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또래이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걸은 두 사람의 인연은 남다르다. '공순이' 최순영이 유신 정권 몰락의 신호탄이던 1979년 YH 사건의 주역이라는 점에서다. 그로부터 25년 후 '공순이' 최순영이 띄운 이 편지는 그 인연을 더 특별하게 만들었다.
노동자 정치 세력화를 위해 나선 '공순이' 최순영은 편지에서 박정희 정권의 산업화 신화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한국 사회, 그리고 산업화의 주역은 박정희 전 대통령도, 한나라당으로 대표되는 수구 기득권 세력도 아닌 "당신들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을 참혹한 노동 환경을 견뎌낸 수많은 노동자들"이라고 역설했다. "당신 아버지(박 전 대통령)가 군대, 경찰, 관료, 재벌들과 함께 5개년 경제 계획을 밀어붙이는 동안 내 아버지와 동료와 또래의 노동자들이 죽어나갔다"고 질타했다. 유신 시절, 병영 같던 공장을 온몸으로 살아낸 이만이 할 수 있는 비판이었다. (당시 기사 : "'공순이' 최순영이 '영애' 박근혜에게")
인생 역정 자체가 부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박근혜 대표로선 듣기 불편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다. 17대 국회에서 함께 일하는 동안에도 최순영 의원은 박근혜 대표에게 껄끄러운 존재였다. 2004년 한나라당이 근현대사 교과서에 '친북·반미' 딱지를 붙이며 이념 공세를 펼치자, 교육위 소속이던 최 의원은 "근현대사 교과서의 겉표지라도 보고 그런 말을 하느냐"고 박 대표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9년. 최 의원은 국회를 떠나 부천으로 돌아갔다. 부천은 '공순이' 최순영이 YH를 떠난 후 새로운 터전으로 삼은 곳이다. 그곳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탁아 운동, 학교 급식 운동, 생활협동조합 운동, 가정법률상담소 활동 등을 했던 최 전 의원은 다시 부천 주민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
12월 23일, 부천에서 최 전 의원을 만났다. 박근혜 정부가 민주노총 본부에 공권력을 투입한 다음 날이었다. '공순이' 최순영이 '영애 대통령' 시대를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은 인터뷰의 주요 내용이다.
▲ 최순영 전 의원. ⓒ프레시안(최형락) |
"목숨 걸어야 했던 우리 때 싸움보다 더 어려워졌다"
프레시안 : 정부가 12월 22일 민주노총에 공권력을 투입하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1979년 YH 사건을 떠올렸다. 당시 YH 노조 지부장으로서 이번 사태가 남다르게 다가왔을 것 같다.
최순영 : 그날 오후 결혼식에 갈 일이 있었는데, 거기서 만난 사람들이 'YH하고 똑같다'며 말을 걸어왔다. 참 마음이 아팠다.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나 카카오톡 등에 동료들이 진행 상황을 계속 전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저기 가야 하는데, 저기 있어야 하는데'란 생각을 계속했다. 결국 일정이 발목을 잡아 가보진 못했다.
한편으론 지금 맞닥뜨린 상황은 과거보다 더욱 나빠지고 (탄압은) 교묘해졌단 생각도 들었다. 당장 이번에 지도부 몇 명 잡겠다고 투입한 경찰이 5000여 명이라는 게 굉장히 놀랍다. 1979년 신민당사에서 우리 여성 노동자들을 끌어내겠다고 정부가 투입한 경찰은 2000여 명이었다.
프레시안 : 그때보다 상황이 더욱 나빠졌다는 건 무슨 뜻인가.
