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무기, 언제부터 왜 만들었는가
북한 핵무기, 언제부터 왜 만들었는가
[이재봉의 법정증언] 남한엔 미국의 핵우산···북한엔 아무것도 없었다
북한 핵무기, 언제부터 왜 만들었는가
1995년 4월 이른바 '조중동'에 속하는 한 신문사 기자가 전화를 걸어 인터뷰를 요청했다. 미국에서 10여 년 공부하며 모았던 수많은 자료들을 갖고 귀국해 하나씩 써먹으며 열심히 논문을 발표하던 시간강사 시절이었다. 4월 혁명에 관한 내 논문의 "늦어도 1958년 1월부터 남한에 미국 핵무기가 배치되기 시작했다"는 대목에 관해 취재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남한 핵무기에 관해 학계나 언론계에는 1980년대 후반부터 조금씩 알려지긴 했지만, 미국정부의 공식 외교문서를 이용해 확실하게 밝힌 논문은 아마 처음 같다며.

1990년대 말부터 '조중동'엔 글도 싣지 않고 인터뷰도 거절해왔지만, 그때는 그런 거부감이 없었다. 다음 주에 서울 갈 일이 있어 그때 만나자고 했더니 급하다며 당장 경주로 오겠다고 했다. 별것도 아닌 걸로 인터뷰하겠다고 멀리 경주까지 오겠다는 데 부담스러워하자, 그의 대꾸가 재미있었다. "우리 기자들은 뉴스거리가 있으면 지구 끝까지도 날아갑니다." 

정말 멋있었다. 정치학박사로 전문기자라는 그의 기자정신에 감탄해 기꺼이 인터뷰에 응하기로 했다. 다음날 집으로 찾아온 그에게 1960년 전후 상황을 설명해주며 내 논문과 미국 외교문서를 복사해 건네주었더니 흥분하디시피 한 마디 던졌다. "와, 이거 우리 신문 1면 톱뉴스감인데요." 내가 맞장구를 쳤다. "제 덕분에 특종 한 번 써보세요."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록 그에 관한 기사가 나오지 않았다. 일주일쯤 뒤 서울에서 그와 동료 기자들 서너 명을 만나 함께 식사하며 '1면 톱뉴스'의 안부를 물었다. 물먹었단다. 북한 핵무기 개발 문제가 쟁점이 되고 있는 터라 남한 핵무기에 관한 기사에 대해 신문사 간부들이 몹시 민감하게 반응하며 잘랐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 거의 20년이 흐른 지금까지 남한 핵무기에 관한 기사는 1면 톱뉴스는커녕 맨 뒷면 맨 아랫줄 뉴스로도 실리지 않고 있다. 북한 핵무기에 관해서는 믿기 어려운 소문조차 1면 톱뉴스로 다루며 미주알고주알 보도하면서도, 남한 핵무기에 관해서는 확실한 증거를 갖고도 단 한 줄도 보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남한의 핵무기 배치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불러온 직접적 배경과 원인이 되었다. 그에 관한 자세한 내막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핵심 내용만 소개한다. 미국은 1950년대 한국전쟁을 통해 재정 적자가 심각해졌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주한미군을 줄여야 했고 미국의 원조에 전적으로 의존했던 대규모의 남한 병력도 감축해야 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이 거세게 반대하자 그를 무마하면서 병력을 줄이는 대신 주한미군의 안전을 위해 늦어도 1958년 1월부터 남한에 핵무기를 들여놓기 시작했다. 가장 심각한 정전협정 위반이었다.

이른바 '북핵 문제'는 1990년대 초부터 20여 년이 지나도록 풀리지 않고 있다. 머지않아 해결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무슨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 문제가 일어나게 된 배경이나 원인부터 정확하게 파악하고 대책을 세우는 게 바람직할 텐데, 우리는 2010년의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 그리고 2014년의 '세월호 참사'에서 보듯 원인 규명엔 소홀하고 대책 마련에만 매달리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아이가 울면 울음을 그치라고 다그치기 전에, 배가 고파서 울면 젖을 주고, 기저귀가 젖었으면 갈아주며, 졸려서 울면 재워주는 게 좋지 않겠는가.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막고 싶다면 그 배경과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에 걸맞은 대책을 마련하는 게 순리라는 뜻이다. '친북'이라는 딱지에 개의치 않겠다면서도,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정당화하거나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람직한 해결 방안을 모색해보기 위해서라는 점을 한사코 강조한다.

▲ 부산 해군기지에 입항한 미국 해군의 버지니아급 핵추진 잠수함인 하와이호(7800톤급) ⓒ연합뉴스


1. 남한의 핵무기 배치와 북한의 대응

주한미군과 유엔군사령부는 남한에 핵무기를 도입하기 위해 남한에서 무기 도입을 감시하던 중립국 감독위원회 감시위원들을 1956년 6월 추방했다. 정전협정에 따라 스웨덴과 스위스 감시위원들은 북한에서,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감시위원들은 남한에서 군비 증강을 감시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인천, 부산, 군산에 주재하던 중립국 감시위원단 16명을 판문점으로 쫓아낸 것이다.

