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책을 읽다 보면 의문이 들다 못해 울화통이 치밀어 오를 때가 적지 않다. 알렉산드로스, 칭기즈칸, 나폴레옹 등 멀쩡한 남의 나라를 침략해 엄청난 수의 인명을 희생시킨 살인마들이 영웅이니 위인이니 하고 추앙받는 일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적절치 않은 비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처녀가 임신을 해도 할 말이 있는 법이니 그들과 같은 침략자에게도 변명거리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책들은 변명을 넘어 그들에 의해 헬레니즘 문화가 확산되고, 동서 교류가 활발해지고, 프랑스혁명의 정신이 전파되었다는 찬양을 늘어놓기에 바쁘다.
왜 법과 도덕에서 범죄로 가르치는 행위들이 역사에서는 면죄부를 받을까? 흔히들 역사란 적대적 투쟁 속에서 진보해 왔기 때문에 전쟁, 폭동 등의 폭력을 불가피하게 수반할 뿐 아니라 그런 폭력 행위가 인간 사회를 발전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정복자들의 살상 행위가 인류 진보의 필요악이었다는 논리이다.
가소로운 소리! 그렇게 해서 일어난 '발전'이 누구를 위한 발전이었는가? 기술의 진보만을 진보라 하지 않고 더 많은 인류가 함께 행복해지는 것을 진보라 한다면 감히 침략 전쟁 따위를 '필요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전쟁을 수반하는 국가 단계로 '진화'하지 않고 요행히 문명 이전의 공동체를 유지한 채 살아가는 오지 사람들이 가끔 조명되곤 한다. 경쟁에 지친 자본주의 사회의 주민 대다수는 그들을 바라보며 새삼 '행복'이란 말을 떠올린다. 연대에 기초해 사랑으로 서로 감싸 주는 남태평양 외딴섬 주민들의 삶이야말로 진보의 이름으로 침략 행위에 둔감해지는 '사이비 역사' 바이러스에 대한 천연 백신이다.
평화 지킨 이순신과 패권 전쟁에 앞장선 군인들은 다르다
이제 이순신 이야기를 해 보자. 영화 <명량>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경상남도 통영에서는 이순신의 한산대첩을 기념하는 축제가 한창이다. 그런데 그 이순신 역시 살인자였다. 사람을 죽여도 보통 많이 죽인 게 아니다. 그렇다면 살인과 폭력을 부정하는 논리에 따라 이순신에게도 유죄 판결을 내려야 할까? 질문을 꺼내기가 무섭게 머쓱해진다. 말장난할 필요 없이 이순신의 살인은 정당했다. 우리의 삶을 통째로 파괴하려는 침략자가 새까맣게 몰려오는데 그들을 죽여 내 가족, 우리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런 자가 역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죄인일 것이다.
영화 <명량>에 관한 다양한 반응 중에 눈길을 끈 것이 일본인들의 반응이다. 덜떨어진 일부의 생각이겠지만, 명량해전은 전국(戰局)에 영향을 끼치지 않은 국지적 전투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인 한산도대첩마저 압도적 전력으로 일본 수군의 소부대를 유린한 작은 전투에 불과했다는 말도 한다. 전쟁을 무슨 월드컵 축구 같은 것으로 보고 이순신을 축구 감독 평가하듯 재단하려는 이런 사이코패스들에게 한국인은 단 한 명도 말려들지 말기를 바란다. 대첩이든 소첩이든, 12척으로 333척을 이겼든 13척으로 133척을 이겼든 그것은 국가대표 축구팀끼리 벌이는 선의의 전략 대결이 아니고 부도덕한 침략자에 대한 정의의 응징이었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수장시킨 일본의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자신을 넬슨 제독과는 비교해도 이순신 장군과는 비교하지 말라고 했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어떤 한국인은 그 말을 듣고 자부심을 느끼기도 하는데, 나는 무척 수치스럽고 화가 난다. 그의 '비교'는 분명 전쟁 능력의 비교였을 것이다. 이는 아무런 가치판단 없이 자신과 이순신을 '순수한' 군인으로 놓고 비교하는 것을 의미한다. 언감생심! 도고와 넬슨은 제국이 벌인 패권 전쟁을 수행한 자들이었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칼을 빼들어야 했던 이순신과 그 무슨 비교를 한다는 것 자체가 무엄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나는 종종 외국인 친구들에게 역사에서 교훈이라는 걸 얻고 싶으면 한국사를 일독하라고 권한다. 그건 바로 을지문덕, 이순신, 안중근 등 사람을 죽여도 뚜렷한 대의명분이 있었던 영웅들이 한국사에 즐비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명분 없는 침략과 대살육을 감행한 자들을 '위인'으로 받들어야 하는 '잘나가던' 나라들의 역사는 얼마나 비루한가?