최순영 : 겉으로 보면, 경제가 성장하며 예전보다 살기 좋아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작 그 성장을 일군 사람들은 오늘날 비정규직 양산 정책과 극심한 양극화에 시달리고 있다. 과거보다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다.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가 막 붙지 않나. 거기서도 요즘 젊은 세대가 얼마나 힘든지가 잘 느껴진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1960~1970년대 고속 성장 과정에서 첫 단추를 잘못 끼웠기 때문이다. '선성장 후분배'를 내세웠던 유신 정권은 노동자를 장시간 노동에 내몰며 엄청나게 착취했다. 그중에서도 우리나라 피복 생산의 70% 정도를 담당했던 청계 피복의 노동 조건은 특히 열악했다. 천장이 낮은 영세한 공장 안에서 열두 살짜리들이 폐병과 빈혈을 앓으면서 일했다. 도시락을 싸올 수조차 없어 점심을 거르던 어린 노동자들이 있었고, 생리대 대신 공장에 있던 광목을 써야 했던 여성 노동자들도 많았다. 공장 안에서 숙식하던 노동자들은 모두 퇴근한 후에 청소하고 이튿날 일할 것들을 다 준비해 둔 후 자정이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고 또 일찍 일어나서 일했으니 얼마나 잠이 부족했겠나. 이는 지금 누군가의 어머니 이야기이자 누군가의 젊은 시절 이야기다. 바로 이 사람들이 우리 경제를 성장시킨 주역이다.
프레시안 : 그 주역들 중 일부는 지금도 최저임금 보장을 요구해야만 처지다. 예컨대 50~60대 청소 노동자들이 그렇다. '산업화', '박정희 찬양가'가 울려 퍼지는 한국 사회에서 정작 그 산업화를 일군 주역 중 상당수는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다.
최순영 : 경제 성장의 혜택은 기업들에 집중됐다. YH무역(창업주 장용호)이 바로 그런 경우다. YH는 (자본금) 단돈 100만 원에 (종업원) 10명으로 (1966년) 시작했다. 당시엔 수출만 한다고 하면 정부가 돈을 다 해줬다. (정부의 수출 우대 정책과 특혜 금융에 힘입어) YH는 1968년엔 (면목동에) 2700평 대지를 사 공장을 지었고, 내가 입사했던 1970년엔 종업원이 4000여 명에 달하는 국내 최대 가발 업체가 됐다.
이렇게 잘나가던 공장이었는데, 경영진이 해외로 돈을 빼돌리고 횡령하면서 무너졌다. (장용호는 1970년) 영주권을 얻어 미국으로 건너간 후 15억 원을 외상으로 가지고 나간 다음에 안 갚았다. (장용호는 1970년 동서인 진동희에게 YH 경영을 맡기고 자신은 미국에 YH 제품을 판매하는 상사를 설립, YH로부터 제품을 구매한 후 그 대금을 결제 기간이 지나도록 갚지 않는 방식으로 사실상 외화를 빼돌렸다. <편집자>) (동업자 진동희는) 사원들에게 상여금을 줬다며 (허위 장부를 만들어) 빼돌린 10억 원을 가지고 해운 회사를 세웠다. 알려진 것만 25억 원 정도를 경영진이 빼돌린 것이다.
그러니 이 공장이 어떻게 되겠나. 1979년 공장은 폐업 공고를 내걸었다. 장용호 일가는 100만 원 가지고 10여 년 만에 25억 원을 빼돌렸는데, 우리는 임금도 제대로 못 받으며 일하다 빈털터리가 됐다. 이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어서 싸웠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도 경영진은 공장 폐업 책임을 노조(YH 지부)로 돌렸다. 노조 때문에 문을 닫는 거라고 했다. 우리가 노조를 1975년에 만들었는데, 초창기부터 노조가 있었으면 회사가 그렇게 망가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임금이라도 제대로 받지 않았겠나. 그런데 우리가 장용호 입속에 돈을 넣어준 꼴이 됐다. 사람 하나하나가 돈이었으니까. (최 전 의원이 입사한 1970년, YH무역 노동자들의 첫 월급은 2000∼2500원 수준이었다. <편집자>)
프레시안 : YH무역만이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 전반의 문제였다. 노동자를 정당하게 대우하는 기업을 찾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최순영 : 한국 자본가들이 그래서 욕을 먹는다. 노동자를 착취하고 돈은 (제대로) 안 주고, 그러면서 자신들이 가진 권력은 세습한다. 이런 불평등한 경제 성장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정당하게) 분배하지 않는 압축 성장에만 매달린 결과,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것과 별개로 양극화와 사회 갈등은 더욱 커졌다.