1년 뒤 1957년 6월엔 "한국 경외로부터 증원하는 작전비행기, 장갑차량, 무기 및 탄약을 들여오는 것을 정지한다"는 등의 정전협정 일부 조항을 폐기했다. 주한미군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은 1955년부터 미국 대통령에게 주한미군과 남한군에 새로운 무기들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무기 도입에 관한 정전협정 조항을 변경하는 게 필수적이라고 강조해왔는데 실행에 옮긴 것이다.

이에 북한은 미국이 남조선을 핵전쟁 기지로 만들려 한다고 비난했고, 소련과 체코슬로바키아는 유엔 회원국이 아닌 북한 대신 1957년 11월 유엔총회에서 이를 비난했다. 나아가 늦어도 1958년 1월부터 남한에 핵무기가 배치되기 시작하자 북한은 다음과 같은 대응책을 마련했다.

첫째, '북한의 4대 군사노선' 가운데 하나인 '전국토의 요새화'를 대대적으로 시작했다. 쉽게 말해 '땅굴 파기'다. 김일성이 1963년 온 나라를 요새로 만들면 "원자탄을 갖지 않고도 원자탄을 가진 세력을 물리칠 수 있다"며, 전선 지역뿐만 아니라 후방 지역에도 주요 군사 시설과 산업 시설까지 지하에 건설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한미군사령관은 2001년 3월 미국의회에서 북한 전역에 지하 방어시설이 1만 개 이상 건설되어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1960년대 초 착공된 평양 지하철일 텐데, 난 1998년 10월 평양에 들어갔을 때 직접 확인했다. 수직으로 땅 밑 100m 정도에 위치한 지하철을 타기 위해 150m 정도의 직선 고속 에스컬레이터에 올라 안내원에게 물었다. "지하철을 방공호로 쓰기 위해 이렇게 땅속 깊이 건설했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안내원이 정색하리라 예상했지만 태연하게 답했다. "맞습네다. 전쟁이 터지면 우리도 피할 구멍이 있어야 하지 않갔습니까." 그러면서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고 덧붙였다. 평양엔 대동강과 보통강 등 물줄기가 많아 지반이 약하기 때문에 웬만큼 깊이 파지 않으면 무너질 수 있다고. 붕괴를 방지하며 방공호로 쓰기 위해 그렇게 깊이 땅을 팠다는 것이다.

둘째, 미군이 북한군을 상대로 핵무기를 사용하기 어렵게 북한군을 휴전선 근처에 전진 배치시켰다. 이른바 '적 껴안기' 전략으로, 김일성은 남북의 병력이 서로 뒤섞여 전투를 하면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휴전선 근처에 배치된 북한군을 핵무기로 공격하면 남한의 전방에 배치된 주한미군과 남한군은 물론 인근 지역에 살고 있는 민간인들도 방사능 피해를 당할 수 있기 때문에 핵무기를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리라고 내다본 것이다. 참고로 주한미군사령관은 2001년 3월 미국의회에서 북한 현역군의 70%가 휴전선에서 약 150km 안에 배치되어 있는 것 같다고 보고했다.

셋째, 북한이 자체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1963년 소련에 협조를 요청했다. 이에 소련은 핵무기 개발은 도와줄 수 없다고 거절하는 한편, 우방국인 북한을 달래기 위해 평화적 목적의 원자력 개발은 지원할 수 있다며 1965년부터 영변에 원자력 발전소를 세우는 데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북한의 핵 과학자 300여 명이 소련에서 20여 년 동안 훈련을 받았던 것이다. 이에 미국은 북한이 소련의 도움 없이 자체적으로 영변 원자력발전소를 확장하여 궁극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한다고 1980년대부터 의심하게 되었다.

넷째, 1964년 중국이 원자탄 실험에 성공하자 김일성은 베이징에 대표단을 보내 북한도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구했다. 마오쩌둥(毛澤東)에게 편지를 보내 전쟁터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한 형제 국가끼리 원자탄의 비밀을 공유하자고 한 것이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북한 같은 조그만 나라가 핵무기까지 가질 필요는 없다며 김일성의 부탁을 거절했다.

2. 북한의 핵무기 개발 배경

앞에서 얘기했듯, 1958년 남한의 핵무기 배치가 북한 핵무기 개발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박정희가 1974년 프랑스와 원자력협정을 맺어 핵무기를 개발하려 하자, 김일성은 중국에 핵무기 개발에 대한 협조를 거듭 요청했지만 중국은 다시 거부했다. 이에 북한도 1970년대 후반부터 자체적으로 핵무기 개발에 나서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엔 몇 가지 배경과 이유가 있다.

