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째깍째깍… 중세는 암흑 시대가 아니었다!

[프레시안 books] 카를로 치폴라의 <시계와 문명>

과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서양의 중세를 우리는 흔히 암흑시대라고 부른다. 그만큼 서양의 중세에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과학적 지식이 서양의 종교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면 철저히 무시되었기 때문이다. 고대 바빌로니아와 고대 이집트에서 발생한 문화가 고대 희랍으로 건너가 다양한 형태로 정리되고 체계화된 것이 현재 서양 과학의 원류다. 이렇게 희랍에서 발전된 고도의 과학의 체계는 그대로 고대 로마로 넘어가지 못하고 이슬람 세계로 넘어갔다.

이렇게 이슬람 문화 속에서 다듬어지고 정리된 과학은 다시 서양으로 역수입되는데 바로 이 시기가 기점이 르네상스 때이다. 당시 과학의 중심은 수학과 천문학이 주축을 이뤘고 실제 생활에서는 연금술이 두각을 드러냈다. 예를 들면 현재 사용하고 있는 별자리 이름은 고대 바빌로니아나 이집트에서 유래되거나 희랍시대부터 사용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별자리에 속한 밝은 별들은 상당수가 아랍어로 되어 있다. 중요한 화학 물질도 아랍어가 어원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점을 보더라도 과학에서 이슬람 문화의 역할은 대단히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시계와 문명>(카를로 치폴라 지음, 최파일 옮김, 미지북스 펴냄). ⓒ미지북스
과학의 발전 역사에서 볼 때, 서양의 중세는 과학적 지식이 진보하기보다는 퇴보했다는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많다. 그러나 예외적인 것 중 하나가 수공업에 의존한 산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기계 문명의 발달이 지속적으로 나타났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카를로 M. 치폴라 교수의 <시계와 문명>(최파일 옮김, 미지북스 펴냄)은 이러한 점에 초점을 맞추어 서양의 산업 발달의 변화를 "시계"라는 주제로 설명하고 있다.

서양 중세의 기술 문명 발전사에서 물레방아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무명의 수공업자들이 일련의 기계장치를 고안하여 물의 흐름이나 바람에서 얻어진 회전력을 이용하여 망치, 압축기, 드릴, 맷돌 등을 사용할 수 있는 여러 운동 장치를 개발하게 되었다. 이것은 인력을 대신하여 곡물을 빻고 올리브 기름을 짜고 옷감을 다듬이질하고 종이를 만들고 금속을 제련하고 맥주를 양조하는 등의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다. 노동력이 점점 비싸지는 사회 변화에 대응하여, 노동 집약적 장치에 대한 개발 압력이 갈수록 커지면서 기계를 사용하려는 노력도 더욱더 심화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등장한 것이 숙련공이다. 숙련공의 확보가 국가 경제의 흥망을 결정하게 된다. 중세 이태리에서는 기술과 숙련도에서 유럽을 주도하는 나라가 되었다. 이에 자극을 받아 독일의 서부와 남부에서는 야금술과 광업에 종사하는 숙련공이 증가하여 산업이 크게 발전하였다. 이에 비하면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발전이 미흡하여 숙련공을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 불러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숙련공의 규모가 나라의 산업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이러한 숙련공의 역할 중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게 된 분야가 기계식 시계의 제작이다. 기계식 시계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시간 측정은 주로 해시계에 의존했다. 이 해시계는 비교적 비용이 적게 드나 정확성이 높았기 때문에 기계식 시계가 등장한 이후에도 다양한 해시계가 개발되었다. 이 해시계의 가장 큰 문제점은 흐린 날이 많은 유럽에서 항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보조 수단으로 물시계를 사용했으나 이것 또한 사용상 문제가 있어 불편은 여전했다.

서양 중세 도시 생활에서 시계가 중요하게 인식되게 된 이유는 잠자리에 드는 시각, 일어나는 시각, 일터에 나가는 시각, 기도하는 시각 등과 같이 우리 일상생활의 기본 규칙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시각을 알리는 방법으로는 종소리를 이용했기 때문에 자연히 시각에 따라 종을 치는 장치 개발에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것이 기계식 시계를 개발하는데 결정적 전기를 마련해준 셈이다.

기계식 시계 제작의 가장 큰 기술 발전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정하게 제어해 줄 수 있는 기계 장치인 탈진기의 발명이다. 이 탈진기를 이용한 기계식 시계의 등장은 13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데 이 때 대포도 본격적으로 제작하였다. 금속 숙련공의 역할이 높아지면서 시계 제작자 중 다수가 대포도 제작했기 때문이다.

