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를 욕망하다>(마이클 폴란 지음, 김현정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를 읽기 시작한 뒤 일주일 쯤 지나서 세월호가 바닷물에 빠졌다. 수많은 열예닐곱의 꽃다운 청춘들도 바닷물에 수장되고 말았다. 즐거움에 들뜬 어린 새싹들이 침몰하는 배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한 것은 기막힌 일인데, 온 매체가 그 슬픈 소식을 도배할 때도 나는 어김없이 밥을 먹었다. 그리고 애통함 때문에 몇 끼 밥을 거른 부모들 말고는 대다수의 사람은 누군가가 요리한 밥을 먹었을 것이다.
침식을 잊어버린 슬픔은 극한의 슬픔이다. 그만큼 먹고 잔다는 것은 생명 유지에 어찌할 수 없는 동물의 욕구이자 한계이다. 어느 장관 하나는 학부모들을 위로한다고 진도에 가서 배고픔에 컵라면 하나를 먹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배가 고파 컵라면 하나 먹은 게 무슨 잘못이냐 할지 모르지만, 때와 장소가 그 욕구 충족에 마땅한 것이었는가 하는 문제가 있겠다.
▲ 배가 고파 컵라면 하나 먹은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욕구 충족보다 때와 장소, 자기 지위에 대한 판단이 우선해야 할 때도 있다. ⓒYTN 뉴스 캡처
그 컵라면도 요리라면 요리다. 수행원 누군가는 컵라면 뚜껑을 벗기고 뜨거운 물을 부어 허기진 장관에게 주었을 것이다. 아니 그 이전에 라면 공장에서는 온갖 식재료를 가지고 라면을 만든 자체가 요리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는 것이나, 라면 공장에서 라면을 만드는 일을 요리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적어도 조개로 국물을 내고, 밀가루를 반죽하여 썰어 국수를 끓이고, 애호박 고명쯤은 있어야 요리라고 여긴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가끔 그 요리라는 정의에 대해서도 혼란을 느낄 수도 있겠다. 칼국수를 만드는 밀가루의 근본적인 문제까지 걸고 넘어가니 말이다. 세월호를 바닷물에 침몰시킨 자본의 맹목적인 욕망은 우리가 늘 먹는 밥과 요리에도 어김없이 작용하고 있으며, 이제는 그 어느 누구도 이 자본의 욕망에서 빠져나오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슬픔과 비통함에도 우리가 계속 먹어야 삶을 유지할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잠시 그 일은 접어두고, 요리의 욕망을 이야기하련다.
내 경험에 따르면 식당에서 아주 잘 기른 화분들을 본다면, 또 그것이 그저 화원에서 돈을 주고 사서 진열해 놓은 것이 아니라 주인이 직접 기른 것이라면, 대개 그 음식점은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 이런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고 그 이유를 꼽아 보니 원예와 요리는 비슷한 성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초는 어지간한 정성으로 돌보지 않으면 맑고 깨끗한 모습을 유지하기 쉽지 않다. 적정한 물과 양분과 햇빛이 필요하고, 또 그 적당함이란 것도 식물의 종류마다 다르다. 요리도 마찬가지라서 세심한 주의와 관찰, 적정한 가열과 섞음의 과정이 순서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제대로 맛이 나오기 어렵다.
▲ <요리를 욕망하다>(마이클 폴란 지음, 김현정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 ⓒ에코리브르
이 책의 저자인 마이클 폴란은 우리에게는 <잡식동물의 딜레마>(조윤정 옮김, 다른세상 펴냄)라는 책으로 익숙하지만, 원예에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저널리스트이다. 이 책의 곳곳에서 보여주는 원예에 대한 편린과 비유는 그가 요리하는 음식이 썩 괜찮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준다. 물론 본인은 별로 요리를 해본 일 없는 초보자라고 겸양하기는 하지만, 요리의 기초 체력은 충분히 되는 것 같다. 이 책의 저자는 요리를 배우기 위해서 전문 요리사들이나 현장을 두루 찾아다닌다.
