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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자에서 애국자로…역사를 바꾼 신분 세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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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자에서 애국자로…역사를 바꾼 신분 세탁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0> 해방과 분단, 다섯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해방과 분단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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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해방 공간의 결정적 국면 중 하나가 모스크바3상회의(1945년 12월) 결정을 둘러싼 논란이다. 일각에선 이를 '찬탁'(신탁 통치 찬성) 대 '반탁'(신탁 통치 반대)으로 오해하고 있다.

서중석 : 찬탁 대 반탁은 적절한 규정이 아니다. 그간 이런 지적을 참 많이 했다. 우익이 반탁 투쟁을 했다는 점에서 반탁은 맞다. 그러나 좌익은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 것이지, 신탁 통치 하나를 주로 지지한 것이 아니었다.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임시정부 수립이었다. 좌익은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다', 이렇게 나왔는데 지금까지 우리는 '찬탁, 반탁' 식으로 교육을 받아왔다.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 지지'라고 하면 너무 길어지니 그냥 찬탁으로 해버리는 게 좋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문제에 대해선 정말 오해가 많다. 1960년대 후반에 조순승 교수가 미국에서 영어 저서를 냈는데, 미국 국무부 자료를 활용해 신탁 통치에 관한 내용을 상당히 서술했다. 신탁 통치 내용이 어떤 것이라는 건 그때쯤이면 학자들은 알 수가 있었다. 최상룡 교수가 1970년대 초반에 도쿄대에서 쓴 박사 논문에도 (논란이 됐던) 신탁 통치가 어떤 것이었다는 게 많이 나와 있다. (또 1980년대 이후 현대사 연구 성과가 쌓이고) 그랬는데도 1990년대까지 억설이 많이 통용되고 교육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해서야 되겠는가 하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국사 교과서도 달라져 상당히 정확히 기술하는 편이다.

프레시안 : 진보 성향 인사 중에도 이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이 적잖다.

서중석 : 나이 드신 분일수록 잘못 알고 있는 게 많다. 진보적인 선생 중 한 분이 이렇게 얘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신탁 통치를 5년 이내로 한다고 했으니까 길어봤자 5년 아니냐. 5년간 신탁 통치를 받고 통일 국가를 세웠더라면 분단과 전쟁의 고통을 겪지 않고 훨씬 더 강력한 국가를 갖지 않았겠느냐.' 그런데 전제인 '5년 이내 신탁 통치', 이 대목에 뭔가를 잘 모르고 말한 부분이 있다고 본다. 또 다른 분은 이렇게 말씀하더라. '신탁 통치를 하고 임시정부를 세운다.' 이건 거꾸로 얘기한 거다.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에 따르면) 임시정부가 먼저 세워지고 신탁 통치는 나중 문제였다.

(일부) 서양 학자들은 (이 논란을)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나 보더라.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살펴보면) 좌우가 그렇게까지 싸울 문제가 아닌데 어째서 한국 사람들은 이걸 가지고 그렇게 싸웠는지, (그 결과) 나중에 분단까지 가는 데에도 이 문제가 명분으로 작용하는지 참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정말 그런 점도 있는 것 같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찬탁 대 반탁? 오래된, 치명적인 오해

프레시안 : 1945년으로 돌아가 구체적으로 짚었으면 한다.

서중석 : 먼저 반탁 운동이 어떻게 시작됐는가를 살필 필요가 있다. (그해) 12월 16일 미국, 영국, 소련 세 나라 외상이 모스크바에서 만나 논의하는데, 제일 중요한 것 중 하나가 한국 문제였다. 그때까지 연합국은 한국 문제에 대해 어떤 결정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논의를 한 거다. 사실 8.15 이후 넉 달이나 지난 시점에 논의한다는 건 너무 늦은 거다. (8.15 후 시간이 흐르면서) 굉장히 합리적인 결정이 나와도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야 한국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 된 건데, 그렇지 못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논의가) 너무 늦게 진행된 것 자체가 큰 문제가 된다고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 내용이 잘못 알려지면서 문제가 커졌다.