이제는 대학을 나와도 먹고살기 힘든 사회다. 대학을 나와도 비정규직이 된다. '안녕들 하십니까' 자보가 현세대의 어려움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국을 잘살게 해준 것처럼 젊은 친구들이 많이들 알고 있는데,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선성장 후분배가 아니라 분배와 성장을 조화롭게 했다면 기업들도 나름대로 진화했을 것이다. 그러면 한국 사회도 이보단 건강한 사회 경제적 구조를 갖추지 않았겠나. 여러모로 지금 세대가 해야 하는 싸움은 목숨을 걸어야 했던 우리 때 싸움보다 더 어려워졌다.
▲ 1979년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는 YH 여성 노동자들. ⓒ연합뉴스 |
"간곡히 호소한다…박 대통령, 아버지 잘못을 깊이 돌아봐야"
프레시안 : YH 최순영은 같은 연배인 '영애 박근혜'와 함께 17대 국회의원으로 일했다. 2004년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에게 띄웠던 편지 <'공순이' 최순영이 '영애' 박근혜에게>는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았다. 지금은 그가 대통령이다.
최순영 : 나도 편지를 썼지만, 내 기억에 1979년 우리(YH지부) 조합원이 박근혜 당시 영애에게도 편지를 썼었다. 우리가 이렇게 억울하게 당하고 있다고, 도와달라고 애원하는 편지였다. 참 절절했다. 1970년대 그때 우린 정말 그랬다. 그때나 지금이나 노동자들에게 청와대는 참 멀고 높은 곳 아닌가.
프레시안 : 2004년 편지에서 '영애와 영식의 시대가 가고 공순이와 공돌이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최순영 : 그건 다 우리 탓이다. 할 말이 없다.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10석이나 얻었지만 그때 우리가 주장했던 무상 의료나 무상 교육을 요즘에는 누구나 다 얘기하는 상황이 됐다.
정치는 기본적으로 토론이고 협상이다. 그런데 한국 정치는 그야말로 조폭 정치다. 국민으로부터 얻은 정치권력을 개인의 권력으로 가져가려 한다. 협상은커녕 숫자만 늘리려는 식으로 정치를 한다. 다수결의 원칙을 내세우는데, 그건 권력을 쥔 다수들만을 위한 것이다. 아무리 소수 의견이라도, 예를 들어 5%의 국민만이 주장하는 것이라도 이를 논의에 반영해야 한다. 그게 협상이고 그게 잘돼야 정치가 발전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진보 진영 역시 정치판에 들어가면 다 같아지는 것 아닌가란 생각이 든다. 내가 당선되느냐 마느냐라는, 개인의 권력에 급급한 정치를 진보만큼은 해선 안 된다. 지난 몇 년간 진보 정당이 합쳤다 결별했다 이동했다 하는 걸 보면서 참 많이 아쉬웠다.
프레시안 : 박근혜 정부 출범 후 1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최순영 : 사실 지난 대선 이후 의식적으로 텔레비전 뉴스를 잘 보지 않았다. 다 끊고 '개그콘서트' 정도만 본다. 그래도 요즘은 인터넷이나 SNS를 통해 (이런저런) 소식을 접하는 데 문제가 없는 세상이다.
프레시안 : 박근혜 정부의 노동 정책은 어떻게 보나. 아울러 '공순이' 최순영이 '영애 대통령' 박근혜에게 9년 만에 다시 편지를 띄운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나.
