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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노린 남자의 삶, 박근혜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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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노린 남자의 삶, 박근혜에게 권한다!

[프레시안 books] 라종일의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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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파주시 적성면에는 '적군묘지'가 있다. 구상 시인의 '초토의 시' 연작 가운데 하나인 '적군묘지 앞에서'를 통해 잘 알려진 장소다. 한국전쟁 당시 사망한 북한군과 중국군의 유해가 주로 묻혀 있다. 전쟁 이후 북한이 남파한 공작원의 유해도 포함돼 있다. 1987년 대선을 앞두고, 김현희와 함께 KAL858기를 폭파했던 북한 공작원 김승일의 시신도 이곳에 있다고 한다.

한국전쟁, 그 이후 내내 이어진 북한의 테러 등으로 인한 피해자가 살아 있는 현실에서, '적군묘지'는 위치가 숨겨져 있어야 하는 장소였다. 실제로 김승일의 묘비에는 아직 이름이 없다. KAL858기 사건에 분노한 이들이 묘지를 훼손할 가능성 때문이다.

줄곧 초라하게 방치돼 있던 '적군묘지'는, 이명박 정부 시절인 지난해 8월 대대적인 정비를 마쳤다. 당시 국방부가 주도한 일인데, 극우 단체의 반발이 거셌다. 그럼에도 묘지를 정비한 건 잘 한 일이라고 본다.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부터 불과 2년 뒤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쉽지 않은 결정이었으리라.

말끔히 단장된 '적군묘지'의 존재는, 남한이 북한보다 여러 면에서 살기 좋은 곳이라는 강력한 증거다. 우리에게 총을 겨눴던 '적'들의 시신을 수습해줄 여유가 있는 사회. 상대에 대한 콤플렉스에 갇힌 사회라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적군묘지'가 좀 더 떳떳하게 모습을 드러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직은 먼 희망이다. '적군묘지'의 묘비는 모두 북쪽을 향하고 있다. 비록 육신은 땅에 묻혔지만 영혼이라도 고향을 바라보라는 배려다. 그러나 정작 북한 측은 유해 인수 의사가 없다. 과거 남한 정부가 일부 유해의 송환 의사를 밝혔으나 북한 측이 거부했다. 남파 공작원의 경우, 북한 측은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유해를 인수하면, 과거 자신들의 입장을 번복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남한 역시 적극적인 송환 교섭에 나서지는 않았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적군묘지에 있는 중국군 유해 송환을 제안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 적군묘지의 북한군 유해는 언제쯤 고향 뒷산에 묻힐 수 있을까.

1.

▲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라종일 지음, 창비 펴냄). ⓒ창비
어떤 시신은 적군묘지에조차 묻힐 수 없었다. 남과 북 모두가 외면한 죽음이다. 최근 출간된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라종일 지음, 창비 펴냄)의 주인공, 강민철이 그렇다.

딱 30년 전인 1983년, 당시 대통령이던 전두환은 서남아시아 순방을 준비했다. 남한과 북한의 체제 대결이 격렬하던 때였고, 중간 지대에 있던 이른바 비동맹 국가와의 외교가 절실하던 때였다. 인도, 호주, 뉴질랜드, 스리랑카, 브루나이를 방문할 계획이 마련됐다. 이 가운데 핵심은 인도였다. 인도 초대 총리인 네루의 외동딸인 인디라 간디가 당시 인도 총리였는데, 그녀는 미국과 소련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는 비동맹 국가 그룹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다. 인디라 간디와 전두환이 만난다면 정치적 상징성이 대단할 터였다. 나머지 방문국은, 외교적 결례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해외 나간 김에 한번 들러보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방문국 명단에 버마(현 미얀마)가 추가됐다. 주무부처인 외교부의 실무자들도 그 이유를 몰랐다. 그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현 국가정보원)가 어떤 목적을 갖고 개입했나보다 하고 짐작할 따름이었다.