첫째, 군사적으로 주한미군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미국은 한국전쟁 중 1951년부터 북한을 핵무기로 공격할 수 있다고 몇 차례 위협했다. 1953년엔 초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휴전협상이 잘 진전되지 않으면 원자탄을 사용할 수 있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휴전협정 직후엔 덜레스 국무부장관이 세계 어디서든 재래식 공격에도 핵무기로 대응하겠다는 '강력한 보복전략'을 공표했다. 1955년엔 래드포드 합참의장이 서울을 방문해, '강력한 보복전략'이 한반도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필요하면 원자탄을 사용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마침내 늦어도 1958년 1월부터 남쪽에 어니스트 죤 (Honest John), 랜스 (Lance), 나이키 허큘레스 (Nike-Hercules) 미사일 등과 함께 다양한 전술핵무기를 들여놓기 시작해 1970년대까지 거의 800기나 되는 핵탄두를 배치하게 되었다. 또한 1976년 2월부터 시작된 연례 한미합동 군사훈련인 '팀 스피리트 (Team Spirit)'는 대대적인 핵무기 사용 훈련을 포함하고 있었다.

둘째, 지리적으로 북한을 둘러싼 모든 나라에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었다. 북한은 북쪽으로는 중국과 러시아에 그리고 남쪽으로는 남한에 가로막혀 있는 가운데, 바다 건너 서쪽으로는 중국에 그리고 동쪽으로는 일본과 미국에 둘러싸여 있다. 이 가운데 미국은 1945년, 소련은 1949년, 중국은 1964년에 핵무기개발에 성공하여 다양한 전략 및 전술핵무기를 배치해 놓았으며, 일본과 남한은 자체 핵무기는 없지만 1950년대부터 주일미군 및 주한미군 기지에 미제 핵무기를 들여놓기 시작했던 것이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된 이후 미국은 남한에서 핵무기를 철수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 작성된 미국 태평양사령부의 비밀보고서에 따르면, 2000개 이상의 핵무기는 모두 철수하더라도 해군 핵무기는 "적당한 때에" 재생하거나 재배치할 수 있도록 했고 핵무기 저장시설도 유지하도록 했다. 그리고 2014년 현재까지 남한에 대해 지속적으로 '핵우산'을 제공할 것을 다짐해왔다. 남한이 다른 나라로부터 핵무기 공격을 당하면 미국이 핵무기로 보복해주겠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 핵무기로 무장된 미군 잠수함이 동해 근처 해역을 운항하고 있다. 한반도 지상에서는 핵무기가 철수되었을지라도 한반도 주변 해역에는 여전히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는 셈이다.

이에 반해 북한은 소련으로부터든 중국으로부터든 핵우산을 제공받은 적이 없다. 북한을 사방에서 둘러싸고 있는 모든 나라들이 다양한 핵무기를 다량으로 배치해놓고 있거나 적어도 미국의 핵우산을 받고 있는 마당에, 북한만 자체 핵무기도 없고 다른 나라의 핵우산도 받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셋째, 경제적 측면에서 핵무기 개발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안보효과를 얻을 수 있다. 주한미군이 남한에 핵무기를 배치했던 가장 큰 이유처럼. 1970년대부터 남한의 경제력이 북한의 경제력을 앞서게 되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격차가 커지자 북한은 남한과 재래식 군비경쟁을 하기 어렵게 되었다. 예를 들어 1976년 남한은 국방비를 2배로 늘리고 그 이후 3년 동안 해마다 군비를 대폭 증강했다. 국내총생산 (GDP)에서 군사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예나 지금이나 북한이 남한보다 훨씬 크지만, 군사비 액수로는 1970년대 중반부터 남한이 북한을 앞서기 시작해 1970년대 말에는 남한의 국방비가 북한의 국방비보다 2배 이상으로 증가됐다. 

특히 1990년대 들어 북한이 심각한 경제난에 처하게 되면서 북한의 국내총생산은 대략 미국의 600분의 1 수준이고 남한의 30분의 1 수준이며, 북한 군사비는 대략 미국의 200분의 1 안팎이요, 남한의 10분의 1 안팎으로 추정된다. 빈약한 경제력 때문에 전투기나 함정 같은 재래식 무기경쟁은 도저히 할 수 없게 되자, 핵무기와 미사일을 비롯한 대량파괴무기 (WMD)를 개발해온 것이다. 대량파괴무기를 조금이라도 갖게 되면 안보에 대한 걱정 없이 재래식 무기 유지 및 증강에 들어갈 비용을 경제개발에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남한에서는 북한이 심각한 경제난을 겪으면서도 핵무기와 미사일 같은 대량파괴무기를 개발한다고 비난하는데, 북한은 경제난 때문에 대량파괴무기를 개발해왔으니 참 역설적이랄까.

