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요?"
강연 시작부터 끝까지, 홍세화 <말과 활> 발행인은 같은 질문을 수 없이 던졌다. 사람은 생각이 없는 상태로 태어나는데, 지금 갖게 된 나의 생각은 대체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는지. 그걸 질문하지 않는 것이 우리 사회의 비극이라고 했다.
프레시안협동조합이 지난 20일 여덟 번째 조합원 교육에서 만난 이는 지식협동조합 '가장자리'의 이사장을 맡고 있는 홍세화 발행인이다. 서울 영등포구 아이쿱협동조합지원센터에서 열린 강연의 주제는 '생각의 좌표-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이다. 그는 지난 2009년 같은 제목의 책을 낸 바 있다.
"내가 정말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겁니다. 생각하는 동물인 사람이 생각을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면, 지금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 이 질문을 던졌을 때 비로소 생각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이 질문이 소거된 곳이 우리 사회다. "자신의 사유에 긴장하지 않고 오로지 소유에 긴장"한다.
결국 "생각의 성질만 꿈틀대고(스피노자)", 그 생각의 성질로 곧 "고집"만 남은 사회가 됐다는 것이다. 홍 발행인은 "고집할 뿐, 누구도 회의할 줄 모른다"고 했다.
생각의 성질로 '고집'만 남은 사회의 비극은 누구도 설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득과 토론을 통해 얻게되는 사유의 기쁨없이, 저마다 소유에만 집착한다.
홍 발행인은 이 같은 사유 부족은 진보적이라고 하는 이른바 '운동 진영' 역시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운동을 조직과 학습, 선전의 삼각구도 속에서 설명한다면, 학습과 선전(설득)은 사라지고 오로지 '조직'과 '조직 내 알량한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내부 투쟁'만이 남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몇 권의 책으로 세상을 다 알아버린" 그들은 "태양의 진리를 획득한" 것인냥 윤리적 우월감에 취해 스스로의 자리에 만족하고, 누구도 설득하려 하지 않고 냉소한다. 그렇게 '운동'은 사라지고 다시 '조직'만 남는다.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교육받는 사람들
홍 발행인에 따르면, 사람은 때로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 하는 존재'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을 여간해선 잘 바꾸지 않는다. 사람이 태어나서 만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사회화 공간인 가정과 학교에서부터,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을 사실상 차단해왔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생각들이 개인의 부단한 성찰로 얻어진 결과가 아니라, 제도교육과 사회가 던져준 논리를 알게 모르게 그대로 흡수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홍 발행인이 "당신의 생각의 주인은 과연 당신인가?"라고 집요하게 묻는 이유다.
그는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는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면, 지배세력이 주입하는 생각을 그대로 수용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너무나 엽기적인데도 아무도 엽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더 엽기적인" 주입식 교육의 현장에서부터 사유를 차단 당한다. 정답이 없는 인문사회과학을 정답이 있는 것처럼 '암기'로 공부하고, 그렇게 입력된 내용 역시 철저하게 "지배세력이, 지배세력의 관점에서 학생들에게 '학문과 진실'의 이름으로 주입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오래된 명제와 달리, 사람들은 때로 '자신의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갖게 된다. 대개는 부자들보다 사회적 약자가 그렇다.
"초등학생 때부터 학교에 사회 수업이 있어요. 고등학교까지 10년 넘게 사회에 대해 공부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를 사회시간에 배운다고 생각하는 이는 별로 없습니다.
프랑스는 중학교 3학년 때 아이들에게 '노동조합이 민주주의 발전에 미치는 영향'을 글로 쓰라는 숙제를 내줍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다수가 노동자라면, 노동조합에 대해 당연히 고민하고 배워야 하는거죠.
그런데 한국은 어떤가요? 한국의 많은 노동자들에게서 노동자 의식을 발견할 수 있나요? 거의 없어요. 오히려 반(反)노동자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다 가진 사람들은 없는 사람을 사람 대접 안 해줍니다. 그런데 참 희한한 것은, 없는 사람들이 가진 사람들을 걱정해줘요. 틈만 나면 재벌 걱정을 해주죠.
결국 자신의 존재와 전혀 상관없는, 존재를 배반하는 그런 의식을 주입받는 것이죠. 거칠게 표현하자면, 가난한 사람들과 가난한 노동자들의 자식은 장래에 자신의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형성하기 위해, 자기 돈을 들여서 공부를 하고 있는 현실인 겁니다."
"설득하지 않는다면, 단언컨대 희망은 없다"
의식이 존재를 배반하고, 모두가 상위권 진입이 가능하다고 믿으며 그를 위해 달려가는 사회. 그럼에도 홍 발행인은 끈질기게 '설득'과 '연대'를 강조했다. "다시 설득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설득을 포기한다면, 우리끼리 개탄하고 존재의 우월감을 다독거리며 자족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상황이라면, 단언컨대 희망은 없습니다.
정치적 힘의 역학관계를 바꾸지 않는데 어디서 희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그 역학관계를 바꿀 수 있는 힘은 뭘까요? 결국 설득입니다.
오래된 말 중에 '잡초를 없앨 순 없지만 뽑을 순 있다'라는 말이 있어요. 우리 모습도 비슷합니다. 잡초를 없앨 궁리만 할 뿐, 아무도 설득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안 바뀌고, 온통 잡초밭만 되는 것 같고…. 그래서 개탄하고, 분노하고. 그러나 아무도 설득하진 않고. 어렵지만 설득해야 합니다. 집요하게, 성실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
홍 발행인은 그의 책 <생각의 좌표>에서 일흔 살을 앞두고 자살한 아우슈비츠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는 죽기 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괴물이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위험한 존재가 되기에는 그 수가 너무 적다.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의문을 품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믿고 행동하는 기계적 인간들 말이다." (<생각의 좌표>, 192쪽)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라는 물음은, 어떻게 보면 프리모 레비가 언급한 '괴물보다 위험한 평범한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진 않느냐는 질문이기도 하다.
아우슈비츠가 가능했던 것은 괴물 같은 독재자가 있었기 때문이지만, 무엇보다 그의 폭력에 침묵했던 다수의 독일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탠리 코언의 책 제목을 빌자면, '잔인한 국가'에 더해 '외면하는 대중'이 있었던 탓이다.
세월호 참사가 터졌을 때 많은 이들은 처음에는 슬퍼하다가, 그 다음엔 분노했고, 곧이어 망각했다. 더 나아가 이제는 "그만 좀 할 때까지 되지 않았느냐"는 말도 나온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우리는 "의문을 품어보지도 않는", 외면하는 대중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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