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2013년의 달력을 내리고 2014년의 달력을 걸 때다. 해마다 반복되는 이 일을 하면서 나는 두 가지 불편함을 느끼곤 한다.
하나는 엄동설한에 새해를 맞는 불편함이다. 예로부터 새해를 신춘(新春)이라 하며 죽음의 계절인 겨울을 보내고 생명의 계절인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한 것은 자연의 순환에 인간의 삶을 맞추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추위가 막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계절에 달력을 바꿔 걸게 되었으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다른 하나는 서기 2014년이라는 기년법이 주는 불편함이다. 서기는 서력기원(西曆紀元)의 약자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원으로 삼는다. 오늘날 전 세계가 공통으로 쓰고 있는 이 서력기원에 따라 우리는 기독교도이든 아니든 예수 탄생 후 몇 년으로 한 해 한 해를 가늠하며 살아가고 있다.
달력에 고스란히 담긴 고대 로마의 역사
두 가지 불편함은 모두 서양에서 기원한 것으로, 첫 번째 것은 고대 로마에 기원을 두고 있다. 전설적인 로마의 건설자 로물루스가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로마력은 태음력이었다. 춘분이 들어 있는 '마르티우스(Martius, 전쟁의 신 마르스의 달)'로 한 해를 시작하고 '열 번째'라는 뜻을 가진 '데켐베르(December)'로 한 해를 마감했다. 동양의 전통 달력처럼 생명이 약동하는 봄에 한 해가 시작되어 수확기인 가을에 마무리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로마력에 따른 열 개의 달에 들어 있는 날짜를 다 합치면 304일밖에 안 된다. 실제 한 해의 길이에 비해 두 달 분량이 모자란다. 로마 사람들은 데켐베르 뒤에 두 달 정도의 기간을 배치했지만, 이 기간에는 아무런 이름도 붙이지 않았다. 만물이 죽어 있는 겨울철에 어떤 의미를 붙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 후 로마의 2대 왕이라는 누마 폼필리우스가 로마력을 개혁해 두 달을 추가했다고 한다. 하나는 '문(門)의 신 야누스의 달'을 뜻하는 '야누아리우스(Januarius)'이고, 또 하나는 '정화(淨化)의 달'을 뜻하는 '페브루아리우스(Februarius)'였다. 이 두 달이 점차 마르티우스 앞에 놓이게 되면서 지금과 같은 달력이 완성되었다.
야누스는 문의 신이므로 지나간 해와 다가올 해를 다 같이 바라보는 존재로 여겨졌다. 그래서 두 얼굴을 가진 것으로 그려진다. 고대 로마인은 야누아리우스를 저무는 한 해와 새로 열리는 한 해 사이에 놓인 과도기로 생각한 것이다. 이어지는 페브루아리우스는 이름 그대로 지난 한 해의 잘못된 일을 깨끗이 정화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정화의 달'로 여겨졌다. 이 두 개의 달은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쓰이는 그레고리력에서도 1월(January)과 2월(February)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면서 서양 모든 나라들이 안게 될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다른 달들이 모두 두 개씩 순위가 밀리며 '열 번째'라는 뜻을 가진 December가 12월이 되고, 일곱 번째인 September는 9월, 여덟 번째인 October는 10월, 아홉 번째인 November는 11월이 된 것이다.
태음력이 다 그렇듯 달의 변화에 따라 달력을 만들면 한 해의 길이가 지구의 공전 주기인 1년과 일치하지 않는다. 개정된 로마력도 355일로 이루어져 실제의 한 해와 10일이 조금 넘는 불일치가 생겼다. 로마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2월 23일과 24일 사이에 22~23일간의 윤달을 삽입했다. 2월에 윤달을 넣은 이유는 이 달이 전해의 실질적인 마무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어떤 해는 그냥 355일이고, 어떤 해는 377일, 또 어떤 해는 378일의 길이를 갖게 되었다.
