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맨 출신 목사 서세원 씨가 만든다는 이승만 전 대통령 영화가 논란이다. 제작을 추진하는 이들의 그간 행보를 볼 때, 역사 연구 성과 및 다수 국민의 상식과 동떨어진 영화가 나오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13일 열린 '<건국 대통령 이승만> 영화 제작을 위한 시나리오 심포지엄'에서는 눈길을 끄는 발언이 여럿 나왔다. 관련 보도를 종합하면 이렇다. 서 씨는 "빨갱이들로부터 이 나라를 지켜야 한다"고 했다. 이 전 대통령이 1941년에 쓴 책에서 일본이 미국을 침략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이게 들어맞았다며, 기독교인인 이 전 대통령에게 "하나님이 예지력을 주셨다"고 말했다. 서 씨는 이 전 대통령에 대해 공부를 많이 했다며, "이승만은 친일파라고 배웠"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는 이야기도 했다.
이승만 예찬만 하지는 않겠다는 뜻도 밝혔다. 서 씨는 영화에 "공과 과를 다 넣겠다"고 말했다. "이승만 나쁜 놈, (노무현 전 대통령을 그린) <변호인> 나쁜 놈 하지 말자"고도 했다. 이승만 영화 제작이 끝나면 "김구 선생님"과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을 다룬 영화도 만들 것이라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 된다"고 말했다.
눈길을 끄는 발언을 한 건 서 씨만이 아니다. 행사 사회를 맡은 정미홍 전 KBS 아나운서는 "다음 영화의 주인공은 김구가 아니라 박정희가 돼야 한다"고 말해 참석자들의 박수를 받았다. 영화에서 이 전 대통령의 과오를 다룰 때 "오늘의 잣대로 당시의 과를 평가해선 안 된다"고도 했다. 정 전 아나운서는 박원순 서울시장 등에게 '종북' 딱지를 붙여 논란을 불러일으킨 인물이다. 또한 전광훈 목사는 이 영화의 감독을 구하기 어려웠다며 "영화 제작 관계자의 90퍼센트 이상이 좌파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밖에 "하늘이 내리신 대통령" 등의 표현으로 이 전 대통령은 한껏 치켜세우고 노 전 대통령은 깎아내리는 참석자도 있었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은 민간인 학살과 김구 암살 등을 어떻게 다룰까
이제 발걸음을 떼는 영화를 미리 재단하고 싶지는 않다. 그간 이뤄진 연구 성과와 역사의 흐름을 충실히 반영해 이 전 대통령을 재조명하는 영화는 필요하다. 그러나 이날 심포지엄 내용은 이 영화에 대한 우려를 더하기에 충분하다. 걱정이 드는 대목 몇 가지만 살펴보자.
우선 "빨갱이들로부터 이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걸 강조하면서 이승만이라는 인물을 공정하게 재조명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현대사를 돌아보면 이 점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른바 '빨갱이 사냥'은 이승만 세력이 애용한 무기였다. 4.3사건 당시 제주도민, 국민보도연맹원을 비롯해 수많은 민간인을 억울한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규모는 수십만에 이른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모든 책임을 이승만 한 사람에게 돌릴 수는 없지만, 이승만이 그 막중한 책임의 상당 부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여러 학자의 연구 결과다.
'빨갱이 사냥'을 내세운 정치 공세 대상에는 이른바 좌파와는 거리가 먼 정통 우익도 포함됐다. 이승만의 정적이던 백범 김구가 대표적이다. 해방 후 이승만과 함께 우익의 지도자로 꼽히던 김구는 1948년 초 이승만과 결별하고 분단을 막고자 남북 협상에 임하면서 이념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김구 암살 사건에서도 이 점은 잘 드러난다. 기록에 따르면, 법정에서 안두희는 "이 자리에서 공산당과 (김구의) 한독당이 같은 노선이 아니라는 사람이 있으면 손들어라"라고 한껏 외쳤다. 법정 안에서는 안두희를 "애국 청년"으로 칭송하는 삐라가 돌고 바깥에서는 "안두희 의사"를 치켜세우는 벽보가 붙었다.
