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books'는 개편 작업을 준비하며 예년보다 1주 일찍 송년호를 꾸렸습니다. 이번 송년호(170호)에서는 '프레시안 books'의 기자, 기획위원, 연재 필자 열두 명이 각자가 꼽은 '올해의 책'을 이야기합니다. 판매 순위나 화제성보다는 책과의 만남의 밀도, 이 사회에 던지는 화두를 중심으로 꼽은 '올해의 책'과 함께 2013년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아울러, '프레시안 books' 다음 호는 사이트의 전면적인 디자인 개편 작업이 끝난 뒤 2014년 1월 3일 금요일 저녁에 발행됩니다. 독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1. 올해의 책과 그 적들
'올해의 책'은 말 그대로 올 한 해를 규정짓고 설명할 수 있을 만한 그런 책이어야 한다. 그 기준을 놓고, 올해의 책을 뽑아달라는 청탁을 들은 후 계속 고민했다. 과연 2013년이라는 해는 어떤 해였는가? 올해를 작년, 재작년, 그 이전의 시간들과 구분지어 주는 명확한 특징이 있다면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단행본이라는 형식의 매체를 통해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가?
▲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혜민 지음, 이영철 그림, 쌤앤파커스 펴냄). ⓒ쌤앤파커스 |
여기서 우리는 2013년 출판계의 한 특징을 명확히 관찰할 수 있다. 소설을 제외하고 본다면, 2013년은 2013년의 책을 읽은 해가 아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은 2012년 1월에 출간되어 그 해 내내 '힐링 열풍'을 주도한 책이고, <꾸뻬 씨의 행복 여행>은 2004년에 나왔다가 어떤 책 소개 TV 프로그램에서 전파를 탄 이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2013년의 베스트셀러 트랜드는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2013년 박근혜 정부의 정책 방향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관성적이고, 복고적이며, '뭐 없다'.
올해의 책이라는 것이 반드시 베스트셀러여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한 해를 특징지을 만한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거나, 그것이 표상하는 무언가와 전면적으로 대립하거나, 많이 팔린 책들이 가리키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방향을 지시하거나 하는 식으로, 결국 어떤 식으로건 베스트셀러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될 수 있다. 그리고 올해의 베스트셀러는 '올해의 책'이 아니었다. 작년의 문제적 베스트셀러가 올해에도 계속 잘 팔렸다. 2004년에 나온 줄도 몰랐던 책이 방송을 타고 다시 한 번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올해의 출판계는 대중들을 상대로 한 자체적인 문제 제기에 실패했다고 감히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 <꾸뼤 시의 행복 여행>(프랑수아 를로르 지음, 이지연 그림, 오유란 옮김, 오래된미래 펴냄). ⓒ오래된미래 |
'올해의 책'은 그러므로 다른 해와 마찬가지 의미에서 '올해의 책'일 수가 없다. 2013년은 2012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런 해이기 때문이다. 대선 열기에 불타올랐다가 차갑게 식어버렸고 재가 되어버렸다는 것만 제외하고 나면, 결국 올해에도 사람들은 '자기계발'의 논리와 대립하며 '멘붕'이라는 호들갑을 더 호들갑스럽게 떨쳐내고자 했고, 결국 '힐링'을 넘어서는 개인의 윤리적 지침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시도들을 그러모아본 후, 그 중에서 '올해의 책'을 탐색해보자.
2. 힐링의 끝, 혹은 아파트-인문학-사회?
2012년의 문제적 베스트셀러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2013년까지 계속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유지해온 것과 마찬가지로, 2012년에 (대선과 무관하게) '대항 담론'으로 등장했던 <피로사회>의 영향력 역시 2013년까지 쭉 이어졌다. 'XX사회', 'XXX 사회' 같은 제목을 단 책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인터넷 서점에서 '사회'라는 키워드를 입력한 후, 해당되는 책들의 이름을 선별하여 정리해보았다. 그 목록을 발간 순서대로 짚어보기로 하자. 이 목록에 빠진 책도 물론 있을 수 있다.