서중석 : 12월 24일 무렵부터 <동아일보>에 일방적으로 소련을 헐뜯는 기사가 실렸다. 사실에 맞지도 않고 어떤 데서도 구체적으로 입증이 안 된 내용이었다. 12월 26일 저녁에는 이승만이 방송에서 '어느 나라에서는 한국을 독립시키려 하는데 다른 어느 나라에서는 신탁 통치를 하려 한다', 이런 식으로 얘기했다. 이것도 참 이상한 것이다. 이승만 이 양반의 위치를 생각하면 (이승만이 말한) '독립시키려는 나라'는 미국, '신탁 통치를 하려는 나라'는 소련을 가리키는 것 아니겠나. 그렇게 보면, 정반대로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더 놀라운 건 12월 27일자 보도다. 이날 <동아일보>는 (1면 톱기사로) "소련은 신탁 통치 주장, (…)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라는 제목 아래 '소련은 무슨 이런 음모를 꾸미느냐', 이런 투로 보도했다. (이런 식으로 보도한 게) <동아일보>만은 아니지만, <동아일보>에서 크게 보도했다. 여기에서 반탁 투쟁이 시작된다고 많은 연구자들이 얘기하고 있다.

프레시안 : 왜곡 보도다. 신탁 통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전후 구상 중 하나였다.

서중석 : 1942~1943년 무렵부터 미국은 신탁 통치를 주장하고 소련은 그 문제에 대해 소극적으로 나왔다. 그리고 여러 학자들이 1960년대 이후 연구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해방 직후 남북 상황을 볼 때 소련은 '즉시 독립'을 주장하는 게 자국에 유리하다고 본 것 아닌가. 실제로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번즈 미국 국무장관은 12월 17일, 한국에 신탁 통치를 실시하자고 주장했다. 그걸 12월 20일 몰로토프 소련 외상이 전반적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이렇게 두 나라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안을 영국 외상까지 봐가지고 27일에 서명하는데, 그게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이다.

하여튼 간에, 12월 27일자 보도는 내용도 터무니없는데다 출처도 없다. 뉴스라는 건 출처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모 통신사에서 12월 25일에 보냈는데 합동통신에서 이걸 받았다', 이런 식으로만 돼 있다. (이처럼)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이상한 보도가 나오면서 12월 28일부터 '그러면 우리는 반탁 투쟁을 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분위기가 싹 잡혔다.

왜곡 보도와 신분 세탁, 역사를 뒤흔들다

프레시안 : 반탁 투쟁은 어떤 식으로 전개됐나.

서중석 : 반탁 투쟁이 본격적으로 일어나는 건 12월 29일인데, 많은 사람이 부정확하게 알고 있는 게 있다. 뭐냐 하면 '반탁 투쟁을 가장 중심에 내걸고 싸운 것일 거다' 하는 사고다. 이날 (중경) 임정 요인들뿐만 아니라 우익의 (여러) 대표자들까지 모여 경교장에서 '각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회의'라는 걸 연다. 그러면서 내세우는 게 이런 거다. '1. 연합국에 (중경) 임시정부 즉시 승인을 요구함. 2. 신탁 통치 절대 배격.' 신탁 통치 배격은 뒤에 가 있고 그 앞에 '임정을 우리 정부로 인정해 달라'는 요구를 내세운 거다. 그러니까 이때의 반탁 투쟁은 중경 임정 추대 운동의 일환으로 벌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여튼 그러면서 우익 중심으로 반탁 투쟁이 대대적으로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더 놀라운 현상이 벌어진다.

프레시안 : 무엇인가.

서중석 : 친일파의 변신이다. 예전에 친일파로 활동했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모인) 단체들이 12월 29일부터 반탁 투쟁에 나섰다. 그 이후 친일파가 반탁 투쟁에 참 많이 가세하는 걸 볼 수 있다. 매국노, 민족 반역자에서 갑자기 애국자로 둔갑한 거다.

그 당시에도 '친일파가 세탁했다'는 표현이 나오더라. 친일파는 해방 정국에서 두 가지를 통해서 변신이랄까 세탁을 한다. 하나는 반탁 투쟁, 다른 하나는 이승만의 단정 운동이다. 단정 운동에서 친일파가 대단한 힘을 발휘하며 중추 역할을 하지 않았나.

프레시안 : 친일파의 기막힌 신분 세탁은 한국 현대사에 커다란 악영향을 끼쳤다.

