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다음 퀴즈 2개를 풀어보자.
1. 다음에 나열된 숫자들을 비밀은?
< 1, 2, 3, 1, 3, 6, 1, 1, 1, 1, 1, 4, 1, 1, 2, 1, 2, 1 >
2. 다음 왼쪽 두 선거 포스터와 오른쪽 두 선거 포스터의 차이는?
1번 정답은 역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대통령들의 후보 기호다. 한국의 대통령 선거 당선자 번호로 3과 6, 4는 어색하지만, 처음 3번은 이승만, 다음 3번과 6번 당선은 박정희, 4번은 전두환 대통령이다.
2번 정답은 포스터의 숫자, 즉 기호가 왼쪽은 없고 오른쪽 포스터엔 있다는 것! 우리에겐 익숙한 번호가 영국의 선거 포스터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돌발 퀴즈! 한국 정치사를 블랙 코미디로 승화시킨 허경영 후보의 기호는 몇 번이었을까? 8번이었다. 대통령 후보 기호1번 허경영, 어떤가? 살짝 미소가 지어진다면, 이미 우리는 심각한 정치적 선입견에 빠져있는 것이다.
거대 정당, 왜 정당 기호제에 집착하는가?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새정치민주연합의 기초선거 무(無)공천 방침에 대한 논란에서, 당내 반대파의 논리는 '기호 2번'이 없다면 매우 불리한 선거를 치르게 된다는 것이었다. 선거에서 여당은 통일된 1번을 달고 새정치연합은 불특정 번호를 다는 '룰의 공정성'에 대한 지적인데, 이 논리의 이면에서 오히려 번호의 혜택을 버리지 못하는 거대 양당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정당 기호제 시행 명분은 법 제정 당시부터 '유권자의 편익'이었다. 그러나 교육감 선거에선 이와 다른 이야기가 나왔다. 정당 추천과 관련 없는 교육감 선거에서 이전까지 후보들은 추첨을 통해 기호를 정했으나, 오히려 유권자들이 기호를 특정 정당과 연관해 오해했고, 결국 기호 추첨만 잘하면 당선되는 '로또 선거'로 불리기까지 했었다.
이러한 선거 결과의 왜곡을 개선하기 위해, 이번 선거에서는 '교호 순번제'를 도입했다. 투표 용지에서 기호를 삭제하고 후보자 이름의 기재 순서 또한 다르게 배치한 것이다. 이 제도로 투표한 유권자 중 불편을 호소한 유권자는 없었고, 공정성을 의심하는 시각도 없다. 오히려 보수지역에서 당선된 한 진보 성향 교육감은 교호 순번제로 인해 정책 위주의 선거를 치를 수 있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기호제가 유권자의 편익을 대변한다는 논리는 빈약해 보인다.
정당 기호제에 대한 평가는 복잡하다. '선거에서 앞 순위가 유리한가?'라는 '기호제' 자체의 문제와 '후보가 인물보다 정당으로 평가받는 것은 공정한가?'라는 '정당' 기호제의 문제가 뒤섞여 있다.
우선 기호제와 관련하여, 투표에서 기재 순서만으로도 유불리가 바뀔 수 있다. 코펠(Koppel)과 스틴(Steen)은 기호와 당선 가능성에 관한 논문(2004)에서 첫 번째로 기재된 후보자의 당선 가능성이 약 3.5% 포인트 높음을 확인했다. 이외에도 국외의 다수 정치학 논문에서 인쇄 순위 및 기호와 당선 가능성의 상관관계에 대한 논증이 한창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기호가 선거 결과에 일정 정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운 듯하다.
여기에 더해 한국과 같이 정당과 연계된 번호를 사용하는 정당 기호제를 시행한다면, 선거 결과의 왜곡이 심화되리라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정당 기호제의 문제는 결국 선거 공정성의 문제인 것이다.
