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한 그 도시를 '청소'하라!
부패한 그 도시를 '청소'하라!
[윤영천의 '하우, 미스터리'] 대실 해밋의 <붉은 수확>
부패한 그 도시를 '청소'하라!
1. 
점잖고 부유한 신사숙녀들이 모이자 천박하지 않은 살의가 수면 위로 드러난다. 기묘한 수수께끼로 감춰진 살인이 일어나고 탐정이 등장하더니 사건은 멋지게 해결된다.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을 전후한 미스터리의 황금기, 수수께끼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이상적인 공간에서 작가와 독자의 두뇌 게임이 펼쳐지는 동안, 소설 밖 현실은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로저 애크로이드가 수수께끼의 죽음을 맞았던(애거서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1926년, 영국은 광산 노동자들이 주축이 되어 360만 명 이상이 참여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총파업이 시작됐다. 하지만 당대 영국 미스터리에는 파업을 주도했던 TUC(영국노동조합회의)나,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가까스로 유지됐던 사회 공공 부문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영국 미스터리의 전통을 따른 일련의 미국 미스터리(S. S. 밴 다인, 엘러리 퀸 등)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세계 대전 이후 갑작스러운 번영과 보수적인 가치관의 충돌, 1920년 발효된 금주법으로 인한 혼란, 30년대의 긴 불황을 선포한 1929년의 '검은 목요일’도 미스터리 속에서는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처리됐다. 

▲ 월 스트리트의 파탄 이후 대공황의 시작을 알리는 1929년 신문.


'현실의 범죄'를 다루는 장르가 오히려 현실과 점점 멀어지는 아이러니는 그동안의 미스터리에 확실한 뒤틀림을 가져왔다. 순수한 게임만을 지향하기에 사회는 너무나 격렬하게 움직였다. 뒤틀림들은 구체화됐고, 마침내 어떤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0년대 미국, 갱지에 조악하게 인쇄된 10센트짜리 싸구려 잡지 위에서 어떤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2. 
1920년대 미국은 그야말로 '하드한' 곳이었다. 당시 미국 사회는 전쟁이 가져온 뜻밖의 풍요로움을 온전히 소화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금주법'에서 알 수 있듯 비합리와 불법이 만연했고, 그럴 듯하게 포장된 욕망들이 여기저기에서 불거지던 시기였다. 페니 드레드풀(Penny Dreadful)이나 다임 노블(Dime Novel) 같은 싸구려 소설의 전통을 계승한 펄프 매거진은 그런 욕망들의 배출구 역할을 했다. 선정적인 표지와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들로 채워진 싸구려 잡지들은 훗날 미국 대중문화의 근간을 이뤘고, 미국적인 색을 덧입힌 새로운 미스터리를 탄생시켰다. 

▲ 대실 해밋의 <몰타의 매>가 연재되던 당시의 <블랙 마스크>.

'하드보일드(hardboiled)'는 그렇게 탄생했다. 특히 가장 크게 성공한 펄프 매거진 중 하나였던 <블랙 마스크(Black Mask)>(조셉 쇼가 편집을 전담했던 1926년부터 1936년까지)는 그 요람이 되었다. 

하나의 서브 장르나 막연한 폭력성을 뜻하기도 하지만, 하드보일드는 결국 하나의 문학적 스타일이다. 스타일은 대부분 문체로 만들어졌고, 문체는 무심한 태도에서 비롯됐다. 하드보일드의 탐정들은 신사도 귀족도 아니었다. 그들은 우아한 이성이 아닌 절박한 생존 본능으로 움직였고, 당시 독자들이 머물고 있는 현실처럼 거칠고 폭력적이었다. 비정한 탐정과 장식 따위 없는 날것의 문체는 <블랙 마스크>의 작가들에 의해서 널리 퍼져나갔다. 

3.
하드보일드를 거슬러 오르면 캐롤 존 댈리(Carroll John Daly)에 도달한다. 1920년대 초에 발표된 그의 단편들은 미스터리 역사상 최초의 하드보일드로 여겨진다. 하지만 거기에 문학적 무게를 얹고 대중화한 것은 대실 해밋이었다. 그 어떤 시기보다도 혼란스러웠던 미국을 그 어느 작가보다 파란만장하게 살아간 그는 1922년부터 <블랙 마스크>에 단편을 발표하며 점차 위대한 작가로 성장했다. 1929년 <붉은 수확>(대실 해밋 지음, 김우열 옮김, 황금가지 펴냄)부터 시작되는 다섯 편의 장편소설은 미국식 미스터리의 진정한 시작을 선포하는 신호탄이었다. 

