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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맞았으면, 책을 버렸어야지!

[금정연의 '요설'] 플로베르의 <부바르와 페퀴셰>

☞금정연의 '요설' 이전 이야기 바로 가기 :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제24장> 자연의 빛에 의한 진리탐구 혹은 불행한 독서


1.
언젠가 데카르트는 이렇게 썼다.

유년기에 내가 얼마나 많이 거짓된 것을 참된 것으로 간주했는지, 또 이것 위에 세워진 것이 모두 얼마나 의심스러운 것인지, 그래서 학문에 있어 확고하고 불변하는 것을 세우려 한다면 일생에 한 번은 이 모든 것을 철저하게 전복시켜 최초의 토대에서부터 다시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이미 몇 해 전에 깨달은 바가 있다. 그런데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일을 적절하게 실행할 수 있는 성숙한 나이가 되기를 기다렸다. (<성찰>(이현복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 34쪽)


자, 그러니 우리도 그렇게 하자. 아마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늙었거나 조금 어리겠지만, 상관없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할 자격이 있고, 엄밀히 말하자면 그렇게 해야만 한다. 유년기에 우리가 얼마나 많이 거짓된 책을 참된 책으로 간주했는지, 또 이것 위에 세워진 독서가 모두 얼마나 의심스러운 것인지, 그래서 독서에 있어 확고하고 불변하는 것을 세우려 한다면 일생에 한 번은 이 모든 것을 철저하게 전복시켜 최초의 토대에서부터 다시 새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장마철 곰팡이처럼 어느새 집안을 점령한 책 더미에 불을 싸지르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쁜 습관이 만든 운명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부바르와 페퀴셰는 그러지 못했다. 행운이 그들을 찾아왔고, 이미 성숙한 나이였으며,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쁜 습관이 그들을 망쳤다. 한 마디로, 계속해서 책을 읽은 것이다. 슬퍼라.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읽는 내내 내게 찾아온 기회에 감사를 해야만 했다. 마감이라는 시간에게. 만약 그것이 아니었다면 나는 결코 데카르트를 떠올리지도 않고, 이런 글을 지어내지도 않았을 테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2.

▲ <부바르와 페퀴셰 1>(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진인혜 옮김, 책세상 펴냄). ⓒ책세상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두 남자가 길 양끝에서 걸어왔다. 키가 크고 좋은 혈색에 금발의 곱슬머리를 가진 호쾌한 인상의 남자와 가발을 쓴 듯 곧고 검은 머리에 짧은 다리, "밑으로 길게 내리뻗은 코 때문에 마치 옆모습처럼" 보이는 얼굴을 가진 진지한 표정의 남자다. 그들은 더위를 식히기 위해 같은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동시에 모자를 벗었다. 어느 모로 보나 닮은 구석이 없는 한 쌍이다. 하지만 이내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상대방의 모자 안쪽에 이름이 적혀 있다는 사실을 알아보았다고 해야겠지만.


"저런! 우리는 똑같은 생각을 했군요. 모자에 이름을 써두는 것 말입니다."
"정말 그렇군요! 사무실에서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죠!"
"저도 그래요. 저도 사무원이거든요."
그들은 서로 바라보았다.
부바르의 사랑스러운 모습은 곧 페퀴셰를 매료시켰다.
(…)
페퀴셰의 진지한 모습은 부바르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플로베르 지음, <부바르와 페퀴셰 1>(진인혜 옮김, 책세상 펴냄) 8쪽)


"시골에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진지한 페퀴셰가 말을 꺼냈고, 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끼던 호쾌한 부바르도 동의했다. 그리고 그들은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며 보도를 건너는 한 주정뱅이를 보며 노동자에 관한 정치적인 대화를, 결혼식 광경을 보고 여자에 관한 대화를, 창녀가 군인과 함께 걸어하는 모습을 보면서는 외설스러운 이야기를, 산책하는 신부를 보고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그들은, 여자들이란 경박하고 까다로우며 고집쟁이라고 선언했다. 여자들은, 때로 남자들보다 더 나은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대개의 경우 더 위험한 존재라는 것이었다. 요컨대, 여자 없이 사는 게 더 나았다. 그래서 페퀴셰는 독신 생활을 하고 있었다.

"저도 홀아비입니다. 자식도 없고요."
부바르가 말했다.
"그건 어쩌면 당신에게는 다행한 일인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고독도 오래 지속되면, 비참한 일이었다. (10쪽)


물론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결혼을 앞두고 있는 새신랑으로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비록 저 부분에 밑줄을 긋긴 했지만 그건 가위표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편집자는 아니지 않은가?