어느 해에 얼마만큼의 윤달을 삽입할 것인지 결정하는 사람은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라고 불린 대신관(大神官)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로마의 정치 체제는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었다. 이때 최고의 정치적 실권자가 '콘술(Consul)'이라 불린 집정관이었다면, 대신관은 종교 지도자였다. 문제는 대신관이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윤달을 삽입하는 것은 엄밀한 원칙보다는 대신관의 자의적 판단에 상당 부분 맡겨져 있었다. 만약 대신관과 친한 사람이 집정관으로 있으면 대신관은 그 집정관의 임기를 늘려 주기 위해 긴 윤달을 삽입했다. 싫어하는 사람이 집정관을 맡으면 그 임기를 단축하기 위해 일부러 윤달을 넣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로마력은 점점 엉망이 되어 갔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 대권을 장악한 것은 서기전 46년 1월이었는데 계절은 엉뚱하게도 늦가을이었다. 이처럼 계절과 달력이 3개월의 격차를 갖게 된 것은 대신관의 자의적 윤달 집행이 계속된 결과였다. 정치적으로 생겨난 달력의 문제는 정치적으로 풀 수밖에 없었다.
절대 권력자로서 대신관 자리에까지 오른 카이사르는 이집트에서 사용되던 태양력을 받아들여 로마력을 대대적으로 개혁했다. 카이사르의 이름을 따서 '율리우스력'이라고 불리게 된 새 달력은 1년을 365일로 하고 4년마다 2월 23일 뒤에 1일의 윤일을 삽입해 춘분이 항상 3월 21일에 오도록 했다. 그리고 이미 실제 계절과 격차가 생긴 달력을 정상화하기 위해 서기전 46년 2월 뒤에 90일 분량의 윤달을 삽입했다. 그해는 역사상 가장 긴 445일의 해가 되었고, 많은 로마인에게 '대혼란의 해'로 기억되게 되었다.
카이사르가 절대 권력을 손에 넣자 그가 공화정의 전통을 깨려 한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원로원 내에서 공화정을 옹호하던 사람들은 카이사르가 왕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서기전 44년 그를 암살했다. 그러나 이미 거대한 제국으로 발전한 로마는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전제 권력을 요구하고 있었다. 로마는 죽은 카이사르를 영웅으로 받들고 그의 생일이 들어 있는 7월을 '율리우스(Julius)'로 바꿨다. 그 이전에 7월은 '퀸틸리스(Quintilis, 다섯 번째 달)'였다.
카이사르의 양자였던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는 정적들을 물리치고 서기전 27년 원로원으로부터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칭호를 받아 실질적인 황제가 되었다.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가 알렉산드리아를 함락시킨 8월을 기념하기 위해 그달의 이름을 '아우구스투스'로 바꿨다. 그전까지 8월의 이름은 '섹스틸리스(Sextilis, 여섯 번째 달)'였다.
그러면서 율리우스력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본래 카이사르가 율리우스력을 도입할 때는 홀수 달에 31일, 2월을 제외한 짝수 달에 30일을 배정했다. 그런데 아우구스투스의 달을 다른 달보다 짧은 30일로 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평년 29일로 정해졌던 2월에서 하루를 빼고 8월을 31일로 늘렸다. 그리고 8월 뒤에 오는 달은 오늘날처럼 짝수 달이 31일, 홀수 달이 30일을 갖게 되었다. 이때 정해진 원칙은 1582년 율리우스력을 미세하게 조정해 전 세계에서 사용되는 역법이 된 그레고리력에도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
▲ 2014년 새해 달력. ⓒ연합뉴스 |
서력기원의 또 다른 축, 기독교 전통
이처럼 우리가 쓰는 달력에는 고대 로마의 역사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우리가 추운 야누스의 달(January)에 한 해를 시작하는 것이나, 열 번째 달인 December를 '12월'로 부르는 것이나, 7월과 8월에 카이사르(July)와 옥타비아누스(August)의 이름을 접하는 것이나 모두 로마에서 비롯된 일이다.