군사정권 시절이라서, 아무데나 군사 용어를 가져다 썼다. 대통령의 서남아시아 순방 계획을 당시 실무자들은 '국화작전'이라고 불렀다. 방문 시기가 10월이라서 붙인 이름이다. 국화가 한창일 때니까. 결국 이런 작전명은 다른 뜻으로 오래 각인되게 됐다. 순방 일정 첫 방문지인 버마에서 아웅산 테러가 발생했고, 한국인 17명과 버마인 4명이 목숨을 잃었다. 국화는 장례식장에서 조의를 표하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테러의 목표였던 전두환은 살아남았다. 그러나 김재익 경제수석을 비롯한 숱한 고위공직자가 희생됐다. 테러 이후 한국 곳곳에서 규탄대회가 열렸다. 30년 전임에도 당시를 생생히 기억하는 이들이 많은 것은 그래서다. 이런 대회는 대부분 관제행사였지만, 그 점 때문에 당시 온 나라를 뒤덮었던 슬픔과 분노를 깎아내려서는 안 된다. 생명은 무조건 존엄하고,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잘못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이 그렇듯, 이 사건 역시 한바탕 뜨거운 푸닥거리로 끝났다. 사건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나 평가는 없었다. 그 빈자리를 메운 건 음모론이었다. 전두환 정권의 자작극이라는 건데, 설득력 없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2.

성찰 없는 분노는 누군가에게 이용당하기 십상이다. 늦게나마 당시 사건에 대한 차분한 정리가 이뤄진 게 반가운 이유다. 저자인 라종일 한양대 석좌교수가 그 작업을 했다. 정치학자인 그는 김대중 정부에서 국가정보원 해외담당 차장, 대통령 비서실 국가안보보좌관,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장, 주영 대사, 주일 대사 등을 지냈다. 정보기관의 핵심부, 안보정책의 사령탑, 주요 우방 국가 대사 등에 있었던 그의 경험은, 그 자체로도 이미 관심거리다. 그래서인지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에는 아웅산 테러 사건에 대한 독자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내용이 많다.

- 전두환의 서남아시아 순방 일정에 왜 갑자기 버마가 포함됐나?
이런 의문에 대해 그간 별의별 설명이 다 있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원래 계획은 바로 인도로 가는 것이었는데, 그러자면 당시 적성국가였던 중국과 베트남에 근접해서 비행을 해야 했다. 이건 위험하니까 긴 우회로를 택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중간 기착지가 필요하고, 그게 바로 버마였다는 거다. 문외한이 보기에도, 설득력이 없다. 고작 이 정도 이유로 대통령의 방문국이 정해질 리는 없지 않은가. 저자 역시 같은 생각이다.

또 당시 안기부가 개입해서 버마 방문 일정을 잡았다는 말도 있었다. 당시 순방을 준비하던 외교 실무자들이 품었던 의혹인데, 저자에 따르면 이는 사실과 다르다. 오히려 당시 안기부 실무자들은 버마 방문이 위험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안기부의 현지 파견관이었던 강종일 서기관은 (…) 대통령 일행의 버마 방문이 위험할 수 있다는 보고를 본부에 보냈다. 구체적으로는 특히 아웅산 묘소 방문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보고였다. 이곳에서는 수년 전 (서울의) 국립묘지에서 (북한 공작원이) 시도했던 것과 같은 방식의 (폭탄) 테러 공격이 가능하다." (72~73쪽)

이런 예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러나 당시 안기부 역시 이미 정해진 방문 일정을 바꿀 힘은 없었다. 그렇다면 누가, 왜 버마를 방문 일정에 포함시켰는가. 저자는 권력 핵심부의 정치적인 동기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전두환은 당시 헌법에 따라 '7년 단임'(7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겠다는 뜻)을 약속한 상태였다. 이런 약속을 대놓고 깨기란 어려웠다.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권력을 내놓을 마음도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전두환의 이런 속내를 꿰뚫어보고 아이디어를 냈다는 게다.

