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부터 새로 시작하는 코너 '취미는 독서'입니다. <프레시안>의 강양구, 김용언, 성현석, 안은별 기자와 함께 천문학자 이명현, 사회민주주의센터 공동대표 정승일, CBS 정혜윤 PD, 자유기고가 노정태, 서대문자연사박물관 이정모 관장, 그리고 특별한 게스트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의 최근 독서 목록'을 공개합니다.
네팔에도 그런 어른이 있었다. 네팔 민주화의 아버지 다이아몬드 라나가 쓴 소설 <화이트 타이거>(이근후·정채현 옮김, 연인M&B 펴냄)가 나왔다. 현실 정치가로 활동했고 9번이나 투옥되었던 인물이다. 감옥에서 쓴 <화이트 타이거>는 "권력과 통제를 위한 책략과 대항책들, 정렬과 재정렬 등의 역동적인 반목의 이야기와 함께 실제 사실에 바탕을 둔 로맨틱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어수선한 세상에서 타산지석 삼아 읽어볼 만한 책이다.
정승일(사회민주주의센터 공동대표) : 서울의 광화문 거리에 해당하는 베를린의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 거리에는 독일과 프로이센의 영욕의 역사가 잔뜩 묻어 있다. 한때 나는 이 거리에 있는 훔볼트 대학(과거의 베를린 대학)에서 공부를 했는데, 그 건너편의 국립 오페라 하우스 옆에 과거 프로이센 황태자궁이 있다. 이 건물은 20세기 들어 왕립 도서관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동독이 붕괴된 몇 년 후 그 건물에 우연히 가보니 후에 러시아 혁명을 일으킨 레닌이 이 도서관에서 <제국주의론>과 <철학 노트>를 썼다는 안내 팻말이 있었다. 지금은 그 팻말도 사라졌다.
그런데 이 도서관과 바로 옆 광장이 베를린 관광객들에게 유명한 것은 나치 집권 직후 벌어진 분서 사건 때문이다. 나치당원들은 이 도서관에서 유태인(아인슈타인과 프로이트 포함)이 쓴 책과 민주주의, 사회주의·공산주의에 관한 책 등 '독일 정신'에 위배되는 책들을 빼내어 바로 옆 광장에서 불에 태웠다. <인디아나 존스 - 잃어버린 성궤를 찾아서>라는 영화에는 그 분서 행사장에서 인디아나 존스(해리슨 포드)가 우연히 히틀러와 조우하는 코믹한 장면이 나온다.
나는 그 분서 사건이 나치당이 즉흥적으로 꾸민 행사로 알았다. 그런데 <금서의 역사>(베르너 폴트 지음, 송소민 옮김, 시공사 펴냄)를 읽어 보니, 그 행사는 친 나치 대학생연합이 몇 달 전부터 계획하여 주도한 행사로 베를린만 아니라 뮌헨, 프랑크푸르트, 하이델베르크 등 독일의 모든 도시에서 한 날 한 시에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대학생들의 행사 조직 능력을 반신반의하던 나치당 지도부는 그 성공적 수행을 쌍수 들고 환영하였고, 베를린의 분서에서는 괴벨스도 참석하여 연설하였다. 도서관에서 책을 꺼내고 불을 붙인 자들은 대학생들이었다. 친 나치 대학생들이라니, '일베 바퀴벌레'에 전염된 대학생들은 안녕들 하신가?
성현석(<프레시안> 기자) : 멀쩡한 사람들이 모여서 벌이는 바보짓. 최근 불거진 '의료영리화' 논란을 보며 품었던 생각이다. 우리가 민간의료보험 상품에 쓰는 돈을 거둬서 국민건강보험 재원으로 쓸 수 있다면, 우리는 병원비 걱정 없는 세상에 바짝 다가갈 수 있다. 민간의료보험은 가입자가 낸 돈 가운데 약 40%만 돌려받는 구조다. 국민건강보험에 비해 훨씬 낭비가 심하다. 말 그대로, "건강보험 하나 잘 키우면 다른 보험이 필요 없다."
'에이 설마' 싶다고? 현직 의사이면서 의료정책 전문가가 차근차근 풀어서 설명하는 책이 있다. 가정의학 전문의인 김종명이 쓴 <의료 보험 절대로 들지 마라>(이아소 펴냄)가 그것. 풍부한 자료가 매끄러운 논리를 타고 흐르는 이 책을 읽고나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게다. 내가 만약 부자라면, 내 돈으로 사서 온 국민에게 나눠주고 싶은 책이다.
