을 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박정희는 서구적 정치, 선거를 중심으로 하는 의회 정치, 정당 정치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고 '한국 사회에 맞는 정치를 해야 한다', 이런 얘기를 하지 않나. 그런 박정희가 이 선거를 보면서 여러 가지로 생각하는 게 있었다고 본다. 그런데 박정희 후보는 이 선거는 물론이고 그다음 선거들에서도 정말 '내가 승리했다'고 강하게 얘기하는 데 약점이 있었다.

프레시안 : 김대중과 맞붙은 1971년 대선과 달리, 윤보선이 다시 야당 후보로 나온 1967년 대선에서는 박정희가 상당한 표차로 비교적 쉽게 승리하지 않았나.

서중석 : 1967년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가 윤보선 후보를 압도적 표차로 이긴 것은 틀림없다. 1963년 선거에 비하면 훨씬 득표 차가 많이 난다. 그런데 1967년에는 야당이 1963년보다 훨씬 분열된 상태였다. 제1야당, 통합 야당으로 나온 그 야당(민중당)에서 당권이 옛날 민주당 신파 쪽인 박순천한테 넘어가니까 윤보선이 탈당하지 않나. 한일 회담 문제에 대해 박순천 쪽이 약하게 나오는 것에 대한 불만도 작용했다. 그러면서 그쪽하고는 사이가 아주 나빠지면서 윤보선은 독자적인 당(신한당)을 만들어버린다.

그런데 정작 제1야당인 민중당에선 대통령 후보로 낼 만한 사람이 없었다. 유진오를 끌어들이고 했지만 안 되는데, 윤보선은 또 나오겠다고 했다. 그런 속에서 윤보선이 또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온 것 아닌가. 1963년보다 신선한 맛은 더 떨어지고 참 구태의연한 노인네가 나온 것이다. (1967년 1월 유진오와 윤보선이 만나 민중당과 신한당의 합당을 결정한다. 그해 2월 두 당을 통합한 신민당이 발족한다. 윤보선은 신민당 후보로 다시 대선에 나선다. <편집자>)

그럼에도 동서 선거였다. 서쪽에선 전부 윤보선이 이겼다. 물론 큰 표 차이로 이기지는 못했다. 그래서 영남을 중심으로 한 동쪽에서 이긴 박정희에게 큰 표 차이로 졌다. 그렇다고 해도 서울, 경기, 충남, 전남, 전북에서 윤보선이 다 이겼다. 박정희가 그 많은 표 차이를 낸 건 경상남북도에서 낸 것이다. 이러니 박 후보 쪽이 '내가 이겼다'고 강하게 주장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1971년 선거 이건 누가 봐도 막상막하라고 하지 않았나. 여기서 더 얘기할 필요도 없다.

프레시안 : 박정희 대통령은 대중 앞에 나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걸 바탕으로 정치력을 발휘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서중석 : 박정희 후보는 카리스마 같은 게 약했다. 선거에선 대중을 움직이는 힘, 이게 참 중요하지 않나. 박정희는 목소리는 카랑카랑했지만 교사처럼 설명형적인 주장을 하고 그랬다. 용모라든가 캐릭터에서도 카리스마적인 걸 갖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대중의 강한 지지를 이끌어내기보다는 '대중은 내가 끌고 가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지 않았나. 강력한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연설은 김종필이 훨씬 잘했다. 그래서 이 선거에서는 아니어도 그다음 선거에선 김종필을 아주 중요하게 쓸 수밖에 없었다. 김종필은 대중적인 제스처도 있었고, 뛰어난 대중 연설가였다. 대중에게 인기가 아주 좋았다. 그러니까 또 바로 김종필을 견제하고 선거 유세에서도 따돌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쨌건 박정희는 특이한 정치 이념을 갖고 있었고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그런데 대중 정치력은 결핍돼 있었다. 이런 것과 연결돼 선거에서 느꼈을 좌절감 같은 것이 결국 유신 체제로 가게 하고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게 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공화당 공천 파동…"구악 중의 구악 끌어들인 자가 누구냐"

프레시안 : 대선 한 달 후인 1963년 11월 총선이 치러진다.

서중석 : 그렇다. 그에 앞서, 외유를 떠났던 김종필이 8개월 만인 10월 23일 귀국하고 바로 평당원으로 복당했다. (김종필은 12월 4일 민주공화당 의장으로 올라선다. <편집자>) 민주공화당은 10월 31일, 국회의원 후보자 제2차 공천 명단을 발표했을 때 심하게 갈렸다. 이때 47명의 후보자를 공천하는데 구(舊)자유계가 18명이나 됐다. 그중에는 자유당 말기 가장 인상 나쁜, 아주 더러운 선거를 치른 울산 재선거 관련자도 있었다. 자유당 후보로 나온 자가 그렇게 못된 짓을 했다. 참 질이 나쁜 부정 선거를 저질렀는데 그 사람들까지 포함된 것이다. 4.19로 투옥된 자유당 인사도 포함돼 있었다. '이건 심하다'고 해서 당무 회의에서 일부 재조정을 건의했다. 민주공화당에서 제일 중요한 게 당무 회의 아닌가. 그런데 당 고위층에선 이를 거부했다. 그래서 많은 당원이 중앙당에 몰려가 항의하고 소란을 일으키는 일이 일어났다. (이때 민주공화당 내에서는 "4.19와 5.16을 유발한 구악 중의 구악을 끌어들여 공천을 준 자가 누구냐"라는 거센 반발이 터져 나왔다. <편집자>)

