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에 문을 연 '프레시안 books'가 이번 5월 30일, 191호를 끝으로 잠시 문을 닫습니다. 지난 4년간과 같은 형태의 주말 판 업데이트는 중단되나, 서평과 책 관련 기사는 <프레시안> 본지에서 부정기적으로나마 다룰 예정입니다. 아울러 시기를 약속드릴 수 없지만 언젠가 '프레시안 books'를 재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실린 글을 편하게 검색하고 볼 수 있는 아카이브를 여름 내로 구축하도록 하겠습니다.그동안 '프레시안 books'를 사랑해 주신 독자 여러분, 참여해 주신 필자 여러분, 지켜봐주시고 도와주신 출판계 관련자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프레시안 books'가 언젠가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에 조합원으로 함께해 주세요! -프레시안 books 편집부 올림
1.
"처분에 맡겨야죠 뭐…그 사람들, 이제나 저네나, 떨구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벌을 받는 거니까…넘겨 드리기 전에는 계산을 많이 했죠…그 쪽과 협상을 할까도 싶었구요…근데 그랬다간 평생 그 집 개로 살 거 같았어요…" (<밀회> 16화)
얼마 전 종영한 JTBC 드라마 <밀회>에서 여주인공 오혜원이 담당 검사에게 한 말이다. "그 집 개로 살 것 같았다"는 말, 이 한 마디에 "우아한 노비" 신세인 그녀의 삶 전체가 담겨있다. 마지막 딜을 제안하는 이사장 성숙에게 혜원은 이렇게 대답한다. "제가 바라는 건 존중입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걸 다 가진 여자'인 혜원을, 그 모든 걸 다 내려놓는 극단적인 결단으로 이끈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운명적인' 사랑일까? 아니, 그보다는 오히려 그 사랑을 통해 가능해진 어떤 것, 즉 자기 삶에 대한 거리두기와 성찰의 경험일 것이다. 이선재와의 만남 이후에 비로소 혜원은 분명하게 깨달았다. 재벌가의 능란한 해결사인 자신이 조선족 식당 아주머니보다 못한 자존감을 지녔으며, (자기 자신을 포함해) 지금껏 그 누구로부터도 진심 어린 '존중'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깨끗한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려는 선재의 정성스런 걸레질이 그녀 "인생의 명장면"이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인생을 새롭게 포맷하려는 그녀의 최종 결단에 시청자가 공감하려면, 기존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운명적인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 그에 더해 그 이전, 사랑 이전의 삶에 대한 그녀의 평가에 동의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은 어떤 삶인가? 단지 허위와 위선의 삶이 아니다. "그 집 개로 사는" 삶, 성공과 출세의 대가로 언제 끝날지 모를 항시적 모멸감을 견뎌야만 하는 삶, 우아한 노비의 삶이다.
2.
'모욕 권하는 사회' 한국에서 그 스펙트럼은 그야말로 전 방위적이다. 사회의 전 영역에 촘촘하게 걸쳐 있는 '갑을관계'에서 시작해, 강도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감정노동'의 실태, 왕따와 악플로 대변되는 모욕의 수사학, 인격 모독에 육박하는 '압박면접'과, 그에 대비하기 위한 '모욕스터디'까지…. 과연 이 모멸감의 총체적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책머리에서 저자가 이런 고백을 하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 책을 쓰면서 얻은 큰 수확은, 그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무심하게 모멸감을 주었는지를 깨달았다는 점이다. 그 얼굴들이 자꾸만 떠올라 한동안 집필을 중지한 적도 있었다. 기억나는 일만 해도 숱한데, 잊어버렸거나 애당초 의식조차 하지 못한 일들은 엄청날 것이다. 이 저술은 내 마음과 행동의 습성을 깊이 되돌아보는 참회의 과정이기도 했다." (10~11쪽)
아닌 게 아니라 법정 최종진술에서 오혜원도 이렇게 말을 했다.
