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봄, 서울 용산 전자상가와 주택지 인근에 '삐까뻔쩍'한 건물 하나가 위용을 드러냈다. 지상 18층, 지하 7층, 총 25층 규모를 자랑하는 이 건물은 전국 최대 규모의 마권 장외발매소, 이른바 화상경마장이다.
가을 개장까지 불과 5개월을 앞두고서야 건물 용도를 알게 된 주민들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전방 200~500미터 사이에 위치한 학교만 대여섯 곳이기 때문이다. 교육 환경의 질 저하를 우려한 주민들과 해당 학교 교사들이 급하게 입점 저지를 위한 대책위원회를 꾸렸다. 그리고 지난 1월부터는 건물 앞에서 천막 농성을 시작했다.
그러나 갖은 노력에도 개장을 막기는 쉽지 않았다. 지난달 28일 마사회는 기습적으로 임시 개장을 선포하고, 고객들을 맞았다. 지역 주민들은 이번 임시 개장이 곧 정식 개장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 초비상 태세를 갖추고 있다. (☞ 관련 기사 : 朴대통령 모교 교장 "도박장으로부터 아이들 지켜 달라", "도박장 아니라 도서관, 경마장 아니라 경기장을!")
가을 개장까지 불과 5개월을 앞두고서야 건물 용도를 알게 된 주민들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전방 200~500미터 사이에 위치한 학교만 대여섯 곳이기 때문이다. 교육 환경의 질 저하를 우려한 주민들과 해당 학교 교사들이 급하게 입점 저지를 위한 대책위원회를 꾸렸다. 그리고 지난 1월부터는 건물 앞에서 천막 농성을 시작했다.
그러나 갖은 노력에도 개장을 막기는 쉽지 않았다. 지난달 28일 마사회는 기습적으로 임시 개장을 선포하고, 고객들을 맞았다. 지역 주민들은 이번 임시 개장이 곧 정식 개장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 초비상 태세를 갖추고 있다. (☞ 관련 기사 : 朴대통령 모교 교장 "도박장으로부터 아이들 지켜 달라", "도박장 아니라 도서관, 경마장 아니라 경기장을!")
이곳 주민들은 왜 화상경마장 입점을 반대하는 것일까. 무엇을 걱정하는 것일까. <프레시안>이 지난 10일, 용산 화상경마장과 가장 가까운 학교인 성심여자중고등학교를 찾아 학생들과 학부모들, 그리고 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편집자.
"도박중독자 보고 자란 아이들이 어떤 어른이 될까"
"안녕하십니까"
신나는 하굣길. 멀찍이서 교사들을 알아본 학생들이 달려와 인사한다. 교사들도 걸음을 멈추고 함께 고개를 숙인다. 50년 역사를 자랑하는 서울 성심여자중고등학교 구성원들의 인사법이다.
"'안녕하세요'보다 '안녕하십니까'가 더 격식을 차린 말이잖아요. 수업시간에도 '차렷, 경례' 대신 '안녕하십니까'라고 하면서 맞절을 합니다. 교사와 학생 서로가 존중하는 차원에서요."
성심여고 영어과 강석문 교사는 도미노처럼 차례로 인사하는 학생들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예의와 존중을 중시하는 것은 이 학교의 오랜 교풍이라고 했다.
성심여고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자랑거리는 바로 아름다운 교정이다. 너른 터에 반듯하게 자리한 학교 건물과 성당, 그리고 수녀상. 그 사이사이에는 꽃나무들이 정갈하게 배치돼있다. 수풀이 우거진 뒷마당은 이 학교 구성원들의 점심 산책로다.
"학생들이 바른 인성을 갖추고, 열심히 공부에 전념하려면 환경이 중요합니다. 성심학교는 교정이 예쁘기도 하지만, 학교 주변 환경도 좋은 편이었습니다. 다 주택가이고, 술집 같은 유흥가가 없어 조용하고 깨끗했으니까요."
강 교사는 과거형으로 말했다. 성심학교가 좋은 교육 환경 1순위 학교란 건 이제 곧 옛말이 될 터였다. 학교에서 직선거리 235미터, 도보로 5분 거리에 초대형 사행 산업시설인 용산 화상경마장이 들어선 탓이다. '전국 최대 규모'라는 홍보 문구에 걸맞게, 용산 화상경마장문은 지난 28일 임시로 문을 연 다음날부터 마권을 구입하려는 손님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성심여중 3학년 장미반 창밖으로, 이 건물 외벽에 그려진 '말' 문양이 또렷이 보였다.
"이렇게 학교가 코앞에 있는데 경마장이 들어설 거라곤 생각 못 했죠. 수업하다가도 고개만 돌리면 저 건물이 보이고, 매일 집 가는 길에서 도박하는 사람들이 보여요. '돈 놓고 돈 먹기' 하는 모습을 옆에서 계속 보게 되면 괜히 사행심(射倖心)이 들지 않을지 걱정됩니다."
2012년 한국갤럽이 발표한 '사행 산업 이용 실태 조사'에 따르면, 화상경마장의 도박중독 유병률(중독자 비율)은 72.9%로 나타났다. 본장은 39.4%에 불과했다. 화상경마장에 처음 가는 사람 열에 일곱은 중독자가 된다는 얘기다.
성심여고 2학년에 재학 중인 자녀를 둔 학부모 이미숙(가명) 씨는 이 점을 걱정했다.