<피로사회>(현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2012년 3월
<감시사회>(한상희 외 지음, 철수와영희 펴냄) 2012년 6월
<무연사회>(NHK 무연사회 프로젝트 팀 지음, 김범수 옮김, 용오름 펴냄) 2012년 7월
<루머사회>(니콜라스 디폰조 지음, 곽윤정 옮김, 흐름출판 펴냄) 2012년 8월
<팔꿈치 사회>(강수돌 지음, 갈라파고스 펴냄) 2013년 4월
<허기사회> (주창윤 지음, 글항아리 펴냄) 2013년 5월
<과로 사회> (김영선 지음, 이매진 펴냄) 2013년 5월
<자기 절제 사회>(대니얼 액스트 지음, 구계원 옮김, 민음사 펴냄) 2013년 8월
<속삭이는 사회>(올랜도 파이지스 지음, 김남섭 옮김, 교양인 펴냄) 2013년 8월
<잉여사회>(최태섭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2013년 9월
<절벽사회>(고재학 지음, 21세기북스 펴냄) 2013년 9월
<격차사회>(다치바나키 도시아키 지음, 남기훈 옮김, 세움과비움 펴냄) 2013년 9월
<부품사회>(피터 카펠리 지음, 김인수 옮김, 레인메이커 펴냄) 2013년 11월
▲ <피로사회>(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
본 필자는 저 각각의 책의 내용과 논의의 깊이 등에 대해 평가하고 있는 게 아니다. 저 책들 가운데 어떤 것은 눈에 띄는 성취를 이룬 것일 수도 있고, 또 어떤 것은 터무니없는 태작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이토록 많은 저자와 편집자들이,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한국 사회를 'XX사회'라고 이름 붙이고자 했다는 사실 그 자체다. 다들 '한 방'을 노렸다는 인상을 지울 수는 없다. 하지만 저 중에 단연 올해의 책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우리 모두'의 담론적 지형도를 뒤바꾸거나 포착해낸 그런 작품이 있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한국 사회를 '단언컨대' 어떠어떠하다고 정의하고자 하는 시도를 보여주는 단행본이, 올해에만도 아홉 권 이상 나왔다. 그 결과 우리는 피곤하고 감시하며 기댈 곳도 없는 사람들이 서로 뒤에서 쑤근쑤근 루머를 퍼뜨리면서 팔꿈치로 막 찌르고 그러다보니 허기가 드는데도 계속 과로하는 가운데, 자기 절제를 하지 못하며 속삭이는 잉여들이 절벽에 매달려 격차에 시달리다가 결국 부품이 되어버리는, 그런 사회에 산다고 판명되고 있는 것이다.
아, 힘들다. 이게 사는 건가 싶다. 그리하여 우리의 독자들은 뭔가 삶의 의미를 찾고 싶고,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나에게 나침반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책을 원하게 되는데, 신간 중에는 마땅한 게 딱히 없는 터라, 결국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다시 집어들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개중에는 이미 그 책을 읽었거나, 너무 쉽고 말랑말랑해 보이지만은 않는 책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런 수요로 인하여 2013년의 서점가는 이른바 '인문학' 열풍에 휩싸이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인문학'을 제목에 집어넣은 책들은 앞서와 같은 방식으로 목록화하여 제시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오늘날의 독자들은 인문학으로 스펙도 쌓고 취업도 하고 광고도 만들고 음악도 만들고 영화도 찍고 내 마음을 어루만지고 네 마음을 이해하며 심지어 인문학에 미치기까지 한다. 2013년 12월 현재 '인문학'이라는 단어는 그렇게, MSG처럼 어중간한 내용의 애매한 책들 위에 뿌려지는 마법의 양념이 된 상태다.
검색해보니 다행히도 <인문사회><인문학 사회> 같은 책은 아직 없는 듯하다. 대신 그 역할은, 사회학자면서 동시에 인문적인 사유의 깊이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곤 하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수행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올 한 해 바우만의 책이 무려 여섯 권이나 나왔다. 물론 그 중에는 훌륭한 책도 있고 그리 밀도가 높지 않은 책도 있을 수 있으니, 독자 여러분께서 직접 확인하시는 것도 좋겠다.