"여하간 대통령의 최측근 중 한 명이 그에게 대통령직에서 은퇴한 다음에도 그대로 권력을 유지하거나, 적어도 그가 전문성이 있는 분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귀띔했다는 것이다. 대통령 자신이 특별히 잘할 수 있는 분야로 생각한 것은 안보, 외교 그리고 경제였다고 한다." (70쪽)

버마의 네윈 장군을 배우자는 아이디어였다. 네윈(본명은 슈 마웅)은 군인 출신이고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으며 무지막지한 독재를 했다. 여기까진 전두환과 닮았는데, 이념은 다르다. 네윈은 사회주의자다. 극우 성향인 전두환 일당이 사회주의자에게서 배움을 얻으려 했다는 게 우스꽝스럽다. 애초 그들에게 이념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남을 지배하고픈 욕망을 채우는 게 늘 우선이었다.

"네윈은 당(버마 사회주의 계획당)의 지도자로서 당을 장악하고 있었고 실질적으로 그 당시 버마의 실권자였다. 네윈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우산유는 실상 허수아비여서 퇴임 후에도 네윈이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버마를 방문하면 전두환과 그의 측근들은 버마 모델을 숙지할 기회가 있을 것이고 아울러 네윈과 전두환 사이에 인간적인 교류도 가능하리라는 계산이 있었던 것이다." (70~71쪽)

- 어쩌다 전두환은 살아남았나?
이 사건에 대한 대표적인 궁금증이다. 자작극 음모론이 난무했던 배경이기도 하다. 당시 한국 언론은 '나팔수의 착각'을 이유로 꼽았다. 의전 상 실수 때문에 전두환은 아웅산 묘지에 늦게 도착했다. 그 바람에, 묘지에 있던 나팔수는 앞서 도착한 이계철 버마 대사를 전두환으로 착각했다. 그래서 나팔수는 행사 시작을 알리는 나팔을 불었는데, 이 소리를 듣고 테러범들이 폭파 스위치를 눌렀다는 게다.

하지만 이런 설명에도 의문은 뒤따랐다. 당시 아웅산 묘역에 설치된 폭탄 가운데 폭발한 것은 일부였다. 폭탄을 전부 터트리지 않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저자는 당시 북한 테러범 3명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강민철의 증언을 간접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이 책의 주인공이다. 그에 따르면, 전두환이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폭탄이 터진 것은 누군가의 실수 탓이 아니다. 폭탄 자체의 기술적 결함 때문이다. 무선으로 원격 조종되는 폭탄인데, 다른 전파의 간섭 때문에 일부 폭탄이 먼저 폭발했다는 게다.

테러 직후 언론 보도 내용과 달리, 테러범들은 전두환의 동선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전두환이 숙소에서 늦게 출발한 것, 아직 현장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 등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엉뚱한 시각에 폭탄이 터졌고, 그래서 테러범들 역시 당황했다고 한다.

저자 역시 이런 설명을 신뢰한다. 비슷한 유형의 테러 시도는 이보다 앞서도 있었다. 북한 공작원이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폭탄을 설치한 적이 있는데, 이때도 기폭장치가 다른 전파 때문에 오작동을 해서 공작원만 사망했다고 한다. 같은 착오가 반복된 사례라는 게다.

▲ 테러 사건 당시 버마 아웅산 국립묘지 헌화 행사에 도열한 수행원들. 색이 바랜 이 한 장의 사진은 당시 연합통신 최금영 기자(중상으로 입원)가 폭발 참사 수초전에 찍은 것이다. ⓒ연합뉴스

- 만약 테러가 성공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이 책에 따르면, 테러 직후 남한 군 지휘관들은 몹시 격앙했고, 강력한 보복 공격을 주장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사망하면, 총리가 권한 대행을 하게 돼 있는데, 당시 총리는 학자 출신인 김상협이었다. 허수아비 노릇하던 총리가 흥분한 군부를 제대로 다스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저자 역시 같은 생각이다.

그럼, 제2의 한국전쟁이 터지는 걸까. 이 역시 가능성이 낮다. 테러 이후 미국 측은 한국에 대해 '침착한 대응'을 강력히 주문했다. 미국은 전쟁을 원치 않았다는 게다. 작전권은 미국이 갖고 있으므로, 미국이 원치 않는 전쟁이 한국에 의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다만 군부가 민간인 정부를 무시하고 폭주하면서 여러 혼란이 생겼을 가능성은 있다. 이렇게 됐다면, 한국의 민주화 역시 지연됐을 게다.

