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10년 7월에 문을 연 '프레시안 books'가 이번 5월 30일, 191호를 끝으로 잠시 문을 닫습니다. 지난 4년간과 같은 형태의 주말 판 업데이트는 중단되나, 서평과 책 관련 기사는 <프레시안> 본지에서 부정기적으로나마 다룰 예정입니다. 아울러 시기를 약속드릴 수 없지만 언젠가 '프레시안 books'를 재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실린 글을 편하게 검색하고 볼 수 있는 아카이브를 여름 내로 구축하도록 하겠습니다.그동안 '프레시안 books'를 사랑해 주신 독자 여러분, 참여해 주신 필자 여러분, 지켜봐주시고 도와주신 출판계 관련자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프레시안 books'가 언젠가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에 조합원으로 함께해 주세요! -프레시안 books 편집부 올림
한국어에서 '공부'는 긍정적인 단어다. 다들 공부라면 치를 떠는데 무슨 소리냐고 할 수 있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우리가 지긋지긋해 하는 것은 대학에 들어갈 자격을 얻기 위한 그 '공부'일 뿐이다. 한국인들은 마음도 공부하고 세상도 공부하고 사랑도 공부한다.
심지어 <공부하는 삶>(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 지음, 이재만 옮김, 유유 펴냄)이라는 책이 인문 분야에서 적잖은 판매고를 올리기도 했고, <공부하다 죽어라>(정찬주 지음, 유동영 사진, 열림원 펴냄)라는 제목의 불교 화두집도 출간되었다. 우리 모두가 공부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싫어하거나 입에 담고 싶어하지도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 서평에서 다루게 될 <공부 논쟁>(김대식·김두식 지음, 창비 펴냄)의 제목을 보며 든 생각이었다. '공부'는 책 제목으로 올릴 때 제법 먹히는 단어로구나 싶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책은 제목과 비슷한 범주에 있지만 동일한 것으로 평가하기는 어려운 주제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두 형제 저자 가운데 특히 '공격수' 역할을 맡고 있는 김대식 교수는 내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평소에 가슴에 쌓아두고 있던, 혹은 동생과의 대화에서만 꺼내던 격정적인 토로가 다소 산만하게 오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화록은 잘 편집되어 있다. 그 덕에 독자로서는 김대식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도저히 잘못 알아들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 명료한 메시지는 저자들의 의도와는 다소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것 같다.
2.
책이 시작되자마자 김대식은 자신이 가장 중요시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이야기하며, 동시에 (적어도 그가 생각하는) 어떤 금기를 건드린다.
차별금지법이나 학생인권조례 만들어야죠. 그런데 왜 박근혜를 지지하느냐? 저한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좌파냐 우파냐, 민주당이냐 새누리당이냐가 아닙니다. 내가 정치할 사람도 아닌데 왜 그걸 신경 써야 해요? 저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저의 독립적인 사고를 지키느냐입니다. 아무리 옳은 소리를 해도 그게 자기 머리에서 나온 게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34쪽)
동생 김두식은 형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형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치적 어젠다가 열개가 있다고 했을 때 아마 일곱개쯤은 민주당이나 진보정당들과 똑같을"(35쪽) 거라며, 그런데도 왜 박근혜를 지지하는지 그 이유를 다시 한 번 묻는다. 그에 대한 김대식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민주당에 뭘 기대해요? 저는 오히려 동생이 그런 정당에 일말의 희망을 품는 게 이상해 보입니다. 그게 더 놀라워요. 민주당은 그냥 기득권 엘리트 집단일 뿐이에요. 새누리당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는 강남좌파고 다른 하나는 강남우파일 뿐이에요.(같은 곳)
이런 알찬 대화가 담겨있는 1장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형제 격돌, 엘리트주의에 칼을 대다". 그러므로 독자 여러분도 이 시점에서, 설령 <공부 논쟁>을 읽지 않았더라도, 2012년 대선 이후의 현실 속에서 왜 이렇게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며 한 권의 책을 시작하는지 짐작하실 수 있을 것이다.
대화를 나누는 김대식과, 어쩌면 자기 형의 이런 생각을 굳이 이렇게까지 책으로 펴낸 김두식은, 진보진영 혹은 '범 야권'의 엘리트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만 잘났다고, 혹은 자신과 비슷한 학벌을 가진 사람들의 말에만 귀 기울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엘리트주의 앞에서, 어린 시절에는 '악동'이었지만 뒤늦게 공부 머리가 트인 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교수가 된 김대식은, 고전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침을 뱉고 있다. '나는 박근혜를 지지한다, 그래서 뭐?'라는 침을.
