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여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5.16쿠데타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 한국전쟁
[이야기 마당 4∼8] 친일파
[이야기 마당 9∼15] 학살
[이야기 마당 16∼31] 해방·분단[4월혁명, 여섯 번째 마당] 국민 죽이고 '야당 탓' 대통령, 미국도 안 지켜줬다
[4월혁명, 일곱 번째 마당] '참변은 너희 탓' 떠넘긴 대통령, 결국 쫓겨났다
[4월혁명, 여덟 번째 마당] '일본과 일전불사' 대통령, 속셈은 따로 있었다
[4월혁명, 아홉 번째 마당] 제자들의 의로운 죽음, 선생도 나라도 바꿨다
[4월혁명, 열 번째 마당] 결정적 순간, 야당 지도부는 비겁했다
[5.16쿠데타, 첫 번째 마당] 박정희 쿠데타 연재는 왜 그 신문에서 사라졌나
[5.16쿠데타, 두 번째 마당] 오랜 꿈 이룬 '박통'…대한민국은 짓밟혔다
[5.16쿠데타, 세 번째 마당] 박정희는 왜 한국인의 '노예근성'을 주목했나
프레시안 : 5.16쿠데타 과정을 되짚다 보면, 4월혁명을 거쳐 만들어진 장면 정권을 끝까지 지키려 한 세력이 왜 그리도 없었나 하는 의문이 든다. 1979년 12.12쿠데타와 1980년 5.17쿠데타 이후엔 5.18항쟁이 있었지만 5.16쿠데타 이후엔 그런 움직임이 없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도 닿아 있다.
서중석 : 장면 정부 또는 민간 정부에 대해 강한 애착이 있었으면 반대 시위도 있을 수 있지 않았느냐는 건데, 그건 현실적으로 어려웠다고 본다. 예전에 한 사회과학자도 그런 주장을 했는데, 내가 그건 말도 안 된다고 했다.
당시 쿠데타에 조직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어떤 시민 세력도 없었다. 쿠데타에 저항할 수 있는 건 조직적 세력을 갖춘 곳이고, 예컨대 남미에서는 노조 조직이 그런 역할을 좀 했다. 한국에서는 학생 조직이 그런 역할을 할 수도 있지 않았느냐고 할 수 있지만, 이때는 그런 걸 할 만한 정도의 학생 조직이 없었고 노조 조직도 사실상 전혀 없었다.
그리고 쿠데타에 저항하는 나라, 별로 없다. 아, 총칼을 든 군인이 전차와 중화기를 끌고 나왔는데 거기에 맞서 싸우는 게 얼마나 있었나. 1968년 체코 프라하라든가 1956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처럼 (시민들이 군인에게) 저항한 사례가 없는 건 아니지만, 쿠데타에 맞서 그런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1972년 10월 17일 유신 쿠데타가 일어날 때만 해도 사회가 많이 달라졌는데 아무도 그것에 반발하는 데모를 즉각 하지 않지 않았나. 그것도 5.16쿠데타 못지않은 헌정 파괴 행위였다. 그렇지만 그것에 대한 반대 투쟁이라고 할까, 활동을 누구도 전개할 수 없었다. 전개하지 못했다. 할 수 없었던 것, 못한 것과 안 한 것 중 어떤 것이 더 맞느냐. 난 양자가 다 있다고 본다. 12.12쿠데타도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쿠데타 아닌가. 그때만 해도 학생 운동 세력, 재야 세력이 상당히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투쟁으로 직접 나서지 않았다.