- 북한은 왜 테러를 했나
저자에 따르면, 북한이 전두환 암살을 시도한 건 여러 차례였다. 같은 군인 출신 대통령이지만 노태우에 대해선 암살 시도가 없었다고 한다. 노태우의 경우, 야당도 참여한 선거로 집권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북한 정권이 노태우 정권과는 전과 다른 관계를 모색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전두환 정권 초기에 암살 시도가 잇따랐던 건, 1980년 광주에서의 시민 학살과 무관하지 않다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광주 학살에 대해서는 전두환조차 자격지심을 갖고 있었다. 전두환이 지방순시를 할 때면, 다른 곳에선 늘 질책을 쏟아냈지만 광주는 예외였다고 한다. 광주에선 칭찬만 했다는 게다. 또 광주를 방문한 전두환 일행은 엄중한 경비 아래 관공서 건물 안에만 있었다고 한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정당성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속으로는 겁을 먹고 있었다는 이야기.

그래서 전두환은 많은 한국인들에게 노골적인 경멸 대상이었다. 이는 몇 가지 부작용을 낳았는데, 그 중 하나가 북한의 도발 행위에 대해 많은 한국인들이 정부의 조작이라고 의심하게 된 것이었다. 물론, 당시 군사 정부가 간첩 사건을 숱하게 조작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점이 북한의 부당한 도발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이런 분위기를 당시 북한도 잘 알고 있었다. 전두환에 대한 테러를, 자신들과 상관없는 남한 내부의 문제로 몰아갈 수 있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다만 아웅산 테러는 북한의 통일전선부가 아닌 북한군 작전부가 주도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아웅산 테러에 앞서 몇 차례의 전두환 암살 시도가 있었는데, 이는 북한 통일전선부가 주도했다. 그러나 모두 실패했다. 그러자 군 작전부가 나섰다는 게다.

북한 군부는 학업성적, 체력 등 여러 면에서 뛰어난 엘리트 군인 셋을 뽑아 테러를 준비했다. 이 가운데 한 명은 테러 직후 사망했고, 또 한 명은 체포 이후 재판을 거쳐 사형 당했으며, 나머지 한 명인 강민철만 사형 집행이 보류돼 오래 살아남았다. 강민철은 체포 직후 자신이 서울대학교 재학생이며, 서울 영등포구에 거주한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당시 서울대에 동명이인이 있었다고 한다. 아웅산 테러를 한국 내 반정부 세력의 소행으로 몰아가려는 북한의 계획에 따른 거짓 진술이었다.

실제로 테러 직후, 버마 정부는 남한의 자작극 또는 남한 내 반정부 세력의 소행일 가능성에 무게를 실었다. 이런 사실이 한국에 소문으로 전해지면서, 자작극 음모론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버마 수사당국이 엄밀한 조사를 한 결과, 북한의 소행이라는 점이 명백해졌다. 테러범 강민철의 진술은 앞뒤가 맞지 않는 대목이 많았다. 당시 버마는 비동맹 국가로서 한국 또는 미국의 눈치를 볼 처지가 아니었다. 버마 수사당국의 조사 결과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

만약 테러가 성공한다면, 남한 군사 정권은 단지 정당성이 없다는 점을 넘어 무능하기까지 하다는 점이 입증되는 셈이었다. '국가 안전 보장'이라는 핑계로 시민 학살마저 정당화했는데, 정작 최고 권력자와 그 일행의 안전조차 보장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이게 북한의 계산이었다.

그러나 아웅산 테러는 남한 내 민주화 세력을 탄압할 구실만 제공한 셈이었다. 설령 테러가 성공했다고 해도, 남한 군부의 힘만 키우는 결과를 낳았을 게다.

3.

북한은 아웅산 테러 사실을 끝까지 부인했다. 실패한 테러범 강민철은 북한에서 지워진 이름이었다. 강민철은 버마 정치범 수용소인 인세인 감옥에서 생을 마쳤다.

