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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제국의 부활, 한반도의 운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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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제국의 부활, 한반도의 운명은?

[동아시아를 묻다] 제국의 진화

남북과 양안

갑오년, 통일론이 분출한다. 남북만은 아니다. 양안도 그러하다. 대륙과 대만(타이완) 사이 뼈를 담은 말이 오고 갔다. 시진핑은 이렇게 말했다.

"양안의 오래된 정치적 분열은 점진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문제를 결코 다음 세대까지 남겨줄 수도 없다." 집권 10년의 청사진을 담은 중국 공산당 3중전회에서의 발언이었다. 양안 문제 해결의 긴박성을 촉구하며, 과거의 사고방식에 얽매이지 말라는 지시도 내렸다. 각별하다.

마잉주도 간접적으로 화답했다. 화어권 최고의 권위지인 <아주주간(亞洲週刊)> 신년 특집 인터뷰에 응했다. 올해 가을 베이징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서 시진핑과의 회담을 원한다는 뜻을 공개리에 천명한 것이다. 그는 집권 6년간 양안 간 직항로를 허용하고, 대륙에 진출한 대만인의 권익을 보호하는 방안을 강구했으며, 대륙 학생의 대만 유학을 수용하기도 했다. 이미 대만에 유학한 대륙 학생의 경험담이 십수 권 째 출판되었다.

그러나 대만의 여론지형이 녹록치는 않아 뵌다. 2016년 총통 선거에서 국민당의 재집권을 장담키 어려운 형국이다. 물론 민진당이 정권을 회수한다 해도 기존 정책을 철회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속도를 더 내는 것 또한 힘들 것이다. 집권 초기의 시진핑과 집권 말기의 마잉주가 만나야 할 서로 다른 이유가 있는 셈이다. 국공 합작을 도모할 조건은 갖추어졌다.

남북 정상 회담이 두 차례 열렸던 것과는 달리 양안 간 정상은 마주한 적이 없다. 마오쩌둥과 장제스의 분열 이래 한 갑을 넘겼다. 이순(耳順)이 지난 것이다. 귀가 순해질 때도 되었다. 마침 시진핑과 마잉주 모두 1950년대 출생이다. 1949년의 분열 이후 태어나, '두 개의 중국'에서 60년을 살았다. 살아있는 동안 아버지 세대('신청년')의 갈등과 분열을 치유할 역사적 책무를 나누어 갖는다. 올 가을 '세기의 회담'을 기대해보는 까닭이다.

시진핑이 언급한 '과거의 사고방식'이란 '92년 컨센서스'로 짐작된다.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여전히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1992년 이래 양안은 주권(主權)은 상호 불인정하지만, 치권(治權)은 상호 부인하지 않다는 원칙을 고수한다. 양쪽 모두 '하나의 중국'이라는 대원칙을 지지하되, 각자가 그 '하나의 중국'을 대표한다고 자임해온 것이다.

원칙의 공유와 해석의 자유에 기대어 '선경후정(先經後政)'이 추진되었다. 경제 합작을 우선하고, 정치 합작은 미루어 둔 것이다. 그러나 양안 간 경제 통합이 벌써 일정한 수준을 넘어섰다. 일본과 미국과의 네트워크로 100년을 지속했던 대만은 이미 대륙과 긴밀한 생활권, 생활망을 형성했다. 정치 의제가 부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부지불식 간 통합에서 통일로 이행 중이다.

그래서 새삼 주목되고 있는 것이 중국 공산당 원로였던 왕따오한(汪道涵)의 발상이다. 그는 1999년 대만 인사와의 접견 자리에서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분열을 넘어서서 '중국'으로 통일하자는 견해를 제기했던 바 있다. '두 개의 중국'에 새겨진 좌우 갈등, 이념과 정권의 다툼이라는 100년의 흔적을 지우고 중국의 역사와 문화에 기초하여 하나가 되자는 것이다.

과연, 中國이란 두 글자는 퍽이나 의미심장하다. 반만 년 문명 전통이 함축되어 있을뿐더러, 100년의 근대화도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진한에서 명청에 이르기까지 누천년을 지속했던 왕조의 이름이 아니다. 공화국의 국명으로 '중국'이 부상한 것이다. 정녕 역사상 처음으로 '中國'을 국호로 삼는 국가가 등장할 것인가?