14세기에는 기계식 시계가 전 유럽으로 서서히 확산되었고 소리로 시각을 알려주는 장치를 포함된 장치가 일반화되었다. 1335년 밀라노의 산고타르도 교회에는 24시간 동안 매 시각마다 종을 치는 신기한 시계가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유럽의 여러 교회에서는 24시간을 자동적으로 알려주는 기계식 시계를 설치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모든 사람들은 해가 뜨지 않더라도 시각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공 시계는 당시에 매우 비싼 장치였을 뿐만 아니라 시계를 유지하고 보수하는데 지역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다고 한다.

공중식 기계식 시계 덕분에 시민들은 더 질서 정연한 삶을 살게 되어 도시들은 서로 이 시계를 경쟁적으로 설치하려고 했다. 따라서 기계식 시계 설치는 많은 비용이 들더라도 도시의 자부심, 실용성, 기계에 대한 관심에 힘입어 전 유럽으로 확산되어갔다. 또한 제작자들의 기능도 향상되어 정시뿐만 아니라 15분 간격으로 종을 치는 시계도 제작되었다. 그러나 시계의 정확도는 낮아서 16세기가 되기 전까지 우수한 시계라도 대충 시각이 맞을 정도였다. 따라서 매일 하루에 한 번씩 해시계를 이용하여 시계 바늘을 다시 조정하여 사용해야만 했다.

이 시기 시계의 정확성은 크게 개선되지 못했지만, 대신 매우 복잡하고 신기한 장치가 달린 시계가 개발되었다. 여러 종류의 톱니바퀴를 추가하여 만든 복잡한 운동 장치가 달린 시계가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 무렵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 성당에 설치한 시계는 크기가 클 뿐만 아니라 달력의 역할도 하고, 시계 바늘로 태양과 달의 위치도 알려주고, 행성들의 움직임도 알아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그리고 정오가 되면 음악이 연주되고 여러 종류의 인형들이 나와 볼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특히 이 시계의 가장 놀라운 점은 태양계 내에 일어나는 천문 현상을 보여주는 천문 시계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공성을 가진 시계들은 크기도 크고 유지 관리하는데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다. 이 시계들의 거의 긴 추를 줄에 매어 늘어뜨렸을 때 생기는 힘으로 구동되었기 때문에, 집안에서 사용할 수 있는 규모로 작게 만드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1410년이 되자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의 태엽으로 구동되는 시계를 만들 수 있었다. 태엽의 발명으로 쉽게 운반이 가능한 시계를 제작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게 되었다. 그 후에 손목시계와 회중시계와 같은 휴대용 시계의 제작도 가능하게 되었다.

14세기와 15세기만 해도 시계에 대한 수요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시계공들은 주로 대장장이나 자물쇠공 또는 대포 주조공들었다. 중세 유럽에는 금속 노동자가 적고 기계에 소질이 있는 수공업자가 귀했기 때문에, 외부에서 그들을 초빙하여 시계를 제작했다. 그러나 독일에는 비교적 유능한 대장장이와 시계공들이 많았던 것 같다. 이들은 프랑스와 이태리로 초빙되어 시계 제작에 많은 활동을 했다. 이 시기에 아우크스부르크와 뉘른베르크는 시계 제작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되었다.

중세학자들은 기계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은 없었지만 시계만큼은 천문학과 연계되었기 때문에 예외였다. 17세기 과학혁명이 진행되던 시기에는 시간 측정에 큰 관심을 가진 학자들이 많았다. 이 시기 유럽은 전 세계의 넓은 바다를 향해 나가던 시기였다. 천문학자와 항해사들이 항로를 정확하게 결정하려면, 천체의 관측이 필수적이고 정확한 시계가 가장 중요한 기기 중의 하나였다. 특히 경도를 결정하려면 쉽게 휴대가 가능하고 정밀도가 높은 시계가 필수불가결하다.

정확한 시각을 측정하기 위한 시계 만드는 일에 몰두한 학자들이 많았다. 그들 중에는 갈릴레오, 하위헌스, 후크, 벤델런, 파티오, 라이프니츠 등의 유명한 학자들도 포함되었다. 이중 하위헌스는 1650년경 시계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진자시계 연구에 착수했다. 진자시계의 등장은 그동안 답보 상태에 있던 시각 측정의 정밀도를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영국의 시계제작자들은 독창적인 방식으로 정밀도가 높은 시계를 제작하게 되었다. 그중 1670년경 등장한 앵커 탈진기는 톱니바퀴의 마모를 크게 줄이고 긴 진자를 사용하면서 정밀한 시각의 측정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런던과 제네바는 유럽 시계 제조업의 최대 중심지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특히 시계 제작이 발달한 지역은 특정한 부품을 전문화하여 생산하는 체제가 완성되었다. 이것이 분업의 이점을 극대화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시계가 교환 가능한 부품으로 구성되고 전문화된 직공의 손을 거치면서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는 산업혁명과 이어질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유럽인들은 무역을 하고자 동양으로 진출하면서 이윤을 남길 수 있는 다양한 상품이 동양에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품과 교환할 수 있는 유럽의 상품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그들은 동양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서로 중계 무역을 주도하면서 이윤을 얻었다. 그러나 유럽의 제품은 대부분 아시아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거나 동양에서 만든 유사한 상품과 경쟁이 되지 못했다.

