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민주화는 지난 대선을 관통한 화두였습니다. 이 화두를 잘 풀어가는 것이 박근혜 정부의 주요 과제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경제 민주화에 관한 논의는 무성하지만 이뤄진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갈 길은 멀지만 포기할 수 없는 과제인 경제 민주화를 위해 다시 한 걸음씩 내디뎌야 할 때입니다.
이에 <프레시안>은 '경제 민주화와 재벌 개혁을 위한 국민운동본부' 자문위원회와 공동으로 경제 민주화의 오늘을 짚고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기획 '경제 민주화 워치'를 진행합니다. '경제 민주화 워치' 칼럼은 매주 게재됩니다. <편집자>
올해 들어 ‘손배폭탄’이 뜨거운 사회이슈로 세간에 이목을 끌고 있다. 손배폭탄은 노조 파업이 불법이라는 이유로 사용자가 엄청난 금액의 손해배상 및 가압류를 청구하여 노조활동과 조합원생계를 파탄내는 일들을 일컬어 붙여진 표현이다.
작년 말 철도노조 파업에 막대한 금액의 손배가압류가 청구되고, 그 즈음에 쌍용차 해고자들에게 2009년 분규행위로 47억원을 배상하라는 법원 명령이 떨어지자 몇몇 진보교수가 나서서 손배폭탄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면서 시민사회의 주목받는 움직임으로 가시화되었다.
그 움직임은 곧 노동조합과 시민단체 뿐 아니라 정치·문화·예술계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얻어 지난 2월 26일에 “손배· 가압류를 잡자! 손에 손을 잡고(약칭 손잡고)”라는 범사회적인 시민연대모임의 출범을 이뤄냈다.
그 와중에, 쌍용차 손배폭탄 47억원을 십시일반으로 해결해보자는 어느 시민의 제안이 온라인으로 퍼져 아름다운 시민연대의 힘을 모아주었다. 손해배상 판결로 경제적 위기에 놓인 노동자들과 그 가족을 위해 모금을 해보자는 취지로 시작된 “노란봉투” 캠페인이 16일(2월 10∼25일)만에 1단계 목표인 4억 7천만원(9241명 참여)을 채운데 이어 2단계로 이어져 오늘(3월 9일)까지 1만 6천명으로부터 8억 5천만원을 모금하고 있다.
이처럼 “노란봉투” 프로젝트가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는 것은 유명 연예인의 동참으로 널리 알려지기도 하였지만, 우리 사회에 손배폭탄으로 고통받는 노동자들과 가족의 피맺힌 사연에 공감하여 손 잡아주려는 시민들이 적잖게 존재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최근 들어 시민단체 주도로 손배가압류의 제도개선을 모색하는 정책토론회가 열리고, 일부 진보언론을 중심으로 손배폭탄 실상과 해외사례를 소상하게 소개하는 기획기사가 연이어 게재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이 글에서는 경제민주화의 근간을 위협하는 손배폭탄 문제를 다뤄볼까 한다.
노동조합이 경제민주화의 제도적 근간이라는 점에 대해 굳이 긴 사설이 필요 없을 것이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사회에서 경제약자인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익을 지키고 개선하라고 노동조합의 자주적 결사를 헌법의 노동기본권으로 보장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헌법의 제33조 1항에 단결권·단체교섭·단체행동권을 보장한다고 엄연히 명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987년 이전까지 개발독재의 철권통치하에서 노동조합을 국가안보와 경제성장에 위협되는 존재로 다루듯 철저히 통제하였기 때문에 자유롭게 노동3권이 행사될 수 없었다.
1987년 6월의 시민항쟁을 통해 민주화가 실현됨에 따라 그동안 권위주의 정부의 강압통치와 사용주의 병영적 현장통제에 억눌렸던 노동자들의 불만이 일거에 폭발한 것이 이른바 ‘노동자대투쟁’이었다.
민주화 이후 엄청난 기세로 확산되는 신규 노조의 결성과 단체행동으로 궁지에 몰린 정부와 기업들이 새롭게 강구하여 등장시킨 대응수단이 바로 손배·가압류소송이다. 1990년대에 들어 노조의 분규행위를 억제하기 위해 문민정부가 직접 나서서 사용자로 하여금 합법·불법 파업을 가리지 말고 노조 상대의 손해배상 청구를 적극 독려하였으며, 그 결과 기업들의 손배가압류 청구소송이 부쩍 늘어났다.
1994년 대법원에서는 노조 파업에 대해 손해배상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려 손배가압류 청구가 노조의 분규행위를 억제하는 유력한 수단으로 뒷받침하는 사법적 판례가 마련되기도 하였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인력감축이나 구조조정을 반대하는 노조파업이 크게 증가하자 이에 맞서 사용자들의 손배가압류 청구건수도 늘어났으며, 그 활용방식도 크게 바뀌었다.
