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디는 남편과 헤어진 두 아이의 엄마다. 세 들어 살던 아파트를 구입한 개발업자는 그 자리에 콘도미니엄을 지으려고 한다. 살 곳을 새로 구해야 하는데, 조건이 맞는 곳이 없다. 직장과의 거리, 버스 노선과의 거리, 아이들이 안전하게 교육받을 수 있는 환경 등을 고려해서 셋집을 찾으니, 자기 수입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월세가 비싸다. 두 달이 허비되고, 퇴거 시한이 임박해진다.
할 수 없이 차로 직장까지 45분 걸리는 곳에 집을 하나 찾았다. 하나뿐인 침실은 아이들이 함께 쓰고, 자기는 거실에서 자기로 한다. 세탁기도 건조기도 없고 놀이터도 없지만 할 수 없다. 그런데 월세 석 달 치를 보증금으로 선불해야 한다. 갖고 있던 돈은 모두 할부 자동차 계약에 쏟아 넣었다. 자동차가 없으면 이 집에서 출퇴근이 어렵고, 자동차를 가지자면 보증금을 낼 수 없다. 어렵지만 그래도 멀쩡한 직장인으로 살고 있던 한 시민이 졸지에 홈리스로 전락할 지경에 이른다.
이는 가상의 사례지만, 미국에서 (그리고 물론 한국에서도) 이와 같은 진퇴유곡의 상황은 드물지 않다. 이 상황의 특징은 뭔가 잘못되기는 했는데, 특별히 잘못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다. 샌디는 유달리 게으르거나 무능하거나 사치스럽거나 방탕한 사람이 아니다. 개발업자도, 그에게 아파트를 판 집주인도, 주택 개발을 승인한 정치인이나 공무원도 특별히 잔인하거나 악랄한 사람이 아니다. 버스 노선이나 자동차 가격이나 보증금 제도도 나름대로 공정한 방식으로 설정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샌디가 단순히 운이 없었다고 말하고 넘어가는 것은 한 가지 방법이다. 반면에 아이리스 영은 이것이 단순히 운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구조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샌디가 저런 처지를 당하게 된 데 기여한 원인은 매우 다양하고 복합적이다.
우선 개인적인 원인을 들자면, 대학교에 가지 않았다든가, 남편을 잘못 골랐다든가, 아이를 낳지 말았어야 했다든가, 기타 무수한 원인들이 거론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사후에 거론될 수 있는 원인들은 모두 간접적인 원인일 뿐이다. 대학교 학위가 없이 두 아이를 기르는 홀어머니라고 해서 홈리스가 되어야 할 필연성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또한 사회 구조도 원인으로 작용했다. 택지 개발을 통해 이익을 추구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제도와 풍토, 월세 보증금 제도, 버스 노선을 그렇게 설정한 시의회의 정책, 주택 보조금을 신청한 후 결정이 내려지기까지 2년 이상이 걸리는 관료제의 절차, 기타 등등, 무수한 제도들의 결합과 그런 제도를 당연하게 여기고 적응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습관이 사회 구조를 이룬다.
이 구조를 구성하는 요소 하나하나를 따지면, 어떤 것도 특별히 잘못이랄 게 없다. 뭘 어떻게 개선해야 샌디가 당하는 것과 같은 곤경이 방지될 수 있을지 뾰족한 답도 없다. 그렇지만 이 원인들 가운데 어떤 것도 자연의 산물이 아닌 것도 분명하다. 정책과 제도는 사람들이 정한 것이고, 그런 정책들과 제도들을 당연하게 여기고 살아가는 우리의 태도 역시 자연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선택한 결과이다.
아이리스 영은 우선 이와 같은 구조적 측면에 우리의 주의를 환기한다. 사회적 불의(injustice, 역자는 부정의로 옮겼다) 가운데 구조적인 원인 때문에 발생하는 것들을 불가항력적 자연의 소산으로 혼동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구조적인 불의는 사회 구성원들이 습관적으로 행하는 일반적인 행위들이 축적된 결과로 나타난다.