여기까지라면, 그저 딱딱한 사건 기록이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이야기가 뒤에 있다. 체포 이후 강민철의 변화다. 살인기계로 조련된 엘리트 군인, 그러나 그 역시 사람이다. 기계는 부품을 갈아가며 계속 쓸 수 있지만, 사람에게 육신은 하나뿐이다. 그게 망가지면 생은 끝난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 삶이 무의미한 고통으로 채워지는 걸 견디지 못한다. 생은 한번뿐이니까.

고통은 피할 수 없지만, 그래도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기를 기대한다. 살인기계 강민철 역시 마찬가지였다. 강민철은 재판을 참관하던 일본대사관 직원에게 침을 뱉은 일이 있었다. 재판에 불리하게 작용하리라는 걸 뻔히 알면서 한 행동이다. 알고 보니, 일본대사관 직원을 한국대사관 직원으로 착각한 거였다. 그가 품었던 남한 군사정부에 대한 적개심, 그리고 독재에 시달리는 대다수 남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은 진심이었다.

"(강민철은) 텔레비전을 통해서 광주항쟁의 실상을 보았고 남한 동포를 해치는 전두환을 처치하라는 지시를 '정의로운 사명감'을 갖고 받아들였다고 했다." (63쪽)

이랬던 그가 마음을 바꿨다. 테러 사실을 자백했고, 기독교 신자가 됐다. 드라마틱한 사연이 있다.

"후일 강민철은 남한 외교관에게 자신이 심경변화를 일으켜 자백하게 된 경위에 대해 설명했다. 직접적인 이유는 병원에서 부상 치료와 회복 기간 중 자기를 돌보아준 버마인들에 대한 인간적인 호의였다. 특히 한 간호사가 특별히 자기를 친절하게 대해주었다는 것이다. (…) 그 간호사는 강민철에게 모든 것을 사실대로 자백하라고 몇 차례 권유했다고 한다." (220쪽)

이 간호사의 정체가 뭘까. 일종의 미인계였다.

"버마의 수사당국은 일부러 미모의 간호사를 뽑아 그를 돌보면서 수사에 협조를 유도하고 그를 회유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강민철에게 살려는 의지를 되살려서 조사를 원활하게 하려는 계책이었다." (220쪽)

하지만 저자는 강민철이 미인계에 넘어갔다는 식의 단순 논리가 몹시 못마땅하다.

"그러나 그가 이른바 의도적인 미인계에 걸려 자백하기로 결심했다고 치부해버린다면 옳지 않을뿐더러 어떻게 생각하면 가장 비정하고 비인도적인 판단일 수 있다. 버마당국의 미인계를 강민철이 간파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특수과업을 수행하는 요원으로서 훈련받은 강민철이 이런 흔한 수법을 몰랐을 리 없다." (221쪽)

저자의 이런 해석에 대한 판단은 사람마다 다를 게다. 철저히 폐쇄된 조건에서 단련된 테러범이 설령 미인계에 마음이 좀 흔들렸다 한들, 그게 그렇게 큰 허물인가 싶기도 하다. 다만 그가 마음을 고쳐먹고 생의 의지를 회복한 것을 오로지 미인계 때문이라고 보는 논리는 명백한 잘못이다.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다.

강민철은 아웅산 테러에 대한 북한의 입장 발표를 텔레비전으로 접했다. 그를 훈련시켜서 버마로 보냈던 북한 당국은 테러에 대해 딱 잡아뗐다. 원래 그렇게 하기로 돼 있던 거였다. 강민철은 남한 사람이며, 테러 사건은 남한 내부 문제라고 몰아가게끔 계획이 돼 있었다. 그런데 텔레비전을 보고 있노라니, 새로운 깨달음이 몰려왔다. '정의로운 사명감'을 갖고 테러를 준비하던 시기엔 깨닫지 못했던 거였다. 자신은 그저 쓰다 버리는 도구에 불과했다는 깨달음. 그게 그의 마음을 바꿨다.