"저를 학대하고, 불쌍하게 만든 건 바로 저 자신이었습니다…뿐만 아니라 제가 기억할 수도 없을 만큼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와 절망을 줬겠죠…그래서, 저는, 재판 결과에 승복하려고 합니다. 어떤 판결을 내려주시건, 항소하지 않겠습니다."(<밀회> 16화)
물론 <모멸감>의 저자가 오혜원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제안하는 것들은 보다 온건하고 구체적이다. 예를 들어, 우리 마음 습관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모욕감수성"(217쪽)의 개념, 아는 것(知)을 넘어 상대방의 입장에서 '느끼는' 단계까지 나아가는 "역지감지(易地感之)"(220쪽)의 태도,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환대의 시공간"(250쪽), 그리고 자기감정의 주인이 될 수 있게 하는 "중용"(289쪽)의 힘 등이다.
저자가 풀어 놓는 모멸감의 사례들은 과연 풍부하고 다채롭다. 당대 삶의 여러 영역에서 벌어지는 사건들뿐 아니라 동서양의 고전 소설과 시, 수용소 문학, 철학서와 사상서까지 두루 아우른다. 저자의 기본 입장은 감정이란 "개개인의 내밀한 영역에 관련된 것이면서, 집합적으로 구성되는 정교한 프로그램"(5쪽)이기 때문에 타고난 천성이나 성장 배경뿐 아니라 "시대를 지배하는 정서적 문법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일종의 구성물로서의 감정은 선천적인 만큼이나 "역사와 문화의 산물"이기도 하다. '한국사회와 모멸의 구조'를 다루는 2장이 한국사회의 정서적 지형을 귀천의식과 신분적 우열 관념, 급속한 산업화와 소비주의 등 한국의 고유한 '역사적' 배경을 중심으로 살피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모멸감의 실상을 조목조목 확인하고, 그것의 역사적 배경을 파악하며, 나아가 나 역시 그것의 일부분임을 자각하는 일은, 물론 필요하고 의미 있는 작업이다. 어느 샌가 우리의 마음자락에 깊숙하게 자리 잡은 모멸이라는 감정에 관한 사회학적 소묘를 기대했던 독자라면 이 정도에서 만족스럽게 책장을 덮을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저자의 고백에 동참하여 모멸감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인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반성으로 이어질 수도 있으리라.
3.
하지만 모든 독자가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반성' 이전에 보다 철저한 '비판'을 기대하는 이들이 반드시 있다. 이런 사람들은 대상의 심층을 속속들이 파고드는 비판적 분석과 성찰이 동반되지 않으면 여간해서 잘 반성이 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백컨대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다). 여기서 비판적 분석과 성찰이란 연구 대상을 개념화하기 위한 명료한 '언어'를 제공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그렇다면 <모멸감>은 모멸이라는 감정에 대한 명료한 개념화에 성공하고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이 물음에 선뜻 긍정의 답을 내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 가령, 책의 3장에서 저자는 모멸의 존재 방식을 총 일곱 개의 범주(비하, 차별, 조롱, 무시, 침해, 동정, 오해)로 나누어 살피고 있는데, 구분의 자의성은 그렇다 치고 이 유형화 자체가 나열 이상의 어떤 의미를 갖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모멸이라는 개념에 접근함에 있어 저자의 출발점은 '수치심'의 두 갈래를 구분하는 것이다(1장, '수치심의 두 얼굴').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이른바 '인간적인 것'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는 전제 하에 "순기능적이고 건설적인 수치심"과 "역기능적이고 파괴적인 수치심"이 구별되는데(55쪽), 책의 주제인 모욕 혹은 모멸은 당연히 후자에 속한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전자가 "사회가 원만하게 유지되기 위해서 구성원들이 반드시 지녀야 할" 것, "인간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데 필수불가결한 감정"이라면 후자는 "존재를 송두리째 부정하면서 자존감을 뭉개버리는" 감정이다. 그런데 나는 "대단히 까다로운" 이 감정이 이렇듯 순기능과 역기능으로 편리하게 구별될 수 있는지도 의심스럽고 그것의 순기능이 "사회가 원만하게 유지되기 위한 것"이라는 말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예컨대, 책에서도 인용되고 있는 프리모 레비의 저 유명한 증언을 보자. 레비에 따르면, 인간을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인 유대인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최악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몸을 씻은 사람들이다. 인간임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환경에 굴하지 않고 몸을 씻는다는 것은 내가 동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사실을 선언하는 의식과도 같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가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때문이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이것이 인간인가>(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돌베개 펴냄), 57~58쪽)
여기서 인간다움의 마지막 보루를 지켜내려는 처절한 의지는 "사회가 원만하게 유지되기 위한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것은 극단적인 모욕과 굴욕의 상황에서 오히려 뚜렷하게 드러나는 인간성의 어떤 본질을 가리키고 있다. 인간을 인간 이하로 떨어뜨리는 모욕의 최대치, 그 한계 상황에서 인간적인 것의 정수가 오롯이 드러난다.