따라서 뒤집어서 생각하면, 사회 구성원들의 행동 습관이 바뀐다면 개선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럼에도, 물화(物化, reification), 연결의 부정, 직접성의 요구 그리고 "내 일이 아니다"라는 태도 때문에 대부분 책임을 회피하게 되고, 그 결과 특정한 부류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대가로 다른 사람들을 부당하게 억압하게 되는 불의한 구조가 유지된다.
물화는 사회 구조 때문에 발생하는 결과를 자연의 소산으로 혼동하는 경향이다. 연결의 부정, 직접성의 요구, "내 일이 아니"라는 태도 등은 모두 직접적인 인과 관계가 있을 때에만 인과성을 인정하는 사유의 습관에 기인한다. 인과 관계 중에 간접적인 부류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보지 못하게 가로 막는 가장 중요한 요인을 영은 법적 책임 모델에서 찾는다.
민사 사건이든 형사 사건이든 어떤 피해가 발생했을 때 책임 소재를 가리는 작업은 특정인의 작위(또는 부작위)가 그 피해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는지를 따지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책임이라는 개념을 이와 같은 모델에 따라 이해하게 되면, 구조적 불의에 대해서는 책임질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결론이 저절로 나온다. 구조적 불의는 불특정 다수의 행위가 오직 간접적으로만 원인을 제공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조적 불의에 대해 각 개인이 책임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먼저 책임의 개념부터 법적 모델과는 다른 방식으로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아이리스 영은 사회적 연결 모델을 <정치적 책임에 관하여>(허라금·김양희·천수정 옮김, 이후 펴냄)에서 제창한다.
사회적 연결 모델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각 개인은 구조적 불의에 대해 책임이 있다. 이 책임은 법적인 책임처럼 직접적이지도 않고, 특정한 개인을 지목하지도 않는다. 이를 영은 정치적 책임이라고 부른다. 이 책임은 정치 공동체의 경계 안에 국한되지 않고, 때로는 국경을 넘어서까지 연장된다. 이 책임은 또한 과거의 역사에 대해서도 연장될 수 있다. 국경을 넘어선 책임의 사례로는 의류 산업의 국제 분업 구조 같은 것이 있고, 과거의 역사로 연장되는 책임의 사례로는 인종 차별이라든지 식민주의 등을 들 수 있다.
2.
▲ <정치적 책임에 관하여>(아이리스 영 지음, 허라금·김양희·천수정 옮김, 이후 펴냄). ⓒ이후 |
특히 사회생활의 거의 모든 국면이 고도로 조직화되어 있는 현대에 구조적 불의에 대한 감수성이 유지되지 못한다면, 기술 관료에 의한 전횡을 견제할 수 있는 길은 사라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조지 오웰이 <1984>를 통해 그려낸 관료제에 의한 전체주의는 히틀러나 스탈린의 체제뿐만이 아니라 산업화되고 조직화된 현대 사회의 암울한 단면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런 체제를 막기 위한 유일한 길은 구조적 차원에서 인간 세상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그 결과 누가 부당하게 억압당하는 대가로 누가 어떤 특권을 향유하게 되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아이리스 영이 촉구하는 정치적 책임의 출발점은 바로 구조에 주목하는 시야의 확보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아이리스 영이 앤서니 기든스, 장폴 사르트르, 카를 마르크스 등을 인용하면서 구조적 관점을 부각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고 또한 성공적이다. 사회생활의 형태를 조금이라도 개선하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음으로써 구조적 관점의 중요성을 깨닫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아이리스 영이 촉구하는 정치적 책임이 법적 책임과 다른 개념이라는 점도 충분히 음미할 수 있어야 불필요한 인식론적 장벽을 제거할 수가 있을 것이다. 법적 책임의 관점에서 어떤 불의에 대해 누군가에게 책임이 있다는 말은 그 누군가에게 배상이나 처벌을 가함으로써 그 문제가 일단락된다는 뜻을 함축한다.
