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아이를 볼모 삼는 집회'에 나가는 엄마가 됐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아이를 볼모 삼는 집회'에 나가는 엄마가 됐다"

[민들레 교육 칼럼] 엄마라서 말할 수 있다

우리 아이 첫 어린이날, 엄마의 선물

2014년 5월 5일. "우리 다인이의 첫 어린이날, 나는 민주주의를 선물해주었다"라고 시작하는 건 너무 거창할까? 민망한 고백이지만 세월호 이후, 나는 30년 넘는 인생을 살면서 처음으로 '집회'라는 것에 참여해봤다. 그동안 나는 우리나라 대통령들의 주요 업적에 대해 '김영삼 대통령은 금융실명제 만들어서 학창시절을 IMF로 얼룩지게 만들었고, 김대중 대통령은 방북 한 방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며, 노무현 대통령은 탄핵 마당에 눈치 없이 쌍꺼풀 수술해서 인상을 버렸고, 이명박 대통령은 쥐도 새도 모르게 4대강 공사를 해냈던 사람' 정도로 파악하고 있을 만큼 정치에 관심 없는 것을 자랑으로 삼으며 살아왔다.

초·중·고 12년을 죽어라 공부해서 들어간 대학에서 나는 명품 가방을 사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1500원짜리 김밥을 먹고 후식으로 스타벅스에서 5000원 넘는 커피를 마시며, 주말엔 서울 청담동에서 브런치를 즐기면서 싸이월드에 허세 사진을 올리는 레알(real, 진짜) 된장녀였다. 두꺼운 원서를 옆구리에 끼고 캠퍼스를 거닐다가 학생회 언니야들이 '학교의 상업화와 구조조정'을 반대하며 삭발하고 크레인에 올라가는 걸 보면, "학교 안에 별다방(스타벅스) 생기면 간지나고(멋지고) 편하기만 하겠구만. 왜 저래들?"이라고 했던 무식한 삼류 엘리트였고, 심지어 우리 학과가 통폐합된다는 소식도 바다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봤더랬다.

그 시절 우연히 부산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FTA 반대 집회에 참가했다가 내려가는 고등학교 동창을 만난 적이 있다. 두 시간 반 동안 그 친구는 FTA에 반대해야 하는 이유는 고사하고, 그게 뭔지도 잘 모르는 나를 보고 '겉멋만 든 무식한 한국 대학생의 전형'이라며 어찌나 조롱하던지. 기차에서 내릴 땐 '내가 두 번 다시 너랑 상종하나 봐라. 고등학교 때 공부도 못하고 야자 땡땡이치고 당구장이나 다니던 주제에 외국물(유학생 출신) 좀 먹었다고 잘난 척은! 두고 보자!'라고 하며 뒤도 안 돌아보고 각자 갈길을 갔었는데…. 그 우연이 운명이었는지 그 친구와 지금 부부의 연을 맺고 자식까지 낳아 살고 있다. '어맛! 나를 대놓고 무시하는 남자는 니가 처음이야!'가 제대로 먹혀들어간 걸까?

그때의 '재수 없는 놈'이 지금의 '여보느님'이 되어 "지금 네가 편하다고 아무도 돕지 않으면 나중에 네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누구도 너를 돕지 않을 것이다"라는 복음을 전하사, 이 혼탁한 세상에 쬐끔 관심이 생긴 아줌마로 만들어주었고,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할 일들을 함께 '약간씩' 하다가, 급기야 이렇게 '아이를 볼모로 삼는 집회'에 나갈 만큼 용감한 엄마가 됐다.

ⓒ프레시안(최형락)

저 하늘에도 물 좋은 클럽이 있기를

세월호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그 사건이 내 인생에 이런 변화를 가져올 줄 몰랐다. 그저 '잊을 만하면 터지는 대형 참사가 또 일어났구나' 싶은 생각에 마음이 착잡한 정도였다. 그런데 이번 사건은 달랐다. 수상한 점이 너무 많았다. 탑승객 전원이 구조되었다고 하더니, 다시 대부분이 선실에 갇혀 있단다. 그중 대다수가 수학여행을 떠난 학생들이라고 한다. 게다가 뉴스 속보에 나오는 해경이 구조하는 모습은 만화 영화 <로보카 폴리>의 구조 장면보다 단출했다. 그때부터 보름 동안 에어포켓이니, 평형수니, 낯선 선박 용어들이 일상어처럼 들려오고 각종 SNS에서는 끝도 없이 언론 왜곡을 고발하는 글과 색깔론까지 횡행했다. 급기야 유가족들과 경찰이 대치하는 어이없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러던 중 세월호에 탑승했던 한 학생이 촬영한 침몰 직전의 동영상이 공개됐다. 마지막까지 너무나도 천진난만한 아이들. 그중 누군가 "수학여행 클래스!"를 외쳤다. 아… 그 와중에 수학여행 클래스라니. 그 목소리가 끊임없이 귓가에 맴돌았다.