서중석 : 그렇다. 이제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은 어떻게 알려지게 됐는가를 짚어보자. 12월 29일 <동아일보>에 대문짝만하게 보도된 게 있다. '한국에 신탁 통치 실시 결정. 이게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이다.' 이런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소련을 맹렬히 비난했다. 사람들이 읽어보면 소련이 신탁 통치 실시를 주장한 건 말할 것도 없거니와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의 핵심)은 신탁 통치인가 보다', 이렇게만 생각하게끔 돼 있다.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이 언제 한국인한테 전문 그대로 알려지느냐. 그건 12월 30일자 <동아일보> 한 귀퉁이에 들어 있다. '미 육군성 코뮈니케'라고 돼 있는데, 이게 사실 맞는 거다. 왜냐하면 한국엔 군사 체계로 들어오게 돼 있다. 미국 국무부, 육군성, 맥아더 사령부, 그다음에 하지 사령부로 가는 거다. 그러니까 이게 틀린 것도 아니지만 사실 한국인은 이게 뭔지를 전혀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에 대해 이미 다 (잘못) 알고 있지 않았나. 그래서 이것(미국 육군성 코뮈니케)을 주의 깊게 읽은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번역도 아주 서툴게 돼 있어서, 나중에 우리가 알고 있는 번역문은 이것하고 상당히 차이가 난다. 그래도 이게 사실이다. 여기에 있는 게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문이다. 신탁 통치는 말할 것도 없이 반대해야 하는 것이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반탁 투쟁이 참 특이한 형태로 일어난 면도 생각을 안 할 수는 없다.

▲ 해방의 기쁨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한반도에 먹구름을 드리운 결정적 계기 중 하나는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둘러싼 논란이었다. 사진은 해방에 환호하는 한국인들. ⓒ연합뉴스

3상회의 결정에서 제일 중요한 건 임시정부 수립이었다

프레시안 :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에 대해 반탁 세력이 처음에는 잘 몰랐다고 하더라도, 반탁 운동 규모가 점점 커진 1946년 초까지도 몰랐던 건가.

서중석 :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알았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 (그전에) 먼저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이 어떤 내용이었는지 살필 필요가 있다. 결정의 첫 번째는 한국에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조속히, 또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것이었다. 모두 한국인이 바라던 것이었다. 두 번째는 그렇게 하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를 연다는 것이다. 미소공위가 한국의 정당·사회단체들과 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협의하게끔 돼 있었다.

세 번째의 앞부분은 '연합국이 한국을 도와줘야 한다'는 건데, 이건 나쁜 소리가 아니다. 그런데 후단에 가서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 신탁 통치를 5년 내의 기한으로 실시한다'고 돼 있다. 문제는 그 부분도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게 있다(는 것이다). 이게 유엔 헌장에 나오는 신탁 통치하고는 다른 것이라고 여러 연구자가 주장한다. 신탁 통치의 구체적인 내용,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 신탁 통치를 할 것인지는 미소공위가 한국 임시정부와 상의해서, 정당·사회단체들의 의견을 들어서 신탁 통치 당사국(미국, 소련, 영국, 중국)에 회부해 승인을 받도록 돼 있다는 거다. 나중에 <동아일보> 설의식 주간이 사설에 쓴 대로, 신탁 통치의 구체적 내용은 결정된 바가 없는 거다. 다만 실시한다고만 한 것이고, 구체적인 방안은 나중에 임시정부와 상의해서 마련하도록 돼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김규식 같은 사람은 이렇게 주장한 거다.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지키지 않으면 분단되고 분열을 겪는 건데,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 제1항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 아니냐. 빨리 미소공위에 협력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그런 다음에 (신탁 통치를) 열화와 같이 반대하면 될 것 아닌가. 제3항에 우리하고 상의한다고 돼 있는데, 우리가 다 반대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미국, 소련도 어떻게 우리 의견을 무시하겠는가. 우선 임시정부를 세워놓고 보자.' 그 얼마나 현명하고 정확한 답인가.

프레시안 : 미군정은 반탁 운동에 어떤 반응을 보였나.

서중석 : 하지 사령관은 반탁 운동에 한편으로는 놀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굉장히 좋아했다. 감격했다고 할까. 반탁 투쟁 전까지는 좌익이 너무나도 강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정국이 어떻게 돼가는 건가', 이게 (하지의) 큰 걱정이었다. 미국은 무엇보다 한국에서 자국의 이해관계를 실현해야 하는데, 좌익이 강성하니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던 거다. 더욱이 미군정이 등용한 친일파는 한국인들로부터 민족 반역자로 매를 맞고 있었다. (그런데) 친일파가 반탁 운동에 참여하면서 애국자로 둔갑했다. 그러니 하지는 '반탁 투쟁이 이렇게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는구나. 우익한테 정치적 헤게모니를 주다니' 하고 느낀 것이다.

그런데 본국에서는 (하지에게)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한국인한테 잘 주지시키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반탁 투쟁은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에 반대한다는 뜻 아닌가. 제1항(임시정부 수립)까지 거부한다는 뜻을 내포한다고까지 판단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런 점에서도 심각한 면이 있는 것이었다. 그런 반탁 투쟁을 친미 세력의 주력이 하고 있었다. 여기서 하지의 딜레마가 생겨난다.

