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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은 들을 수 있는가"

[프레시안 books]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90년대 후반, 처음 서발턴이란 용어가 '하위주체' 등으로 소개될 때에 비해 이제는 한국에서도 서발턴이란 말이 제법 많이 쓰이는 듯싶다. 인도의 라나지트 구하의 책(<서발턴과 봉기>(김택현 옮김, 박종철출판사 펴냄))과 스피박과 차테르지 등 주요 서발턴 논자들의 책이 번역되고 소개되는 점으로 미뤄보면, '학문적 시민권'을 획득했다고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도 '서발턴 그룹'의 서발턴, 스피박의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등 논의가 번역, 소개됐지만 한국 사회에서 서발턴이 어떻게 이해되고 수용되어야 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는 많지는 많았다.

▲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가야트리 스피박 외 지음, 로절린드 C. 모리스 엮음, 태혜숙 옮김, 그린비 펴냄). ⓒ그린비
90년대 중후반 학술지 <트랜스토리아>(박종철출판사 펴냄)라는 이름의 포스트식민-서발턴을 전유하려는 흐름이 있었지만, 오래 지속되진 못했고 서발턴도 '익숙지 않은 인도/서구 이론' 혹은 '페미니즘 이론' 등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최근 차테르지의 <민족주의 사상과 식민지 세계>(이광수 옮김, 그린비 펴냄), 베벌리의 <하위주체성과 재현>(박정원 옮김, 그린비 펴냄) 그리고 스피박의 1988년 문제제기를 현재화 시킨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로절린드 C. 모리스 엮음, 태혜숙 옮김, 그린비 펴냄)가 잇따라 출판됐다. 왜 이 세 권의 책들이 연이어 출간됐는지는 그 연관성을 생각하기 쉽지 않지만, 구하의 <서발턴과 봉기> 이후 스피박의 문제제기가 수용되고 확산되던 시점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해주는 책들이기에 반갑다.

다만 이번에 소개하는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란 책은 한마디로 요약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앞뒤에 1993년과 1988년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의 2개의 판본을 위치시켜 놓고 2부에서는 서발턴이란 입론의 수용사, 확산사를 주로 다루었다. 3부에선 가장 논쟁적이었던 서발턴과 재현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리고 4부에서는 지구화 이후 서발턴이란 입론이 국제적 노동 분업, 제3세계 여성의 자기 재현과 연관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글이 실렸다. 물론 5부에선 이들 논의에 대한 스피박의 '응답'이 실려 있다.

서발턴에 대한 숱한 오해들

좁은 지면에 모든 이야기를 담아낼 수는 없고, 대신 확장된 서발턴이란 입론을 '한국'에서 수용할 때 몇 가지 주목해야 할 이 책의 주장들을 간략히 다루도록 하겠다. 먼저 한국에서 제일 오해가 많은 문제는 서발턴이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다. 기왕의 민중, 계급이 있는 데 굳이 서발턴이냐, 라는 반론이 계속되어 왔다. 한국 운동사에서 만들어진 '민중'이란 규정이 있는데 굳이 서발턴을 사용할 이유가 있을까에 대한 의문일 것이다. 그래서 제기되는 질문이 '서발턴은 누구인가'란 유의 질문이다.

하지만 서문에서 엮은이 모리스가 밝히듯 이는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오독'에 기반을 둔 의문이다. 단적인 예로 서발턴의 침묵을 기록상의 부재로 인한 정보 복원의 문제로 보는 것, 이론과 실천의 구성적 대립이란 이해 혹은 인도 사례가 제3세계를 대표한다고 읽는 것들. 스피박의 문제를 이해하기보다, 자신의 틀로 스피박과 거리 두려는 결과이다.