3.
이렇게 놀고 또 놀다가 그것도 지쳐서, "외로움, 악동의 피로감. '할 만큼 했다. 싸움도 할 만큼 했고 터지는 것도 해봤고"(94쪽) 싶은 마음에 중학교에 가면서 공부를 시작했고, 그러다보니 고등학교에서는 전교 1등이 되었고, "그 당시에는 아주 공부를 잘하면 물리를 한다는 분위기도 있었고"(98쪽) 해서 김대식은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진학했다(이 책의 기획 자체에 대해 '재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는 독자들은 대체로 이런 대목에서 '버튼'이 눌리는 것 같다).
그런데 그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대한민국은 어떤 결정적인 변화의 순간에 도달한다. 하나는 거대한 비극이고, 하나는 잘 따지고 보면 결국에는 희극이었다.
1980년이었다. 5월이었고, 광주의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민주화 운동을 벌였다. 정통성 없이 집권한 신군부가 오직 광주만을 탄압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광주의 봉기와 저항과 비극은 그 자체로 비교 불가능한 민주화의 씨앗이 되었지만, 신군부의 치안 병력들은 서울에서도 '반항'할 것처럼 보이는 이들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하고 있었다. 김대식의 증언에 따르면 그렇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게 데모하는 게 아니라 그냥 데이트하던 남녀 대학생 중 남자애를 공수부대원들이 개작살을 냈"(99쪽)던 일화를 그는 생생히 떠올린다.
그 해 10월에는 예년처럼 본고사가 치러질 예정이었다. 당시 정일학원은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만 모아 따로 본고사 대비 시험을 치게 하고, 그 성적이 우수하면 장학금을 줬다고 한다. 김대식은 그 시험을 보고 돌아오던 길에, 데이트하던 대학생 중 남학생이 개 패듯 맞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걸 보고 나서도 고3이 뭘 어쩔 도리는 없었"던 관계로, 그는 그냥 수험 공부를 계속했는데, 그해 8월 갑자기 "도서관에는 애들이 하나도 없고 운동장에 새까맣게 나가서 축구하고 있"(99쪽)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전두환 정권이 난데없이, 시험을 두 달 앞두고, 본고사를 없애버린 것이다.
이렇게 급작스러운 입시 정책 변경이 있었던 이유에 대해 딱 부러지는 해설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정통성이 부족한 정권이었기 때문에 국민들의 인기를 얻기 위한 방편 중 하나였다는 주장이 가장 그럴듯한 것 같다. 벼락치기로 공부하는 학생처럼, 벼락치기로 입시 제도를 바꿨다. 자신의 인생사를 되짚으면서도 어지간해서는 호들갑 떨지 않는 '남자다운' 김대식마저도, 고등학교 3학년의 신분으로 겪었던 그 변화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그때의 충격은 엄청났어요. 고3 중간에 입시제도가 완전히 바뀐 거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얘기죠. 80년의 고3들에게는 5월의 쇼크보다 8월의 쇼크가 더 컸어요.(99쪽, 강조는 인용자)
4.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읽은 <공부 논쟁>의 내용을 되짚어보자. 뭘 붙들었다 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으로 전교 1등을 넘어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하고 유학도 다녀온 후 31세에 교수가 된 김대식의 인생사 등을 빼고 본다면, 1장부터 3장까지의 이야기는 대략 이런 것이다.
자기 머리로 생각하지 않는, 남들 의견에 따라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대단히 올바르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그들'의 엘리트주의를 김대식은 비판한다. 김두식도 그 내용에는 동의하지만, 그게 꼭 박근혜를 지지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어야 하는지, 꼭 그래야만 '내 머리로 생각하고 내린 판단'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입장이 다른 듯하다.
엘리트주의를 비판하는 인사이더가 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그 엘리트 집단에서 얼마나 확고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지를 과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김대식의 엘리트주의 비판은 그런 식으로 가볍게 넘길만한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적혀 있는 내용만으로는 그 이상의 발전적 논의가 담겨있지 않지만, 뒤이어 등장하는 자신의 고3 시절 이야기 때문에, 이 교수 형제의 대화 뿐 아니라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 자체도 상당히 다른 맥락에 빨려들게 되는 것이다.