책의 구성은 그리스의 사원소설에 나오는 불, 물, 공기, 흙을 화두 삼아 전개한다. 저자는 통돼지 바비큐에서부터 물에 끓이는 냄비요리, 빵 굽기, 치즈 만들기, 사워크라우트와 김치 담그기, 치즈 만들기, 꿀로 술 담그기, 맥주 만들기에 이르기까지 일반인들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분야들마저 요리 스승을 만나 도제를 해가며 배운다. 그야말로 산업시대 이전에 이미 전문화를 했던 분야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만들어온 음식 요리법들의 개요를 섭렵하려 하는 것이다. 물론 단순히 요리를 배우는 과정만을 늘어놓는 책은 아니다. 곳곳에 요리의 인류학적, 종교적, 또는 인문학적 의미를 곁들이고, 과학적인 이유와, 사회적 현상과 그 의미까지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러면서도 요리라는 것의 본질이 주는 의미는 끝끝내 놓지 않는다. 그 결정이 부록처럼 달려있는 권말의 몇 가지 요리의 레시피일 것이다. 물론 레시피의 한계를 이야기하고, 자신의 방법을 만들라고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저널리스트였기에 수많은 취재를 통해서 우리 사회에서 식품들이 지닌 문제점들을 직시하고 있으며, 이 책에서도 요리의 본질과 아울러 그 문제들을 요리들의 중간에 슬며시 들이밀고 있다. 먼저 '불'의 장에서 이것을 인류 최초의 요리 형태로 제시하고, 이 날짐승을 잡아 통째로 불에 굽는 끔찍한 요리가 가지고 있는 제의적 의미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슬쩍 들이미는 묘한 대비가 눈을 사로잡는다.
이 태고의 요리를 배우기 위해 저자는 통돼지 바비큐로 이름난 노스캐롤라이나로 향한다. 통돼지 바비큐를 만드는 이름난 레스토랑의 주방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숯의 그을음과 돼지기름이 엉킨 채 커다란 돼지와 뜨거운 숯불과 연기와 싸우며 그것을 굽는 끔찍한 모습과, 그 통돼지 바비큐의 살과 껍질을 발라내서 양념하여 먹는 맛있는 샌드위치가 묘한 대비를 이루는데, 이것보다 중요한 대비가 있다.
그가 통돼지 바비큐를 배우고 견학한 곳은 두 군데다. 한 곳은 그저 양돈업자가 기른 일반적인 돼지를 가지고 좋은 참나무 장작을 골라 불을 때서 숯을 만들어 굽는 곳이며, 다른 한 곳은 그저 공장에서 만든 편리한 성형 숯을 쓰고, 향취를 위해 참나무 장작 몇 개를 얹어놓는 정도에 그치는 곳이다. 그런데 이 요리사는 양돈업자가 빨리 살이 찌라고 좁은 우리에서 꼬리를 잘라내고(스트레스를 받은 돼지들이 꼬리를 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송곳니를 뽑고, 항생제를 먹어가며 키운 돼지가 아닌 방목해서 키운 토종 돼지를 주재료로 쓴다. 그 두 군데가 묘한 대비를 이루는 것이다.
어떤 계기 때문에 방목한 토종 돼지를 재료로 쓰기 시작한 이 요리사는 이로 인해서 같은 지역의 양돈업자에게 핍박을 받는다. 또한 그것이 씨앗이 되어 복잡한 과정을 거쳐 운영하던 사업체가 도산하여 괴로움을 겪었으리라는 암시도 들어 있다. 그는 나중에 재기를 해서 자신의 고집대로 다시 바비큐를 만드는 음식점을 차린다.
과연 제대로 된 숯을 쓴 것이 옳은 것이냐, 아니면 제대로 키운 돼지를 먹는 것이 옳은 일이냐의 문제에 대해서 명확한 답을 내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복잡한 문제는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에 걸려 있는 문제다.