차테르지가 '서발턴 그룹'의 입장에서 그 역사를 술회한 것처럼 스피박이 1993년 <서발턴 연구>에 개입-이른바 포스트구조주의적 전회-한 것에 대해서는 "급진적 정치에서 변절"과 "소박하게 정치적이었던 초기보다 낫다"라는 평가가 엇갈린다. 다만 분명한 점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를 통해 하나의 '신화'가 균열된 점은 분명하다. 즉 서발턴의 역사는 부르주아/서구 역사서술의 주권적 주체인 인간-시민이 엘리트였으며, 역사가의 서술을 통해 서발턴이 직접적으로 말할 수 있다는 재현의 욕망은 '신화'였다. 이는 초기 <서발턴 연구>의 주요 구성원 차테르지의 말이다.

특히 스피박이 자살한 부바네스와리 사례-그녀는 17세에 죽은 스피박의 이모할머니이다-를 통해 이야기하려고 하는 바는 "저항을 위한 유효한 제도적 배경이 아예 없다면 저항은 인지될 수 없고 사티를 활성화시켰던 공리들에 대한 부바네스와리의 저항은 인지 될 수 없었다. (…) 나의 요점은 그녀들이 말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다른 무언가를 하고자 했을 때 제도적 정당화라는 것이 아예 없으니 그 다른 무언가를 인정받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응답'). 한편으로 말할 수 없어서 불륜으로 비난받았던 부바네스와리는, 다른 한편 "몸속의 문자소"를 통해 실은 말을 했던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의 불완전한 전형이었다. 스피박이 "(글을 처음 쓸 당시-인용자) 모든 마르크스적 의미에서 그녀(부바네스와리)를 재현하는 것이 과제였다고 지적하듯이, 스피박이 이처럼 불완전한 전형으로 부바네스와리 사례를 선택한 것은 형상화된 것과 문자 그대로인 것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른바 "급진적 이질성론"-이었다. 스피박이 부바네스와리의 자살을 서발턴적 죽음의 사례로 삼은 것은 그녀에게 씌워진 '불륜', '테러주의'라는 단정에 대한 "의미의 폐제'를 위한 것이었다.

이런 과정을 경유하며 초기 <서발턴 연구>의 중심인물인 구하가 <서발턴과 봉기>에서 언급한 봉기 혹은 엘리트와 구분되는 "헤게모니 외부에 있는" 민중의 자율적 정치 공간 그리고 "종속적 주체의 역사적 행위능력의 복원"에서 (물론 스피박은 구하로부터 "서발턴은 차이의 공간에 있다고 말하는 법을 배웠지만") 서발턴의 일상적 종속이란, 즉 '서발턴은 어떻게 재현되는가'란 주제의 변화를 겪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스피박 텍스트를 통해 저항, 무의식적 저항, 피억압자의 행위능력을 포착하려는 시도도 존재했다. 특히 이 책에 소개된 제임스 스캇(James. Scott)의 <약자의 무기>(1985) 등 해석학적 사회과학 연구들은 현실 사회주의 붕괴와 계급정치에 대한 피로감의 반영이다. 동시에 이 과정에서 그람시, 푸코 등을 응용한 정치적 대안의 가능성이 해석학적으로 모색됐다. 하지만 이들의 주된 해석과 달리 서발턴은 '투명하게' 드러나는 존재가 아니며, 스피박 역시 '불명성의 불가능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한 바 있다.

이처럼 서발턴의 진정한 목소리와 의식을 경험적으로 복원했다는 주장이나 서발턴의 진정한 목소리와 이해관계를 표현하거나 이들이 자신이 당하는 착취의 본성을 본능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그래서 곳곳에서 저항이란 실천이 가능하다고 푸코처럼 주장하는) 인식론은 오히려 서발턴을 지우거나 국제적 노동 분업 속에서 서발턴(농부, 미조직농업노동자, 부족민 등)에 대한 착취를 모호하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는 스피박의 주장을 이 책은 거듭 강조한다.

