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군대에 보낸 한 지인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젊었을 때는 내가 나이 들어 우리 아들 면회 갈 일이 없을 거라 믿었어요. 그런 일이 있다 해도 (통일이 되어) 압록강 부근의 한적한 초소로나 갈 줄 알았죠."
전방 부대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사고는 그 부자를 포함해 대한민국의 젊은이들과 그들의 가족을 다시 한 번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런 끔찍한 사고가 일어나는 곳이라고 해서 젊은이들이 입대를 선택하지 않을 자유는 없다. 이 땅에서 군 복무는 선택이 아니라 '신성한 의무'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적성과 의지를 초월한 이 절대적인 의무의 근거는 물론 이 나라가 아직도 전시 상황이라는 데 있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해 1953년 7월 27일 중단된 뒤 지금에 이르고 있는 전쟁을 '6.25전쟁'이라고도 하고 '한국전쟁'이라고도 한다. 두 이름 모두 그 자체로는 전쟁에 대한 가치판단을 배제한다. 그런데 언제인가부터 '6.25전쟁'은 보수 진영이, '한국전쟁'은 진보 진영이 사용하는 용어처럼 인식되어 왔다. '6.25전쟁'이라는 용어가 과거의 '6.25사변'이나 '6.25동란'처럼 "잊지 말자, 6.25!" 식으로 북한에 대한 증오와 적대감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진보학계 일각에서 좀 더 객관적인 '한국전쟁'을 선호했기 때문인 것 같다.
'한국전쟁'은 미국 등 외국에서 사용하는 용어다. 미국은 자신이 참전한 베트남의 전쟁을 '베트남전쟁'이라 하고 자신이 참전한 한국의 전쟁을 '한국전쟁'이라 한다. 예전에는 신미양요를 가리켜 '한국전쟁'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미국인도 아닌 한국인이 자기 땅에서 일어난 전쟁을 가리켜 남의 나라 얘기하듯이 '한국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개운치 않다. 누구보다도 더 한국의 현실에 민감한 진보 진영이 왜 그런 용어를 선호하는 걸까?
'6.25사변', '6.25동란' 등 한국의 전통적 용어나 북한의 '조국해방전쟁'이라는 용어는 이 전쟁의 성격에 대한 명확한 규정을 담고 있다. 전자는 북한 괴뢰 집단이 일으킨 반란을 뜻하고, 후자는 미 제국주의에 점령당한 조국의 반쪽을 해방시키는 전쟁을 뜻한다. 1980년대 이래 성장한 한국의 새로운 진보 세력이 이 두 가지 용어를 모두 외면하고 '한국전쟁'이라는 중립적인 이름을 택한 것은 수십 년 된 전쟁의 양대 진영 어느 쪽에도 가담하기 어려운 그들의 사정에 기인한다.
정전협정을 맺은 지 60여 년이 지났지만 전쟁의 주도 세력은 남북에서 모두 건재하다. 북의 세습 권력은 미국과 맞서 싸우던 기억과 여전한 미국의 위협에 의지해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과 국제적 고립에도 불구하고 요지부동이다. 남의 반공 우익 세력 역시 북한의 위협을 전가의 보도로 삼아 잇단 민주 혁명과 국민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끄떡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창살 없는 감옥 만든 전쟁…평화 없이 미래 없다
문제는 정전 이후 한국에서 새롭게 성장한 진보 세력이다. 그들을 싸잡아 '종북 좌파'라고 공격하는 보수 세력의 논리대로라면 이들은 1950년대의 전쟁을 '조국해방전쟁'으로 인식해야 옳다. 그러나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분단의 폐해를 고스란히 뒤집어쓰며 자라난 그들은 '미제'의 포로가 된 채 북녘의 해방군만을 갈망하는 가련한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진보 세력이 싹쓸이당한 남한 땅에서 자본의 독주 속에 태어나고 자랐다. 그 특수한 조건에서 한국 자본주의는 맹렬하게 성장했고 그만큼 맹렬한 노동자의 성장을 촉진했다. 자신을 둘러싼 사회의 모순을 다른 어떤 나라에서보다 더 예민하게 인식하고 그 해결을 고민하는 한국의 노동자들이 바로 신세대 한국 진보 세력의 동지이며 가족이며 그 자신이다.