▲ <아파트 게임>(박해천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휴머니스트 |
세 권의 책은 모두 아파트라는 한국 사회의 중요 변수를 꼭짓점으로 삼아 각자의 길로 나아간다. 그 결과, 이 책들은 앞서 논한 'XX사회'들보다 더 구체적인 논의를 펼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반면 그로 인해, 책에서 제시할 수 있는 해답 역시 현실의 무게에 짓눌릴 수밖에 없기도 하다. 가령 <아파트>와 <아파트 한국사회>는 모두 거대 단지로 조성되어 있는 아파트가 한국 사회를 폐쇄적 이익 공동체로 만들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하지만, 아주 급진적으로 부동산을 몰수하고 전 국토를 다시 도시계획하지 않는 한, 이미 만들어진 아파트 단지를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아파트 게임>의 경우 사태는 한층 더 복잡하다. 필자가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아파트 게임>의 마지막 장인 '지상의 방 한 칸 - 큐브의 간략한 역사'에 해당하는 내용을 저자의 입에서 강연을 통해 직접 전해들은 청년들 중 일부가, '멘붕'하거나 자신이 '멘붕'했음을 호소하는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비평적 픽션'이라는 방법론을 도입하여 한국 중산층의 등장과 몰락을 "가족 로망스"의 틀 안에서, 즉 세대론을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해석하는 도구로 활용했던 저자의 노력은 말하자면 사회를 분석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독자-청중들은 <아파트 게임>을, 마치 테드 창의 책 제목처럼 '당신 인생의 이야기'로 적극 대입하고 해석했고, 그때부터 불협화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파트 게임>은 '아파트 게임'의 적극적 행위자인 중장년층에게 유용한 투자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책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아파트 게임'에 뛰어들 수 없게 된 청년층에게 어떤 인생의 지침이나 경제적 해법을 제시하는 책이 될 수도 없다. 그러나 매달 몇 십 몇 만원의 월세를 내며 방 한 칸 부엌 한 칸 딸린 집에서 사는 필자와 비슷한 연배일 우리의 청춘들 중 일부는 아프고, 아팠고, 불안했기에, 뭔가 세상 돌아가는 원리를 보여주는 것 같은 이 책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해답'까지 구했던 것 같다. 진심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3. 그리하여, '올해의 책'은…
여기까지 읽은 독자라면 본 필자가 <아파트 게임>을 올해의 책으로 선정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2013년 기준으로 볼 때 충분한 자격을 갖춘 책이다. 하지만 그 대신, 독자들에게 전혀 생소할 수밖에 없는 다른 책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 <테아이테토스>(플라톤 지음, 정준영 옮김, 이제이북스 펴냄). ⓒ이제이북스 |
<테아이테토스>는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다룬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음을, 그 앎이 참임을 어떻게 아는가?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인문학'적인 문제, 혹은 그 수많은 '인문학'들의 바탕에 놓일 수밖에 없는, 궁극적인 질문이다. 참과 거짓의 문제,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문제, 그것을 본격적으로 논의한 인류 최초의 텍스트를 우리는 드디어 한국어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철학 전공자로서 '오버'를 좀 하겠다. <테아이테토스>는 올해 출간된 수많은 '인문학' 서적들 전부를 합한 것보다 더 중요한 책이다.
만약 독자가 <테아이테토스>를 차분하게 읽는다면, 그는 한국 사회의 현재를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문제에 대한 모종의 해법을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회적 지위가 높은, 재산이 많은, 성소수자에 속하지 않는, 이러저러한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오늘날의 청년층은 '꼰대질'이라는 식으로 반발하는 경향을 보여주곤 한다. 그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인데, 물론 대부분의 '꼰대'들은 정말 하등의 쓸모가 없는 소리를 내뱉곤 하지만, '꼰대질'처럼 보이는 타인의 발언 속에서 유의미한 배움의 가능성을 찾아낼 여지는 의외로 적지 않기 때문이다. '꼰대'를 발견하고 미워하는 기계적 반응 체계는, (물론 필자를 포함하여)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앗아가고 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나이 많은 이들 역시 젊은이들에게 적절하게 말 거는 방법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테아이테토스>는 그런 차원에서도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플라톤의 거의 모든 대화편처럼 이 책 또한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하여 당시의 실존 인물들이 나누는 가상의 대화를 전해주는데, 대체로 그 경우 소크라테스는 가르치는 사람, 스승, 즉 '꼰대'의 입장에서 말을 건다. 그 '꼰대'가 젊은이인 테아이테토스에게, '앎이란 무엇인가'라는 터무니없는 주제로 말을 걸기 시작하는 앞부분만이라도 많은 독자들이 직접 읽어봤으면 싶다.
"꼭 그래 주게, 테아이테토스. 나 자신이 어떤 생김새인지 나도 뜯어볼 수 있게 말이야. 테오도로스 님은 내가 자네와 닮았다고 말씀하고 계시거든."(76쪽)
철학의 아버지 플라톤의 이 고전적 저작 속에서, 거리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젊은이에게 '외모' 이야기로 말을 붙이며 철학을 시작한다. 소크라테스는 들창코에 머리가 벗겨진 추남이었다. 그 추남이 다가와 '너와 내가 닮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면, 누구라도 일단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 언급되기도 하는 이 책을 우리는 편견을 버리고 연극 대본처럼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인문학'이라는 단어가 생기기도 전에, 인류가 사고하고 추론하고 대화했던 방식이다. 그 속에는 '꼰대'도 없고 '싸가지 없는 요즘 것들'도 없다. 그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나누는 대화만이 존재할 뿐이다.
▲ <애완의 시대>(이승욱·김은산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
하지만 아직도 쏟아져 나오는 '인문학' 서적들, '힐링'에 대한 독자층의 여전한 요구 등을 보고 있노라면, 어쩌면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극히 원론적이고 추상적인 차원으로까지 기꺼이 내려가고자 하는 그런 모험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바로 그런 오늘날, <테아이테토스>의 한국어판이 출간된 것은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며, 지금이 아니면 정암학당과 이제이북스의 뚝심 있는 학술 출판을 기념할 기회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2013년 올해의 책으로 <테아이테토스>를 선정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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