최순영 : 박근혜 정부에 대해 큰 기대는 없지만, 다만 실낱같은 기대는 하나 있었다. 남북 관계는 그래도 좀 잘하지 않겠나 하는 것이었다. 예전엔 남북을 잇는 철도를 놓자는 이야기 같은 걸 하기가 어렵지 않았나.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그런 걸 한다고 하면, (남북 관계 개선을 추진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쏟아졌던 비판보단 (공격을) 덜 받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또 우리 사회 자체가 이전보다 잘살게 됐으니 북한과 관계를 잘 만들 수 있지 않겠나 싶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남북 관계를 보면 무서워서 무슨 일이 나지 않을까란 생각마저 든다. 그렇긴 하지만, 지금도 박근혜 대통령이 어떤 업적을 남긴다면 그건 남북 관계 개선일 수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한다.
노동 문제만큼은 별로 기대가 가지 않는다.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를 법외 노조로 만들겠다고 그 난리를 치지 않았나. 간곡히 호소하고 싶은 심정이다. 아버지(박정희 전 대통령)가 잘못한 것들을 깊이 돌아보고, 극복하려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지금이라도 아버지 때부터 심해진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한 괜찮은 정책을 펼칠 수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극복하려면 무엇보다 기업들로부터 세금을 제대로 받아야 한다고 본다. 한국은 돈이 없는 게 문제가 아니라 돈을 잘못 써서 문제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라는 속담이 있는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개같이 벌면 개같이 쓰게 된다. 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서 콩 나는 것이다. 세금을 제대로 거두고 그걸 제대로 쓰면 (박 대통령이) 공약했던 반값 등록금, 고교 무상 교육 이런 걸 지킬 수 있다. 또 그렇게 해야 양극화 문제나 비정규직 문제도 풀린다.
▲ 구로공단은 박정희 전 대통령도 수시로 방문할 정도로 1970년대 국가 경제 성장의 주요 축이었다. 오늘날 구로공단은 서울디지털단지로 이름이 바뀌었고 인근에는 고층 빌딩이 들어섰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1970년대 '여공'의 자리를 이어받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쓰이고 버려지고 있다. 사진은 1976년 퍼스트레이디 시절 구로공단을 방문해 여성 노동자들을 격려하는 박근혜 대통령. ⓒ연합뉴스 |
프레시안 : 노동 운동이 직면한 상황 역시 만만치 않다. 선배로서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은가.
최순영 : 그런 생각이 들더라. 1970년대에 노조 숫자는 적었지만 굉장히 끈끈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정이었고 관계였다. 만나면 좋고 힘이 되고 그래서 지금도 모이면 깔깔거리면서 옛날이야기를 하고 그런다. 그런데 요즘 활동가들을 보면 '동지가'는 항상 부르지만 '동지애'는 (별로) 없다는 느낌이 든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동지는 없고 정파만 있다'고 하더라. 특히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일수록 그런 것 같다. 그게 참 아쉽다.
민주노총에 대한 공권력 투입 등으로 여러모로 어려운 때인데, 그럴수록 민주노총이나 현장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서로 격려하고 정을 나눠 힘을 키웠으면 한다. 결국 관계의 문제 아닌가. 젊은 세대가 살기 어렵다며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를 붙이는데, 그런 젊은 세대에게도 우리가 살아갈 세상은 결국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걸 얘기해주고 싶다. 우리는 세상을 떠나선 살 수가 없고,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려면 힘을 모아야 한다. 이런 것들은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
불우한 시기를 버틴 1970년대 여성 노동자들처럼, 젊은 친구들이 서로 격려하고 만나서 힘도 주고 했으면 한다. 인간은 누구나 어딘가에 속하기를 원하는 사회적 동물이지 않나. 그래서 조직을 하는 것이고, 조직이 중요한 것이라고 본다.
"학생들에게 근로기준법 가르치자고 하니 엄마들이 좋아하더라"
프레시안 : 국회의원 임기를 마치고 원래 활동하던 부천으로 돌아갔다. 근황이 궁금하다.
최순영 : 요즘은 지역에서 협동조합 일을 주로 하고 있다. 다리를 걸쳐놓은 곳만 다섯 군데라 많이 바쁘다. 부천햇빛발전소 협동조합에 동참하고 있고, 의료 협동조합도 하고 있다. 생활협동조합은 1989년부터 쭉 해온 일이고, 여행 협동조합도 지인들과 하고 있다. 얼마 전엔 농협의 조합원도 됐다.
