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현 원광대학교 총장)은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대북 적대의식을 완화하고 북한과 다양한 방식의 교류 협력을 통해 북한의 '대남 의존성'을 키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난 10일 서울 신길동 icoop협동조합지원센터 대강당에서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이 조합원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하반기 첫 교육이 열렸다. 이날 '한반도 평화의 조건'이라는 강연의 강사로 나선 정 전 장관은 한반도의 갈등이 지속되는 이유로 외부적으로는 북핵문제와 미국의 동북아시아 전략, 내부적으로는 과도한 북한에 대한 적대 의식을 꼽았다.
정 전 장관은 한반도 평화에 대해 "6.25 전쟁 이후 미·북 간 적대적 관계가 계속되고 있다"면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도 한반도의 평화는 요원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처음에 문제가 제기됐던 때부터 2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한 북핵문제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과 연관돼있다고 설명했다. 1994년 제네바 합의를 통해 잠시나마 북한의 핵 활동을 중지시켰지만, 이후 국제정세와 미국 정권의 변화로 북핵 문제는 또다시 출구를 찾기 힘든 골칫거리로 남게 됐다.
정 전 장관은 "2000년대 초 중국이 부상하기 시작했는데, 미국은 이를 동북아에서 자국의 위상에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변수로 생각했다"면서 "미국이 동북아에 계속 개입할 명분이 필요했는데 이것이 바로 북핵 문제였다"고 설명했다.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동북아에 관여할 구실로 북핵을 활용했다는 분석이다.
그는 "그래서 2002년 부시 정권은 실체가 없는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을 북한의 핵 개발 계획이라고 밝히며 북한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결국 제네바 기본 합의는 물거품이 돼버렸다"고 지적했다. 정 전 장관은 "결국 북핵 문제를 구실로 펼쳐지고 있는 미·북 간 적대관계는 북한도 원인을 제공하긴 했지만, 미국의 동북아 정책 때문에도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종북 논쟁 끝장내지 않으면 통일은 없다
정 전 장관은 지난 7일 <한겨레>의 '종북 논쟁 끝장내지 않으면 통일은 없다'는 제목의 칼럼에서 "남한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는 북한을 추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지금 이 시기에도 남한에 있다는 것인가? 종북 논쟁은 참으로 시대착오적이고 비현실적인 정치공세"라며 북한에 대한 과도한 적대의식에 빚어진 이른바 '종북'논쟁에서 벗어나 북한의 대남 의존성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쌀과 비료 지원을 통해 북한의 민심을 얻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통일부 장관 재직 시절 1년에 수십만 톤의 쌀을 지원했던 정 전 장관은 이후 북한이 남측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2005년 6월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을 때 김 위원장은 남측에서 쌀과 비료를 갖다 줘서 인민들이 매우 고맙게 먹고 쓰고 있다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면서 "쌀이 가니까 민심이 연결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 전 장관은 쌀을 지원했을 당시 북한에서는 "이렇게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동포가 아니면 누가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겠는가라는 이야기도 나왔다"면서 "민심이 연결되는 것이 한반도에서 평화를 이룰 수 있는 내부적 요건"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북한에 쌀과 비료를 주는 것이 이른바 '퍼주기'라는 비난이 여전한 것도 사실이다. 이에 대해 정 전 장관은 "대북 지원 총 금액이 5000억 원 정도다. 이에 비해 남한이 음식물 쓰레기로 버리고 있는 경제적 가치가 18조 원"이라며 대북 '퍼주기'에 대한 허상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서독은 동독에 현금을 먼저 지원한 뒤 이후 물자를 지원했다"면서 현금 지원으로 동독의 코를 꿰놓게 되면서 동독이 서독에 의존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정 전 장관은 "결국 서독의 요구를 동독이 거절하지 못하면서 끌려가다가 동독의 민심까지 통째로 넘어가게 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북한에 들어가는 현금이나 물자가 단순한 '퍼주기'가 아니라 남한의 의존성을 높이는 효과적인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남한이 쌀과 비료를 지원해주기 때문에 북한이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을 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북한의 경제 체제를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정 전 장관에 따르면 북한은 군사 경제와 인민 경제가 서로 섞이지 못하는 체제를 갖추고 있다. 쌀을 지원한다고 해도 이를 통해 남겨진 돈으로 무기를 개발하는 것 자체가 구조적으로 힘들다는 지적이다.
쌀이 군량미로 쓰일 수 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우리가 보내는 쌀은 2~3년 된 벼를 방아 찧어서 보내는 것"이며 "군량미로 저장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일부러 이런 쌀을 보낸다"고 설명했다.
대남 의존성 높이면 북핵 문제 해결의 길도 열린다
한편 정 전 장관은 북한이 남한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핵문제해결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북핵 해결의 로드맵이라 불리는 2005년 9.19 공동성명이 타결되는 과정을 설명하며 당국 차원에서 남북 간 신뢰가 생겼고, 상황이 이렇다 보니 미국도 남한을 통해 북한의 속내를 알아보기도 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남한이 북한에 대한 레버리지를 갖다 보니 미국도 남한 당국자를 찾아 북한의 의중을 파악하기도 했다. 정 전 장관은 "당시 미국의 동아시아태평양담당차관보가 찾아와서 다음번 6자회담 때 북쪽이 태도변화를 할 수 있도록 남북회담에서 조율을 해달라고 말하고 가더라"라며 "미국이 이런 요구를 한 것은 남북이 서로 신뢰하는 사이가 됐다고 판단하고 북한이 남한 말을 듣는 것이 확인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인도적 지원과 남북 간 경제 교류 협력을 활성화하다보면 북한의 대남 의존성이 강해져서 우리 말을 듣게 된다"며 "이를 통해 미국, 중국을 설득하고 협의해서 동북아 핵문제를 풀고 평화도 가져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전 장관은 그러면서 평화에 방해가 되는 우리 내부의 요인부터 제거하는 것이 순서라고 지적했다. 그는 "외부의 조건을 개선하는 것은 쉽지 않다. 대북 적대의식은 무비판적으로 내려오거나 분단 체제에서 구축된 기득권이 깨질 것을 우려하는 세력들이 전파하는 것인데, 이를 완화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서는 정권 차원에서 나서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보수에 지지기반을 갖고 있는 박근혜 정부가 이를 실행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 또한 현실이다. 정 전 장관은 "대북 적대의식의 토양 위에서 보수 결집이 일어나야 정권이 안정적으로 유지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보수 정권은 대북 적대의식을 완화시키려 하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권 차원에서 대북 적대의식을 없애려고 하지 않으면 남북 관계개선과 통일은 기대할 수 없다"면서 "정부가 보수층을 설득해가면서 대북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정세현 전 장관의 강연을 시작으로 하반기 조합원 교육을 시작합니다. 오는 8월 20일에는 홍세화 <말과 활> 발행인이 '진보의 새 희망, 협동조합'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가집니다. 이후 9월 27일에는 홍성의 유기농 마을을 탐방하는 현지 교육이 있습니다.10월 20일에는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이 '생명운동과 협동조합'이라는 주제로, 11월 27일에는 고려대학교 강수돌 교수가 '협동조합과 대안 경제'라는 주제로 강연을 열 계획이며, 12월 17일에는 도법 스님이 '화쟁과 상생의 길'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조합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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