과거에는 손배청구가 노조 파업을 조기 종결시키기 위한 압력수단으로 활용되어 노사합의에 도달하면 취하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1998년 이후에는 손배가압류가 노조를 무력화하거나 아예 파괴하기 위한 무기로 변질되어 노사분규 종결 이후에도 취하 없이 노조 재정을 계속 옥죄거나 조합간부와 파업참가 조합원들의 생계를 핍박하는 노조탄압용 ‘폭탄’으로 등장한 것이다.
지난 2003년 두산중공업과 한진중공업에서 사측의 손배폭탄에 항거하여 자결한 배달호·김주익 열사의 사건을 계기로 참여정부는 손배가압류 남용방지를 위한 노사정협약을 체결하는 등 관련 제도개선을 추진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민사집행법에 급여가압류의 최저생계비 제외규정을 추가하는 정도로 그쳤을 뿐 그 폭탄제거를 위한 근본적인 개선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명박 정부에 들어서는 노조를 적대시하며 손배폭탄을 조장하거나 심지어 직접 투하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실제, 이명박 정부는 노조 파업이 공공질서에 손해를 안겨준다는 명분으로 화물연대와 쌍용차의 분규에 대해 손배배상을 청구하는 소송당사자로 나서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철도파업에 대한 강경대응의 일환으로 무려 116억원의 가압류와 152억원 넘는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지난 6년 동안 노조를 탄압하는 정권 분위기에 편승하여 기업들의 손배폭탄이 크게 늘어났다.
그 결과, 2013년 말 현재 민주노총 산하조직에 대해 손해배상 1129억원과 가압류 168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이 청구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최근에는 대학 청소노동자들의 노조활동 일환으로 게시된 대자보에 대해서까지 100만원 가처분이 청구될 정도로 손배폭탄의 용도가 아주 폭넓게 확대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노동조합의 파업은 노동력의 제공을 거부하여 사용자에게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행사하려는 평화적인 분규행위이며, 헌법에서 보장하는 단체행동이다. 물론, 노동조합이 파업과정에서 사용자의 생산시설을 파괴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불법행위가 발생하는 경우에는 형사상 처벌이나 민사상 손해배상이 부과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 노사관계현실에서는 노무공급을 거부하는 노조의 정당한 파업행위에 대해 기업경영에 손실을 주었다거나, 사회이익을 해쳤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업무방해의 형사처벌과 더불어 엄청난 손배폭탄을 안겨주는 일이 빈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노조의 정상적인 활동이 크게 위축되는 것은 물론이고, 손배가압류 대상의 조합원들이 경제적 압박과 심리적 고통에 시달리며 가정파탄이나 심지어 자살에 이르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이처럼 손배폭탄의 심각한 폐단이 드러나고 있음에도 오히려 그 활용빈도가 늘어나고 있는 배경에는 노동조합의 단체행동을 죄악시하거나 용납치 않으려는 정부와 기업의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 일차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지만, 현행 관계법령이나 사법부의 판결에서 손배폭탄을 조장하는 제도적 허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합법적인 노조 쟁의행위를 협소하게 제한하거나 업무방해죄로 몰아가고 있으며 손해배상책임의 주체와 대상범위가 지나치게 포괄적이라는 문제점들이 지적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대한민국에서 노동조합이 합법적인 파업을 전개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힘들고, 파업에 참가하는 노동자가 패가망신하기는 다반사가 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그동안 손배폭탄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개선과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논의-제시되어온 것으로 판단되므로, 여기서는 그 과제의 성취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살펴보는 것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현실적으로 손배폭탄을 제거하는 길은 크게 두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가 손배폭탄 관련 법률을 개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가 현행법률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이 바뀌는 것이다.
사실, 두가지 해결책 모두 현재 상황을 감안할 때 바라기가 쉽지 않은 길이다. 박근혜 정부와 여대야소의 의회가 손배폭탄의 문제 심각성을 인정하여 노동조합의 파업권을 보장-확대하는 관령 법령개정을 나서서 추진할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또한, 사법부 역시 그동안 노동사건에 대해 경제적 논리를 우선시하는 보수적인 평결태도를 쉽게 바꿀 것 같지 않다. 이같은 제약조건하에서 손배폭탄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동력은 노동-시민의 아름다운 연대에서 찾아질 수 밖에 없을 듯하다.
1987년의 민주화함성이 정치민주화를 이뤄냈다면, 이제는 경제민주화를 위해 노동기본권이 온전히 지켜지는 나라가 되게끔 정부와 국회 그리고 사법부가 손배폭탄의 제거에 나서도록 노동조합과 시민사회가 함께 거대한 아우성을 연출하는 공적 드라마가 필요하다.
그 아우성의 울림이 국민 다수의 열망과 성원으로 발전되어 박근혜정부 조차 손배폭탄 제거의 해법 찾기에 나서지 않을 수 없도록 말이다. 그런 희망을 안고 “손잡고”와 노란봉투의 힘찬 활약을 기대하고 성원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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