두 번째 장인 '물'에서는 국물 요리를 다룬다. 스튜나 브레이스는 우리 식으로 하면 찌개나 국물이다. 여기서도 저자는 뜨끈한 냄비 요리와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는 범람하는 기성 음식들에 대한 작은 관찰을 대비시킨다. 곧 저자의 식구 세 사람은 슈퍼마켓에서 전자레인지용 기성품을 자신이 먹고픈 대로 사다가 먹기로 한다. 그것으로 코스 요리를 차려낼 정도로 미국에는 전자레인지용 기성 요리들이 많은가 보다. (뭐 한식도 불가능하지야 않겠지만 아직은 반찬가게를 동원한다 해도 한정식을 차리려면 한 번 장을 보는 것으로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이렇게 사온 것을 가지고 식탁을 차리려니 집에 한 대 밖에 없는 전자레인지가 병목 현상을 일으켰다. 결국 각기 다른 세 사람의 음식을 번갈아가며 데우는 일은 음식을 준비하는 것보다 별로 시간을 단축시키지 않았으며, 슈퍼마켓에서 내용물과 성분을 보면서 고르는 시간을 포함하면 시간이 없어서 기성품을 사먹는다는 얘기는 별로 신통치 않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돌아가며 데우느라 식구들이 식탁에 함께 앉아 있을 시간조차 별로 없었으며, 맛을 느끼기도 쉽지 않고, 먹은 다음에 발생하는 다량의 포장지 처리 시간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차라리 냄비 요리를 하나 만들면 준비하는 시간은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고, 양도 풍부하기에 두었다가 다시 데워먹을 수도 있으며, 맛도 상상하는 것보다 더욱 좋다. 사람들이 시간 부족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남는 시간을 효과적으로 쓰지도 않는다. 지금 우리에게 요리는 잊혀져가는 이야기이며, 텔레비전에서 이름난 셰프가 하는 요리는 따라 하기 위한 것이 아닌 그저 구경하는 대상인 것 같다.
세 번째 장은 '공기'다. 공기를 불어넣은 빵에서는 기업과 소비자의 문제가 더 첨예하게 드러난다. 초반부는 공기에서 잡아넣은 미생물로 빵을 팽창하게 만드는 사워도우 발효종에 대한 이야기다.
발효종이란 것도 이제는 보다 통제하기 쉽게 하기 위해 건조한 이스트란 공장의 생산물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결국은 발효종의 원료이자 빵의 주원료인 밀가루의 문제가 등장한다. 이것은 밀가루에서 거친 식감이 싫어 배제한 겨와, 빠른 변질의 원인인 씨눈에 대한 이야기다. 밀에서 가장 영양분이 많은 곳은 씨눈인데, 제분 과정에서 씨눈을 제거하지 않으면 변질의 우려가 있어 보관상의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제분업체들은 우선 껍질과 씨눈을 제거하고 매끈한 밀가루를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밀가루는 좀처럼 변질되지 않는다. 그리고 농가가 심는 밀의 종자는 이미 껍질과 씨눈을 쉽게 벗겨낼 수 있는 것으로 거의 전부가 교체되었다.
통밀가루가 하얀 밀가루보다 건강에 좋다고 하자, 기존의 제분업체들은 통밀가루를 생산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품질 관리의 문제 때문에 씨눈은 제거했다가 나중에 다시 첨가하는 방식이다. 어떻게 씨눈을 처리하고 첨가하는지는 책에 나오지 않는다. 어쨌거나 그것은 진정한 통밀가루라 할 수 없다. 그러면 샌프란시스코에서 통밀 빵을 만드는 빵집은 어떻게 할까. 그들은 농가와 계약 재배를 하고 그 밀을 가져다가 자신들이 맷돌로 천천히 제분을 해서 쓴다. 그렇게 해서 자신들이 만든 사워도우 발효종을 넣어 반죽하여 빵을 만들지만 이들 빵이 공장에서 생산하는 통밀 빵보다 엄청나게 비싼 건 아니다. 아주 조금 더 비쌀 뿐이다.
