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가 되지 못한 것도 있고, 기사로 옮겨진 것도 있다. 처음 삼성전자서비스 위장 도급 의혹이 일었을 땐, 하루에도 한두 개씩 꼬박꼬박 녹음 파일이 제보됐다. 짧게는 2~3분, 길게는 3시간에 이르는 것까지. 의혹이 제기되고 첫 한 달간은 잡음이 엉킨 녹음 파일을 듣고 또 듣는 데, 일과 시간을 상당 부분 썼다. 이제는 머릿속에서 수십 개의 대화가 뒤섞여, '징계 해고 건이 어디였지?'식의 되새김질을 종종 하곤 한다.
지난달 31일 저녁,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 노동자 최 모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단 연락을 받았을 때도 그랬다. '지난번 욕설 녹취 당사자'라는 설명을 듣고 처음 든 생각은 '욕설 녹취가 한두 개였어야지…'였다. 마침 연락이 닿은 다른 신문사 기자에게도 '어떤 녹취인지 명확히 아느냐'고 물었는데, 반응은 비슷했다. '보름 전 그 녹취인가? 두 달 전에도 비슷한 거 있지 않았어?'라는 물음이 되돌아왔다.
그렇듯, 최 씨가 남긴 '욕설 녹취'는 별로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기자가 지난 네 달여 동안 들은 녹취 속엔 듣기 불편한 육두문자와 인신공격이 때때로 등장했다. 표현만 부드러울 뿐이지 곰곰이 듣고 있으면 '이건 협박인데' 싶은 발언도 적지 않았다. '돈 벌어가서 애들 잘 키워야지', '너네 자꾸 노조 하면 삼성이 우리 폐업시켜' 등 내용도 가지각색이다. 최 씨의 죽음을 두고 다른 수리 기사들이 '남 일 같지 않다'고 말하는 덴 이런 배경이 있다. 1등 기업 '삼성' 로고를 가슴팍에 달고 일하는 노동자들의 현실이다.
▲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 노동자 고(故) 최종범 씨를 추모하는 금속노동조합 삼성전자서비스 지회 조합원들. ⓒ전국금속노동조합 삼성전자서비스지회 |
삼성 로고 조끼 입고, 삼성전자 스마트폰만 쓰는 노동자들
삼성전자서비스 위장 도급 의혹은 시작부터 '녹취'가 발단이었다. 6월 초, 기자는 부산 동래 센터에서 일하는 두 노동자가 녹음한 장장 3시간짜리 음원 파일을 받았다. '나한테 무슨 권한이 있느냐…. 삼성에서 다 결정하는데'란 협력사 사장의 말이 선명하게 박힌 녹음이었다. 여러 정황과 서비스 위탁 계약서, 증언들을 종합한 결과, 협력사 노동자들이 무언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방식으로 일하고 있단 결론을 내렸다. 법률 자문을 한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에선 이를 '위장 도급'이란 단어로 설명했다.
삼성이 만든 스마트폰은 이렇게 부메랑이 돼 삼성으로 돌아갔다. 누구나 스마트폰을 활용해 필요한 대화를 언제든 녹음할 수 있게 된 시대. 여기서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가 있다. '녹취' 폴더 안에 있는 음원 파일들은 전부 확장자가 '3ga'란 점이다. '3ga'는 삼성 휴대폰으로 녹음한 파일에만 붙는 고유한 확장자다. 예외는 없다. 삼성전자서비스 수리 기사 전원은 삼성 스마트폰을 자비로 사서 업무에 사용한다. 그것도 제법 최근 모델로만.
애사심 때문만은 아니다. 수리 업무를 하는 데 필수 프로그램인 '애니 존(Any Zone)'이 삼성 스마트폰에서만 구동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취재차 만난 수리 기사 대다수는 "툭하면 애니 존을 업그레이드해서 구형 스마트폰에선 제대로 굴러가지도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기사 쓰는 그 노트북 회사에서 줬지요? 우리는 이 스마트폰 우리 돈 내고 사고, 전화비도 다 우리 돈으로 내요"라는 얘기를 들은 게 여러 번이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서비스 측은 소자본으로 운영되는 협력업체에 기술을 지원한 것일 뿐이라 말한다. 이게 핵심이다. 소프트웨어를 삼성이 공급하는 것. 소프트웨어는 모든 것을 결정한다. 하드웨어가 어떠하든, 협력업체 노동자들의 업무 방식과 내용을 결정하는 쪽은 기술도 자본도 없는 협력업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를 공급하는 삼성이다. '나한테 무슨 권한이 있느냐…. 삼성이 다 결정하는데'란 협력사 사장의 고백 아닌 '고백.3ga'가 의미하는 바도 마찬가지다. 수리 기사들의 소프트웨어는 사장님이 누구이든, 근로계약서가 어떠하든 '삼성맨'이다.