다만 5.17쿠데타에 대해선 광주에서 5.18항쟁이 있었다. 5.17쿠데타에 저항한 것은 광주가 갖는 특징 때문이다. 그 부분은 광주항쟁과 결부해 다르게 얘기해야 한다. 어떻게 이야기하는 것이 더 정확할 수 있냐면 5.16쿠데타, 유신 쿠데타, 12.12쿠데타에 못지않게 헌정 파괴가 분명한 5.17쿠데타에 왜 광주를 제외한 다른 도시는 침묵을 지켰느냐, 1980년 5월 15일 10만 명이나 되는 학생이 서울역 앞에 집결할 정도의 시위도 있었는데 왜 5.17쿠데타에 대해서는 침묵했느냐, 이렇게 묻는 것이 더 맞는 말이 아닌가 싶다. 쿠데타에 직접 항거한다는 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프레시안 : 4월혁명 후 부정 선거 원흉 처단, 반민주 행위자 처벌, 부정 축재자 처리 문제 등 '혁명 과업'을 이행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9개월도 안 되는 짧은 집권기로 인한 한계를 고려한다고 해도, 장면 정권이 이러한 과업 이행에서 미진한 모습을 보인 게 사실이다. 이와 달리 '혁명 과업'을 조기에, 철저히 이행하는 모습을 보였어도 다수의 국민이 장면 정권 붕괴를 그저 지켜보기만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서중석 : 장면 정권이 잘했느냐 못했느냐하고도 꼭 관련되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쿠데타와는 별 상관없었다고 본다. 다만 군 내부에서 더 요동쳤을 가능성은 있다. 그리고 그간 거듭 얘기한 것처럼, 장면 정부가 그 정도 했으면 (부족하긴 하지만) 차근차근 했다고 볼 수 있다. 1960년 8∼11월 이때는 신민당, 그러니까 민주당 구파하고 머리 터지는 싸움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것이 정리되고 어느 정도 정권이 안정되는 게 1961년 2월쯤이다.
더군다나 '혁명 입법'이니 이런 건 같은 보수 세력이 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건 박정희 정권도 한다고만 했다가 실제로는 다 안 하지 않았나. 사실 박 정권에서 잘한 건 거의 다 장 정권을 이어받은 것이다. 경제만 해도 박정희가 어느 정도 자신의 경제 정책을 추스르는 건 1964년 무렵이다. 그전엔 시쳇말로 개판을 쳤다. 그러면 장 정권과 박 정권 중 어디가 더 그랬느냐. 내가 보기엔 박 정권이 훨씬 심했다. 이런 점을 명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5.16쿠데타 후 왜 조직적 저항이 없었을까
프레시안 : 5.16쿠데타에 대해 학생층과 일반 국민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짚었으면 한다. 학생층과 관련해 많이 거론되는 것이 서울대 총학생회의 쿠데타 지지 성명이다. 그러나 학생층 전반이 그처럼 반응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시기 자료들을 보면 쿠데타 직후엔 일단 지켜보면서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군사 정권을 점점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학생들이 늘어났던 것 같다. 이와 관련해 쿠데타 초기, 4월혁명 주역임을 자임하던 학생들이 '혁명 과제'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반성의 차원에서 쿠데타를 받아들인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서중석 : 학생들의 태도는 애매했다. 그냥 현실 권력으로 많은 사람이 인정했을 수는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비판 목소리가 높아진다고 했는데, 사실 그런 흐름은 그전에도 있었다. 그런데 1961년, 1962년 계엄령 아래서 그런 소리를 신문이나 어디나 실어줄 턱도 없고 하지도 못하는 것이었다. 다 잡아가고 그 무서운 군인들이 칼 휘두르던 때 아닌가. 그런 목소리는 잠겨 있는 것이었다. 그것에 대한 반발이 전면적으로 나오는 건 한일 회담 때다.
민정 이양기인 1962년에 고려대생과 서울대생이 한 데모도 그것과 한편으로는 맞닿아 있다. 미군 범죄에 대한 항의 데모가 일어나는데 5.16 정권이 완전히 조져버린다. 그야말로 칼을 휘둘러 학생들을 완전히 묵사발을 만들어버린다.