이승만과 함께한 친일파가 그런 안두희를 비호했다는 것은 백범 암살 진상 규명 운동과 학계의 연구를 통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이 전 대통령이 백범 암살과 직접 관련돼 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안두희가 "의사", "애국 청년"으로 여겨진 건 이승만 세력이 '빨갱이 사냥'을 통해 극단적인 극우 반공 체제를 지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음은 분명하다. 안두희가 김구 암살 후 오히려 특별 진급을 하고, 1960년 4월혁명으로 이승만이 쫓겨나기 전까지 편안히 살 수 있었던 것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런 문제들을 제대로 조명하지 않는다면, <건국 대통령 이승만>은 적잖은 이들이 우려하는 것처럼 '과도한 이승만 띄우기'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단독 정부를 추진한 이승만을 띄울 경우 김구의 남북 협상은 '건국 방해'로 간주되며, 그 경우 안두희의 범죄는 '건국'을 방해한 김구를 죽인 의로운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건 논리적으로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이승만 추앙 세력 사이에서는 남북 협상을 '건국 방해'로 치부하는 이야기가 지금도 나온다.
공과를 모두 다루겠다는 서 씨의 발언과 달리, 자칫하면 "김구 선생님"을 암살하고도 안두희가 "의사"로 여겨지며 편히 살 수 있었던 시대의 부활을 촉진하는 교두보 역할을 하는 영화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영화는 서 씨도 바라지 않으리라 믿는다.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부르는 것이 적절한지도 여전히 논란이다.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임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세운 건국 대통령이라는 주장은 수많은 학자와 독립 운동가를 비롯한 많은 이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때 벌어진 '건국절' 논란에서도 이 점은 잘 드러난다. 당시 뉴라이트 등 일부 세력이 멀쩡한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는 데 앞장섰다가 엄청난 반발을 불렀다. 민간인 학살 등 이승만 정권의 숱한 문제점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대신 이승만 띄우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이었다. 고령의 독립 운동가들은 훈장 반납까지 결의하며 반대했다.
그렇게 해서 '건국절'은 무산됐지만 이 전 대통령을 '건국 대통령'으로 부각하려는 일부 인사들의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건국 대통령'으로서 이승만을 조명한다는 서 씨가 '건국절' 파동의 교훈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지 주의 깊게 지켜볼 일이다.
비판의 핵심은 '이승만=친일파'가 아니라 이승만의 친일파 비호
마지막으로 서 씨의 발언 중 두 가지를 짚고자 한다. 하나는 "이승만은 친일파라고 배웠"다고 한 부분이다. 어디서 그렇게 배웠는지는 모르겠으나, 맥락상 이 전 대통령을 추앙하는 이들은 아닐 터. 그렇다면 이 전 대통령을 비판하는 이들을 겨냥한 듯한데, 서 씨가 잘못 짚은 게 아닌가 한다. 많은 사람이 친일 문제와 관련해 이 전 대통령을 비판하는 핵심은 '이승만=친일파'가 아니다. 독립 운동가들을 고문하고 숱한 한국인을 괴롭힌 친일 경찰을 비롯한 친일파를 이승만이 비호하고 자신의 권력 기반으로 삼은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 결과, 반민특위가 습격당하고 친일 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제가 무산됐던 건 세상이 다 아는 일 아닌가. 덧붙이면, 이 전 대통령이 집권기에 일본에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는 건 이 전 대통령을 비판하는 학자들의 책에도 명확히 나오는 이야기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예지력을 주셨다"는 대목이다. 그런 능력을 정말 주셨는지 신에게 확인할 수는 없지만, 미국과 일본의 충돌 가능성을 이야기한 한국인은 이승만 한 사람이 아니다. 이승만이 1941년이 돼서야 처음 이야기한 것도 아니다.
예컨대 국내 신문에도 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1924년 <동아일보> 사설(12월 27일자)에는 일본, 미국, 영국 등의 집권자들을 볼 때 극동과 태평양에서 장차 상당한 파란이 일어날 것이고 강자는 강자들 간의 싸움에서 스스로 무너질 것이라는 내용이 실렸다. 1925년 <동아일보>에 실린 논설은 더 구체적이다(8월 28일부터 9월 6일까지). 미국과 러시아는 언젠가 일전을 겨룰 수밖에 없으며, 미국과 러시아의 전쟁으로 가는 도정에서 미국과 일본은 중국 문제를 둘러싸고 충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를 감안하면, "하나님이 예지력을 주셨다"는 발언은 듣기 민망한 게 사실이다. 지난해에 박정희 전 대통령을 "반신반인(半神半人)"으로 신격화해 논란을 부른 구미시장의 말을 떠오르게 만드는 발언이다.
한때 서 씨를 보며 웃었던 국민들이 서 씨의 영화를 보며 쓴웃음을 지어야 하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쓴웃음을 주는 건 주가 조작 및 자금 횡령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던 과거의 일로 이미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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