하지만 이런 스피박의 개입과 문제의식은 현실의 변화-통치성의 '망'으로 병합, 선거정치와 국가 복지 정책 요구 등-를 동시에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지구적 자본주의 하에서 소비주의를 기반으로 한 인적 자원의 업그레이드를 통한 서발턴의 배제와 억압이 아닌, "생산적 병합"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 좀 더 주목할 필요성이 제기되기도 한다(이 책에서 치아는 가사이주여성의 국제적 재생산 노동 분업 사례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즉 국민국가에 적합한 발전과 성취의 틀 안에서 여성의 평등과 자유와 권리라는 생명정치적 육성이 생산적 병합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여기에는 초국적 페미니즘 NGO도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비참하게도 초과착취를 당하는 서발턴들이 반자본주의 연대가 아닌, 지구적 자본주의를 지속시키는 도구성의 장 안에 머물게 만든다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소수자에 대한 정정'과 연관된 문제다. 한국에서도 소수자 담론, 문학 등이 넘쳐나지만 진지하게 다시 사유해 봐야 할 것은 인권이나 소수자란 이름으로 그들을 어떤 주체로 만들고자 하는가이다. 이 책에서 코넬리는 '인권의 윤리적 긍정'을 통해 선진자본주의 규범에 비추어 볼 때 "비생산적"이라고 간주되지만 서발턴의 표식인 "종속적인 문화"와 "사회적 이동성의 노선으로부터 격리된" 서발턴에 대한 태도에 대해, 일방적인 주체로 타자가 변화하기를 요구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을 변혁하며 서발턴과 더불어 자유를 추구하는", 이른바 "새로운 페다고지"를 제안하고 있다.

포스트 식민과 서발턴

다음으로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는 포스트 식민과의 관계다. 서발턴 연구와 포스트 식민간의 관계는 차테르지가 언급한 바와 같이, "제3세계 주체가 서구 담론에서 어떻게 재현"되는가를 둘러싼 문제다. 스피박의 문제제기는 이런 변화를 가져온 하나의 '이정표'였다. 비를라가 '포스트 식민 연구'에서 언급한 것처럼, "현재도 진행 중인 식민 형성, 탈식민화의 실패, 인간과 자본의 새로운 초국적 흐름과 더불어 다시 구현되는 식민 관계"의 주목이 그 내용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타자/화의 복잡다기한 과정에 대한 주목이다.

스피박 이후 제기된 이 문제는 동일성의 서사/정치를 한편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대타성의 윤리를 성찰하는 것이었다. 한국의 가까운 현실에 비추어 보면 토착성이나 한국적인 것을 통해 '탈식민'을 추구했던 전략-대표적인 예로 60년대 후반 이후 진정한 민족주의를 추구했던 내재적 발전, 시기구분론, 근대문학사 재구성과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로 대표되는 한국적인 것에 대한 식민주의적 해석의 극복 전략-은 식민주의로부터 벗어나려는 지식 생산 전략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이런 전략은 식민적 타자화 논리의 재생산이자,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토착적인 것의 긍정을 통한 유럽적 역사 주체의 "거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진정한 토착성의 외형을 띤 '서구/보편에 대한 강렬한 욕망'일 것이다. 유사한 맥락에서 '인권의 윤리적 긍정'(코넬리)에서 언급된, "진화도식의 자연화"로서 사회적 다윈주의에 입각한 시혜, 선의, 우월함에 근거한 인권 담론은 식민주의의 연장선상에서 위계화-인종화된 질서를 합리해주는 데 봉사할 수 있다. 후술할 지식인의 책임의 윤리도 여기에 해당되는 개입 근거다.