노정태(자유기고가) : 벌써 1월 중순이다. '올해의 첫 뭐뭐'의 목록이 하나씩 채워질 시점이다. 올해의 첫 재채기, 올해의 첫 계란 프라이, 올해의 첫 책 구입, 이런 것들을 세다가 지겨워질 때쯤이면 민족의 명절 설날이 되고, 새삼스레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말을 한 번씩 더 주고받으며, 실은 새해 계획을 하나도 안 지키고 있는 스스로를 위로하게 되는 그런 애매한 기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본인은 '올해의 첫 실패'를 며칠 전에 맛보았다.
<그리스도를 본받아>(토마스 아 켐피스 지음, 박동순 옮김, 두란노 펴냄)는 14세기에 태어나 15세기에 주로 활약했던 가톨릭 수도사 토마스 아 켐피스가 쓴 기독교 묵상 서적이다. 소개 문구에 따르면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기독교 서적이라고도 한다. 이것을 본인은 모종의 필요에 의해, 참고문헌으로 계속 뒤적거리고 있다가, 그 필요를 불러온 작업에 실패하면서, 아직 완독하지 못한 채 책상 위에서 굴리고 있다. 취미는 독서요, 인생은 고통이다. 새 새해가 시작되기 전까지, 그래도 책장을 끝까지 넘겨볼 계획이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에서 적을 직접 쏘는 비율이 50% 정도로 올랐고, 베트남에선 70~80%까지, 이라크전에선 더 올라갔다고 했다. 전 세계 인류에서 정말 아무 감정 없이 타인을 죽일 수 있는 사람, 즉 소시오패스의 비율은 2%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런데 군대에선 군인들을 그런 존재로 훈련시킨다. 그게 어떤 과정을 거쳐 가능해지는지, 실제로 살인을 저지른 군인들이 겪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는 어떤 것인지, 국가가 이들을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 등을 정교하게 파헤친 책이며, 또한 사람들을 폭력에 무감각해지게 만드는 미디어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아끼지 않는 책이다.
지금 준비 중인 장편 소설 때문에 폭력적인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 읽은 책인데 무척 재미있었다. 사실 참조할 게 너무 많아서 고민이다. 이젠 널린 게 살인인데, 식상하게까지 느껴지는 이 살인자들을 뛰어넘는 안 식상한 인물을 창조하는 게 훨씬 힘들어졌다. (구술 정리)
김용언(<프레시안> 기자) :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산다. 그러다보니 길에서 마주치는 고양이들에게도 관심이 생겼다. 예전에 인터넷에서 봤던, 굶주린 나머지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찢어 찾아낸 총각김치를 씹고 있던 고양이 사진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매일까진 아니라도, 가끔 날씨가 궂은 날 사료와 물을 담아 집 근처에 두었다. 싹 비워질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지만, 어쨌든 나와 같은 공간에 사는 동물들 몇 마리라도 허기와 갈증을 달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기뻤다.
그러다가 <후쿠시마에 남겨진 동물들>(오오타 야스스케 지음, 하상련 옮김, 책공장더불어 펴냄) 앞에서 눈물을 쏟았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난 뒤, 반경 20킬로미터 지역의 사람들이 전부 피난을 간 뒤 그전까지 사람들과 함께 살던 동물들은 영문도 모른 채 텅 빈 마을에 버려졌다. 동물들은 굶어죽거나 차에 치어 죽어갔다. 그런데도 가족을 기다리느라 집을 떠나질 않고, 혹은 도와주려 다가가는 자원봉사자들만 보면 더럭 겁을 먹고 달아난다. 사진가 오오타 야스스케는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먹을 것을 챙겨주고, 가능한 한 많은 동물들을 열심히 구조했다. 고양이 56마리, 개 13마리, 닭 13마리. "자기만족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다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 없었을 뿐이다." 인간의 불행에 견주긴 힘들 수도 있겠지만, 인간에게 의지해 살아가는 것에 길들여진 동물들이 별안간 밀어닥친 불행 앞에서 영문을 모른 채 죽어가는 풍경을 보고 '어쩔 수 없다'라고만 말하기는, 너무나도 힘든 일이다.