사실 모욕과 인간성의 특별한 관계는 '인간 속의 인간'을 탐구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평생의 테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저자가 2장에서 인용하고 있는 중편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이 주제의 교과서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모든 사람에게 모욕당하고, 모든 사람에게 치욕을 당하는 한 마리 파리"(60쪽)인 주인공은 대체 어떤 인간인가? 한마디로 그는 모욕을 통해 깨우친 인간이다.
자신을 동정한 창녀 리자를 모욕한 후 지하생활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녀가 영원히 모욕을 느끼며 떠나갔다면 그것이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모욕이란 건, 이를테면 일종의 정화작용이니까. 모욕이란 무엇보다도 신랄하고 통렬한 의식이니까! (…) 아무리 추악한 오욕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이 모욕은 (…) 증오의 힘으로 그녀를 높은 데로 이끌고 정화할 것이다. (…) 그렇다! 한 가지만 더 말해두겠는데, 그 당시 나는 그러한 고뇌 때문에 거의 앓아누울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욕과 증오의 이점에 관한 자신의 정의에 오랫동안 만족을 느꼈던 것이다." (<지하생활자의 수기>(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동현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 194쪽)
모욕은 과연 "정서적인 원자폭탄"이기만 한 것일까? 그것은 "수치심을 일으키는 최악의 방아쇠"가 되어 다만 "폭력"의 악순환을 불러올 뿐인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전 창작 과정은 인간성의 심연을 통과한 모욕의 감정이 모욕적인 세계 자체와 정면 대결할 수 있는 거대한 힘으로 전화될 수도 있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기존하는 세계를 뒤바꿔버릴, 새롭고 강한 인간을 꿈꾸었던 니체가 도스토예프스키의 범죄자들에 그토록 매혹되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니체는 "도스토예프스키야말로 내가 무언가를 배운 유일한 심리학자이며, 그를 안 것은 내 생애의 가장 큰 행운 중 하나"라고 말했는데, 그에 따르면 "범죄자형은 불우한 환경에 처한 강한 인간의 유형, 즉 강한 인간이 병든 상태"로서 "그가 지닌 가장 활력에 가득 찬 충동들은 곧장 억압적인 감정과 의심과, 공포와, 치욕과 뒤섞인다." 하지만 어쨌든 이 세계의 변혁이 시작되는 것은 바로 그들, "사회보다 강한" 자들로부터다.(<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송무 옮김, 청하 펴냄), 103쪽).
"치욕honte은 굴욕humiliation과 다릅니다. 치욕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치욕입니다. 자신에 기인한 그 무엇이 치욕입니다. 굴욕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제 9조는 강요된 헌법이다! 일본인이 이렇게 된 건 중국인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굴욕'입니다. 그것은 항상 '그 누구'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굴욕을 느끼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자기를, 자기 세계를 변혁하고자 하는 동기가 되는 것은 항상 '치욕'입니다. 굴욕은 그 무엇도 바꾸지 않습니다. 그것이 낳은 것은 약자에 대한 폭력과 차별뿐입니다." (<이 치열한 무력을>(사사키 아타루 지음, 안천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 149쪽)
4.