하지만 난 9개월 된 아기를 돌봐야 하는 엄마였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온라인으로 댓글 한두 줄 쓰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던 중 육아정보를 공유하던 자연 출산 카페에서 한 아기 엄마가 "엄마라서 말할 수 있다"는 침묵 행진을 제안했다. 아기 돌보느라 자기 밥 챙겨 먹을 시간도 없는 나 같은 평범한 엄마가 처음으로 경찰서에 집회 신고를 해봤다고 했다. 그 엄마의 용기에 마음으로 큰 박수를 보냈다. 난 그때 하필 친정인 부산에 있어서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그날의 후기와 기사를 관심 있게 찾아 읽으면서 아기 엄마도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해 대한민국의 안전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그러던 중 두 번째 집회가 계획됐고, 작은 힘이나마 꼭 보태고 싶었던 나와 신랑은 여러 가족 행사와 일정을 전부 취소하고 부랴부랴 짐을 챙겨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드디어 태어나 처음으로 집회에 참가한 날! 5월 5일의 홍대 거리는 세월호의 슬픔 따위는 남의 나라 이야기인 듯 즐거운 사람들로 붐볐다. 봄날의 젊음과 모처럼의 황금연휴를 즐기는 인파 사이로 시커먼 옷을 입고 침묵 행진을 하자니, 그들의 행복에 훼방꾼이 된 듯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좁고 복잡한 길에 나타난 불청객들, 거기다 어린 아가들까지 대동한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처음엔 따갑기만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긴장이 좀 풀렸을까? 주위를 둘러보니 처음엔 차갑게 느껴졌던 사람들 속에서 조금씩 따뜻한 눈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기를 안고 길을 가던 젊은 엄마가 우리 뒤를 말없이 따라 걸어왔고, 어떤 아저씨들은 박수를 보내주시기도 했다. 고등학생 딸과 나온 한 어머니가 우리를 바라보며 "세상에는 저렇게 좋은 사람들도 많단다" 하시는 것을 들었을 때는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걷는 내내 세월호에 의해 희생된 200명이 넘는 단원고 학생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이 겨우 '대학=유흥'이라 그렇겠지만, '단원고 학생들도 그 시절의 나처럼 대학생이 되어 홍대 앞을 누비고 다닐 그날을 꿈꿨겠지' 하는 마음에 눈물을 참느라 혼이 났다. 부디 하늘나라에도 물 좋은(?) 클럽이 있어서 우리 예쁜 학생들이 맘껏 뛰놀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

내 배후에는 그들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내가 집회에 참여하고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 의아해하거나 못마땅해 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많다. 사실 지금 이 순간에도 친정엄마는 웬만하면 함부로 글을 쓰지 말라고 말린다. 물론 그들 또한 각자의 가치관이 있고 내가 걱정이 돼서 그러는 것이겠지만, 나는 계속해서 목소리를 낼 것이다. 내 뒤엔 정말 든든한 배후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근육보다 사상이 울퉁불퉁한 남편과 그 사나이를 낳고 기른 시어머니다.

우리 시어머니는 대학 시절부터 환갑이 넘은 지금까지 장장 40여 년 동안 사회 문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여러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대학 시절 학생운동은 물론이고, '참교육학부모회' 활동을 통해 교육 문제를 개선하는 일에 앞장섰으며, '한살림'이라는 농촌살림과 안전한 먹을거리를 지키기 위한 협동조합의 창단 멤버다. 물론 지금도 그런 단체에서 계속 활동하고 있고, '정토회'를 통해서 다양한 봉사활동과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는 분이다. 솔까말(솔직히 말해서), 처음 결혼할 때만 해도 신랑에게 어머니 이야기를 듣고 적잖이 걱정했다. 혹시 나에게도 어머니의 가치관을 강요하시지나 않을지, 정치에 문외한인 며느리를 답답해하지는 않을지. 하지만 어머님은 상상과는 달리 그저 맘씨 좋은 친구 어머니였고, 결혼 후에도 내가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국사 교과서 왜곡과 관련해 1인 시위를 하는 사진을 보게 됐다. 한 고등학교 정문 앞에서 피켓을 들고 묵묵히 서 있는 어머니는 내가 평소 알던 모습이 아닌 다른 분 같았다. 시위할 때 주위의 시선이 신경 쓰이지 않는지 어머니에게 물어봤더니, "우리 손녀랑 친구들이 나중에 잘못된 가치관이나 역사관을 가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면 이런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웃으셨다. 예순이 넘은 연세에도 미래 세대를 위해 귀한 시간을 나누고 마음을 쏟는 어머니.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나는 사진 속 어머니가 그레이스 켈리보다 우아하고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에게 이렇게 근사한 새어머니를 만들어준 남편이 고마웠다.