(1962년 6월 6일 고려대생 2000여 명, 같은 달 8일 서울대생 1000여 명이 '한미행정협정 체결 촉구' 시위를 했다. 5.16쿠데타 후 첫 시위였다. 계기는 그해 봄 임진강 부근에서 나무꾼이 미군에게 살해당한 것에 이어 파주에서 미군들이 한국인 소년을 도둑으로 몰아 사형(私刑)을 가해 결국 죽게 만든 것이었다. 학생들은 주한 미군의 법적 지위를 제대로 규정해 불평등한 관계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미주둔군지위협정은 1966년 체결돼 1967년 발효되지만, 2002년 효순·미선 사건을 비롯한 숱한 사안에서 드러난 것처럼 독소 조항이 많았다. 한편 한국 국회의 비준을 거친 협정이라는 점에서 한미행정협정이 아니라 한미주둔군지위협정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편집자>)
5.16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일반 국민들은 어떤 태도를 보였느냐. 그것에 대해 그 당시 쓴 것을 보면 그저 관망한다고 할까, 그러다가 나중에는 인정한다고 하는 식이다. 함석헌은 '무표정이고 묵인이다', 이런 쪽으로 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전두환 등이 선동한 육사 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시위가 있긴 했지만 시민들 사이에서는) 앞장서 지지한 세력도 없었고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선 세력도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박정희·전두환, 깡패 소탕 하나는 시원하게 했다?
프레시안 : 쿠데타 세력은 권력을 잡은 후 이른바 사회 정화 작업을 한다. 그러면서 재건 국민 운동을 실시하는데, 일제 말 전시 동원 체제와 닮은꼴이라는 지적이 많다.
서중석 : 적지 않은 사람들이 쿠데타에 대해 '시원하다'고까지 이야기하는 게 나온다. 그런 데에는 교통정리, 깡패 소탕 같은 것에 대해 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이 하야했을 때 학생들이 맨 먼저 한 게 교통정리였다. 좀 많이 어수선하지 않았나. 그런데 군인들이니까 이걸 서릿발처럼 무섭게 했을 것이다. 1961년 6월 1일에는 대학생한테 제복을 입게 했다. 또 고교생에게 삭발을 하도록 했다. 이런 것들은 일제 말에 볼 수 있던 것이라고 일부에선 얘기한다. 일제 말에 머리를 빡빡 깎게 하지 않았나. 대학생에게 제복을 착용하게 한 것도 단적으로 이야기해서 군사 문화다. 나도 1967년 대학에 들어갔을 때 입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이걸 입는 게 제일 편했다. 값이 쌌기 때문이다. 하여튼 학생들에게 제복을 입게 해서 군인처럼 획일화된 것을 갖게 했다.
프레시안 : 12.12쿠데타 후 전두환 신군부 세력도 5.16쿠데타 세력이 한 방식을 이어받아 사회 정화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대표적인 사례가 삼청교육대다. '군사 정권이 깡패 하나는 시원하게 처리했다'며 좋게 평가하는 이들도 일부 있지만,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사람 중 상당수는 폭력배와 거리가 멀었다. 민주화 운동에 관계한 사람은 물론 그런 운동과는 무관한 이들도 강제 할당제에 엮여 많이 끌려갔다. 이웃과 분쟁 중 경찰서에서 '인원이 부족하니 새마을 교육 받으러 가야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끌려간 사람, 자장면 내기 화투판을 구경하다가 도박죄 명목으로 끌려간 사람 등 어이없는 사례가 많다. 그렇게 사람들을 끌고 간 삼청교육대에서는 끔찍한 인권 유린이 자행됐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5.16쿠데타 세력의 사회 정화 작업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서중석 : 깡패 소탕이란 부분에 대해선 여러 가지로 생각해봐야 한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 이게 군대 파시즘이라고 할까, 이런 데서 항용 하는 짓이다. 다른 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12.12쿠데타와 5.17쿠데타가 나고 나서 제일 피해를 많이 본 것이 부랑아로 불린 사람들이다. 1980년 10월 신군부가 '사회악 사범' 6만여 명을 일제 검거해 그중 4만 명가량을 군부대에 끌고 가 '순화 교육'을 한다고 발표했다. 운동권도 걸려들었지만 부랑아로 불리던 이들도 많이 걸렸다. 그렇게 삼청교육대로 끌려간 사람들에 대해서는 훗날 인권 유린이라고 해서 부분적으로 보상도 받게 하고 그랬다. 죽은 사람을 포함해 그렇게 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진전된 것이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 때 이뤄진 깡패 소탕에 대해선 시원하게만 생각했다. 이게 참 문제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아직은 인권 문제 같은 것을 충분히 생각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1960년 4.19 그날 그리고 4월 25일과 26일, 또 마산에서 특히 4월 11일과 12일 이런 때에 껌팔이, 신문팔이, 구두닦이, 실업자, 한마디로 불우하고 부랑아로 불리던 사람이 많이 참여했다. 4월혁명 때 제일 많이 죽은 것이 그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나. 중·고등학생 사망자 수보다도 많다. 1980년 광주항쟁 때도 이 사람들이 제일 많이 죽었다. 통계가 그렇다.