하지만 모욕/치욕이라는 감정의 잠재력에 관한 이 모든 언급들은, 어쩌면 '(인)문학주의자'의 공연한 불평이자 넋두리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애초의 물음, 그러니까 모멸이라는 '사회학적' 분석 대상의 '개념화' 문제로 되돌아가 보자. 사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품었던 가장 큰 아쉬움은 따로 있다. 이 책을 읽기 전부터, 그러니까 제목만 보고서도 이미 떠오른 제일 커다란 궁금증은 다음과 같다. 왜 하필 '모멸감'인가? 어째서 모욕감도 굴욕감도 아닌 모멸감일까?
저자는 '모멸감'이라는 화두를 김우창 교수의 글(<정치와 삶의 세계>(삼인 펴냄))에 나온 한 구절('오만과 모멸의 구조'로 이루어진 한국사회)에서 얻었다고 밝히고 있는데, 언뜻 생각해봐도 모멸감이라는 단어는 모욕감과 똑같지 않다. 모욕은 굴욕과 더불어 손쉽게 'humiliation'이라는 영단어로 번역되지만, 모멸은 그에 정확하게 대응되는 영어를 찾기 어렵다. 한자의 경우로 비교해보면, 모욕(侮辱)이 업신여기고 '욕되게' 하다는 뜻을 갖는 반면, 모멸(侮蔑)은 업신여기고 '멸시'하다는 뜻을 지닌다. 저자는 모욕과 모멸의 차이를 책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모욕과 모멸이 거의 동의어로 쓰이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약간 뉘앙스가 다르다. 모멸은 '모욕'과 '경멸'(또는 멸시)의 의미가 함께 섞여 있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모욕은 적나라하게 가해지는 공격적인 언행에 가깝고, 경멸 또는 멸시는 은연중에 무시하고 깔보는 태도에 가깝다. 모욕에는 적대적인 의도가 강하게 깔려 있는 반면, 경멸에는 그것이 분명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모욕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무심코 경멸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모멸은 후자의 가능성까지 포함한다."(67쪽)
"모욕하다"라는 말은 타동사로 쉽게 쓸 수 있지만(누가 누구를 모욕하다) "모멸하다"는 그렇지 않다. 모욕을 주는 주체는 쉽게 지목할 수 있지만 모멸의 주체는 잘 식별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람이 아닌 특정한 상황이나 제도로부터도 모멸감을 느낄 수 있으며, 심지어 다른 사람은 안 그런데 나 혼자만 모멸감을 느낄 수도 있다.
자, 그렇다면 이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은 <모멸감>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책에서 내가 무엇을 기대했는가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나는 모욕감과 모멸감의 '차이,' 작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이 '차이'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을 기대했다. 한마디로 나는 (모욕감이 아닌) 모멸감이라는 단어로 집약될 수 있는 현 단계 우리 사회의 풍경에 대한 비평적 분석을 예상했던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최근 한국 출판계의 눈에 띄는 트랜드 중 하나는 "〇〇사회"라는 제목을 붙이는 경향이다(<피로사회>, <단속사회>, <분노사회>, <잉여사회> 등등). 이 경향에 슬슬 피로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런 식의 제목달기가 겨냥하는 공통된 지향점은 분명 존재한다. 그 지향이란 사회의 앞에 붙은 〇〇이라는 단어를 일종의 개념적 프레임으로 삼아 그 단어가 표상하는 우리 사회의 어떤 '변화'를 포착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변화인데, 즉 이 시도의 밑바탕에는 하나의 전제가 깔려 있다. 우리 사회가 어떤 측면에선가 이전과 분명히 달라졌으며, 그 변화를 가장 잘 드러내는 단어가 다름 아닌 〇〇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책들이 겨냥하는 목표는 〇〇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계보학적/문화사적 분석을 넘어 그것과 연동된 사회적/구조적 변화를 이해하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모욕감'이 '모멸감'으로 바뀌는 이 변화에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걸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모멸감'이라는 제목을 단 이 책의 저자가 다름 아닌 이 변화에 좀 더 집중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모욕을 둘러싼 논의를 동서고금으로 확장하기 이전에 필히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이 있다. 적어도 근대 이후의 우리는 타인을 향한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모욕을 사회/제도적으로 '금지'하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는 점이다.