그의 이런 깨달음을 뒷받침한 사례는 또 있다. 테러 직후 도망치다 버마인들에게 포위당했을 때, 그는 수류탄을 꺼냈다. 안전핀을 뽑았는데, 바로 폭발했다. 그래서 그는 불구의 몸이 됐다. 정상적인 수류탄이라면, 던지고 나서 일정 시간이 지난 뒤에 폭발한다. 알고 보니, 죽은 다른 테러범들이 갖고 있던 수류탄 역시 안전핀을 뽑자마자 터졌다고 한다. 여기서 그는 의심을 품었는데, 북한 당국이 일부러 특수한 수류탄을 지급했다는 것이다. 안전핀을 뽑자마자 터지게끔 돼 있는 수류탄을 지급해서, 테러범들의 속마음과는 무관하게 자살로 처리되게끔 했다는 의심이다. 그래야 북한은 테러가 자신들과 무관하다고 잡아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자동으로 폐기돼야 했을 살인기계가 살아남았다. 여기서 반전이 생겼다.

'정의', '민족', '자주' 등 거창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만만한 약자를 골라 쓰다 버릴 뿐인 권력에 대한 환멸. 그게 그를 신앙으로 이끌었다. 그래서 기독교 신자가 됐고, 감옥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았다. 하지만 권력에 대한 환멸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북한에 정이 떨어진 그는 남한으로 가기를 원했다. "나는 누구이고, 왜 이상한 나라에서 이상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가. 한국인이 살고 있고 한국말을 할 수 있는 곳에서 단 하루라도 사람다운 삶을 살다가 죽고 싶다"고 말했다는 강민철. 그러나 남한의 군사정부와 민주정부는 각기 나름의 이유로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남한의 민간인 중에서 그를 데려오려는 시도를 한 사례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역시 강민철을 일종의 도구로 여기는, 실용적 관점이었다. "중요한 역사적 사건의 증인"으로서 가치가 있다거나, 일종의 정보원으로서 쓸모가 있다는 식이었다. 권력에 의해 도구로 키워지고, 끝내 버림받았으며, 훗날 자신의 죄를 뉘우친 한 인간에 대한 관심이 들어설 자리는 남과 북 어느 쪽에도 없었다. 결국 강민철은 25년간의 수형생활 끝에 간암에 걸렸고, 2008년 5월 감옥에서 병원으로 가던 구급차 안에서 숨졌다. 종교의식은 물론 제대로 된 장례식도 없었다.

▲ 강민철. ⓒ연합뉴스

4.

강민철은 몰랐겠지만, 만약 알았다면 그의 환멸감을 더욱 증폭시켰을 사실들이 테러 이후 죽 이어졌다. 아웅산 테러가 있고난 바로 이듬해, 전두환은 자신의 최측근인 장세동을 북한 김일성에게 특사로 보낸다. 김일성과 만난 자리에서 장세동은, 김일성의 항일투쟁 이력과 북한을 통치하며 이룬 업적에 대해 낯 뜨거운 찬양 발언을 했다. 불과 1년 전에 그의 주군을 살해하려던 김일성 앞에서 말이다. 서울 거리를 오가는 보통 시민이 같은 발언을 했다면, 바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잡혀갔을 게다.

김일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정의'의 이름으로 처치하려던, 광주 학살의 주범, 전두환에 대해 "전두환 대통령 각하"라며 깍듯이 존대했다. "친절하고 애국의 지성을 담은 좋은 말씀"이라는 인사도 곁들였다. 김일성의 머릿속에 자신이 쓰다 버린, 고장 난 살인기계 강민철의 기억이 들어설 자리는 과연 있었을까.

어이없는 일은 계속 이어진다. 대통령이 테러로 죽을 뻔 한 사고가 터졌는데, 책임을 진 건 대부분 말단 실무자 아니면 허수아비 공직자들이었다. 권력 실세들은 테러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직책에 있었음에도, 오히려 영전했다. 예컨대 테러 당시 안기부장이었던 노신영은 총리가 됐다. 테러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이 있는 대통령 경호실장은 장세동이었는데, 그는 자리를 지켰고 얼마 뒤 안기부장이 됐다.

한 세대 전의 사건들인데, 낯설지가 않다. 위험을 약자에게 떠넘기는 권력, 사고에 대해 책임을 지는 건 늘 말단 실무자들일 뿐 진짜 책임이 있는 이들은 계속 승승장구 하는 모습. 그리고 외눈박이 엘리트로 길러지지만 단물이 빨린 뒤에는 내쳐지는 한국의 강민철들.