김대식이 같잖게 여기고, 김두식이 '그래도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형제가 공히 '엘리트주의에 빠진 집단'이라 여기는 그들은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그렇다. 그들은 이른바 '386 세대'다. 본고사가 일제의 식민 통치처럼 갑자기 사라져버린 시대에 대학에 들어간 젊은이들, 두 달 앞으로 다가온 시험이 폐지되어 운동장에 새까맣게 몰려들어 축구를 하던 청년들, 그렇게 이전 세대에 비해 실컷 놀면서 대학에 들어갔더니, 80년 광주의 비극을 목 놓아 우는 선배들을 만나야 했던 바로 그 세대 말이다.
그러니까 80년의 고3에게는 5월의 광주보다 8월의 충격이 더 컸다는 김대식의 말은, 반쯤 옳고 반쯤 그르다. 적어도 '운동권'의 길로 빠지지 않은 대다수의 학생들에게는 그래도 본고사 폐지가 인생에 더 큰 영향을 미친, 더 오래도록 기억되는 사건일 것이다. 하지만 386 세대의 탄생에 있어서 두 가지 사건은 따로 떼어놓고 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전두환이 과외를 금지했으므로 고만고만한 집안 출신의 학생들은 과외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전두환이 과외를 금지했으므로 대학생 '비밀' 과외의 몸값은 더 올라갔다. 그 전두환은 80년 5월 광주의 비극을 딛고 권좌에 오른 사람이었으며, 80년 5월 광주의 비극을 무마하기 위해 그해 8월 고3 학생마저 운동장에서 축구공을 걷어차게 만들었다. 이렇듯 전두환이 만든 제도를 통해 비교적 마음 편하게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은, 전두환이 만든 참극을 목격하며 의식화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 그들 중 서울과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이들은, 이미 1974년부터 시행된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 덕분에, 고등학교 입시라는 하나의 관문을 또 쉽게 통과한 다음이었다.
5.
<공부 논쟁>의 '셀링 포인트'는 사실 이게 아니다. 물리학과 교수 김대식과 법학과 교수 김두식이 마주 앉아, 각자가 속한 학계의 지지부진한 면모를 곱씹고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적어도 표면상에 드러나 있는 이 책의 본론이다. 그렇게 놓고 볼 때에야 '공부 논쟁'이라는 제목도 말이 될 뿐더러 그 논의가 사회적인 유용성을 갖게 될 것이다. 책에 나온 표현을 빌자면, '장원급제 DNA'가 아닌 '장인 DNA'를 갖춘 학생들이 어떻게 더 열심히 공부하게 할 것인가, 그런 내용을 놓고 형제가 난상토론을 벌이는 것이 본래 이 책이 지향하는 문제의식일 것이다.
그러므로 4장, '대한민국이 노벨상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김두식의 문제 제기로 시작한다. 해외유학파가 학계를 장악하고 있고, 다수의 국내파들이 자신의 생각을 펼쳐내는 이론적·제도적 체계, 즉 '자기 집'을 갖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김두식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제가 다닌 법대는 교수님들 대부분이 독일 유학을 마친 분들이었어요. 주로 일본 책들을 베낀 앞선 세대 법학자들과 달리, 독일 유학파들은 유럽 법학을 직수입하는 걸 자랑으로 여겼죠. 학자들끼리의 논쟁도 일본이나 독일에서 벌어진 논쟁의 판박이였고요. 일본이나 독일의 A라는 학자가 있으면 한국의 A'라는 학자가 그걸 그대로 수입해요. 그러면 한국의 B'라는 학자는 독일에서 A의 적수인 B라는 학자 이론을 수입해서 A'를 비판하죠. 독일에서 벌어지는 A와 B의 논쟁하고 100퍼센트 똑같은 논쟁이 한국의 A'와 B'라는 학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거예요.(121쪽)
김두식이 다닌 법대 말고도 다른 모든 '인문계'의 상황이 매한가지일 것이다. A와 B라는 학자들 사이의 논쟁을 모방하다 못해, 이제는 A라는 학자의 심오한 사고를 A'라는 연구자 혹은 번역가가 과연 '올바로' 전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논쟁을 벌이고, 각자의 작은 마음에 큰 상처를 받으며 등 돌리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 말이다.