대실 해밋은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핀커튼 탐정 사무소에서 일했다. (1850년에 설립된 핀커튼 탐정 사무소는 당대 가장 유명했다. 눈 마크와 '우리는 잠들지 않는다'라는 캐치프레이즈는 탐정을 뜻하는 P. I의 어원이기도 하다.) 남북 전쟁 이후, 핀커튼의 탐정들은 주로 기업에 고용됐다. 탐정들은 돈을 받고 이간질을 벌였고 노동조합을 탄압했으며 파업을 저지하곤 했다. 대실 해밋 역시 그런 일을 했고 숱한 환멸을 경험했다.

▲ 핀커튼 탐정 사무소의 로고.


<붉은 수확>은 대실 해밋의 그러한 경험이 오롯이 담긴 작품이다. 포이즌빌이라고 불리는 광산 도시 퍼슨빌. 당대 미국 사회의 치부를 욱여넣은 듯한 그곳에 이름 없는 탐정 '콘티넨털 옵(콘티넨털의 탐정이라는 뜻)'이 의뢰인을 찾아 방문한다. 하지만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의뢰인 도널드 윌슨은 누군가에게 살해당하고, '나'는 의뢰인의 아버지이자 퍼슨빌의 실질적인 소유주인 일라이휴 윌슨을 만나게 된다. 

광산 노동자들의 파업을 저지하기 위해 무리하게 폭력배를 끌어들였다가, 이권을 빼앗기고 위기에 처한 일라이휴 윌슨은 '나'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아들의 살인범을 찾아내는 것은 물론, 퍼슨빌 전체를 싹 쓸어달라고 의뢰한 것이다. 수임료로 1만 달러를 빼앗다시피 받아든 콘티넨털 옵은 이제 퍼슨빌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악당들과 승부를 벌여야 한다. 

4.

▲ <붉은 수확>(대실 해밋 지음, 김우열 옮김, 황금가지 펴냄). ⓒ황금가지

이전 황금기 미스터리 속 탐정에게 이 의뢰를 맡긴다면 어떻게 해결할까. 도널드 윌슨의 죽음은 안락의자에 앉은 채로 해결하겠지만, 나머지는 손사래를 치며 경찰에 가보기를 권할 것이다. 수수께끼의 해결을 환호해줄 왓슨도 없고 질서를 회복할 만한 이상적인 경찰도 없는 퍼슨빌에 감히 발을 들이는 명탐정은 아마 없으리라. 

콘티넨털 옵은 위태로운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던 악당들 사이를 능수능란하게 오가며 그들을 휘젓는다. '독의 도시'를 배신과 모략으로 뒤집고 폭력과 죽음으로 쓸어버리는 탐정. 이전까지의 미스터리가 현실에 맞닥뜨려 우물쭈물했다면, 대실 해밋은 범죄를 다루는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안했다. 그것은 형식에 갇힌 장르에게 탈출구였고, 급변하는 현실을 반영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었다. 

바야흐로 미스터리 장르는 범죄 소설로의 전환을 맞이하고 있었다. 작품은 게임에서 빠져나와 현실에 자리 잡게 됐으며, 탐정은 드디어 안락의자에서 내려와 땅 위에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붉은 수확>은 그 분기를 나타내는 표석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함께 읽어볼 만한 작품들

▲ⓒ

-<대실 해밋 : 중국 여인들의 죽음 외 8편>(대실 해밋 지음, 변용란 옮김, 현대문학 펴냄)
1929년부터 시작된 다섯 편의 장편은 대실 해밋의 정점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인지 상대적으로 그의 단편들은 국내에 그다지 많이 소개되지 않았다. 대실 해밋은 1922년부터 <블랙 마스크>를 통해 꾸준히 단편을 발표해왔다. 이 작품집은 콘티넨털의 탐정 사무소의 이름 없는 탐정이 등장하는 9편의 단편으로 구성돼 있다.

-<몰타의 매>(대실 해밋 지음, 김우열 옮김, 황금가지 펴냄)
1941년 존 휴스턴 감독의 영화와 험프리 보가트로 더 잘 알려진 작품이다. 이야기는 아름다운 여인이 스페이드&아처 탐정 사무소를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한 남자와 함께 사라진 여동생, 동료의 죽음, '몰타의 매'를 차지하기 위해 모인 다채로운 인간 군상들. 야비하고 비열하지만 매력적인 탐정 샘 스페이드가 활약하는 이 작품으로, 대실 해밋은 큰 명성을 얻게 된다.

-<유리 열쇠>(대실 해밋 지음, 김우열 옮김, 황금가지 펴냄)
대실 해밋이 스스로 뽑은 자신의 최고작. 헨리 의원의 정치 활동을 돕고 자신도 함께 정치계에 입문하려는 폴 매드빅. 그리고 그를 형처럼 따르며 뒤처리를 도와주는 네드 보먼트. 어느 날 헨리 의원의 아들 테일러 헨리가 시체로 발견되고 폴 매드빅이 범인으로 지목되면서,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아이러니한 등장인물의 관계와 꼬이고 꼬인 사건을 통해 사회를 말하는 세련됨이 돋보인다.


eon@pressian.com 다른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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