이건 내 추측이지만, 만일 저자가 이 역설에 보다 집중했다면 모멸의 문화론과 모멸의 사회학에 더해서 또 한 가지 관점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모멸이라는 감정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관점이다.
문제의 핵심은 오늘날의 모욕이 새로운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데 있다. 그것은 법적이고 제도적인 '평등'의 전제 위에서 작동하는 모욕, 이를테면 '구조적으로' 인정되고 수용될 만한 모욕이다. 예컨대 노동자가 하루아침에 예고도 없이, 해고를 알리는 문자 한 통을 받았다고 하자. 당연히 그는 모멸감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멸의 감정은 대체 누구를 향해야만 할까? 그를 해고한 사장을 그를 모욕하려는 의도가 없다. 그는 다만 시장(구조)의 법칙에 따라 적절히 행동했을 뿐이다(만일 사장이 몹시 미안해하며 직접 만나 해고를 알렸다면 과연 모멸감이 사라질까?).
감정노동에 종사하는 직원이 고객으로부터 비인격적 대우를 받았다고 하자. 저자가 책에서 인용하고 있듯이, "너희는 쓰레기통이야. 그 역할을 하라고 월급을 주는 거야"(97쪽)라고 솔직하게 설명하는 고용주도 물론 있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보다 세련된 고용주라면 아마도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을까.
"그런 고객마저도 능란한 서비스로 사로잡을 수 있는 것, 바로 그게 경쟁력을 갖춘 유능한 직원의 자세입니다. 바로 그런 능력이 (시장에서의) 당신의 '가치'를 더욱 더 높여 줄 겁니다."
그런 후에 어쩌면 이렇게 덧붙일지도 모른다.
"고작 그 정도 일로 모멸감을 느낀다니…다소 실망이군요. 혹시 자존감이 좀 부족한 게 아닙니까? 그래서는 이 업계에서 성공할 수 없습니다. 나를 보세요. 내가 현재의 이 자리에 올라오기까지 그런 감정 한두 번 느껴봤겠습니까?"
5.
이런 이유로 오늘날 감정을 다루는 학적 접근은 정동(情動)의 자본화, 혹은 감정의 시장화라 불리는 이 새로운 차원의 문제를 우회할 수 없다. '모멸감'이라는 사회적 감정을 고찰하는 이 책이 결정적으로 누락하고 있는 관점이 바로 이것이다. 모욕과 관련된 동서고금의 사례를 두루 참조하는 이 책이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이라는 부제에 온전히 값하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감정의 정치경제학적 고려가 왜 그토록 중요할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이유는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감정적 차원의 여러 문제들이 개별 주체의 '마음가짐'이나 '제도적' 보완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지점들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금지와 처벌의 기제를 통해 작동하는 제도와 달리, 특정한 정치경제학적 체제는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특정한 '주체성의 모델'을 제시하고 그 모델을 적극적으로 독려함으로써 작동한다. 그것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는 물론 각자의 자유지만, 만일 거절한다면 그 대가 또한 각자의 몫(책임)이 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이 새로운 법칙을 의식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모멸감에 취약한 심성을 각자의 내면으로 돌리는 처방적 결론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언급을 보라.