이제 이와 같은 형태의 법적 책임 개념을 표준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예컨대, 자기가 신고 있는 나이키 운동화는 베트남의 십대 소녀들이 저임금과 열악한 작업 조건 더하기 비인간적인 폭력에 시달리며 하루 열 시간 이상 노동한 결과 생산된 결과이므로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주장을 들었다고 가정해 보자.
법적인 책임의 개념 틀에 따라, 이 사람은 책임이 있다는 말에서 곧 자기가 배상을 하거나 처벌을 받아야 하는 의미를 연상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리고 물론 자기가 그 때문에 무슨 배상을 해야 하거나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법적으로 어불성설이므로, 자기에게 무슨 책임이 있느냐고 항의하기가 쉬울 것이다.
이와 달리 사회적 연결 모델에 따른 책임의 이행은 배상이나 처벌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다. 베트남 여공의 처지를 안타까워하고, 이와 같은 구조적 차원에 관해서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영이 주창하는 정치적 책임은 특정인을 직접 겨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끼는 정도를 지나서, 나이키 본사에 항의를 표하거나, 나이키의 하청 구조 또는 자기 나라의 정책과 제도를 바꾸도록 압력을 가하기 위해 시민운동을 조직하는 데까지 나설 수 있다. 각 개인이 어느 정도의 책임감을 느끼고, 그 책임감을 해소하기 위해 어떤 행동으로 나설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에 맡겨진다.
아이리스 영은 정치적 책임이 특정적이지도 직접적이지도 않음을 강조함으로써 책임감에 수반되는 실천적인 부담을 완화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고, 이 전략은 운동의 전략으로서 타당할 뿐만 아니라 이 주제의 본질적 성격에 관해서도 정곡을 꿰뚫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기 생각 안에서 떠오른 정의의 표준을 일방적으로 구체화한 다음에 다른 사람들에게 중뿔난 설교를 늘어놓으려는 자세가 전략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얼마나 오류인지를 영은 분명하게 깨닫고 있다.
하지만 바로 이와 같은 깨달음 안에 들어있는 논리적 함축 하나를 영은 충분히 음미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마사 누스바움이 이 책의 서문에서 제기하는 비판도 이 함축과 상통한다. 영은 법적 책임 모델이 과거 지향적인데 비해 자기가 주창하는 사회적 연결 모델은 미래 지향적임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누스바움은 이에 대해서, 왜냐고 묻는다. 법적 책임을 따지는 데에도 결국 미래를 지향하는 의미가 없을 수 없고, 정치적 책임을 자각하는 데에도 과거에 일어난 일들에 관한 정확한 파악이 필수불가결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나는 법적 책임의 개념과 사회적 연결의 관점에서 바라본 정치적 책임의 개념 사이의 구분이 기본적으로 도식적인 구분임을 영이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이 구분이 도식적이라는 말은 이 구분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들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하고 있는 사유의 프레임을 상대화하고 이 프레임 바깥에 위치하는 일정한 요소에 주의를 환기하는 목적을 위해 영의 도식적 구분은 유용하다.
단, 이 구분을 실제로 적용하게 되면 법적 책임의 개념과 영이 말하는 정치적 책임의 개념은 사안과 맥락에 따라서 연속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법적 책임과 정치적 책임의 구분이 하나의 도식으로서 어떤 지점에서 유용한 반면에, 그 구분을 교조화하지 말아야 할 맥락은 어디인지를 영이 명석하게 분별했더라면 전략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더욱 건강한 논변이 정형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3.
이 책의 서평을 쓰고자 나는 영어 원문을 빈번하게 대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이리스 영의 담론 형식은 아주 치밀하고 분석적인 부류에 해당한다. 한국어 번역문은 전반적으로 원문의 치밀한 분석을 재현하지 못함으로써 논의의 핵심 부분에 해당하는 지점으로 갈수록 논점이 뭉개져 버리는 결함이 나타난다.