바로 우리 대기업의 현재 모습이다. 대부분의 대기업들은 위험한 업무를 직접 하지 않는다. 하청업체에 맡긴다. 산업 재해 등 문제가 생기면 꼬리 자르듯 관계를 끊으면 그만이다. 비리가 드러나도, 책임을 지는 건 주로 월급쟁이 경영자들이다. 오너가 처벌 받는 사례는 많지 않다. 입시 경쟁, 취업 경쟁을 통과한 똑똑한 젊은이들을 받아서 회사인간으로 써먹지만, 쓸모가 다하면 나 몰라라 한다. 회사에 단물을 쪽 빨린 채 중년이 된 그들이 치킨집을 차렸다가 쪽박을 찬 사연이 차고 넘친다. 하지만 대기업을 움직이는 경제 권력이 보기엔 그저 쓰다버린 소모품일 뿐이다. 이젠 남과 북 모두의 기억에서 지워진 엘리트 장교, 낯선 땅에서 외롭게 죽어간 한 테러범의 사연에 감정 이입을 했던 이유다.

5.

왕은 부끄러움을 모른다고 했다. 고대의 금언인데, 왕의 자리에 정치 권력 또는 경제 권력을 넣으면 지금도 그대로 통하는 말이 된다. 권력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전두환은 자신이 다스리는 국민에겐 엄격한 반공교육을 시키면서, 자신의 측근을 김일성에게 보내 찬양 발언을 하게 했다. 이런 이중 잣대에 대해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으므로, 권력이다.

정치 권력의 정점에 있는 박근혜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연평도 포격 등 북한의 도발 사례를 끊임없이 환기시키며 종북 여론몰이를 한다. 북한의 잘못은 너무나 명백하며, 그 때문에 희생된 이들 앞에서는 옷깃을 여미고 고개를 숙여야 한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이중 잣대 역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 <나의 도전 나의 열정>(정몽준 지음, 김영사 펴냄). ⓒ김영사
박 대통령은 한국미래연합 대표 시절인 2002년 5월에 김정일이 보낸 특별기를 타고 평양을 방문했다. 김정일로부터 극진한 환대를 받았던 박 대통령은 "통일에 대한 염원이 더욱 간절해졌다"고 했고, 김정일에 대해서도 "화법과 태도가 인상적"이었다며 나쁘지 않게 평가했다.

그해 9월에는 남북 통일축구대회가 열렸는데, 이는 박 대통령과 김정일의 합의에 따른 작품이었다.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의 회고록 <나의 도전 나의 열정>(김영사 펴냄)에 따르면, 당시 박 대통령은 축구협회장이던 정 의원에게 화난 얼굴로 따진 적이 있다. 남북 통일축구대회 경기장에서 관중들이 왜 태극기를 들고 응원하고 있냐는 게다. 한반도기를 들었어야 했다는 게 박 대통령의 주장이었다고 한다. 또 관중들이 '통일조국' 대신 '대한민국'을 외친 데 대해서도 문제 삼았다고 한다.

북한의 도발에 따른 '제2연평해전'으로 한국 해군 6명이 전사하고, 19명이 부상한 지 불과 석 달이 채 안 됐을 때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관중이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민국을 외친 게 그렇게까지 잘못인가, 라는 의문을 못 던지라는 법은 없다.

대통령에게까지 종북 딱지를 붙이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늘 반복되는 권력의 이중 잣대 적용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내가 하면 국익, 남이 하면 종북'이라는 이중 잣대를 언제까지 고집할 건가.

