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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준은 박근혜의 조자룡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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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남재준은 박근혜의 조자룡인가

[편집국에서] 왕조 국가와 민주주의 국가에 필요한 충성심은 다르다

첫사랑. 악몽으로 기억하는 이도 있겠지만, 많은 사람에게 이것만큼 아련한 향수를 느끼게 하는 것도 찾기 어렵다. 팍팍한 현실에 어깨가 짓눌리는 하루하루, 문득 떠오른 첫사랑의 추억에 미소 지으며 다시 한 걸음 내디딘 경험은 어느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있는 법.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다.

조자룡. 박근혜 대통령의 가슴을 두근두근하게 한 첫사랑으로 꼽힌다. <삼국지>에 조자룡이 등장하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소녀 박근혜는 설렜다고 한다. 조자룡에 대한 애정은 수십 년 세월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외국에도 알려졌다. 지난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중국 측에서 박 대통령을 배려해 조자룡이 종횡무진 활약한 장판파 전투를 재연한 경극을 선보였을 정도다.

충성심. 조자룡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덕목이다. 조자룡 사랑은 박 대통령의 인사 기준과 맞닿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충성심을 무엇보다 중시한다는 말이다. 부친이 부하의 총탄에 세상을 떠나고, 충성을 맹세한 이들 중 상당수가 10.26 후 곁을 떠나는 일을 겪은 박 대통령이다. 그렇기에 배신하지 않을 부하가 절실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대통령의 조자룡 사랑과 10.26, 그리고 국정원

남재준. 군인 출신 국정원장이다. 박 대통령은 군인 출신을 선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남재준과 조자룡, 둘 다 무장이다. 대통령이 무한 신뢰에 가까운 믿음을 주는 것도 닮았다. 절대 배신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판단한 것일까. 남 원장을 보며 대통령의 첫사랑을 생각한다. 친박 좌장으로 통하는 서청원 의원이 '박근혜의 조자룡'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대통령의 조자룡 사랑을 서 의원 한 사람에게 한정해 살필 이유는 없다.

쇠심줄. 조자룡과 남재준은 이 점도 닮았다. 장판파 전투에서 조조의 대군을 뚫고 유비의 아들을 구한 조자룡의 용맹과 생명력은 실로 놀라웠다. 조자룡은 평생 전장을 돌며 숱한 위기를 맞지만 명예를 더럽히지 않으면서 천수를 누렸다. '닥치고 충성'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직언도 서슴지 않았다. 관우의 죽음에 분노해 오나라를 정벌하려 한 유비에게 반대 의견을 낸 것도, 참패한 유비를 구한 것도 조자룡이었다. 그게 조자룡식 충성이었다. 물론 생명력 하면 남재준도 만만치 않다. 안타깝게도 명예와는 거리가 멀지만.

국정원. 대선 개입,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누설, 그리고 간첩 증거 조작까지 쓰나미급 파문의 주역이다. 그 중심에 남 원장이 있다. 그런데 멀쩡하다. 셋 중 하나만으로도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은 물론 감옥에 가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인데도 남 원장은 끄떡없다. 더불어 국정원 개혁도 지지부진하기 그지없다. 이건 박 대통령이 만든 상황이다.

▲ 남재준 국가정보원장. ⓒ연합뉴스

감싸기. 바로 그것이다. 박 대통령은 국정원과 그 수장 남재준을 계속 감쌌다. '괴물 본색'을 다시 드러낸 국정원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각계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척 침묵하다가 '셀프 개혁' 주문으로 면죄부를 주는 식이었다. 더 이상 덮을 수 없을 만큼 문제가 커지면, '조사 후 책임을 물어야 할 일이 있으면 묻겠다'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입으로는 법치와 정상화를 강조하면서도, 법치 국가의 근간을 뒤흔든 국정원은 방치했다.

채동욱. 남 원장 문제를 살피다보면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다. 막강한 검찰총장이 한순간에 날아간 것은 청와대의 의중과 떼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채동욱은 청와대에 불편한 존재였다. 남재준은 이와 다르다. 한 달 전, 검찰총장을 날린 <조선일보>마저 태도를 바꿔 '남 원장이 책임져야 한다'고 나서고 여당 일각에서도 남재준 경질론이 거듭 나왔다. 그런데도 남 원장은 건재하다. 시쳇말로 국정원은 무섭고 검찰은 만만해서? 남재준과 달리 채동욱은 죽을죄를 지어서? 그게 아님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터. 박 대통령의 남 원장 지키기가 어느 정도인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왕조 국가나 조폭 조직의 충성심과 민주주의 국가의 충성심은 다르다

차지철. 충성심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조폭 조직을 연상시키는 맹목적인 충성은 10.26을 불렀다. 아버지를 잃은 박 대통령으로선 10.26 하면 '김재규의 배신과 하극상'부터 떠올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차지철의 맹목적 충성은 10.26의 중요한 배경 중 하나다. 차지철의 전횡을 허용한 건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무엇보다 10.26의 밑바탕에는 박정희 정권이 자초한 민심 이반이라는 거대한 흐름이 있었다. 민심을 거스르며 제 무덤을 판 건 바로 박정희 정권이었다.

쓴소리. 불편하더라도 대통령이 더 들어야 할 것이다. 대통령이 기억했으면 하는 게 있다. 김재규의 행위를 배신이라 단정하는 것이 적절한지도 논란이 될 수밖에 없지만, 그 이전에 짚어야 할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배신이다. 민주공화국의 대의와 민주주의를 짓밟은 배신. 왕조 국가나 조폭 조직에 필요한 충성심과 민주주의 국가에 필요한 충성심은 다르다는 말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충성심만 우선한다면, 그건 힘센 기관의 '괴물 본색'에 힘을 실어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민주주의를 뒤흔든 국정원을 감싸고 남 원장을 지키는 행보를 계속한 박 대통령은 이런 우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희생양. 박근혜 정부가 지방 선거 승리를 위해 남 원장을 적절한 시기에 해임할 것이라는 주장이 일각에서 나온다. 물론 확인된 건 아니다. 이와 달리 박 대통령이 남 원장을 끝까지 지킬 것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어느 쪽이 맞을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남재준 해임은 국정원 개혁의 첫걸음일 뿐이라는 것이다. 제2의 남재준으로 국정원 수장의 얼굴만 바꾸는 데 그치면 곤란하다. 이를 위해 야당이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관심사다. 야권이 기초 선거 공천 논란에 갇혀 '자신들만의 새 정치 리그'에 매진하는 동안 뒷전으로 밀린 사안 중 하나가 바로 국정원 개혁 문제다. 대통령의 결단과 야권의 분투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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