협력업체 수리 기사의 극한의 '감정 노동', 누가 만들었나
원청이 만든 소프트웨어는 협력사 노동자들의 감정까지도 지배한다. '해피콜'의 진화 과정만 봐도 그렇다. 한때 LG의 뒤를 쫓고 있었던 삼성이 택한 전략이 '고객 만족 서비스'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삼성은 1986년 국내 최초로 '해피콜'이란 제도를 도입했다. 삼성에서 수리 일을 오래 한 기사들에 따르면, 초기엔 '만족-보통-불만족' 3단계로 구성돼 있었다고 한다.
처음 평가 시스템이 생겼을 때, 수리 기사들은 "물건이 고장 났는데 만족이 어딨어 만족이. 수리받아도 보통이면 다행이지"라는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러나 점점 상황이 진지해졌다. 평가 지표는 얼마 못 가 '매우 만족-만족-보통-불만족-매우 불만족' 5단계로 세분됐다. 그리고 지금은 10점 만점의 열 단계 평가가 됐다. 평가가 세밀해질수록, 수리 기사들의 감정 노동 강도는 커졌다. 서비스 평가 결과가 자신에게 미치는 결과도 훨씬 더 직접적이게 됐다. 이제는 낮은 점수를 받으면 이른바 '대책서'를 쓰고 다른 직원들 앞에서 낭독해야 한다.
삼성이 만든 '서비스 찬가'는 업계 전반으로 확산됐다. LG 등 다른 전자 제품 업체들도 비슷한 서비스 평가 시스템을 정착시켰고, 이제는 골프장 캐디도 서비스가 끝나면 '점수를 매겨 달라'며 엽서 크기의 종이를 손님들에게 건네는 상황까지 왔다. 서비스에 중독된 사람들은 갈수록 '더 좋은 서비스'를 찾고 있다. 피곤함에 지쳐 '퉁명한 표정'을 짓는 서비스 노동자들은 더는 용서받을 수 없다. 삼성의 위력이다.
▲ 왼쪽은 삼성전자서비스 고객 만족 평가지. 오른쪽은 한 협력업체 노동자가 최근 작성한 대책서의 일부. ⓒ금속노동조합 삼성전자서비스지회 |
명절 반납하고 주말에도 일해서 번 '반짝' 급여 505만 원(-80만 원)
협력업체 노동자들의 임금도 그렇다. 삼성전자서비스 수리 기사들은, 삼성이 설계한 수리 수수료 체계에 따라 급여를 지급받는다. 월급을 쏴주는 통장 명의는 협력사일지라도, 급여 소프트웨어는 삼성 것이란 얘기다.
이들이 받는 수수료는 수리 한 건 당 기본 7000원. 오래된 제품이라 자재가 없어 수리가 불가능하면 2000원의 수수료를 받는다. 자재가 없는 게 수리 기사들의 잘못이 아니건만, 이상하게도 이렇게 책정돼 있다. 복잡한 전문 기술이 필요한 수리라면 7000원 보다 높은 수수료를 받기도 하고, 쪽방촌에 나가 돈을 받기 민망한 경우라면 '특별 처리'라는 것을 해 5000원의 수수료를 받기도 한다.
협력업체 사장이 직원 월급을 올려주기 위해 수수료를 자의적으로 높여 책정할 수 있을까? 사실상 불가능하다. 협력사 노동자들의 수수료 체계는 전국이 동일하다. 삼성전자서비스 측에선 "각 지역 수리비가 둘쭉 날쭉해서도 안 되고, 혹여라도 협력업체가 고객들에게 더 많은 수리비를 요구할 수도 있으니, 수리비 체계는 명확히 서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서비스업의 특성상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니 장시간 노동이 생길 수밖에 없다. 수리 기사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수리 요청이 많지 않은 비성수기에는 하루 수리 건수가 5개 이하에 머문다. 그래서 수리 요청이 두 배가 되는 성수기(6~8월)에 "바짝 당겨야 한다"고 이들은 너나없이 말한다. 하루 10개를 훌쩍 넘기는 수리를 다니고, 주말과 공휴일에도 마다치 않고 고객 집을 방문해야 '반짝' 많은 월급이 들어온단 얘기다. 이처럼 건당 수수료 체계는 필연적으로 장시간 노동을 부른다.