그러나 그 스스로 "지나칠 정도로 에토 준에 대해 살펴 왔지만"이라고 평가하는 이 글을 읽다 보면, 검색어를 집어넣고 검색 결과를 받아 보는 식의 궁금증 해소는 불가능하다. 가짜 근대에 사력을 다한 '이광수들'을 좇아 도쿄로 간 김윤식과 그 앞에 나타난 에토 준이라는 거대한 그림, 에토 준이 그야말로 목숨을 걸었던 나쓰메 소세키와 소세키가 신경쇠약을 안고 돌아와야 했던 20세기 초 런던의 그것까지. 피할 수 없는 물음에 온 몸을 부딪치는 인간들의 연쇄 혹은 상보는 그야말로 장관이되, 지금 이 시대 그러한 뒤좇음, 글쓰기가 가능한가 하는 일종의 무력감도 안긴다.
김윤식의 표현도 그렇거니와 에토의 공적 얼굴 중 하나는 오만한 "우익 논객의 두목"이었다. 그런 그와 관련해 잘 알려진 일화가 아내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자살했다는 것인데, 김윤식은 그것을 순애보적 죽음으로 묘사한 저널리즘에 반대하며 망처도 그 자신의 병도 안중에 없었음이 틀림없었다고 말한다. 대신 그 당시 에토가 <소세키와 그의 시대>를 쓰는 과정을 병행시킨다. 그에게 글쓰기란, 소세키에 육박하기란 "인간임을 포기하고서라도 글쓰기를 앞세운" 악마적인 것, "저술이 아니라 신에 바친 공물", "아내도 개도 핑계였던 것. 아니, 글쓰기가 아내였고 개였던 것"이라고 하며.
그에게 아내가 어떤 의미였는지, 자식을 두지 않고 대신 애정을 쏟은 개가 어떤 의미였는지, 그리고 그것 모두가 진짜 '별것'인 글쓰기에 어떻게 바쳐졌는지, 왜 목숨을 건 글쓰기 아니면 안 되었는지, 신의 영토를 기웃거렸던 인간의 약함이 왜 위대한지 등등, 거인의 어깨에서 장관을 보고 싶다면 이 글을 권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들을 빌려 말할 뿐 그들의 그늘에조차 접근하지를 못했다. 무엇보다 에토 준의 주요 저작은 번역되지 않았다. 전 5권의 <소세키와 그의 시대>가 번역돼 나오기를 바란다.
정혜윤(CBS PD) : 이미 전작 <칠레의 밤>(우석균 옮김, 열린책들 펴냄)부터 <먼 별>(권미선 옮김, 열린책들 펴냄) <부적>(김현균 옮김, 열린책들 펴냄)까지 볼라뇨의 작품이라면 손에서 절대 놓치 못했는데 이번에 유고작 <2666>(전 5권, 송병선 옮김, 열린책들 펴냄)을 읽기 시작했다.
볼라뇨는 천재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볼라뇨 자신이 <야만스러운 탐정들>(우석균 옮김, 열린책들 펴냄)에서 '내장 리얼리즘'이란 말을 썼는데 내게는 볼라뇨 작품 전체가 그렇게 읽힌다. 우리 사회의 내장을 리얼하게 파헤쳐 그리면 어떤 작품이 나올 수 있을까?
<2666>은 볼라뇨가 죽음을 예감하고 간 수술까지 미루면서 쓴 필생의 역작이다. 이제 겨우 1권을 읽는데 벌써 볼라뇨 냄새가 진동한다. 꿈틀 꿈틀한다. 곧 무슨 일인가 벌어질 것 같다.
책을 읽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뻔한 로맨틱 드라마인줄 알면서도, 심지어 전지현에게 별반 애정이 없으면서도, <별에서 온 그대> 앞에서 멍하니 넋 놓고 있는 나를 새삼 씹어보는 게 불편해서가 아니었을까? 이 책은 텔레비전으로부터의 해방을 선동하지도 않거니와, 그것이 가능한지를 놓고서도 회의를 던진다. 그런 머뭇거림이야말로 노명우의 또 이 책의 미덕이다.
참, 이번 수요일에도 이 책은 <별에서 온 그대> 본방 사수를 하는 동안 뒷방 신세였다. 텔레비전은 정말로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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