제국의 진화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을 넘어서 제기된 '중국'이 구호로만 그치지도 않는다. 그 내실을 다지는 제도적 방안을 천착해온 지식인으로 중국인민대학의 카오팡(高放)이 있다. 그는 대륙은 조국 통일을 완수해야 하고, 대만은 그 독립성을 보전하며 국제적 활로를 보장받아야 한다며 대국이 소국을 품는 방식의 제국형 통일을 궁리한다.

국가 안에 국가가 존재하는 정치 형식의 탐구로 근대 국가의 문법을 돌파하는 '새 정치'라고 하겠다. 그리고 '새 정치'는 '옛 정치'와 통한다. 멀리는 중세 유럽의 카롤링거 제국이 거론된다. 노르망디 공국을 품어서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발양했다고 한다. 가까이로는 1876년 성립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있다.

제국형 통일 방안은 연방제도 아니며, 연합제도 아니다. 대륙과 대만 간의 현저한 비대칭성과 불균등함을 고려하자면 연합제와 연방제는 적절치 않은 탓이다. 짐작컨대 티베트, 신장, 내몽골을 품고 있는 대륙의 입장에서도 연합·방은 부담스러울 법하다. 이들 자치구의 면적이 대만에 비해 훨씬 크다.

그렇다고 홍콩과 마카오식의 행정 특구도 적합하지 않다. 무엇보다 1894년 갑오 청일 전쟁 이래 대만과 대륙이 경험한 100년의 역사가 판이하다. 대만이 일본의 식민지였을 때 대륙은 항일 전쟁을 거듭했고, 대만이 미국의 반공 기지였을 때 대륙은 사회주의의 시행착오를 반복했다.

대만의 민주화 이행과 대륙의 개혁 개방 또한 상이한 경로였다. 따라서 한때나마 독립 기운이 고조되었을 만큼 별개의 국가적 정체성을 강화해 온 대만의 사정을 넉넉히 끌어안아야 한다. 정치(政治)보다는 덕치(德治) 쪽이다. 즉 신장·티베트·내몽골과도 다르고, 홍콩·마카오와도 다른 별개의 독자적 구역으로 삼을 일이다.

그리하여 대만=중화민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수교한 국가들에도 공사와 대사관 파견이 가능하다는 파격적 발상이 등장한다. 전혀 터무니없는 구상도 아니다. 선례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리 먼 과거의 일도 아니다. 소련이 그러했다. 즉 소비에트연방에는 '독립 국가'들이 존재했다. 그래서 소련은 유엔에서도 3개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이었다. 중화민국도 '중국' 안에서 그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카오팡의 제국형 통일론이 매우 인상적임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등잔 밑이 어둡다는 느낌을 떨치기도 어렵다. 구태여 카롤링거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소비에트연방으로 우회할 것도 없다. 대청제국이야말로 그가 모색하는 '中國'에 값하는 제국형 통일 모델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대청제국은 중원과 북방을 통합적으로 지배했다. 중원은 중화 세계의 전통적 통치 방식인 행성(行省)을 매개로 직접 지배하고, 북방은 토착 지배자(몽골과 회강은 왕공, 티베트는 승려)를 통하여 간접적인 지배를 시행했다. 그래서 비중화 세계는 정치적, 문화적으로 중원에 종속되지 않는 독자적인 지역으로 지속할 수 있었다.

물론 베이징에 이번원(理藩院)을 두어 번부와 관련된 사무를 총괄케 했다. 또한 번부에 주방장군(駐防將軍), 도통(都統), 대신(大臣) 등의 중앙 관료를 파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해당 지역에 대한 '관리'의 차원이었지 '통치'의 차원은 아니었다. 즉, 제국의 주권을 명확히 해두는 조치에 그치고, 실질적 통치는 현지의 지배자 혹은 종교적 권위자들이 담당했다. 이른바, 주권과 치권의 분리이다.