이에 대해 김두식은 특별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본인이 토론의 장을 열어놓고 김대식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역할이기도 하거니와, 역사적으로 축적된 문화적 요인이 연구에 큰 영향을 줄 뿐더러 연구 대상 및 주체를 규정하기까지 하는 인문계에서는 사실 해법을 찾기 매우 어려운 상황이기도 하니 말이다.
반면 김대식의 대답은 단호하고도 흥미롭다. 그의 말을 직접 인용해보자.
일본에서 노벨상이 많이 나온 것은 인브리딩(inbreeding), 즉 동종교배 덕분입니다. 학문의 세계에서 다른 종이 생기려면 다윈주의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섬에서 고립된 상태에서 인브리딩이 일어날 필요가 있어요. 남과 다른 독특한 애들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130쪽)
자신들만의 독립된 연구 체계를 만들고 운영하는 일본식 방식이 과연 한국의 모델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은 잠시 접어두도록 하자. 고립된 상태에서 인브리딩을 하여 "남과 다른 독특한 애들"을 만들 수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학문의 갈라파고스화를 촉진한다는 비판 역시 가능한데, 그에 대한 평가와 토론도 훗날의 기회를 노려보도록 하자.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인브리딩'을 옹호하는 과정에서, '엘리트주의'에 대해 질타하는 태도를 보였던 김대식이, 어떤 '엘리트주의'를 말하고 있다는 그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6.
'인브리딩'의 반대편에는 '유학파'가 있다. 박근혜를 지지하거나 지지하지 않는 문제로 서로 대립하는 이 교수 형제는, '유학파'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던진다는 점에서 일종의 동맹 관계를 형성한다. 성적 좋은 학생을 받아서 자신이 교육시키고 박사 학위를 주는 대신, '본국'에 있는 자신의 지도 교수에게 보내 학위를 받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의 학문 연구 체제를 '본국', 즉 미국에 종속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유학파의 문제를 지적할 때, 김대식과 김두식은 한마음으로 목청을 높인다.
여기서 형제, 특히 김대식의 논리가 기존의 논의와 묘하게 맞물려 들어간다. 유학파는 결국 고등학교에서 공부하여 대학에 들어올 때 성적이 높은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으므로, "아이러니하지만 경기고 수석 하고 서울대 수석 한 분들이 물리학과로 몰린 게 물리학을 망쳤다고도 볼 수 있다"(223쪽)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자신이 선택된 소수라고, 시험이라는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여 어떤 '신분'을 획득했다고 믿어마지 않는 자들이, 자기들끼리 외국 대학의 간판을 걸어놓은 채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연구 따위는 등한시하고 행정 놀음이나 하고 있다며 김대식은 열변을 토한다.
학문 연구의 첨단에서 활약하고 있는 당사자의 생생한 증언이므로, 김대식의 이 판단에 대해 외부인이 이러쿵저러쿵 논하는 것은 그리 적절한 일이 못 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의 표현에 따르자면 '무당'처럼 직관으로 건너뛰어 이야기하는 이 대목에 들어서면, 우리는 좀 더 눈에 힘을 주고 이 텍스트를 읽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 책은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뺑뺑이 세대의 마지막 발악이군! 그런데 묘하게도 특목고 출신들이 예전 경기고 출신들과 잘 통해요. 스피릿이 같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다시 소수 엘리트의 왜곡된 독점시대가 열린 거죠. 우리 세대는 그 둘 사이에 끼어서 조용히 사라지게 생겼고.(235쪽)
평준화 세대는 이미 경기고 세대의 엘리트주의에 무릎을 꿇었어요. 이미 졌지만 그래도 저는 평준화를 향한 싸움을 다시 시작하자고 제안하는 거예요. 국가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평준화로 돌아가야 합니다. (238쪽)
7.