이런 사정을 알아서 그랬겠지만, 번즈 미국 국무장관은 (12월 31일) '한국에 (반드시) 신탁 통치를 실시한다는 건 아니다', 이런 이야기까지 했다. 하지도 (12월 29일) 한국인한테 '신탁 통치는 결정된 바가 없고 구체적인 내용은 한국인을 순전히 돕자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니 한국 사회에 얼마나 더 혼란이 일었겠나.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3상회의 결정 내용을 몰라서 계속 반탁? 그렇지 않다

프레시안 : 참으로 긴박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서중석 : 그렇다. 신탁 통치 문제에 대한 이해가 사람마다 달랐다. 이제 왜 우익도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잘 알고 있었다고 보는지 이야기할 차례인데, 이 대목에서 4당 코뮈니케(공동 성명)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놓고 한국 내부가 정쟁으로 뒤덮이자, 여운형 같은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정치 세력인 한국민주당, 국민당(안재홍),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여운형), 이 4당이 모여 해결책을 모색하자'고 한다. 그래서 1946년 1월 7일, 4당 코뮈니케라는 걸 발표하게 된다. 4당의 핵심 인물들이 모여서 결정한 것이다.

프레시안 : 4당 코뮈니케에는 어떤 내용이 담겼나.

서중석 : 그걸 보면 '조선 문제에 관한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에 대하여 조선의 자주 독립을 보장하고 민주주의적 발전을 원조한다는 정신과 의도는 전면적으로 지지한다', 이렇게 돼 있다. 굉장한 거다. 이건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전면 지지한 거다. 그다음은 이렇다. '신탁 통치(국제 헌장에 의하여 의구되는 신탁 제도)는 장래 수립될 우리 정부로 하여금 자주 독립의 정신에 바탕을 두어서 해결케 함.' 유엔 헌장에 신탁 통치에 관한 내용이 있는데, 거기선 사실상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로 돼 있다. 그런데 하지의 설명도 그렇고,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 제3항을 자세히 읽어봐도 (신탁 통치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쓴 것이다.

김규식의 주장과 똑같지 않나. 임시정부를 먼저 세운 다음 (신탁 통치 문제는) 임시정부가 자주 독립의 정신으로 해결하자는 것 아닌가. 이건 (신탁 통치를) 반대하겠다, 이거다. 그걸 노골적으로 쓸 수는 없으니까 이렇게 표현한 거다.

이 초안을 작성한 사람이 한민당 대표로 온 김병로다. 김병로가 초안을 잡고 4당이 합의한 거다. 그러니까 우익, (특히) 한민당도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이 뭐라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거다. 반탁 투쟁은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잘 몰랐기 때문에 한 것만은 아니다. (4당 코뮈니케는 해방 공간에서 좌우 주요 정당이 민족 국가 건설 방안과 관련해 합의한 유일한 문서다. 그러나 한민당과 국민당이 태도를 바꾼 탓에 4당 코뮈니케는 무효가 됐다. <편집자>)

프레시안 : 우여곡절 끝에 제1차 미소공위(1946.3.20.∼1946.5.6.)가 열리지만, 열매를 맺지는 못한다. 장애 요소 중 하나가 미소공위가 1946년 4월 18일 발표한 코뮈니케 5호 문제였다. 예전에 반탁 투쟁을 했더라도,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면 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협의할 대상으로 인정하겠다는 내용이다. 이 코뮈니케 5호를 두고 태도가 엇갈렸다.

서중석 : 미소공위에 협조해야만 통일 정부를 세울 수 있고 그래야만 지독한 좌우 대립, 내전으로 번질 수 있는 문제들을 막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김규식과 여운형 쪽은 '어떻게든 미소공위에 협조해야 한다'(고 했다). 이승만은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미국의 태도를 파악하고 '코뮈니케 5호를 지지한다', 이렇게 나왔다. 그런데 (김구를 비롯한 중경) 임정 요인 같은 원로 독립지사들은 '안 된다. 신탁 통치는 반대다', 이렇게 나왔다. 김규식이 이들을 열심히 설득한다. 그 결과 5월 초에 우익의 대표적인 단체인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의원에서 '우리도 코뮈니케 5호에 대해 서명하겠다'고 나온다. 김규식의 말을 존중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 돼서는 소련이 '반탁 투쟁을 하면서 코뮈니케 5호에 서명한다는 건 모순이고 뭔가 책략이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틀어버린다. 그러면서 제1차 미소공위가 실패로 돌아간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스물한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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