4월혁명 때 이 사람들이 큰 역할을 했다. 시위대가 경무대(오늘날 청와대) 쪽으로 향하면서 사태가 크게 번진 데는 이 사람들의 역할이 컸다. 4월 25일 밤늦게 그리고 4월 26일 아침부터 계속된 시위에서도 이 사람들이 크게 활약했다. 그런데도 4월혁명 역사에서 이 사람들은 지워진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4월혁명을 더럽혔다', 이런 식으로까지 많은 사람이 그 당시에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살펴봐야 한다. 4월혁명 이야기할 때도 한두 마디를 하고 넘어갔지만, 이런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깡패 전성시대는 4월혁명으로 이미 막 내렸다
프레시안 : 부랑인으로 불리는 이들에 대한 사회의 차가운 시선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1980년대에 벌어진 형제복지원 참사도 그런 시선과 무관치 않다. (관련 기사 : 박정희와 전두환은 왜 '부랑인'을 겨냥했나) 다시 5.16쿠데타 이후 상황으로 돌아가면, 쿠데타를 일으킨 지 불과 닷새 후인 1961년 5월 21일 쿠데타 세력이 기획한 '깡패들의 행진'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서중석 : 깡패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하는 건 사실은 허정 과도 정부 때다. 임화수를 비롯한 주요 깡패 대장들은 1960년 4월 18일 밤 청계천 종로 4가 거리에서 고려대생들을 두들겨 팬 사건 때문에 그전에 이미 잡혀 들어왔다. (이승만 하야 3일 전인 1960년 4월 23일, 임화수와 유지광은 고려대생 습격 건으로 구속됐다. <편집자>) 4월혁명으로 우리나라에서 깡패 시대는 사실상 끝난 것이다.
깡패 전성시대는 1950년대 한국 사회의 특별한 상황 때문에 생긴 것이다. 자유당 정권은 깡패하고 일정하게 관계를 맺고, 깡패들을 자신들의 도구로 삼아 활용했다. 그런 것 때문에 깡패가 1950년대에 그렇게 활개를 치고 위세가 당당하고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프레시안 : 정치 깡패 전성시대는 4월혁명으로 막을 내린다고 볼 수 있지만, 한국 정치에서 깡패 문제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1987년 4월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용팔이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야당(통일민주당) 창당 대회장에 깡패들이 난입해 폭력을 행사한 이 사건의 배후에는 전두환 정권이 있었다.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장이 정권에 협조적이던 다른 야당의 두 의원에게 거액을 건네 깡패들에게 창당 방해를 사주하게 한 사실이 훗날 드러났다.
서중석 : '용팔이 사건'의 깡패들은 1950년대 정치 깡패와는 성격이 다르다.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 때 중앙정보부와 그 후신인 안기부 같은 곳에서는 어떤 깡패들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걸 다 잡아들이는 대신 길들였다가 때에 따라 동원하는 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50년대와는 상황이 다르다. 그때는 그야말로 자유당의 한 기관이었다.