세월호 참사, 28사단 사건…이순신 지도력 운운할 자격 없는 자들
영화 <명량>에서 솔깃하게 다가왔던 것은 <난중일기>에 나오는 '천행(天幸)'이라는 말을 민(民)과 연결 지은 발상이었다. 이순신이 충(忠)의 대상으로 임금보다 백성을 앞세우고, 백성이 적의 자살폭탄배가 접근하는 것을 알려 요격하게 하고, 백성의 어선이 갈고리를 던져 이순신이 탄 대장선을 구해 주는 장면들이 그런 발상에서 나왔다. 그 발상의 역사적 근거가 희박하다 보니 해당 장면들의 극적 개연성도 부족해 보이고 역사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김한민 감독이 그 발상을 용감하게 밀어붙여 다음 작품에서는 좀 더 그럴듯한 민중의 영웅을 창조했으면 한다. 역사적 사실을 보존하는 것은 역사학자가 할 일이지 예술가가 연연할 일은 아니다. 동아시아 최고의 고전인 <삼국지연의>가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다고 해서 비난의 대상이 된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문제는 민중이란 인정 넘치면서도 엄격한 관객이기 때문에 장구한 역사 속에서 그들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남는 '허구'를 만들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본의 비호를 받아 다른 영화에 기회도 주지 않으면서 상영관을 싹쓸이하는, '이순신'답지 않은 독점 행위는 그 어려움을 더 어렵게 할 것이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이순신을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 '성웅'으로 만들어 광화문 앞에 세웠다. 국왕의 명령을 어기더라도 자기 신념대로 하는 이순신에게서 5.16군사정변의 변명거리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군주제 하의 주권자인 왕과 민주주의 시대의 주권자인 국민은 전혀 다른 '주인'이다. 왕이 천명을 어기면 '혁명'을 일으켜 쫓아낼 수 있지만 국민은 애당초 천명과 불가분인 존재이다. 국민을 상대로 하는 '반역'이 '혁명'으로 전화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그런데 군사정권도 아닌 정부가 이순신 앞에 거대한 트레일러의 장벽을 쌓고 국민과 소통하기를 거부하던 일은 정말 끔찍한 기억이 아닐 수 없다.
이순신을 독재자나 무능한 지도자로부터 민중 편으로 빼앗아 오는 일은 필요하고 가능하다. 이순신 자신이 민중의 지도자였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는 민중의 적을 가장 많이 죽이고 가장 많은 민중의 목숨을 구한 인물 중 하나였다. <난중일기>를 보면 그 치열한 명량해전의 선봉에 섰던 대장선에서 죽은 이가 둘, 경상자가 셋이라 한다. 이 정도면 임진왜란 중에는 이순신 군영에서 복무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생존율을 높이는 방법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전시도 아닌데 멀쩡한 국민의 떼죽음을 방치하고 똘똘 뭉쳐야 할 아군끼리 서로 죽이는 아비규환을 만들어 놓은 자들은 언감생심 이순신의 지도력을 운운할 자격이 없다. 당신들의 지도력이 이순신의 지도력인지 선조의 지도력인지 맹렬히 반성들 좀 해 보시라. 정부·여당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을 직분으로 하는 야당은 더 심각하다. 이순신은 혼자 잘나서 연전연승한 게 아니라 전함, 화포 등 조선 수군의 상대적 장점을 극대화할 줄 아는 지략으로 나라를 구했다. 곧잘 '질 수 없는'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선거에서 연전연패하는 당신들의 지도력은 이순신의 지도력인가 원균의 지도력인가?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는 8.15처럼 한국인에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날들에 담긴 의미를 짚어보는 기획이다. 필자는 다양한 역사책을 기획하고 써 왔으며, 현재 인문기획집단 문사철 주간을 맡고 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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