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임기가 이제 실질적으로 3년 반도 채 남지 않았다. 한국대통령제는 직선제에 바탕을 둔 5년 단임제로 다른 나라의 그것에 비춰보았을 때 제도적 측면에선 상당히 민주적이다. 문제는 절차적 민주성이 현직 대통령에겐 상대적으로 짧은 임기 중 성과를 내기위해 엄청난 압력으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1987년 민주화 이후, 대부분의 대통령들이 비교적 이른 시기에 자신이 애초 설정했던 정책방향을 상실하고 길을 잃고 헤매다 조기 레임덕에 빠지는 게 일반적 모습이었다. 여기에는 또한 대통령들의 지지율 하락이 한 몫 했다. 요컨대, 5년 단임제에 따른 직무압박, 춤추는 지지율에 따른 여론의 집중포화가 민주화 이후 비틀거리는 대통령제를 만들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위에서 든 두 가지 조건은 민주정치의 최소한 기본요건이라는 데 있다. 한마디로, 개헌을 통한 권력구조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 한 어떤 대통령이라도 감내해야 하는 불변의 조건인 것이다. 따라서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서는 외부적 압박을 이겨내고 자신의 정책적 마스터플랜을 여하히 관철시켜 낼 수 있는 정치력 여부가 핵심관건이라 하겠다. 다시 말해서, 한 정권의 성패를 가늠하는 것은 국민들의 정책수요(demand) 내지 필요(need)에 대응할 수 있는 집권세력의 공급능력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집권세력의 주요정책을 실현시킬 수 있는 대통령의 리더십을 통치능력으로 정의하며, 여기서 통치전략이 통치능력을 좌우하는 핵심 매개변수로 작용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결과적으로 통치능력을 인정받은 대통령만이 임기가 끝난 뒤 성공한 대통령으로 기억될 일이며, 그러므로 정치학적 측면에서 주요한 설명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대통령의 '통치전략'(govern-strategy)이다.
대통령이 임기 중에 무언가 성과를 내기 위한 마스터플랜, 곧 통치전략을 구비하고 있느냐 여부가 통치능력을 갖춘 성공한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구호’, 곧 전략이 있는 세력과 구호가 없는 세력 간의 투쟁에선 전자가 승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지금까지 정치세계의 알파요 오메가라 하겠다. 한마디로, 대통령의 정당한 권한행사는 현직에서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사전에 상당정도의 실행계획과 청사진, 곧 통치전략을 구상하거나 거기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비교적 짧은 임기 내에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별로 없다는 점을 반증한다.
박근혜 정부의 통치전략의 핵심을 요약하면, 한마디로 두 국민전략에 입각한 공격적 신보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담론에서 대표적으로 알 수 있듯이, 두 국민 전략에 입각한 공격적 보수주의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문제는 이 전략이 적어도 현재의 국면에선 효능감을 가지면서 한국 사회에 먹혀들어가고 있다는 데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박근혜 대통령이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강점은 무엇이며 이에 기반하여 구사하는 통치전략의 내용은 무엇인가?
박근혜 대통령의 대표적 이미지를 하나 떠올리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응답자들이 안정감으로 답한다. 안정감, 한마디로 법과 원칙, 그리고 무엇보다 질서의 화신과도 같은 그녀의 정치적 이미지는 보수세력은 물론, 일부 국민들에게 박근혜 정부의 통치전략이 가동될 수 있는 안정적 토대를 제공해주었다. 실제로도 양김 이래 40% 가량의 고정지지율을 확보한 정치인은 박근혜 대통령이 유일하며, 이것이 바로 새누리당의 지지율이 40% 이하로 하락하지 않는 내밀한 이유라 하겠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보수이미지에 안주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선 여전히 10%가 부족했던 것이다. 대선에서 최소승리연합을 구축하기 위한 전략이 바로 야권이 제기한 ‘경제민주화’와 ‘보편적 복지’를 보수의 아이템으로 선취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의제선점 전략을 통해 박근혜 후보는 야권이 제기한 종래의 보편적 복지냐 선별적 복지냐, 무상급식이냐 유상급식이냐의 싸움을 누가 더 ‘안정적’으로 보편적 복지를 실현할 수 있는 정권이냐의 문제로 일거에 전환시켜 놓았다. 이러한 발상전환을 통해 그녀는 미국 수입소 광우병파동이나 4대강사업 실패로 인한 이명박 정권의 실정에 대한 심판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던, 객관적으로 쉽지 않은 대선에서 신승을 거둘 수 있게 되었다.