야당은 심하게 난립했다. 12개 정당이 난립했다고 이야기하는데, 장면 정권 때 대변인도 한 신상초가 한 얘기가 있다. '박정희 후보와 야당의 정강 정책은 별 차이가 없는데 야당을 분열시켜 통제하는 정책을 써서 효과를 아주 크게 봤다', 이런 식으로 얘기했다.

프레시안 : 대선을 달군 사상 논쟁이 총선에서도 벌어졌다.

서중석 : 윤보선은 유세 연설에서 "(1946년 세상을 떠난 박상희 이외에) 박(정희) 씨의 다른 형 하나는 현재 북한 괴뢰 정권의 정보 관계 책임자로 활약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도 잘못 알고 얘기한 건지 중상모략을 한 건지는 몰라도 이렇게 폭로도 했다. 그러면서 여순사건 문제를 또 얘기했다.

박정희 후보는 11월 9일 여수 유세에서 "대통령 선거 때 모 야당 후보가 나를 여순사건에 관련된 자라고 말하고 모 신문사를 매수해 삐라 수백만 매를 전국에 뿌려 나를 빨갱이로 몬 일이 있었으므로 내가 직접 이곳에서 해명하겠다"고 하면서 "나는 그 당시 소령으로서 육사 교관으로 근무했으며 그 후 반란군 토벌을 위해 송호성 장군과 원용덕 장군 밑에서 작전 참모로 근무한 일까지 있다"고 얘기했다. 제일 중요한 핵심, 그러니까 남로당 프락치로서 사형 또는 무기 징역 선고를 왜 받았는가 하는 얘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건 답변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여튼 이런 논쟁 같은 것을 하고 그러면서 박정희가 '야당이 이렇게 나를 심하게 모략하고 인신공격을 하고 헐뜯는다'고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 선거에선 지방 공무원, 경찰 일부가 여당 후보를 지원한다는 것들이 폭로됐다. 그래서 목포경찰서장, 함평군수, 파주군수 같은 사람들이 구속되고 그랬다. 이런 부정 선거 양상도 있었다. 또 특이한 것은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자 여야가 한때 선거 운동을 중지했다는 것이다. 11월 23일 정오부터 24시간 동안 그랬다. 그런 일도 있었다.

▲ 1963년 12월 17일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는 강력한 통치자로 군림했다. 사진은 1973년 국군의 날(10월 1일), 박정희 대통령이 경축사를 하는 동안 스탠드에 펼쳐진 대통령 초상화 카드 섹션. ⓒ연합뉴스


공화당, 기형적 선거 제도에 힘입어 압도적 다수 의석 확보

프레시안 : 민주공화당은 이 선거에서 과반수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서중석 : 민주공화당이 그야말로 압도적인 의석수를 차지했다. 지역구에서 88석, 전국구에서 44석의 반절인 22석을 차지했다. 거기에 비해서 제1야당인 민정당은 지역구 27석에 전국구 14석으로 41석밖에 안 됐다. 민주당은 지역구 8석, 전국구 5석이었고 자유민주당은 지역구 6석, 전국구 3석이었다. 국민의당은 8.8퍼센트나 득표했지만 지역구 2석밖에 건지지 못했다.

그런데 득표율은 어떠냐. 공화당의 득표율은 33.5퍼센트밖에 안 됐다. 그런데도 175석 중 110석이라는, 3분의 2에 가까운 의석을 차지했다. 그야말로 이상한 선거 제도가 이런 기형적인 결과를 만들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민정당의 득표율은 공화당 득표율의 3분의 2에 가깝다. 20.1퍼센트였다. 그런데 의석수는 3분의 1을 약간 넘는 41석밖에 안 됐다. 국민의당의 득표율은 공화당 득표율의 4분의 1이 넘는데 의석수는 55분의 1밖에 안 됐다.

이 선거에서는 서울을 제외하고는, 도시를 포함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야당 난립 같은 게 작용해 여당이 이겼다. 서울만은 14석 중에서 여당이 2석밖에 차지하지 못했다. 자유당 때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12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드디어 취임식을 연다. 제3공화국이 탄생한 것이다. 국회의장은 사람들이 거의 몰랐던 이효상이란 사람이 됐고 최두선이 총리를 맡았다. 총리는 곧 정일권으로 바뀐다. 비서실, 경호실, 중앙정보부 같은 힘 있는 핵심 기구는 여전히 군인들이 차지하고 공화당 요직도 대부분 군인들이 차지했다. 자유당계가 일부 들어간 것을 빼면 그랬다. 민정 이양을 했다고 해서 군사 문화가 없어진 게 아니었다. 계속 존재하면서 우리 정치, 문화,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