극소수의 예외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기계식 시계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주로 물로 작동하는 시계였고 해시계는 적도식 해시계가 있을 뿐이었다. 기계식 시계에 대한 소문이 중국에 퍼지면서, 스스로 시각을 알려주고 스스로 소리를 내는 자명종에 대하여 중국인들은 큰 호기심을 보였다. 당시 서양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마카오에서는 자명종을 얻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큰 돈을 지불했다.

기계식 시계는 서양의 선교사들이 중국 황제를 알현하는데 활용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스스로 울리는 종"에 대하여 중국 황제들은 특별한 애착을 갖게 되었다. 17세기와 18세기 내내 시계와 자동 장치뿐만 아니라 이와 비슷한 신기한 기계 장치들이 끊임없이 황궁으로 흘러들어갔다. 급기야 중국의 강희제(1662~1722)는 황궁에 크고 작은 시계를 제작할 수 있는 제작소까지 차리게 되었다. 서양의 선교사들은 전문 시계공을 선발해 중국 선교단에 포함시키기도 했다. 1707년 스위스 출신의 뛰어난 시계공이었던 프랑수아루이 스타들랭 신부는 중국 황궁의 시계 공방의 설립과 운영을 지원하도록 북경에 파견되었다. 1730년대 서양 신부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중국의 황궁에는 진자시계, 회중시계, 반복 타종 시계, 오르간, 천구의, 다양한 천문 시계 등이 4000점 넘게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자명종은 중국 상류 계층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서민들도 새로운 기계장치를 보고 놀라움과 찬탄을 금치 못했다. 중국 문화는 언제나 시간과 천문학과 관련을 맺어왔기 때문에, 중국 학자들은 자신들이 만든 시계에 대하여 특별한 가치를 부여했다. 그러나 16세기와 17세기 중국인들은 서양 시계와 천문학과의 관련성을 강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양 시계는 정확한 시각을 측정하는 기기로 귀하게 여기지 않고 단순히 하나의 신기한 장난감으로만 보았다. 따라서 중국과 일본에서 유럽 상인들은 무역 허가와 상업 특권을 얻기 위해 유력 인사에게 값비싼 시계를 선물하는 것이 일반화 되었다.

이러한 사고 때문에 중국인들은 시계를 만드는데 자신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구현시키지 못하고 무미건조한 복제품을 만드는 것으로 끝났다. 이는 중국인들이 외국 사상을 받아들이는데 익숙하지 않은 때문이라고 본다. 중국과는 달리 일본은 외국 사상을 받아들이는데 능숙하여 서양 시계를 모방하는 대신 실제로 자신들의 필요에 맞게 변형하여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렇게 치폴라 교수의 <시계와 문명>이라는 책의 전체 흐름을 보면 대단히 예리한 시각으로 서양의 기계 시계의 발전을 통하여 당시 유럽의 산업의 구조를 흐름을 알 수 있다. 시계 제작 과정의 한 가지만 보더라도, 서양의 정밀 금속 기술의 발전이 동양보다 군사적인 무기 체계를 우월한 위치에 올라서게 할 수 있었는지 그 전후 과정을 잘 알 수 있다. 또한 이 책에서는 서양이 이러한 정밀 기계 시계를 발전시켜 나간 것이 전 산업 구조에 큰 파급 효과를 주어 산업혁명이 일어나는데 일익을 담당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중국은 서양의 정밀 기계공업의 변화를 읽지 못하여 기계식 시계를 더 창의적으로 발전시키지 않았고 다만 고위 관리나 부유한 사람들의 유희 도구로서만 여기면서, 과학 기술 분야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이에 반하여 일본의 경우는 시계 제작법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정밀 산업을 일으킬 수 있는 계기로 삼았음을 치폴라 교수는 강조하고 있다.

<시계와 문명>이라는 책을 통하여 서양의 과학 기술 발전이 산업혁명으로까지 이어진 과정의 일면을 볼 수 있다. 새로운 과학 기술의 등장을 보고 받아들이는 방법에 따라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책이라 생각한다. 이 책의 내용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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