▲ 지난해 2월 12일 북한 조선중앙TV는 성공적인 제3차 핵실험을 진행했다고 발표했다. ⓒ연합뉴스


참고로, 북한은 2003년 6월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우리가 핵 억제력을 갖추고자 하는 것은 그 누구를 위협하고 공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재래식 무기를 축소하며 인적 자원과 자금을 경제건설과 인민생활에 돌리려는 데 있다"면서, "미국이 조선에 대해 적대정책을 포기하지 않는 한 자금이 적게 들면서도 그 어떤 첨단무기나 핵무기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물리적 억제력을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발표했다. 핵무기 개발의 경제성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미국이 핵무기 선제공격을 할 수 있다고 위협해온 터에 북한은 심각한 경제난으로 재래식 군비증강을 꾀하기 어려우니 값싸게 핵무기로 무장해놓고 군비를 줄여 경제성장에 힘쓰겠다는 뜻이다.

넷째, 전략적으로 핵무기 개발을 통해 미국과 협상을 벌일 수 있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 걸쳐 소련이 해체되고 동유럽 공산주의 정권들이 무너지자 북한은 체제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전통적 우방국인 소련과 중국으로부터의 지원이 끊어지거나 줄어지는 터여서, 북한은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위한 수단으로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 카드를 사용해왔다. 냉전이 끝나면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남게 된 미국이 핵무기와 미사일을 비롯한 대량파괴무기의 확산 저지를 탈냉전 시대, 특히 2001년 9·11 이후, 대외정책의 핵심목표 가운데 하나로 설정하자 이를 이용한 것이다.

북한이 지속적으로 미국과 적대적 관계를 유지해도 중국의 도움으로 살아남을 수는 있겠지만 잘 살기는 어렵다. 가진 것이 별로 없는 터에 경제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 돈을 얻어오든 빌려오든 해야 할 텐데 미국이 세계의 돈줄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과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고 싶어 하지만, 미국은 북한의 불가침조약이나 평화협정 또는 국교정상화 요구에 응하기는커녕 오히려 북한의 체제붕괴를 목표로 삼고 각종 제재를 해왔다. 이에 북한은 미국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위해 핵무기와 미사일 카드를 써왔다.

결과적으로 북한은 이 협상 카드를 잘 활용했다. 이에 따라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 가운데 하나로 가장 큰 어려움에 처해 있는 북한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인 미국을 직접 대화 상대로 끌어들여 적어도 2000년까지는 성공적으로 협상을 이끌 수 있었다. 그 결과물이 1993년 6월 뉴욕에서 발표된 북미 공동성명, 1994년 10월 제네바에서 맺어진 북미 기본합의, 1999년 9월 베를린에서 이루어진 북미 기본합의, 그리고 2000년 10월 워싱턴에서 채택된 북미 공동코뮤니케 등이다.

다섯째, 정치적으로 통치기반을 강화하며 인민을 단결시킬 수 있다. 북한은 1990년대부터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김일성 사망 그리고 심각한 경제난에 따른 위기에 처해 왔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이른바 '고난의 행군'을 시작하면서 내세운 것이 '선군정치'와 '강성대국'이다. 선군정치란 군대를 중시하고 강화하여 나라 안팎의 위협을 물리치며 어려움을 극복해나가는 정치를 뜻하고, 강성대국이란 땅덩어리는 작아도 군사나 경제 분야를 발전시켜 강대국의 위상을 갖춘 나라를 의미한다. 핵무기 개발이나 보유는 선군정치와 강성대국의 상징이 될 수 있고 북한 당국이나 인민들에게 긍지나 자신감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대해 미국은 1980년대 초부터 낌새를 채고 1980년대 말부터 북한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1993-94년엔 북한을 폭격하기 일보 직전까지 가기도 했지만, 앞에서 소개한 대로 2000년까지 각종 합의를 이루어냈다. 그러나 2001년 부시 2세 행정부가 들어선 뒤 2002년 10월 이른바 '2차 북핵 위기'가 시작되었다. 2003년 4월부터 중국의 중재로 북한, 미국, 중국의 3자회담이 열리고 8월부터는 널리 알려진 대로 남한, 일본, 러시아까지 동참하여 6자회담이 전개되었다. 그 중요한 결실이 2005년 9·19 베이징 공동성명과 2007년 2·13 베이징 합의였지만, 이행되지 않았다. 그리고 북한은 2009년 7월 "6자회담은 영원히 끝났다"고 선언했다. 이에 관해 미국은 어떻게 대응할 것이며 남한은 어떻게 대응해야 북핵 문제를 해결하고 궁극적으로 한반도 평화를 불러올 수 있을까? 다음 주 화요일 자세한 과정을 소개하며 제안을 내놓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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