"자존감이 강한 사람은 어떤 일에 좌절했거나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받았을 때 빨리 극복할 수 있다. 그것을 가리켜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라고 한다. 눌렸던 용수철이 금방 튀어 오르듯 난관에서 신속하게 벗어나 삶의 페이스를 되찾는 모습을 개념화한 것이다. 몸이 튼튼한 사람이 병에 걸리거나 다쳤을 때 금방 회복되듯이, 감정이 건강한 사람도 상처를 금방 회복한다."(<모멸감> 281쪽)
회복탄력성, 본래 생태학에서 출발한 이 멋진 개념을 끌어오면서, 저자는 그것의 이면(裏面)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이미 자기계발과 교육 담론 시장에서 강력한 트렌드를 형성하고 있는 이 개념(<회복탄력성>(김주환 지음, 위즈덤하우스 펴냄))은 사실 신자유주의적 주체성 모델과 관련해 근래 들어 가장 활발히 논의되는 토픽 중 하나다. 주기적인 '재난'과 '시련'이 상례가 되어버린 새로운 자본주의 하에서 회복탄력성은 이제 체제 자체뿐 아니라 그 체제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이자 품성이 되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시련과 좌절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문제는 누가 더 빨리 그것을 훌훌 털어내고 본래 상태로 회복될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 그대, 성공하길 원하는가? 그렇다면 지금 당장 회복탄력성을 위한 마음의 근력을 키우도록 하라! 이것은 '구조화된' 모멸감을 문제화하기보다는 그 문제를 문제가 아니게 만듦으로써 해소해 버리는 처방에 가깝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 "새로운 물신(new fetish)"은 체제의 바깥을 고민하는 자들이 맞서 싸워야 할 싸움터가 되어가고 있다.
회복탄력성(resilience)은 그 정의상 저항(resistance)에 반하는(against) 것이다. 회복탄력성이 원하는 것은 저항이 아니라 묵인(acquiescence)이다. 분명 수동적인 묵인이 아니라 사실상 그 반대이다. 그것이 진정으로 요구하는 것은 우리가 자본과 국가에 저항하는 대신에, 그 둘 모두의 안전한 미래에 우리 자신을 맞춰 가는 것이다. (☞바로 가기 : Mark Neocleous, "Resisting Resilience," 178 (Mar/Apr 2013) )
요컨대, 모멸감을 느끼는 주체에게 주어질 수 있는 최악의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지금 당신이 느끼는 모멸감이란 사실 오늘을 살아가는 누구나 경험하고 있는 일상적인 감정일 뿐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인 채 내면의 자존감을 키워 한시라도 빨리 그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라. 그럴수록 당신의 가치와 지속가능성은 더욱 더 커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밀회>의 여주인공 오혜원에게도, "그 집 개로 살아가게" 될 모멸의 삶을 분연히 거부했던 그녀에게도, 같은 말을 해줄 수 있을지 모른다.
"당신은 커다란 실수를 저지른 겁니다. 당신은 친구에게 따귀를 맞고도 가벼운 한숨 한번으로 보란 듯이 일상으로 되돌아갔던, 첫 회의 바로 그 모습으로 되돌아갔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회복되지 못했고 결국 모든 걸 잃었습니다. 당신은 틀림없이 그럴 능력이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사실 까놓고 말해 당신이 느꼈다는 그 모멸감이란 것, 그 정도는 우리 모두 겪으면서 살고 있지 않나요?"
모멸감이 그에 대한 '저항'으로 연결되지 못한 채 무차별적으로(평등하게!) 사회 전체로 확산되는 아득한 풍경. 어쩐지 이 풍경은 '착취'의 메커니즘이 마침내 사회의 최상부까지 스며들어 만들어낸 저 "지배 없는 자기착취"의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니까 모두가 '피로'한 이 세계에서는 우리 모두 저마다의 '모멸감'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이다…. 언제 어디선가 갑자기 '기적'처럼 나타날 각자의 '이선재'를 만나기전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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