김두식과 함께 김대식이 그려나가는 '큰 그림'을 이제 우리는 또렷하게 잡아볼 수 있다. 그는 자신과 동생이 속한 세대, '뺑뺑이'로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본고사를 두 달 앞둔 시점에 시험이 폐지되어버리는 경험까지 한 그 세대를, 남들처럼 '386 세대'라 부르지 않는다. 대신 자신과 동년배들을 '뺑뺑이 세대'로 지칭하며, 그 대립쌍으로 '경기고 세대'와 '특목고 세대'를 묶어서 던져놓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김대식이라는 한 물리학자가 겪는 현장의 모습은 정말 그가 묘사하고 있는 바와 정확히 맞아떨어질 수도 있다. 그가 독립적으로, 자신이 보고 듣고 겪은 것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고 내린 결론에 대해 '린치'를 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나는 이 지점에서 묻고 싶어지는 것이다. '뺑뺑이 세대'의 '평등함'은 대체 무엇이 과연 얼마나 평등한 것인가?
저자들은 힘주어 자신들이 엘리트주의를 비판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말미에 이르면 이 책의 주제는 엘리트주의가 아니라 차라리 엘리트 그 자체다. 다만 그 엘리트가 형성된 방식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떤 세대의 엘리트들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엘리트임을 확인받고 내부 결속을 키워나간 반면, 다른 세대의 엘리트들은 대학에 와서야 한 덩어리가 될 수 있었다. 이것은 정치의 가장 원초적인 면모, 즉 숫자 싸움이다. 김대식 스스로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고등학교 평준화가 계속 이어졌다면 우리 세대 안에도 네트워크는 생겼을 겁니다. 워낙 평준화 유지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그게 안 된 거예요. 그래서 우리 세대가 비평준화 명문고들을 이겨내지 못한 거고요. 재미있는 게 노무현 정부 내내 경기고 출신들에게 제가 가장 자주 들었던 이야기가 "어쩌면 청와대에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냐?"였어요. 그런데 청와대만 그랬지 관료사회는 여전히 경기고로 상징되는 비평준화 명문고가 잡고 있었어요. 청와대로 들어간 83학번 몇 명이 열심히 뛴다고 어쩔 도리는 없었을 거예요. 그 거대한 관료사회를 어찌할 수 없으니 진보적인 정책이 나올 리가 없죠. 그냥 우리 세대가 진 거예요. 그래서 다시 옛날 사람들이 득세를 하게 된 거죠. 패배를 인정해야죠.(250쪽)
물론 나 또한 김대식의 대안에 대해 각론적인 차원에서는 많은 부분 동의한다. 가령 특수목적을 지닌 고등학교가 존속된다 해도, 그것은 마치 <엑스맨> 시리즈의 자비에르 교수의 영재 학교처럼 정말 특수한 학생들만을 모아 그들만을 위한 커리큘럼을 운영하는 것이어야지, 지금처럼 '학벌'을 만들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대학교 입학시험은 짧고 간단하고 수치로 계량화하기 편한 것일수록 좋다. 지금의 복잡한 대입 제도는 결국 경제적으로, 지적으로 여유가 있는 부모의 자식들에게만 유리할 뿐이며, 궁극적으로 계급 고착화에 기여한다.
그런데 이 모든 오류와 과실이 그저 '경기고 세대', 그리고 그들과 "스피릿이 같"은 '특목고 세대'로 인해 벌어진 것인가? 김대식은 그들을 '특목고 세대'라 부르고 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스스로를 '이해찬 세대'라고 부른다. 이해찬이 교육부 장관을 맡았던 국민의 정부 시절부터 시작된, '한 가지만 잘 하면 대학에 갈 수 있다'며 '주입식 교육'을 타파하고, 수능 성적으로 학생들을 줄 세우는 일이 없어야 한다며, 대학으로 향하는 온갖 뒷구멍을 열어젖힌 것은 과연 어떤 세대의 엘리트들인가? 조기유학 붐은 어떤 세대의 자녀들부터 본격화되었나? 이런 저런 '대안학교'를 만들어가며 자신들의 자녀를 남들과 다르게 길러내고 있는 것은, 결국 뺑뺑이 세대들 아닌가?
8.
김두식이 다양한 경로로 알차게 소개해준 것처럼, 김대식의 발언은 거침없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결국 시대의 산물이기에, 김대식의 사고방식은 스스로 평가하는 것과 달리, 그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평균적 궤적으로부터 그리 많이 벗어나 있지 않다. 동생 김두식을 '온정적 뺑뺑이 세대'라 한다면, 형 김대식은 '자연주의적 뺑뺑이 세대'라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나의 제자들, 나의 학문적 동료들이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김대식은 더 강력하고 효율적인 경쟁 체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김두식은 패자에게도 생존의 여지와 부활의 기회를 주는 시스템을 확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보면 두 사람의 입장 차이가 매우 큰 것 같다. 이미 기득권을 차지한 놈들끼리 끼리끼리 해먹는 풍토를 타파해야 한다는 발언 등에서 김대식은 '엘리트주의 비판자'다.