허정 과도 정권이건 장면 정권이건 법치를 하려고 애를 많이 썼다. 법치주의 국가가 되고 사회가 정상화되면 깡패는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깡패를 이미 많이 잡아들이기도 했다. 5.16쿠데타 정권이 깡패를 잡아들인 것은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다른 무엇보다도 되게 가시적으로 보였다. 많이 잡아들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보면 4200여 명을 검거했고, 그중 965명은 국토 개발 사업장으로 끌려간 것으로 나온다.
5월 21일 깡패들은 거리 행진을 하며 자숙한 것으로 돼 있다. 군인들이 대로변에 쫙 늘어서 있는 가운데 이 사람들은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습니다"라는 팻말을 걸고 행진했다. 이런 가시적인 게 사람들한테 강한 인상을 줬나 보더라. 그런데 이것도 사실은 인권 유린이다. 아, 잘못이 있으면 깡패라도 형법에 따라 다스리고 처벌하면 되는데 그게 아니라 조리를 돌렸다. 조선 시대나 중국 명·청 시대에도 그런 식으로 꼭 한 게 아니었다. 군인들이니까 이런 걸 한 것이다. 이런 걸 군대 파시즘이라고 하지 않나. 그런 점에서도 그 당시 일부 시민들이 '시원하다. 잘했다'고 이야기한 것에 대해 지금 와서는 다시 생각을 해야 한다.
살아남은 거물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행동대
프레시안 : 쿠데타 세력은 일부 정치 깡패를 처형했다.
서중석 : 군사 정권이 '혁명 재판' 같은 걸로 죽인 사람 중 이야기가 많이 되는 게 6명이다.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사회당 간부로 남북 협상을 주장한 최백근, 그리고 3.15 부정 선거에 앞장선 전 내무부 장관 최인규, 그리고 나머지 3명은 깡패거나 깡패와 비슷한 사람으로 돼 있다. 이정재, 임화수, 곽영주다.
경무대 경무관 곽영주는 세도가 아주 당당했던 걸로 돼 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원래 이정재, 임화수하고 의형제 비슷한 사람이고 그쪽 방면에서 활동하다 발탁된 인물이다. 이정재, 임화수와 똑같이 완전히 끈이 떨어지니까 자유당 거물 등과 달리 전혀, 어느 누구도 구제하려 하지 않은 것 아닌가. 그러니까 군사 정권이 전시 효과를 노리고 가장 쉽게 죽일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임화수만 하더라도 깡패 시대, 특히 1958~1959년에는 대단한 세도가였을 뿐만 아니라 극장가, 연예계를 주름잡지 않았나. 중요한 감투를 그때 다 썼다. 그러면서 김희갑이라는 희극 배우를 두들겨 팬 것이 말썽이 되고 그랬었다. 참 불우한 출신으로 한때는 문교부 장관을 노린다는 소문도 돌던 자였다. 그렇지만 이 사람, 힘이 없을 때는 사고무친(四顧無親)이었다. 그러면 제일 희생양으로 끌려가기 좋은 것이었다.
프레시안 : 온갖 반민주 행위를 한 이승만 정권의 거물들 중 처형된 건 최인규 한 사람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살아남았다. 부정 축재자들에게도 박정희 집권기는 나쁜 시기가 결코 아니었다. 이에 비해, 이승만 집권 연장을 위해 행동대로 나섰던 일부 정치 깡패들은 목숨을 잃었다. 정치 깡패들이 한 짓은 결코 옹호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반민주 행위를 기획하고 사주한 거물들과 행동대의 엇갈린 처지는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서중석 : 나는 특히 이정재의 경우는 너무 심한 인권 유린이라고 본다. 이정재는 정치 깡패를 대표하는 사람이다. 이정재하고 시라소니, 이정재하고 김두한하고 붙으면 누가 이기겠는가, 이런 게 많은 사람의 관심사였다. 깡패 시대에는 그게 참 화제였다. 직접 안 붙었다. 세 명 다 각각 특기가 있는 사람들인데 김두한은 피한 것으로 돼 있고, 이정재는 시라소니와 직접 붙는 걸 두려워했다. 시라소니가 워낙 독한 사람이지 않았나.