얼마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최 씨도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최 씨는 동료들과의 단체 카카오톡 창에 "배고파서 힘들었다"는 마지막 메시지를 남겼다. 그러자 '욕설 녹취'의 주인공인 천안센터 협력사 이제근 사장이 해명 편지를 썼다. 고인의 '최근 3개월 동안 월평균 급여가 505만 원이었다'는 해명이 비중 있게 담겼다.
'명복을 빈다'는 말이 조미료처럼 뿌려진, 자기변명 색이 짙은 이 편지에서 협력사 사장은 중요한 내용들을 다 빠뜨렸다. 505만 원이 비성수기 아홉 달을 나기 위해 성수기에 '당긴' 급여라는 것, 그리고 여기서 자동차 기름값과 식대와 전화비 등 80만 원가량이 자동으로 빠져나간다는 점. 그가 추석 연휴도 반납하고 주말에도 나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했다는 중요한 사실도 빠뜨렸다. 임금 명세서에 찍힌 숫자만 툭 내어 놓고, 그는 배고프지 않았다고 한 셈이다.
200억 투척한 삼성, 언제까지 "내 문제 아니야"로 일관할 건가
협력업체 노동자들의 이런 현실을 삼성은 몰랐을까. 협력사 직원들의 결혼 여부까지 파악해 전산에 등록한 것으로 알려진 삼성이다. (관련 기사 보기 : "삼성, 협력사 직원 결혼 여부까지 파악해 직접 관리") 삼성전자서비스 측은 지금도 "협력사 직원들의 근로 조건이 매우 안타깝지만, 협력업체와 협력업체 노동자 사이의 일"이란 말을 반복하며 노동자들의 교섭 요청을 외면하고 있다.
그런 삼성전자서비스가 딱 한 번, 공식적으로 '대안'이란 것을 내놓은 적이 있다. 지난달 16일 발표한 협력업체 '상생 방안'이다. 상생안엔 '시간 선택제 일자리' 1000개를 만들어 주 5일 근무제를 정착하고, 협력업체들에 200억 원을 지원해 협력업체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유도하며, 협력사와 상생협의회를 만들어 협력을 강화하겠단 내용이 담겼다. 아주 간단히 추리면 '돈'을 쓰겠단 것이다. 급여 체계 변화도, 해피콜 제도 개선도 언급되지 않았다.
이런 지원책이 삼성이 기존에 만들어놓은 소프트웨어를 뒤바꿀만한 대안인가. 수리 기사 6000여 명, 전체 협력사 직원 1만 명가량의 감정 노동과 장시간 노동, 저임금 체계가 정녕 이 상생안으로 해결될 수 있는가. '불안정 일자리 확대'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시간 선택제 일자리' 창출이 간접고용 노동자들이 처한 고용 불안과 사용자 책임 회피라는 문제를 해결할 열쇠인가. 이것으로 정말, 협력업체 노동자들이 더는 배고프지 않을 수 있는 건가.
'서비스업의 특성상 어쩔 수 없다'란 설명은 안타깝다. 말인즉슨, 서비스업 간접고용 노동자들은 비록 그것이 불합리할지언정 원청의 소프트웨어를 무조건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용자 책임은 너무나 손쉽게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다. '수익자 부담 원칙'을 내세우는 민법 원리와 '직접 고용' 정신을 근간으로 하는 노동법 체계 전반을 대기업이, 그것도 일류 기업 삼성이 나서 흔든 결과다.
결국, 서비스업 간접고용 노동자들은 "나한테 무슨 권한이 있느냐"는 말만 반복하는 협력업체 사장의 입만을 바라본다. 그것이 자신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욕설'일지라도…. 이제, 삼성의 선택은 무엇인가. '또 한 번의 외면'이 삼성의 다음 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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