이로써 대청제국은 중원의 유교 세계, 몽골과 티베트의 불교 세계에 이어 이슬람 세계를 통합하는 보편 제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대청제국의 지배자는 황제이자 현신불(現身佛)이며, 유목 세계의 대칸이면서 이슬람의 보호자로서 보편적이면서도 변화무쌍한 모습을 과시했다.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을 아울러서 등장하는 '中國' 또한 이러한 제국형 정치체에 방불할 것이다. 중원에서는 사회주의의 수호자이며, 홍콩·마카오에서는 자본주의의 후원자이자, 대만에서는 독자적 군대마저도 허용하며 '대만 민주'의 지속을 보장하는 것이다. '주권'을 확보하되, '치권'은 지역의 토착 지배자들에게 아웃소싱하는 '복합 국가'이자 '제국'으로 대일통(大一統)을 완수하는 것이다.

즉, 중국은 100년을 거듭하여 제국에서 국민 국가로 이행했던 것이 아니다. 장기 지속하는 제국의 근대화, 혹은 제국의 진화를 달성하고 있는 것이다. 지구상 유일한 '지속의 제국'인 저들의 역사 감각에 비추어 보자면, 100년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니다. 새 국가의 기초를 닦아 성세를 다짐하는 준비 기간에 그친다. 우리 '근대인'들의 시간 감각이 너무나 얕고 밭았던 것이다. 호흡이 좀체 짧다.

백년대계

제국의 진화는 지식과 사상의 지각 변동을 수반할 것이다. 정치학 교과서는 다시 쓰일 것이다. 말은 고쳐 잡고, 패러다임은 전환된다. 부국강병을 목적으로, 민족주의를 수단으로 삼았던 유럽형 국민 국가는 기각될 것이다. 만국의 만국에 대한 투쟁을 촉발함으로써 천하를 어지럽히고 엔트로피를 증폭시키는 산업 혁명 시대의 예외적 정치체로 기록될 것이다. 전국 시대의 일시적인 정치 형식에 불과했던 것이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또한 제자백가의 일파였을 뿐이다. '동양적 전제'라 폄하되었던 제국은 재평가될 것이다. 안정과 통합, 질서와 위계가 재조명되고 재조망될 것이다.

머지않아 5·4 운동 100년이 다가온다. 2019년, 코앞이다. 중국 공산당 창당 100년(2021년)도 잇따른다. 그 전후로 동서 문화 논쟁 제2막도 개시될 것임을 예감해 본다. 20세기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연출될 것이다. '신청년'이 모셨던 동구파와 서구파는 흐릿해질 것이다. 100년간 고독했던 동방파가 약진할 것이다.

그 와신상담의 끝에서 양안의 화해도 자리할 것이다. 즉, 양안 간 통합과 통일은 국공 합작, 좌우 합작에 그치지 않는다. 그 기저에 고금 합작이 자리한다. 계몽의 변증법으로 중화를 복원하고 신동방을 창출하는 것이다. 즉, 중국의 통일은 100년 근대화의 완성인 동시에, 누천년 문명의 계승이기도 하다. 따라서 '中國'의 새 헌정 또한 자유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닐 것이다. '천하위공'을 제 1사표로 삼는 고전적 국가의 재림일 것이다.

허황한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인가? 아닌 것 같다. 아닐 것이다. 옛 것을 익히면 새 것을 안다고 했다. 옛 것을 배워서 새 것을 일군다고도 했다. '역사의 종언'은 종언을 고하고 '역사의 관성'이 기지개를 켠다. 대륙과 대만은 고전문명의 만개, 르네상스를 향하여 성큼성큼 나아간다. 미래를 향해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

남북의 통일론은 어디쯤에 와 있나? 2019년은 우리에게도 각별하다. 3·1 독립 운동 100주년이다. 2019년의 3·1절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2045년 해방 100년은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2050년 한국전쟁 100년은 또 어떻게 기념할 것인가?

갑오년의 통일론에도 백년대계가 없다. 뜬금없는 대박론에는 여전히 부국강병과 강성대국의 미망이 자욱하다. 20세기형의 발상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사상(思想)이 부재한 탓이다. 사상(史像)이 어긋나 있기 때문이다. 역사 감각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자유민주주의'로 통일하자는 허언이 새어나온다. 1991년 이래 자유민주주의는 쇠잔해지고 형해화하고 있다. 일관된 추세이다.

목하 동(East)과 서(West)가, 고(古)와 금(今)이 반전한다. 시세(時勢)에 걸 맞는 백년대계를 세워야 하겠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

▲ 1919년 5월 4일, 중국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서 일어난 5.4 운동은 반제, 반봉건 혁명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지금, '역사의 관성'이 기지개를 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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