이정재는 자유당 감찰부 차장이라는 고위직에까지 올랐다. 그야말로 주먹계의 왕자였다. 김두한은 정치계로 나왔고 시라소니는 '도코다이'였기 때문이다. 이정재는 정치계에서도 대단한 활약을 했다. 이기붕 권력을 강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깡패, 특히 정치 깡패 하면 누구나 이정재를 떠올렸다.
이정재는 유식한 사람이었다. 글을 아는 사람이었다. 김두한하고 달랐다. 어쨌든 5월 21일 거리에서 조리돌릴 때 제일 앞에 세운 게 이정재였다. "이정재"라는 팻말을 목에 걸고 행진했다. 그만큼 군사 정권이 전시 효과를 노리고 이정재를 써먹기 좋았다. 그러나 생각을 해보자. 이정재는 1958년부터 끈 떨어진 뒤웅박이었다.
프레시안 : 그해 이기붕은 이정재를 내쳤다.
서중석 : 이정재는 국회의원이 되려고 고향(경기도 이천) 사람들에게 정말 잘해줬다. 국회의원 되는 게 이 사람 소망이었다. 나왔으면 틀림없이 됐을 거라고 본다. 그런데 이기붕이 1958년 5.2선거 때 서울서 당선되기 어려울 것 같으니까 이정재 자리를 빼앗아 이천 가서 당선된다. 이정재가 처음엔 저항을 많이 했다. 그렇지만 상대가 누구인가. 자기 직접 상관 아닌가. 나중에는 굴복했다.
이기붕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정재를 내쳐버리고 임화수를 정치 깡패의 제일 앞잡이로 뒀다. 그러면서 신도환을 중심으로 대한반공청년단이 만들어졌을 때 임화수는 반공청년단 종로구단 단장, 그리고 이정재 밑에 있던 유지광은 종로구단 동부특별단 단장을 맡아 맹활약하지 않나. 임화수는 반공예술인단까지 만들었다. 그때부터 사실 정치 깡패의 중심축은 이정재에서 임화수, 유지광한테 넘어간 것이다. 물론 임화수와 유지광은 그전부터 정치 깡패였다.
이정재는 끈 떨어진 신세가 돼가지고 공부도 한 걸로 돼 있다. 이정재는 1958년 4월 신흥대(오늘날 경희대)를 졸업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눈에 띌 만한 깡패 짓을 못 했다. 군사 정부의 이정재 공소장을 읽어보면 '이정재 죄목이 더 많을 것 같은데 왜 이것밖에 못 적었는가' 할 정도로 시시한 것만 나열해놨더라. 그것은 몇 년 징역형을 때리거나 집행 유예 또는 그 이하로 처리해도 될 정도로 낮은 것이다.
그런데 거듭 얘기하지만 이 사람은 희생양으로 써먹기가 좋았다. 그래서 죽이는 것도 빨리 죽였다. 앞에서 이야기한 6명 중 5명은 1961년 12월 21일에 죽이는데, 이정재만은 10월 19일에 죽였다. 무려 두 달여나 빨리 집행했다. 그때 이정재가 끌려가는 모습에 대해 쓴 책도 있는데, 이정재는 그전에도 여러 사람과 대화할 때 자기가 죽을 거라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안 했다고 한다. 당연한 일이다. 자기가 한 일이 1958년 이후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끌려가서 사형이 집행된 것이다. 시원하다고 하기 이전에 이 시기의 이런 것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다시 평가해야 한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마흔여덟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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