정당 기호제! 선거의 필수 요소는 아니다
정당 기호제는 '늘 그랬던 것처럼' 벽보부터 구호까지 우리 선거의 일상적인 풍경이 되고 있지만, 선거 제도로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1948년 최초로 제정된 국회의원선거법 제33조는 '투표 용지에 인쇄할 후보자 성명의 순서를 추첨에 의하여 정'하도록 규정해, 기호제의 출발이 정당과 무관하게 '편의상'의 이유로 설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정치사에서 정당 기호제가 도입된 시점은 1969년으로,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이 3번째 당선되던 제7대 대통령 선거부터 적용됐다. 당시 대통령선거법 제85조3항과 국회의원선거법 제95조3항에는 '현재 국회에서 다수 의석을 가진 제1당의 인쇄 순위를 1로, 제2당의 인쇄 순위를 2로 하고, 기타 정당은 그 정당 명칭의 가·나·다순에 의하여 그 인쇄 순위를 3이하로 한다'고 규정, 지금의 정당 기호제의 시발이 되었다.
이후, 정당기호제는 전두환 대통령이 당선된 1981년 제12대 대통령선거에서 다시 추첨제를 시행함으로써 잠시 사라졌다가, 대통령직선제를 시행한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부터 부활해 현재 공직선거법 제150조 제3항으로 유지되고 있다.
외국의 경우 독일은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채택해 선거에 정당기호제를 도입하고 있다. 그러나 앞선 포스터에서 드러나듯 영국을 비롯해 프랑스 등은 번호 없는 선거를 한다. 특히 프랑스는 각 후보자들이 투표 용지를 직접 작성하고, 유권자들은 지지하는 후보의 투표 용지를 선택해 봉투에 넣는 방식으로 투표해 순서라는 것이 어디에도 없다. 캐나다 역시 번호 없이 정당명과 후보자명만이 있는 투표 용지에 투표하는 방식이다. 미국은 상하원 선거 투표 방식이 주마다 달라, 번호가 없거나 있더라도 정당에 따른 전국적 기호는 아니다. 일본은 투표 용지에 지지 후보의 성명이나 정당 등의 명칭을 유권자가 직접 기재하는 것이 원칙이다. 예외적으로 조례를 따로 규정한 지방선거에서 기호 식 투표를 하지만 이 역시 추첨에 의한 순서이다.
정당 기호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소수 정당을 중심으로 정당 기호제에 대한 헌법소원도 있었다. 1997년 이후 여섯 번의 헌법소원이 있었으나, 모두 합헌 결정이었다. 가장 최근인 2003년 헌법소원심판에서 헌법재판소는 "정당제도의 존재 의의 등에 비춰 목적이 정당하고…(중략)…합리적 기준의 의하고 있어 평등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라며 재판관 전원 일치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미국에서 일부 주가 양대 정당 소속이나 현역 의원인 후보를 앞쪽에 배치했다가 법원으로부터 위헌 결정을 받은 경우와는 대조적이다.
정치학계 일각에선 정당 기호제의 도입과 관련해 1962년 헌법 제36조3항의 '국회의원 후보가 되려는 자는 소속정당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와 같은 맥락에서, 국민들의 다양한 정치 활동을 위축시키고 특정 정당만을 보호하려는 의도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정치권 또한 정당 기호제 부활을 논의한 1984년 기사에는 "정당 기호제로 인해 무소속은 찬밥 먹을 수도 있다", "정당 기호제는 갈라먹기 식 아니냐"며 "선거사무 편익을 빙자해 정치질서를 고착시키려는 구시대적 발상"이라는 회의적인 시각이 드러난다. 이후, 1999년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정치개혁특위에 의해 폐지가 논의되기도 했고, 최근에는 안철수, 심상정 등 일부 의원들과 노동당, 녹색당 등이 폐지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작은 왜곡' 쯤은 지나쳐도 되는 사회인가?
선거는 국민 주권과 기본권의 표출이다. 공정한 선거 즉, 유권자의 의사가 왜곡없이 행사되고 후보자는 모든 조건이 공정한 상태에서 임하는 선거를 쟁취하기 위해 오랫동안 투쟁했고 많은 사람이 희생됐다. 그런데 우리 선거에는 정당 기호제라는 왜곡이 존재한다. 어떤 이들은 이것은 아주 작은 왜곡이라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제 묻고 싶다. 우리 한국은 '작은 왜곡' 쯤은 지나쳐도 되는 사회인가? 그것이 아주 쉽게 바로잡을 수 있는 왜곡인데도 말이다.
'이상한 나라의 선거 기자단' 지난 기사 보기1편 : 선관위는 정말 정치적 중립일까?4편 : 미혼 후보자는 선거운동 절반만 하라?5편 : 속옷만 입을 뻔한 후보들, 사연은?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