(일부) 사람들이 협동조합 하면 만사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제대로 학습하고 조직하지 않으면 협동조합 역시 잘할 수 없다. 노동 운동과 비슷하다. 최근에는 YWCA와 함께 가사 돌보미들을 어떻게 협동조합으로 묶어낼 것인지를 연구하는 연구위원회를 꾸려 학습을 했다. 이 연구를 하면서도 또 느꼈지만, 협동조합은 제일 중요한 게 조합원의 주인 의식이다. 이 역시 노동조합과 비슷하다.
또 중요한 것은 생명, 친환경처럼 어떤 가치를 중심에 둔 협동조합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 경제 차원에서 협동조합을 고민해야 한다. 사람들이 이를 생각하지 않고, 유행이라고 하니 너도나도 하는 분위기다. 협동조합에 걸맞지 않게 다른 곳의 후원을 받는 방식으로 운영하려다 실패하는 사례도 많다. 협동조합은 조합원들의 주인 의식, 조합원의 힘이 근거가 돼야 하고 사람과 생명이 중심이 되는 가치를 세워야 한다. 결국 이를 위한 조합원 학습이 필수다.
프레시안 : 친환경무상급식센터 운영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고 들었다. 국회의원 이전 최순영의 삶으로 돌아간 것 같다. 1989년에도 탁아소를 만드는 등 피부에 와 닿는 지역 활동을 많이 했고, 무상 급식 운동도 원조 격이지 않나.
최순영 : 누가 그러더라. '최 의원은 참 용기가 있다'고. 국회의원 떨어지면 여의도 안 가듯이, 시의원 떨어지면 시청에 잘 안 오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그런데 (전에 시의원과 국회의원을 한) 내가 (이제는) 급식센터 운영위원장이라고 툭하면 왔다 갔다 하니, 창피하지 않나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 시의원이고 국회의원이고 그렇게 생기는 권력은 개인의 권력이 아니다. 권력은 내가 사회를 위해 하려는 일,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하는 데 하나의 수단일 뿐이지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처음부터 내가 하려 했던 것들을 위해선 지역 주민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학습하고 조직하는 게 기본이다.
▲ "학생들에게 근로기준법을 가르치자고 했다. 엄마들이 싫어할 것 같지 않나. 그렇지 않다. 굉장히 좋아한다." ⓒ프레시안(최형락) |
프레시안 : 그 외엔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
최순영 : 혁신학교 운영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권력이 바뀌면 제일 먼저 바뀌는 게 교육이다. 예전엔 아이들의 시민 의식 함양을 위한 교육을 하자고 하면 공무원들이 무슨 정치 교육을 하려 그러느냐고 손사래를 쳤다. 그러다 (경기도에) 김상곤 교육감 체제가 들어선 후 시민교육관을 설치하는 등 교육 운동에 활력이 생겼다.
반응도 좋다. 얼마 전엔 혁신학교 운영위원회 회의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근로기준법을 가르치자고 했다.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면 아르바이트를 하게 될 텐데 자기 권리를 알아야 (맥없이 당하지 않고 권리를) 찾지 않겠냐고 했다. 엄마들이 싫어할 것 같지 않나. 그렇지 않다. 굉장히 좋아한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것 아니겠느냐는 공감대가 있다. 학교에서 바로 그런 것을 가르쳐야 하지 않느냐고도 말한다. 이런 것을 보며 나도 놀랐다. 이것이 변화다 싶었다.
1970년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전태일 열사가 분신했고, 1970년대 여성 노동자들은 모여서 '유신 정권 무너지는 걸 내 살아생전에 볼까. 박정희가 가면 지만이가 오겠지' 그랬다. 역사는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것이다. 잠깐 한눈파는 사이에 냄비 물이 끓어 넘쳐버리는 것과도 같다. 지금 이대로 가면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만큼 늘 변화를 잘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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