혹자는 대선이 끝난 뒤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민주화와 보편적 복지를 헌신짝처럼 내버리면서 본색을 드러냈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건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박근혜 정부는 경제민주화와 보편적 복지를 여전히 주요한 정책적 아이템, 아니 보다 정확히 사정이 다급하면 빼어들 수 있는 비장의 카드로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간직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경제민주화와 보편적 복지의제를 저버리는 순간, 박근혜 정부뿐만 아니라 이후 차기, 아니 차차기 대선에 까지 그 화(禍)가 미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경제민주화는 시대의 정신일 뿐만 아니라 가공할 폭발력을 지닌 전략적 의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대통령이 되고 보니 곳간, 곧 국고가 비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국민들에게 호소하기 시작한다. 곳간을 채우기 전까지 경제민주화, 보편적 복지를 유보하자, 미래 세대에게 엄청난 부담을 떠안기면서 우리만 잘 살수 없지 않느냐 등등. 한마디로, 1990년대 초반 ‘보수는 죽었는가’를 외쳐대던 양동안 류의 방어적이고 불안증에 시달리던 보수주의로부터 위선 떨지 않는 보수, 공격적 보수주의 통치전략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민주화와 보편적 복지란 배분적 정의를 실현하여 계급, 계층 간 사회경제적 불평등 내지 불균형의 시정이 그 요체다. 그러므로 이러한 배분적 정의를 실현하려면 새로운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여 성장률을 높이든가 아니면 기존의 분배체계를 조정하여 소득이전을 실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통상적으로 전자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이 신규투자증대로 박근혜 정부는 이를 창조경제로 명명했다.
문제는 후자다. 소득이전을 통해 보편적 복지를 실현하기 위한 유력한 정책적 수단이 바로 누진적 증세라 하겠다.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민주노동당을 상징하는 정책아이콘이 바로 강력한 누진세율 적용해 소득이전을 실현해보겠다는 취지의 이른바 ‘부유세’ 도입 주장이었다. 그런데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보수세력은 증세, 그것도 누진적 증세에는 경기를 일으킨다. 왜냐하면, 증세는 전통적으로 좌파의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80년대 이후 미국의 보수세력은 감세정책으로 세 차례의 연속집권에 성공했다. 대표적으로 레이건대통령은 국가재정이 파탄일보 직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감세정책을 두 번째 임기 말까지 밀고 나갔다.
박근혜 정부의 핵심 경제정책은 크게 보아 세계적 차원의 보수주의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미 박근혜 대통령은 이명박 전 대통령과 맞붙은 2007년 한나라당 경선에서 자신의 핵심공약으로 ‘줄푸세’ 정책을 내세운 적이 있다. ‘줄푸세’가 무엇의 줄임말인가? '세금은 줄이고, 각종 규제는 풀고, 법 기강은 세운다'는 뜻이다. 이 정책구호야말로 박근혜 정부의 정책적 마인드 내지 보수적 성향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이다. 또한 ‘줄푸세’는 정치이데올로기 계보의 관점에선 분배보다 성장을 중시하고 각종 규제를 철폐하여 자본운동을 보다 자유롭게 하고 국민들의 생활권 내지 생존권 보다는 사적 소유권을 적극 옹호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대선에서 경제민주화와 보편적 복지를 주창하고 나섬으로써 상황이 복잡하게 됐다. 경제민주화 및 보편적 복지와 신자유주의는 쉽게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단순화해 볼 수 있겠다. 증세에 의존하지 않고 보편적 복지를 향한 재원마련은 어떻게 가능한가? 한마디로, 박근혜 정부를 통해 우리는 어쩌면 세계적 차원의 보수주의의 진화를 목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시장친화적 내지 공급중심의 경제정책으로 보편적 복지를 실현해 보겠다는 것이다. 역사에 있어 이러한 방식으로 나름 성과를 거둔 정치인이 내가 알기론 딱 세 명 있다. 독일의 비스마르크(Bismarck)와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 등소평이 바로 그들이다. 박근혜 정부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수단에 입각해서 보편적 복지라는, 어쩌면 과거 보수세력에 의해 정초되고 공유된 정치적 목표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 나는 박근혜 정부의 통치전략을 ‘공격적 신보수주의’로 명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책이나 박정희의 국가주도의 동원적 산업화 전략에 엄청난 희생이 따랐듯이 박근혜 정부의 공격적 신보수주의 통치전략 역시 상당한 사회적 출혈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규제는 암 덩어리이자 쳐 부셔야 할 원수라는 대통령의 고상티 고상한 말 뽄새와 임전무퇴의 각오로 공공부문 개혁을 대하는 대통령의 국무회의 석상에서의 공식발언에 비춰봤을 때, 이는 박근혜 정부가 노조를 개혁에 저항하는 공공의 적으로 돌렸던 과거 영국 대처 총리의 ‘두 국민 전략’을 가동하겠다는 의도로 읽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박근혜 정부 초기부터 종북주의 논란이 일고 급기야 내란음모니 통합진보당 해산 청구가 진행되고 있는 것 역시 일종의 ‘두 국민 전략’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다. 