지식인과 서발턴, 윤리

▲ 가야트리 스피박.
ⓒcenterforthehumanities.org
마지막으로 다룰 문제는 서발턴의 재현과 지식인, 윤리에 대한 문제다. 이 책에서 반복적으로 다뤄지고 있는,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에서 스피박이 제기하는 핵심은 서발턴이 스스로를 대변할 줄 모른다는 것이 아니다. 스피박은 서발턴이나 피억압 대중이 모순과 억압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식의 주장-스피박은 그 주요 논적으로 푸코와 들뢰즈를 들고 있다-은 서발턴을 둘러싼 "억압의 문제를 그냥 방치"(비를라)하는 것에 불과하다. 또한 스피박은 서발턴에게 행위 능력을 부여해서 주체성을 복원한다는 "진정성의 담론"은 이들을 단일한 행위주체로 구축한다고 경고한다. 진정성 대신 스피박이 강조하는 것은 "타자 구성의 역학"이다. 바로 스피박이 강조하는 것은 타자에게 진정성이나 목소리를 주는 과정에서 이들을 주체로 공고히 하는 과정-"타자 구성의 역학 속"-에서 구성되는 헤게모니들에 대한 재고에 다름이 아니다.

이처럼 서발턴이 지식인이란 "복화술사"를 제공받는다고 해서 서발턴을 둘러싼 억압의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발턴의 '서발터니티'는 정체성이 아닌 '곤경'이며 서발턴에게 목소리를 돌려준다는 '선한 의도'의 텍스트도 '번역'이란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왜냐하면 서벌터니티란 권력에 접근하는 능력을 가로막는 '구조화된 장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발턴에 대한 차이를 통약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보편적으로 배포될 수 있는 권리 개념과 인간을 타자와 윤리적 관계 속에 있는 존재(혹은 불가지한 대타성이나 초과)로 이해하려는 '책임' 개념의 구분에 주목해야 한다. 이 책에서 '인권'의 사례에서 지적한 것처럼, (스피박 자신이 인권 자체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타자들을 서구의 주체성의 이상이나 규범에 부응하도록 단일화-보편화하는 것은 폭력적 요구일 수 있다.

'인권의 윤리적 긍정'(코넬리)에서 지적하듯이, 서발턴의 목소리를 재현할 수 있는 지식인들의 권한을 지우는 것은 타자를 이상화하는 동시에, 지식인과 대중의 결합 가능성을 합리화시킨다. 스피박의 말을 간략히 인용하자면, "타자의 불안정한 주체성 속에 있는 타자의 흔적을 비대칭적으로 말소"하는 "지식인의 그림자", 쉽게 말하자면 서발턴에 대한 지식인 자신의 재현에 따르는 윤리적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적으로 타자에 도달하기 어렵지만 그 간극을 보충하려는 시도를 추구하는 윤리적 책임과 대타성을 사유하는 방법으로 스피박이 제안하는 것은 "상상하기"다. 바로 다른 자아, 그 존재 방식과 관계 맺고 대면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이 책의 말미 '응답'에서 그녀는, 서벵골 푸룰리아, 비르붐의 11개의 학교, 중국에서의 체험 그리고 서발턴과 조우하기 위해 모국어로부터 벗어나고 알제리에서 아랍어를 배운 체험 등을 회고하고 있다. 스피박은 알제리에서 보낸 시간을 "누가 서발턴의 말을 듣드냐는 것이었으리라"고 회상한다.

하지만 여전히 남은 문제는 스피박이 애초 언급한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부정적 답변에 이어지는 '우리는 어떻게 들을 수 있는가'를 둘러싼 책임이자 윤리의 문제이다. 부바네스와리를 통해 스피박은 아무 응답도 없는 상황을 읽을 수 있었다. 죽을 때야 응답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서발턴을 낯선 이론의 층위에서 파악하거나, 존재의 문제로만 파악하는 흐름은 이제 변화해야 할 것이다. 스피박이 언급한 바와 같이 서발턴은 이론과 실천의 층위의 복합적이고 병존하는 논거 속에서 제기된 것이며, 경험적으로 구축되어야할 특정 존재가 아닌, 재현을 둘러싼 윤리와 책임의 문제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서발턴으로 가는 길은 '아직'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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