이 책에서 영이 펼치는 주장들은 하나의 주제에 대한 결론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 논의를 시작해보자는 제언에 해당한다. 역자 역시 이 점을 간취하여, 이 책의 한국어본 출판을 계기로 "아이리스 영의 사유 세계에 기꺼이 발을 디뎌 그녀가 제기했던 주제에 대한 논의가 더욱 풍성하게 이뤄지길" 바란다고 했다.
한국 지성계 및 출판계의 현재 사정이 허락을 할지는 미지수지만, 가능하다면 법학, 철학, 정치 이론 등의 분야에서 관심 있는 전문가들의 검토를 한 번 거쳐서 수정본이 나올 수 있다면, 이 책이 다루는 주제에 관한 논의가 풍성해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번역문들을 교정해야 할 법적 책임은 내게 전혀 없다. 단, 영이 주창하는 바와 같은 사회적 연결 모델에 따른 책임은 내게도 어느 정도 있다고 느낀다. 이에 따라, 내 시간이 허용하는 한도 안에서, 현저한 오역에 해당하는 사례를 몇 가지만 예시해본다.
"우리는 에머슨식의 자기 의존을 거론하거나 사적 자선의 영역으로 사람들을 몰아넣으려 하지 않는다. 자율성이라는 가치에 대해 깊은 직관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 책임에 심취하는 최근의 현상은 최소한, 정치적 절망을 담보한다." (85쪽, 낸시 로젠블럼의 인용문)
→ 자율성이라는 덕목에 관한 깊은 직관을 우리가 공유한다고 해서 에머슨식의 자립 이념이나 사적 자선에 호소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 책임에 심취하는 최근의 경향은 자율성의 강조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는 만큼 정치적 절망 때문에 비롯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신체적 아비투스는 적절하게 사회를 분할하고 사람들이 서로의 관계에서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일상적으로 드러난다. (119쪽)
→ 사회생활의 각 부문에는 나름대로 적절한 신체적 아비투스가 있다. 아비투스는 사람들이 서로 관계하는 와중에 발하는 일상적인 표시들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도덕 평가의 주제가 단 하나뿐이라면, 타인과 개별적인 거래를 하는 사람들이 도덕 규칙을 따르든 따르지 않든, 우리는 노직식의 결론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규범적인 수단을 가질 수 없게 된다." (133쪽)
→ 도덕적 평가가 단 하나의 주제에 따라서만 이뤄져야 한다면, 다시 말해 사람들이 서로 관계할 때 도덕 규칙을 따르는지 여부만이 주제라고 한다면, 노직식의 결론에 의문을 제기할 규범적인 수단을 가질 수 없게 된다.
"특수한 관계에서 비롯되는 의무와 때로는 좀 더 일반적인 세계주의적 의무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경우를 구분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범세계적 공리주의는 도덕 행위자들에게 그들이 하려고 마음먹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러한 도덕적인 의무의 요청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범세계적 공리주의의 주장은 분명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232쪽)
→ 특별한 개별적인 관계들에서 도출되는 의무들을 세분하고, 좀 더 일반적인 세계주의적 의무보다 이런 의무들에 때로 우선권을 부여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렇지만 도덕적 의무의 주장은 원래 도덕적인 주체들에게 그들 나름으로 하고 싶어 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요구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도덕적 의무의 주장에 반대하는 것은 충분한 논증이 되지 못한다.
"위와 같은 이유로 부정의를 개선하는 행동에 나설 것이라 우리에게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 대부분이 부정의를 생산하는 사회 과정에 기여하고 있다는 이해에 바탕하여 정치적 책임을 실행에 옮기는 일은 서로가 가진 나쁜 믿음을 드러낼 뿐이다." (283쪽)
→ 부정의를 개선하는 행동에 나설 것이라 우리에게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위와 같이 열거하는 바로 그 지점에 숨어있는 나쁜 믿음을 서로서로 파헤칠 수가 있어야, 우리 대부분이 부정의를 생산하는 사회 과정에 기여하고 있다는 이해에 바탕을 둔 정치적 책임을 실행에 옮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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