이중 잣대가 적용된 사례는 아주 많다. 이 글 도입부에서 '적군묘지'를 소개했다. 박 대통령이 적군묘지에 묻힌 중국군 유해를 송환하겠다고 한 것은 잘한 일이다. 그런데 한국전쟁의 어느 국면에선 북한군보다 중국군의 총에 맞아 죽은 국군의 수가 더 많았다. 그렇다면, 북한군 유해 송환이 불가능할 이유 역시 없어 보인다. 이중 잣대를 고집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버마에 묻혀 있는 강민철의 유해는 당분간 어렵더라도, 적군묘지에 있는 북한군 유해는 송환 협상을 해보면 어떨까. 권력의 도구로 쓰이다 왜 다쳐야 하는지, 왜 죽어야 하는지조차 모른 채 땅에 묻힌 남과 북의 청년들, 그들 역시 미인을 보면 잠시 마음 설레고 늘 고향이 그리운, 그저 사람이었음을 대통령이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6.

▲ 저자 라종일. ⓒ연합뉴스
사람을 도구로 키우고 결국 쓰다 버리는, 분단체제 국가권력의 배신과 위선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의미 있는 독서 경험을 제공했다. 그러나 아쉬운 대목도 많다. 저자는 강민철을 직접 만난 적이 없다. 다만 강민철과 만난 적이 있는 한국 외교관, 정보기관 관계자, 동료 수인 등을 통해 정보를 수집했을 따름이다. 저자의 작업은 일종의 저널리스트가 한 것과 비슷한데, 책의 성격은 학술서, 저널리즘 출판물, 에세이 등의 사이에서 어중간하게 줄타기를 하는 것 같다. 이 가운데 한 가지 성격으로 일관했다면, 읽기가 더 편했으리라는 느낌이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독자마다 다를 수 있으며, 사소한 문제다.

의아했던 것은 이런 대목이다.

"그러나 그(강민철)의 동포들은 그에 대한 관심도 배려도 없었다. 단지 정치만 중요할 뿐이다." (245쪽)

일상에서 '정치'라는 말이 부정적인 뜻으로 쓰이는 건 사실이다. 예컨대 권력게임에서 지분을 늘리는 일을 가리킬 때가 많다. 하지만 정치학자가 '정치'라는 단어를 이런 식으로 쓰는 건 이해하기 어려웠다. 정치라는 단어의 의미를 협소하게 규정하고, 마냥 부정적으로만 바라보게 하는 건 저자가 혐오하는 남한의 독재자들이 주로 쓰던 수법이었다.

인간의 존엄성, 휴머니즘은 절대적인 가치이다. 그러나 휴머니즘을 강조하는 것만으로 휴머니즘을 지킬 수는 없다. 머리도 좋고 몸도 튼튼한, 그러나 권력의 눈으로 보기엔 순진하고 만만한 청년을 데려다 살인도구로 쓰고는 내다 버리는 비인간적인 행태. 휴머니즘에 공명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분노하는 상황인데, 이런 상황을 만든 것도 권력이고, 이걸 막을 수 있는 것도 권력이다. 그렇다면 그저 '인간'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어떻게 생겨먹은 권력이기에 멀쩡한 사람을 쓰다 버리고도 끄떡없는지, 권력의 생김새를 어떻게 바꿔야 '인간'의 가치를 더 잘 지킬 수 있을지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지 않을까.

정치학자의 저술이 아니었다면, 굳이 이런 아쉬움까지 언급하지 않았을 게다. 그러나 정치적 성격이 짙은 고위 공직을 두루 역임한, 이론과 현실을 두루 넘나들었던 정치학자의 저술이라서, 기대가 컸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아쉬움은 작은 부분이고, 권력의 비정한 그림자를 고발한 점은 큰 부분이다. 그래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권할 만하다. 박 대통령 역시 '정치'라는 단어를 좁고 부정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듯하다. 따라서 정치에 희생당한 '인간'을 강조하는 이 책이 대통령에겐 더 편하게 읽힐 수도 있겠다. 이 글 앞부분에서 구상 시인의 시를 언급했다. 이념을 넘어선 인간애를 노래하는 구상 시인의 시가 이 책과 잘 어울린다 싶다. 함께 읽으면 좋을 듯하여 글 말미에 덧붙인다.

초토의 시 8
- 적군 묘지 앞에서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워 있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구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들어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바른 두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도,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이로다.

이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삼십 리면
가로막히고, 무주공산(無主空山)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램 속에 깃들여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北)으로 흘러가고,

어디서 울려오는 포성(砲聲)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놓아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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