과거 반공주의 공세와 차이가 있다면, ‘더 많은 복지’를 위해 노조가 희생해야 하고 ‘더 많은 통일’을 위해서는 북한에 우호적인 세력이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박근혜 대통령은 최근 정부가 추진 중인 공공부문 개혁과 관련해 “공공기관 노조가 저항과 연대, 시위 등으로 개혁을 방해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라며 공기업 노조를 겨냥한 작심 발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은 2월 10일 오전 청와대에서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며 “신년 기자회견에서 경제혁신을 위해 공공부문 개혁이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며 “부채감축과 방만경영을 해결해야 하는 위기 상황에서 공공기관 노조가 연대해서 정상화 개혁에 저항하려는 움직임은 심히 우려되고 국민들께서도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공격적 언급의 배경에는 공공부문 노조가 공공기관 부채의 원인으로 정부의 적자 떠넘기기와 낙하산 인사 등으로 인한 정책실패를 거론하며 반발하자 박 대통령이 직접 공기업의 과잉복지와 노조의 반발을 정조준한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 있는 사실은 앞서 언급했듯이 ‘두 국민 전략’의 원조 격인 대처 총리의 경우, ‘두 국민 전략’이 소위 ‘영국식 복지병’을 겨냥한 규제철폐와 민영화와 요약되는 신자유주의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보편적 복지를 실현하기 위해 ‘두 국민 전략’을 구사하려 한다는 점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박근혜 정부를 신자유주의라기보다는 신보수주의로 규정하는 이유인 것이다. 한마디로, 서로 다른 전략적 목표 아래 유사한 전술을 가동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1980년대 내내 영국사회를 신자유주의 개혁의 일대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대처의 ‘두 국민 전략’은 중산층과 노동자 계급을 분리시켜 통치하는 방법이다. 대처 총리는 당시 영국사회를 침체의 늪에 빠뜨린 ‘영국병’의 원인을 ‘무능하고 일하지 않는 노동자와 연금생활자’라는 이데올로기를 내세우고 민영화 등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추진했다. 그 결과 노동자 계층의 반발에도 중산층의 지지를 바탕으로 11년간이나 총리직을 유지할 수 있었고 보수당 정권은 대처 이후에도 7년이나 더 존속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영국은 보수당 정권으로 날이 지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는 신보수주의 개혁에 과연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대처 총리와는 다르게 박근혜 대통령은 5년의 고정임기라는 시간구속이 있고, 또한 대처의 내각제 정부와는 달리 대통령제 하에서는 의회구속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는 국회선진화법으로 인해 직권상정을 통한 여당 단독으로 법안을 통과하는 일은 예전처럼 용이하지도 않다. 이는 결국 무한한 입법재량권을 향유하며, 북아일랜드 문제와 같이 사안에 따라서는 초헌법적 조치를 동원하여 신자유주의 혁명을 강행해 나갔던 대처와 달리, 한국의 대통령제는 박근혜 대통령의 의도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없는 입법적 제약을 설정하고 있다.
대신, 박근혜 정부는 야당의 일정한 ‘협조’로 신보수주의적 개혁을 실현하기 위해 드문 선택이긴 하겠지만 증세와 재벌개혁 카드를 꺼내들 가능성이 있다. 나는 이러한 전망이 민주당과 합당에 임하는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의 언급에 비춰 볼 때 실현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보지 않는다. 만일 이렇게 할 경우, 박근혜 정부의 통치전략의 대강은 ‘두 국민 전략’에서 ‘일 국민 전략’으로 옮겨가는 형국이 될 것이다.
문제는 일국민 전략과 공격적 신보수주의는 내적 원리 상 충돌할 뿐만 아니라, 현재의 박근혜 정부의 정책적 역량을 고려하건대 이러한 모순을 헤쳐 나갈 능력이 있는지 심각히 의심된다는 점이다. 세월호 사건을 전후 한 연이은 정책적 실패에 대해 지자체 선거 결과는 다시 한 번 박근혜 정부에게 기회를 준 것으로 여겨지지만 시간은 결코 박근혜 대통령의 편이 아니다. 대중과 여론, 그리고 무엇보다 대중의 인기를 먹고사는 국회의원들은 대통령의 정책적 실패를 용납하기엔 인내심이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통치전략에 입각한 주요 정책의제에 대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모든 것을 자신이 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모든 사안에 관여하려 식의 ‘만기친람형’ 리더십은 십중팔구 실패의 지름길로 여겨진다. 한마디로, 민주적 대통령제 하에서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집중할 수 있는 몇 몇 전략적 국가정책을 제외하곤 정당 및 국회와 권력을 나눠야 하고, 아니 보다 정확히 나눌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일종의 철칙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 1년을 돌아보면, 많은 언론에서 지적하듯이 전형적인 만기친람형 통치스타일에다가, 당선 직후부터 지금까지 국민들을 끊임없이 야단치는 교관 내지 훈육자적 리더십을 줄곧 시연하고 계시지 않은가? 그래서 많은 뜻있는 사람들이 이러다 국민들을 계속 꾸짖다가 임기를 마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를 제기하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닐 것으로 여겨진다.
* 이글은 '코리아컨센서스' 이슈 페이퍼로도 발행된 글입니다.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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