아무려나, 그들의 대화는 지칠 줄 모르고 계속 이어진다. 시시콜콜한 신변잡기와 개똥철학을 늘어놓기도 하고, "토목국, 담배의 전매사업, 상업계, 연극계, 항해술을 비롯해 모든 인간에 대해 마치 큰 환멸을 겪은 사람들처럼 비난"하기도 하면서 마치 잃어버린 반쪽을 찾은 듯 샘솟는 기쁨과 애정을 느낀다. 자고로 친해지는 데에는 다른 사람 욕만 한 것이 없는 법이다.


벤치에 엉덩이를 붙인 채로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누군가 그들을 보았다면 별 수다스러운 양반들도 다 있다고 생각했겠지. 사실 그들은 몇 번이나 자리를 일어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매혹으로 다시금 자리에 앉아야 했고, 겨우 엉덩이를 뗀 후에도 차마 헤어질 수가 없어 가로수 길을 위에서 아래로 몇 번이나 왕복해야만 했다. 마침내 안타까운 이별의 순간이 찾아왔지만 그들은 결코 수줍은 소년들이 아니었다. 적어도 부바르는 그랬다.


마침내 헤어지려고 악수를 할 때, 부바르가 불쑥 말했다.
"우리 함께 저녁 먹으러 갈까요?"
"저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제가 먼저 제안할 용기가 없었지요." (11쪽)

부바르는 쾌적한 식당으로 페퀴셰를 안내했고, 그곳에서 그들은 대화를 이어나갔다. 의학과 과학에 대해, 학문의 위대함에 대해. 그리고 그들은 모자에 이름을 적어놓는 습관보다 더욱 결정적인 공통점을 찾아내는데 성공한다. 그들은(바틀비와 아까끼예비치, 그리고 내가 그런 것처럼) 필경사였던 것이다! 더욱 친밀해진 그들은 커피숍을 향한다. 그곳에서 부바르는 페퀴셰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당구공과 큐대를 가지고 묘기를 부리다 주인과 시비가 붙지만, 폐퀴셰가 나서서 부바르의 편을 들어주었다. 비록 쫓겨나기는 했지만 카페 따위는 아무 상관없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눈앞에 있는 상대방뿐이었다.


3.
처음 만난 사람을 집으로 부르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한가? 일주일? 보름? 한 달? 그렇게 생각하는 당신은 아직 젊고, 인생에 남은 시간이 많다고 믿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부바르와 페퀴셰는 아니었다. 그들은 마흔일곱 살의 동갑내기 아저씨였고, 인생이 길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 만난 사람을 다짜고짜 집으로 초대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페퀴셰의 집은 평범했다. 온통 책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부바르는 아마도 냄새 때문인 듯 창문을 열어도 되냐고 물었고, 페퀴셰는 서류 뭉치가 날아가서 안 된다며 거절했다. 페퀴셰는 굳이 창문을 꼭꼭 닫아놓은 더운 방에서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그런 그에게 부바르가 말했다. "저 같으면, 플란넬 내복을 벗어버리겠어요!" 과연, 거침없는 아저씨들이다.


하지만 진지한 페퀴셰는 내복을 벗지 않는다. 그는 건강용 플란넬 내복을 벗는 일이 생각만 해도 두려워 고개를 숙이며 대신 바람을 좀 쐬러 나가자고 제안한다. 산책이 어느 틈에 배웅으로 바뀌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플로베르는 말하지 않고 나도 궁금하지 않다. 어차피 그들은 헤어질 생각이 없었고, 그리하여 페퀴셰는 꽤 먼 거리에 있는 부바르의 집에까지 따라갔다. 진지하지만 그 역시 속은 영락없는 상남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금 이야기를 나눈다. 출근을 위해 그들이 어쩔 수 없이 잠자리에 들어야만 하는 시간이 찾아오기 전까지.


"우리가 아까 산책하러 나가지 않았다면, 서로 모르는 채 죽을 뻔했지요."
그들은 직장의 주소를 교환하고 작별인사를 했다.
"여자와 재미 보러 가지는 마쇼!"
페퀴셰는 짓궂은 농담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16쪽)

다음날, 아침부터 부바르가 일하는 가게를 찾은 페퀴셰는 기쁨에 겨워 이렇게 소리쳤다.


"병이 나지 않았어요! 그것을 벗어버렸는데요!"
"뭐 말이오!"
"그거요!"
페퀴셰는 자기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16쪽)


4.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며 그들은 서로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소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생계를 위해 온갖 직업을 전전해야 했던 페퀴셰의 배움에 대한 열망이나, 부바르의 다소 복잡한 가계와 여섯 달 만에 돈을 가지고 달아난 전 부인은 서로에게 아무런 흠도 되지 않았다. 상대를 알아갈수록 그들의 우정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여기서 문득 그들이 과연 서로의 어떤 점에 끌린 것인지 궁금해진다. 그다지 매력적인 인물들로는 보이지 않는 탓이다. 플로베르는 굳이 시시콜콜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대가다운 솜씨로 이렇게 말할 뿐이다.