카페 게시판에 처음 참가한 집회 후기를 올렸더니, 어떤 분이 댓글을 달았다. 나와는 반대로 학창시절엔 의식을 갖고 사회운동을 많이 했었는데, 큰 힘에 수차례 부딪혀 깨지다 보니 회의가 들어서 지금은 관심을 끊으려 한다고. 그 글을 읽고 여러 물음이 생겼다. '나 역시도 곧 시들해질 세월호 이슈에 부화뇌동하는 것이 아닌가. 내 새끼 키우기에도 후덜덜한 이 시기에 괜히 쓸데없는 짓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문득 사진 속 어머니가 생각났다. 나는 이런 댓글을 달았다. "그래요. 계란으로 바위 치기입니다. 하지만 영화 <변호인>에서도 그러잖아요? 계란은 산 것이고 바위는 죽은 것이라고. 작은 실천일지라도 꾸준히 해나가면 그 시간들이 모여 큰 힘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우리 어머니의 작은 목소리가 저와 우리 남편 벌써 세 사람의 목소리로 늘어났잖아요"라고.

엄마라서 말할 수 있다

그러던 중 엄마들의 침묵행진 모임이 몇 군데 보수성향 단체로부터 고발을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고발 사유는 "언제 폭력이 난무할지 모르는 집회 현장에 아이를 데려온 것은 아동 학대이고, 아이의 인권을 유린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기가 찰 노릇이다. 언제 가라앉을지 모를 배에 우리 아이들이 탈 수도 있기에, 세월호 아이들이 내 아이가 될 수 있기에 우리는 시위하는 것이다. 우린 아이를 방패막이 삼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방패가 되어주려고 일어선 엄마들일 뿐이다.

▲ '우리의 작은 움직임이 큰 기적을 만듭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대학로(서울 혜화동)에서 침묵 시위 중인 김경미 씨.(사진 게시와 관련해 본인에게 양해를 구했습니다.) ⓒ민들레

하긴 예전에는 나도 유모차 부대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집회가 열릴 때마다 차가 밀려 짜증 난다며 싫은 소리를 했다. 하지만 막상 집회에 참여해보니, 이렇게 평화롭고 조용할 수가 없었다. 물론 강경 진압이 일어나는 시위 현장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 엄마들의 집회는 교통체증을 유발한 일도, 폭력이 난무한 일도 없이 아이와 눈 마주치며 걷는 진정한 평화시위였다.

모임 고발 건에 대해 집회를 주도한 엄마 혼자서 너무 고생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도와줄 수 없을까 고민하다가 '참여연대'라는 곳에 난생처음 전화를 해보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숨기고 이런 경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며, 카페 회원으로서 도울 방법이 없을까 물어보았다. 우리 모임은 개인의 자발적 참여로 이루어진 집회이고 모두가 평범한 엄마들이기 때문에 고소와 고발을 일삼는 단체랑 맞붙었을 때 불리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참여연대 변호사와 담당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간부회의를 통해 전폭적으로 지지해주기로 결정했다고. 나중에 집회를 주도한 엄마가 개인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연락을 주어서 일단 참여연대 측에는 보류해달라고 양해 말씀을 드리긴 했지만, 전화를 끊으며 나도 모르게 감탄이 터져 나왔다. "아직 살아 있구나, 민주주의야! 고맙다.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신랑의 말이 다시금 생각났다. "내가 돕지 않으면 누구도 나를 돕지 않는다." 부족하겠지만 나도 그분들에게 힘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다.

내가 받은 첫 번째 어버이날 선물

난 이번 세월호 사건이 비단 정부의 탓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말 잘 듣고 착한 아이로 8할을 살아온 내 인생이 이번 참사를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몰랐다. 국회의사당이 정확히 뭐하는 곳인지도 몰랐다. 선거 때나 여당이니 야당이니 편을 골라 내기하듯 지지할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제대로 일하고 있는지 여야 둘 다를 항상 감시했어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그것은 내 의무이자 권리였고, 나는 대한민국의 소중한 국민이었다.

그런데 바보처럼 한 번도 목소리를 내보지 못했다. 함부로 정치 이야기하면 싸움만 나니까 입 다물고 있으라는 아버지, 괜히 인터넷에 글 같은 거 쓰다가 온 가족이 연좌제(?)로 다 잡혀간다는 어머니, 우린 먹고살 만한데, 왜 좌파 편을 드느냐는 가족들의 분위기…. 언제나 순종적인 모범생이던 나는 아직도 독재가 잔존하는 2014년의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에서 더 이상 착한 딸로 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대신 실천하는 엄마로 살기로 결심했다. 그 결심이 우리 딸에게 내가 받은 '첫 번째 어버이날 선물'이다.

아직은 생각에 모순이 많고 마음이 복잡하지만, 어쨌든 나는 첫발을 내디뎠다. 나중에 우리 다인이에게 "엄마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정말 작은 목소리지만 용기를 냈다고, 네가 있어서 할 수 있었다"라고 말해줄 거다. 그래서 오늘도 "같이 눈사람 만들래~?"가 아니라 "같이 집회 나갈래~?" 하고 꾀어본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이 모두 밝혀지고 해결될 수 있도록, 우리 아이들에게 두 번째, 세 번째 세월호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엄마들에게 거리에 나와 함께 걷기를 권유한다. 단언컨대, 소중한 우리 아이에게 민주주의는 엄마의 가장 완벽한 선물이다.

* 대안교육 격월간지 <민들레> 93호 "잊을 수 없는, 세월"에 실린 글을 재편집했습니다.(☞ <민들레> 바로 가기)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