여기에 서력기원은 기독교의 전통을 덧칠했다. 서기 525년 신학자 디오니시우스 엑시우스는 교황의 명령에 따라 <부활제의 서>라는 책을 써서 예수 탄생의 해를 로마 건국 기원 754년으로 맞추었다. 그것이 오늘날의 서기 1년으로, 연대를 예수 전(B.C., Before Christ), 예수 후(A.D., Anno Domini)로 나누는 서력기원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는 유럽 기독교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기 시작해 서세동점기에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그 후 예수가 태어난 해가 실제로는 서기전 6년이라느니, 서기전 4년이라느니 하는 웃지 못 할 논쟁이 벌어지곤 했다. 예수가 탄생한 해가 서기전 4년이라면 예수는 '예수 탄생 4년 전'에 태어난 셈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서기를 갑자기 4년이나 6년씩 앞당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서력기원이 이처럼 기독교적 발상에서 비롯된 기년법이지만 오늘날 전 세계에서 공통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그 이름에서 종교적 색채를 없애려는 시도도 있다. 서기 1년을 공통시대(Common Era)라 명명하고 서기를 약자로 CE(Before Common Era), 서기전을 BCE(Before Common Era)로 부르는 것이 그 예이다. 중국에서도 이런 방식을 도입해 서력기원을 공원(公元)으로 칭하고 있다.
그러나 이름을 어떻게 바꾸더라도 서력기원이 근대 이후의 서양 패권을 상징하는 기년법이라는 본질적 속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늘날도 일본은 자기네 천황의 연호를 사용해 쇼와[昭和] 몇 년이니 헤이세이[平成] 몇 년이니 하고 있는데, 대일본제국의 상승기에는 전 세계에 이 연호를 통용시킬 꿈에 부풀어 있었을 것이다. 과거 조선은 중국 황제의 연호를 받아다가 연대를 기록하는 수단으로 사용해야만 했다. 서력기원도 본질적으로는 이들처럼 특수한 집단의 시간관이 어떤 계기로 보편화된 것이다.
조선의 엘리트들이 사대주의를 당연시하고 자발적으로 황제의 연호를 사용했던 것처럼, 오늘날 세계 각국이 서력기원을 채택하고 있는 것은 '자발적'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 덕분에 세계는 하나의 시간관을 공유하면서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레고리력 또한 천체의 순환에 인간의 시간을 맞추려는 노력의 결실로, 하자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민중이 창조할 새로운 '세계기원·민중기원'을 꿈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서력기원과 그레고리력의 운용이 불편하다. 거기에서 현대 인류를 포괄하는 인문적이고 역사적인 시간관을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 황제나 예수나 '하늘의 아들'을 자처한 존재였다. 어느 쪽이든 다 논리적 근거가 확실하다. 그중에서도 무서운 지배자였던 황제보다는 인류의 원죄를 대속(代贖)하러 왔다면서 평등과 사랑을 부르짖은 예수가 현대인에게 더 친근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현대 세계에서 서기 1년이 모든 인류의 공감을 자아내는 의미를 갖기에는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나는 전 세계에서 자유와 평등을 위해, 궁극적으로 인간 해방을 위해 싸우는 민중이 결국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기원을 창조할 것이라 굳게 믿는다. 그것은 서기, 불기(佛紀). 단군기원 등 종교적이거나 토착적인 기원이 아니라 그야말로 모든 인류가 확실히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라 공감해 마지않는 기원이 될 것이다. 어쩌면 앞서 광복절에 언급했던 '제3의 8.15'는 그러한 새로운 기원이 형성되는 계기의 일부가 될 지도 모르겠다.
나는 일단 그러한 꿈의 기년법을 '세계기원' 또는 '민중기원'이라 이름 짓겠다. 억압과 착취, 갈등과 대립으로 점철됐던 인류의 '선사 시대'를 마감하고 새롭게 열릴 신기원이 단지 꿈에 불과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우리는 이미 경향신문 사옥에서, 조계사에서, 서울광장과 세종대로에서 그 꿈이 생시로 전변하는 광경을 보고 있다. 그리고 미구에 다가올 세계기원 또는 민중기원은 한 해를 요즘 같은 한겨울이 아니라 만물이 새로운 생명을 얻어 약동하는 봄에 시작할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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