그들은 곧 눈에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서 묶이고 말았다. 게다가 서로에 대해 느끼는 그들의 호감을 어떻게 설명할까? 한 사람의 하찮은 특징이나 가증스러운 결점과 같은 것들이 왜 상대방의 마음을 끄는 것일까? 첫눈에 반한다고 하는 것은 열정의 세계에 있어서는 진실이 아닐 수 없다. 일주일도 되기 전에 그들은 서로 말을 놓았다. (18쪽)

그들은 골동품 상점이 늘어선 거리를 산책하고, 공예 학교, 대성당, 국영 공장, 기념관 그리고 모든 공공 전시장을 함께 다닌다. 가끔은 영국인이나 외국인인 체하면서 즐거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명암이 있는 법. "생각이 많아질수록 그들은 더욱 많은 고통을 느꼈다."(20쪽)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난 그들은 머리를 합쳐 세상의 모든 비밀을 풀고 싶어 했지만, 그러기엔 그들이 가진 학식과 시간이 너무 짧았던 것이다. 단조로운 사무실도 지겨워졌다. 예전에는 괜찮다고 생각했던 동료들이 이제는 어리석게만 느껴졌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게다가 날마다 지각을 해서 상사에게 혼나기 일쑤였다.


이전에 그들은 그런대로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존심을 갖게 되면서부터 그들은 자신들의 직업에 굴욕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혐오감 속에서 서로 힘을 북돋워주고, 서로 칭찬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아껴주었다. 페퀴셰는 부바르의 거친 면을 닮게 되었고, 부바르는 페퀴셰의 우울함을 다소 지니게 되었다. (21쪽)


한 마디로, 그들은 벗어나고 싶었다! 이 지루한 세상을 떠나 그들만의 집을 갖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가기 위해서 그들은 일을 해야만 했고, 자유로운 광장의 곡예사나 넝마주이가 될 수도 없었다.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직장 00년차의 대한민국 선남선녀들이 흔히 하는 고민을 그들 또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그들에게도 이렇게 저주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이나 희망은 없었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로또가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겠다.


하지만 행운은 그들의 편이었다. 그들에게는 로또보다 더 강력한 유산이 있었던 것이다! (복잡한 가계도 덕에) 엄청난 유산의 주인이 되었다는 전보를 받은 부바르. 서로를 바라보는 그들의 입술은 떨리고 있었고, 멍한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러저러한 절차 끝에 마침내 거금을 손에 쥔 부바르의 첫마디는 이랬다.


"우리 시골로 은퇴하기로 하자!"
자기의 행복에 친구를 결부시킨 이 말을 페퀴셰는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두 사람의 결합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깊었기 때문이다. (25쪽)


바로 여기에서 끝났다면 좋았을 텐데. 행복해 하는 그들의 모습이 정지된 채 갈색으로 물들고, 맛없기로 유명한 커피 체인점의 배너가 올라가며 '꾸쥬워마걸~'이라는 가사를 가진 국적 불명의 노래가 나왔다면 아름답고 행복한 이야기로 남을 수 있었을 텐데. 부바르와 페퀴셰에게는 불행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플로베르가 그렇게 호락호락 할 리 없고, 위의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아직 25쪽밖에 읽지 못했다(그리고 <부바르와 페퀴셰>는 2권이다). 아직 가야할 길이 먼 내 입장에서도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다.


5.
그들은 한적한 시골에서의 새로운 삶을 계획한다. 자연과 더불어 일하고, 아름다운 종달새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며, 나막신을 신고 저녁을 먹는 꿈! 그들은 멋대로 살기로 마음먹고,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하기 시작한다. 연장통과 저울, 측량기, 욕조, 온도계와 기압계. 좋은 문학 작품이 몇 권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긴 했지만, 그들은 이내 생각을 바꾼다. 그들 인생에서 가장 훌륭한 선택이었다.


그들은 문학 서적을 구해보았지만, 과연 그런 책이 정말로 서재의 장서가 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부바르가 딱 잘라 말했다.
"이봐, 우리에겐 아마 장서가 필요 없을 거야." (27쪽)


부바르가 자신의 호언장담을 지킬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책 없는 삶이라니. 그런 천국은 과연 어디 있을까? 하지만 공동생활을 앞둔 모든 남자들이 그렇듯 그의 말 또한 지켜질 리 없는 것이었다.


부바르와 파퀴셰의 모든 불행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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