공장에서 만든 통밀 빵은 진정한 통밀 빵이 아니다. 그들이 쓰는 통밀 자체가 진정한 통밀이 아니기에 진짜 통밀 빵의 영양을 주지도 못하고, 흰 빵처럼 소화와 흡수도 빨리 되니 비만 방지에 도움이 되지도 못하고, 오히려 통밀의 단점을 감추기 위해 첨가제와 단맛만 첨가한 제품인 셈이다. 그러니 이런 과정을 거친 빵이라면 굳이 비싼 돈을 주고 통밀 빵을 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빵을 주식으로 하는 곳의 사정이 이럴진대 우리의 사정은 어떨까. 농가와 계약해서 밀을 가져오고, 그것을 자신들이 맷돌로 갈아 빵을 만들 빵집이 우리에게는 있을 수 없다. 그나마 우리가 보는 빵집은 거의 모두 프랜차이즈 빵집으로 변했다. 자신들이 반죽을 해서 장인이 빵을 굽는 빵집은 이제 대도시의 몇몇 군데에밖에 없다. 이들도 자신들이 발효종을 만들어 반죽을 만들어 쓰기는 하지만, 그래도 농가와 계약 재배를 해서 맷돌을 갈아 통밀가루를 만들어 쓰는 것은 아니다. 프랜차이즈 빵집은 공장에서 만들어 가져다주는 반죽으로 굽기만 한다. 곧 우리는 진정한 통밀 빵을 먹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밀 운동이 한창이었을 때 생협을 통해 우리밀 빵이 나오기는 했지만, 결국 맛에서 형편없이 밀렸다. 그것이 제대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제분 공정부터 가다듬고(이 책에는 통밀가루를 제대로 만드는 제분공장 견학기가 나온다), 빵을 만드는 일을 공장의 가공 공정에 맡기지 말고 장인의 수작업에 의지해야 한다. 지금 우리 상황에서 언감생심 그런 빵을 맛보기를 원할 수 있단 말인가.
네 번째 장 '흙'은 효모를 위한 장이다. 채소를 효모로 발효시켜 사워크라우트나 피클을 만든다. 당연히 채소 발효에서는 김치가 빠질 수 없다. 발효에 참여하는 미생물과 우리의 장내세균에 대한 공통점은 아직 모르는 내용이 너무 많다. 하지만 이들의 조화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음만 기억하면 될 것이다. 채소의 발효는 아직 많은 부분이 가정의 영역에 속해 있고, 그래서 수없이 많은 종류의 발효 음식이 살아남아 있다. 하지만 이것도 차츰 기업의 손으로 넘어가 단순화되고 있는 중이다. 아마 전체 규모를 본다면 벌써 공장 김치가 가정의 김치를 능가했을지도 모른다.
다음으로는 생우유로 치즈를 만드는 미생물 박사인 수녀의 치즈 공방이 등장한다. 치즈에 이르면 소규모의 치즈를 만드는 곳들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식품회사에서 만든 치즈가 훨씬 우월하다. 그 공정의 단순화와 표준화는 치즈에서 풍부한 냄새 같은 본색을 앗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세 번째는 술이다. 벌꿀 술을 누구나 만들 수는 있지만, 이를 직접 만들어 마시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맥주에 이르면 소비되는 맥주는 거의 모두가 공장 제품이다. 다른 어떤 발효보다 공정이 복잡하고 설비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소규모 설비로 주점에서 제조하는 맥주가 없지 않지만, 그것도 결국은 공장 설비를 축소한 상황에서 전문가가 만드는 것이다. 우리 막걸리의 경우, 만들기가 맥주만큼 까다롭지 않아서 백 년 전에는 집에서 담그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이제는 시중에 나와 있는 대개가 양조장 제품이다. 사실 맥주나 막걸리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 시간도 많이 잡아먹고, 돈도 많이 든다. 효율을 생각하면 쓸데없는 짓이고, 맛이 공장 제품보다 좋기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맥주를 만든 후에 저자는 수동적인 소비자의 입장에서 벗어나는 만족감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이제 우리가 먹는 것의 대부분은 그 주도권이 식품기업으로 넘어갔다. 농산물 축산물이라 하더라도 유통망을 장악한 유통업자, 축산기업, 도축기업, 가공·판매기업이 거의 모든 주도권을 행사한다. 우리처럼 식량 자급률이 떨어지는 경우라면 수입업자들과 외국의 거대 기업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재료에서부터 개인의 선택권은 축소되고, 다만 몇 가지 브랜드에서의 제한된 선택만 가능한 경우가 많다.