이들 한국의 새로운 진보 세력에게 1950년대의 전쟁은 무엇인가? 그것은 노동자가 자신의 인간적 권리를 지키려고 벌이는 활동조차 '빨갱이 짓'으로 몰아 탄압하는 미친 사회의 연원이고, 태어나면서부터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를 반쪽으로 제한당하는 창살 없는 감옥의 입구였다. 그것은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멀쩡히 살아 있는 핏줄조차 만날 수 없게 하는 패륜극의 시작이자, 지구 반대편도 자유롭게 날아가는 시대에 한두 시간 거리의 '우리 땅'조차 갈 수 없게 만드는 희비극의 서막이었다.
모든 젊은이가 더 좋은 일로 자신과 국가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채 한창 꽃다운 나이에 '총기 참사'의 위험을 감수하고 무조건 입대해야 하는 현실도 당연히 이 전쟁에서 비롯되었다. 수많은 젊은이와 그들의 부모를 미치게 하는 것은 정작 한국 사회의 상층부에는 그런 '신성한 의무'를 온갖 방법으로 회피한 자들이 우글거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한국의 노동 대중과 그에 기반을 둔 신세대 진보 세력은 전쟁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전쟁에 아무런 책임이 없으면서도 그 전쟁의 부정적인 유산을 가장 많이 물려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전쟁은 어떤 의미에서도 계승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영구히 종식시켜야 할 대상이다. 정전 협정이 평화 협정으로 전환되고 한반도에 온전한 평화가 깃들면 전쟁 상태를 구실로 한국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던 온갖 비인간적 장치들이 비로소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신세대 진보 세력이 이 역사적인 과업을 완수할 때 '한국전쟁'이라는 잠정적이고 중립적인 용어도 이 전쟁이 그들에게 진정 의미하는 바를 표현하는 이름으로 바뀌어 갈 것이다. 그때'6.25사변', '조국해방전쟁'은 물론 미국의 '한국전쟁', 중국의 '항미원조(抗美援朝)' 등 다양한 세력의 제한된 입장을 나타내던 이름들은 그 역사적 의미를 다하고 새로운 이름 아래 재배열될 것이다. 그때 전쟁은 새로운 시각에서 다시 쓰일 것이고, 전쟁에 목숨을 바친 이들의 대의도 60년 묵은 정치적 목적에 볼모로 잡히지 않고 온전한 의의를 되찾을 것이다.
한국 사회가 1950년대의 질곡으로부터 헤어나 제대로 숨 쉬기 위해서라도 '한국전쟁'-'6.25전쟁'-'조국해방전쟁'은 다시 명명되어야 하고 다시 쓰여야 한다.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는 8.15처럼 한국인에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날들에 담긴 의미를 짚어보는 기획이다. 필자는 다양한 역사책을 기획하고 써 왔으며, 현재 인문기획집단 문사철 주간을 맡고 있다. <편집자>
역사 오디세이
<1> 분단에 대한 배상…세 번째 8.15가 필요하다
<2> 8.29는 국치일일 뿐이다? "신한국 최초의 날"
<3> 서태지는 왜 노동당사 앞에서 발해를 꿈꿨나
<4> 김구도 빈 라덴 같은 테러리스트? 당찮은 소리
<5> 해방 공간의 '전태일'들, 망각의 늪에서 구하라
<6> '단군이 오래전 건국', 그것만 자랑할 건가
<7> 세종은 오로지 존경 대상? 세종을 질투하라
<8> 10월유신 41년…더 무서운 괴물이 솟아나고 있다
<9> 하얼빈역·궁정동…한국 근현대사 관통한 두 번의 10.26
<10> 러시아혁명의 교훈, 대중을 외면하면 진보도 없다
<11> 전태일과 박정희의 대결은 끝나지 않았다
<12> 미국이 한국 독립 낙점? 유영익의 기묘한 이승만 띄우기
<13> 개화파의 역사적 과오, 안중근이 씻어 내다
<14> 망령 되살린 수구의 '종북' 칼춤…6.29의 저주 풀어야
<15> 억압과 저항의 '선사 시대' 넘어 '민중기원'은 온다<19> 166년 전 문서, 현대 한국의 비밀을 말하다
<23> 추신수 둘러싼 '가증스런 피라미드'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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