문제는 형제가 자신들이 속한 세대를 그 '엘리트주의'의 희생자 내지는 패배자로 포지셔닝할 때 발생한다. 명문고가 사라졌지만 명문대는 엄연히 존속하고 있었던 시절이다. 경기고-서울대만 엘리트가 아니라, 아무튼 서울대를 나오면 엘리트인 것이다. 김대식의 시대까지 그 사실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국사 교과서에서 한반도에 침입하는 국가들의 민족주의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그와 맞서 싸운 조선 민중들의 '저항적 민족주의'를 칭송하듯이, 김대식이 말하고 김두식이 동의하는 대한민국 엘리트들의 세대 변화 속에서, '뺑뺑이 세대'는 그들 또한 엘리트임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민중에 가까워진다. 스스로를 민중의 대변자로, 혹은 민중 그 자체로 여기는 것 또한, 어떤 형태의 엘리트주의가 갖는 중요한 특성이다.
9.
엘리트주의의 폐단이나 기원 등에 대한 그 모든 것들은, 사실 잘못된 논쟁이다. 엘리트주의 그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떠한 종류의, 특히 지적 작업을 수행함에 있어서, 그것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이들과 변별 가능하며, 변별해야만 한다. 뺑뺑이 세대는 자신들이 평범한 고등학생이라고 생각했지만 대학에 들어가는 순간 역사와 민중을 견인하는, 광주의 아픔을 어깨에 짊어진, 대학생이 되었다. 그들의 결집력과 집단행동이 한국 사회의 민주화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문제는 어떻게 엘리트 집단을 구성하고, 부패하지 않도록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며, 이 책에서 말하는 바 '공부'하게 할 것인가이다. 그에 대해서는 여러 해법이 있을 수 있다. 김대식과 김두식이 제시하는 대안에 대해 나도 적지 않은 부분 동의한다. 그런데 그 해법을 못 찾은 것이, 혹은 기껏 찾아놓은 답을 실행하지 못한 것이, 과연 '공부'로 나뉜 어떤 엘리트 그룹과 다른 엘리트 그룹의 싸움의 결과라면, 그래서 전자에 대해 후자가 전면적인 승리를 거두었어야만 한다고 말한다면, 그에 대해 동의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 된다.
요컨대 이 세상이 이렇게 된 데에는, '경기고 세대'만큼이나 '뺑뺑이 세대'의 책임도 크다는 것이다. 아니, 교육 정책만을 중심에 놓고 보자면, 오히려 노무현이라는 카리스마적 정치인을 타고 올라간 후, '경기고 세대'에 유리한 방향으로 교육 정책을 몰고 간 것은 '뺑뺑이 세대'들 스스로가 아니던가.
전면적인 학부제 시행 이후 대학의 학내 조직은 무너졌다. 자연주의적 뺑뺑이 세대인 김대식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학부제로 인해 단과대 별 결속력이 약해지고 나니, 이른바 명문대학들 속에서는 점점 더 특목고의 목소리가 커졌다. 학과는 바뀌어도 고등학교 졸업장은 불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씩 따지고 들자면 한도 끝도 없다.
어떻게 엘리트 그룹을 형성할 것인가, 아니 생산할 것인가. 이것은 매우 중요하면서도, 오늘날과 같은 대중 사회에서 공개적으로 논의하기 어려운 주제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런 생각을 해야 하고, 어떻게든 잘 포장하여 제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절대적 당위를 지니는 가치인 '공부'를 중심에 두는 것은, 그런 면에서 훌륭한 전략일 것이다.
하지만 <공부 논쟁>은 막상 그 내용에서 다소 실망스럽다. '우리 세대'의 패배를 인정하고 곱씹자는 이야기를 이렇게까지 내놓고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뺑뺑이로 고등학교에 갔건, 본고사로 대학에 갔건, 이 책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은 엘리트다. <공부 논쟁>은 그 주제를 너무도 적나라하게 은폐하고 있다. 같은 문제의식을 은밀하게 드러냄으로써 독서 대중의 사유에 기여하는, 그런 책도 훗날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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