거기다가 식품의 반제품과 완제품은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으며, 돈만 주면 밥을 사먹을 수 있는 식당은 지천에 깔려있다. 만들기 번거로운 디저트나 과자, 빵과 떡은 블로그에 올릴 취미가 아니라면 집에서 해먹는 경우는 이제 거의 없다. 외식산업은 날로 그 기세를 더해가고 있으며, 맛이 좋기로 이름이 나거나 유명한 셰프가 있다는 소문이 나면 줄을 서서 기다리며 사먹는다. 돈이 없어도 지천에 널린 편의점을 이용하면 간단한 요기는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텔레비전의 요리 프로그램은 인기 절정이고, 이름난 셰프는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며, 하루 종일 먹을 것에 관한 프로그램만 틀어주는 케이블 채널도 있다. 이런 현상이 설명하는 것은 우리의 입도 자본에 종속되어 간다는 사실이다. 광고에 나오는 것을 사먹고, 대중매체에서 소개하는 맛집을 찾아다니며, 사료업자들이 꼬임에 넘어가 마블링이 좋은 고기를 찾으며, 닭 한 마리를 살 때도 도축한 메이커를 찾아갈수록 우리의 입은 자본에 길들여지는 것이다.
요리는 우리가 생존을 위해 부득이 자연물을 가공해 안전하게 필요한 영양소를 섭취하는 생존 전략이었지만, 거기서 삶의 즐거움을 얻는 오락이자, 이웃과의 관계를 맺는 통로였다. 생존을 위해 부득이 요리를 하기는 하지만 새로운 맛을 창조하며 자신의 스타일을 찾고, 그것을 나눌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카리브 해 플랜테이션의 노예들은 주인을 위해 요리를 해야 했지만, 그 요리를 통해 억압된 환경 속에서 자유의 느낌을 맛보기도 했다. 요리란 주어진 재료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주도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요리는 자신의 방법으로 완성할 수 있다.
물론 정해진 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틀 안에서 자신의 창조력을 발휘하여 자신만의 음식과 맛을 창조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요리는 이 거대한 자본의 틀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기 위한 한 방편이 될 수 있다. 집과 개인에게서 요리가 사라져가는 시대에, 또 자본이 우리의 입과 건강을 좌지우지하는 시대에, 저자가 힘들여 시간을 내서 요리를 배우러 다니고, 여러 곳을 견학하여 이 책을 쓴 것은 그런 뜻이 있어서일 것이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가부장제 사회 안에서 노동으로 요리를 했다. 식구들을 먹이는 책임이 그네들 어깨 위에 지워져 있기에 그것은 피하기 힘든 노역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어머니들이 그 노역을 마다하지 않은 것은, 요리의 즐거움과 그것을 먹어주는 식구들을 향한 애정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집 떠난 자식들에게 무엇 하나 먹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요리는 특정인만 할 수 있는 그런 행위가 절대 아니다. 지금 시대에는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나 해야 하는 일이자, 우리를 가장 즐겁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자본의 이윤추구에 눈이 먼 기업과, 그들 논리에 매몰되어 할 일을 잊은 정부 때문에 지금의 세월호 침몰이란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만들어내었듯이, 우리의 입을 노리는 자본은 언젠가 우리의 입과 건강에 대해서도 무책임한 태도를 보일 것이다. 초식동물에게 육식동물 찌꺼기가 든 사료를 먹여 광우병 소가 발생하는 사태가 말해주듯 말이다.
거기에 대항해서 개인이 주도권을 지키기 위해서도 요리를 더 이상 방치하면 안 된다. 요리도 자유의지 발현의 한 가지 수단이 될 수 있으며, 자신이 직접 요리를 하게 되면 재료가 어떻게 생산되고 유통되는지에 대해서도 훨씬 더 민감해지고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 관심은 최소한, 기업들의 이윤추구에 매몰된 행위에 대해 경각심을 일으킬 수 있다.
학부모들이 모인 강당에서 컵라면을 먹던 장관은 아마도 조만간 자리를 내놓아야 할 것 같다. 공무가 없어져 시간이 많아지면, 컵라면 말고 칼국수 요리에라도 도전해보기를 바란다. 요리가 별 것 아녀 보일지 몰라도 생각해야 할 것은 너무 많고,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그 음식 맛은 배가 산으로 가는 것처럼 되고 만다. 요리도 그럴진대 하물며 아이들을 보살펴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지를 요리를 통해 느껴보시기를 진심으로 권한다. 평생 남이 해준 요리로만 배를 채우는 사람이나, 제 손으로 요리한 음식을 남에게 먹여보지 않은 사람은 아직 철이 덜 든 어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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