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400페이지에 이르는 책을 하루 만에 다 읽었다. 여기저기 밑줄 쳐가며 구절구절 곱씹어 읽었는데도 말이다. 그만큼 재미있고 유익한 내용이다. 옌쉐퉁(閻學通) 칭화대학 현대국제관계대학원장이 쓴 <2023년: 세계사 불변의 법칙>. 작년 <역사의 관성(歷史之慣性)>이란 제목으로 중국에서 출판된 것을 고상희 선생이 번역해 지난달 글항아리에서 펴낸 책이다.
옌쉐퉁 교수는 자칭 '전형적 민족주의자'로, '과학적 예측을 고집하는 현실주의 학자'라 평가받는 '국제 문제 예측 전문가'다. 강한 민족주의 정서를 지니고 견고한 과학주의 노선을 걸으며 분명한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국제 관계를 분석하는 학자란 뜻이다.
2004년 칭화대학 국제문제연구소에 국제 관계에 대한 예측 연구팀을 만들어 과학적 방법으로 분석해 왔다는데, 시간을 한정해 예측하며 애매모호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 게 참 대단해 보인다. 예를 들어, '머지않아', '가까운 미래에', '단기간에' 등 확실하게 한정되지 않은 기간을 잡아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등의 애매한 전망을 하는 것은 검증할 수 없는 예측이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나도 이와 같은 모호한 말들을 자주 써왔는데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은 느낌이다. 진실을 말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거짓말은 결코 하지 않는다는 소신을 갖고 논리를 치밀하게 전개하는 것도 배울 만하고, 직설적인 성격이라 말이든 글이든 빙빙 돌리지 않고 똑 부러지게 표현하는 것도 맘에 꼭 든다.
이런 옌 교수가 내다보는 10년 후의 세계정세 또는 국제 구도의 핵심은 중국이 초강대국이 되어 미·중 양극체제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2023년 말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이 20조 달러로 미국의 19조 달러를 넘어서고, 군사력과 문화력에서는 여전히 미국에 뒤떨어지겠지만, 종합 국력에서 미국과 비슷한 수준이 되리라는 예측이다. 여기엔 그가 명시하지는 않았어도, 1980년대 후반부터 특히 2008년부터 미국 안팎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되어온 '미국 쇠퇴론'이 자리 잡고 있다. 중국은 지속적이고 급속도로 성장하는데 미국은 상대적으로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는 주장 말이다.
이와 아울러 2023년엔 동아시아가 세계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그는 전망한다. 이 지역에서는 미국과 중국이 서로 상대를 견제할 힘을 갖고 있어 어느 나라든 절대적 주도권을 차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두 초강대국이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세계를 주도하려 하기 때문에 이 지역의 전략적 가치가 세계 최대가 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옌 교수가 그리는 동아시아는 다음과 같다. 먼저 일본은 지역 강대국의 지위를 지키겠지만 독자적 외교정책이 없어 미국에 의존하는 가운데 경제성장이 멈춰 2류 국가로 전락하기 쉽다. 2016년까지는 중국의 급부상에 불만을 품고 미국과 동맹을 강화하며 중국에 대항하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경제적으로는 중국과, 안보적으로는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것이다.
남한은 미국과 군사동맹을 유지하지만 중국과도 군사적으로 협력하며 두 초강대국 사이에서 중립적 입장을 취하게 될 것이다. 북한은 개혁정책을 실시하면 정권을 공고히 다질 수 있다.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남북관계가 크게 진전되기 어려울 것이며, 북·미 관계 및 북·일 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질 가능성도 희박하다. 북한이 더 이상 중국의 군사동맹국은 아니겠지만, 미국이 북한과의 국교정상화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중국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이 대목에서 반감을 억누르기 어렵다. 남북한이 분단 78년이 되는 2023년까지 통일의 문턱에 이르기는커녕 한반도 평화협정조차 맺기 어려울 것이라는 그의 비관적 예측 때문이다.