"저는 화상경마장 오는 분들이 특별히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재미 삼아 한 번 할 수도 있죠. 그런데 그렇게 중독되는 것 아닌가요. 학교 왔다 갔다 할 때마다 손에 마권 든 사람들이 보이잖아요. 그리고 청소년에게는 마권 판매만 안 될 뿐 건물에 출입하는 건 문제가 안 되거든요. 아이들이 호기심에 한 번 들어가 볼 수도 있지 않겠어요. 국가에서 청소년들 게임 중독 걱정한다면서 '셧다운제'도 시행했는데요. 경마는 자기가 실제로 돈을 걸고 하기 때문에 게임보다도 몰입도가 훨씬 높습니다. 그런데도 학교 앞에 버젓이 화상경마장을 연다는 건 말이 안 되죠."
다른 학부모 최지영(가명) 씨는 "도박중독자를 보고 자란 아이들의 미래가 걱정"이라고 지적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는데, 도박에 빠진 어른들 옆에서 아이들이 무엇을 보고 배우겠어요. '어떤 어른이 되어라'라는 말도 못 꺼낼 것 같아요. 가치관이라든지 삶의 비전에 대해 말하기도 민망해요. 이런 비교육적인 환경이 어딨나요."
"야자 끝나고 경마장 앞 버스 정류소에 서 있기 무서워요"
귀갓길도 걱정이다. 성심여고 2학년 김보경 학생은 불안감을 호소했다.
"저렇게 큰 도박장이 들어왔으니 주변 상권도 달라질 수밖에 없잖아요. 술집도 많이 생길 거고, 비슷한 도박장도 더 들어올 수 있고요. 밤에 야간 자율학습 끝나고 그냥 집에 가는 것도 무서워요. 그런데 경마장에서 돈 잃고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 분들, 술 드신 분들이 계시면 더 무서울 것 같아요."
임시 개장 첫날부터 화상경마장에서는 '무서운 광경'이 펼쳐졌다. 학부모 정방 씨는 "임시 개장 첫날 오전에 가봤더니 웃통 벗고 문신 그린 아저씨들이 있었다. 만약 학생들이 그 광경을 본다고 생각하니 끔찍하다"고 했다.
학생들의 안전 문제가 제기되자, 마사회는 "용산 화상경마장 위치는 주요 통학로가 아니"라며 학생들과 학부모들을 안심시키려 했다. 그러나 마사회 답변에 대해 학부모와 학생 모두 '잘 모르는 소리'라는 반응이다.
"경마장 건물 바로 맞은편에 여의도 쪽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이 있어요. 거기에서 버스를 타는 친구들이 많아요. 옆에는 서울역 방향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도 있고요. 그게 통학로 아닌가요. 버스 올 때까지 정류장에서 계속 기다려야 하는데,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아나요."
성심여고 1학년 김혜인 학생의 말이다. 정 씨 역시 마사회 입장을 반박했다.
"도박이 끝나면 그분들도 여기저기 퍼질 것 아닙니까. 화상경마장 주변에 보면 영화관도 있고, 큰 길에서 조금만 안쪽으로 가면 술집이 있어요. 임시 개장한 날 보니 아니나 다를까, 경마장에서 봤던 분들이 술을 취하도록 드시고 계시더라고요. 우려하던 상황 그대로예요."
불안감에 휩싸인 학생들을 지키고, 교육 환경 파괴를 막기 위해 교사들이 발 벗고 나섰다. 김율옥 교장은 화상경마장 입점 사실을 인지한 지난해 5월, 학부모·주민들과 함께 대책위원회를 꾸리고 본인이 직접 공동대표를 맡았다. 일선 교사들도 매주 금·토·일요일마다 열리는 시위에 당번을 정해 참석하는 등 1년 넘게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지난달 28일 임시 개장 당시 교감은 마사회 측과 대치를 벌이다 허리를 다쳐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교사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다 못해, 결국 학생들도 나섰다. 학생회를 주축으로 한 성심여중고 학생들은 자신들이 학교 앞 화상경마장 입점을 반대하는 이유 등을 담은 영상물을 제작하고, 포털사이트에서 서명 운동을 시작했다. 또 지난 14일에는 직접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모교 선배인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호소문을 발표하고, 1200여 개의 청원 엽서를 보내기도 했다. (☞ 관련 기사 : "박근혜 선배님, 후배들을 지켜주세요")
"처음 임시 개장했을 때, 저희도 선생님들과 함께 건물 앞에서 반대 시위에 참석했어요. 그런데 화상경마장 이용객분들이 저희에게 오더니 '선생님들이 시킨 것 아니냐'고 막 따지더라고요. 그 얘기를 듣고 '이제 우리들이 직접 다른 사람들에게 설득해야 할 때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동네 주민이기도 한 성심여고 사회과 김연숙 교사는 "학생들이 안쓰럽지만 조금만 버텨주길 바란다"고 했다.
"교사, 학부모들이 모두 나와 시위를 하는 건 아이들의 교육 환경을 지키기 위한 정당한 싸움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사회는 '합법' 운영임을 주장합니다. 화상경마장에서 학교까지 학교보건법 기준인 200미터보다 35미터 더 떨어져 있으니 법적으론 문제가 없단 얘기입니다. 35미터 정도 거리는, 뛰면 10초도 안 나오는 거리입니다. 그렇게나 가까워요. 학생들과 주민들의 행복추구권이라는 기본권을 어기고 있는데. 35미터 운운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나요. 저희는 마사회의 주장을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강 교사도 화상경마장 개장 '결사 저지'를 다짐했다.
"학교는 '마을의 등불'입니다. 지금 저희는 마을의 등불이 꺼지는 걸 보고 있어요.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않습니까. 당장은 힘들지만 끝까지 막아내야죠."
※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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