한반도 통일뿐만 아니라 중국과 대만의 통일도 실현되기 어렵다고 그는 전망한다. 대만에서 자신을 중국인으로 여기는 사람은 1%도 되지 않고 대만인으로 여기는 사람은 70%를 넘게 되는 인구 구성의 변화에 따라 2023년엔 대만 독립을 추구하는 민진당이 집권하고 있을 가능성이 클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아울러 미국과 대만의 군사동맹 관계가 더욱 긴밀해져, 미·중 관계에 대만문제가 일본문제보다 더욱 부정적 영향을 미치리라고 전망한다. 이 대목 역시 나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난다. 지난 2월 11일 중국과 대만 사이에 최초로 장관급 대화가 시작되는 것을 지켜보며, 앞으로 미국의 견제와 방해가 심해지더라도 시진핑 주석의 임기가 끝나는 2023년까지 중국이 대만과 '일국양제'로 통일을 이룰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의 두루뭉술한 전망이 옌 교수의 과학적 예측을 이기긴 어렵겠지만, 그의 예측에 반기를 들고 싶은 오기가 생기기도 한다.
내 예상이 빗나가는 대목은 이 뿐만 아니다. 나는 유럽연합(EU)이 메르켈 독일 총리가 2012년 공언했듯 '머지않아' 연방국가로 발전할 것 같다고 예상해왔는데, 옌 교수는 기존 회원국 몇몇이 2023년까지 EU를 탈퇴하면서 정치통합이 진전되기 어렵다고 예측한다. EU는 독일이 유럽을 장악하는 데 활용하는 국제기구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아무튼 독일은 세계가 인정하는 유럽의 주도국이 되고, 프랑스는 보조적 지도력만 가질 것이며, 영국은 유럽에서 고립되리라고 한다.
러시아는 푸틴 대통령이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며 2024년까지 집권하더라도 과거 소련이 누렸던 초강대국 지위를 되찾기는 어려우며, 세계 제2 군사대국 자리마저 중국에 내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인도,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등도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기 어렵고 여전히 개발도상국에 머무르며, 이들을 가리켰던 '브릭스(BRICS)'라는 말조차 거론되지 않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옌 교수의 예측이 2023년 얼마나 들어맞을지 궁금하다. 그의 말대로 모든 예측은 일기예보와 마찬가지로 100% 정확할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즐겨 쓰는 말대로 99%의 가능성이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고, 1%의 가능성도 실현될 수 있다. 그의 과학적 예측을 존중하더라도, 2023년까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이룰 수 있도록 남북관계뿐만 아니라 한·미 관계 및 한·중 관계를 어떻게 조화롭게 진전시켜 나가야할지 지혜를 모아야 하지 않을까?
이태환 박사가 지은 <미중관계와 한반도의 미래>(한울 펴냄, 2013)는 중국의 부상에 따라 미·중 관계 및 한·중 관계가 어떻게 변하고 있으며 두 강대국이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무슨 입장을 취하고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한다. 조영남 교수의 <용과 춤을 추자>(민음사 펴냄, 2012)는 중국이 지역 강대국에서 세계 강대국으로 떠오르는 과정을 그리고 중국을 이끌어온 중국공산당의 성공 비결을 소개하며 한국이 중국에 대한 정책을 어떻게 세워야 할지 제안한다.
중국에 관해 공부하고 싶지만 책에 매달리기 싫으면 DVD를 즐길 수도 있다. 중국 CCTV가 2006년 11월 방송하고 EBS가 2007년 1~2월 우리말로 옮겨 방영한 <대국굴기>(다우리엔터테인먼트, 2009)는 15세기부터 세계를 이끈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소련, 미국의 강대국화 과정을 보여주며 중국 부흥의 길을 제시한다.
끝으로 잔소리 한 마디 덧붙인다. 요즘 중국의 급부상과 관련해 'G1'이란 말이 오용되거나 남용되고 있다. 2013년 중국의 무역총액이 미국을 추월하자 어느 신문은 중국이 "무역에선 G1"이란 기사를 실었다. 2013년 베스트셀러가 됐던 조정래의 <정글만리>(해냄 펴냄)에도 'G1'이란 말이 다섯 번이나 나온다. "중국이 2016년쯤에는 미국을 제치고 G1이 될 것"이라는 식이다. 2013년 출판된 중국 관련 책들은 "G1으로 향하는 중국몽", "G1 꿈꾸는 중국", "부강 중국과 G1", 등의 부제목을 달고 있다. 여기서 'G'는 '그룹(Group)'을 뜻하는 글자로 지금까지 G4, G7, G8, G20 그리고 G2 등으로 쓰여 왔다. 그러나 등수나 서열을 가리키는 약자가 아니기 때문에 G1이란 말은 부적절하다. 하나의 나라가 그룹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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