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첫 '프레시안 books'는, 향후 5년을 건너가는 데 함께 하면 좋을 책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5년'인 이유는 새로운 대통령과 정권이 들어서는 변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는 비록 전부는 아닐지라도 많은 이들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며 그들의 희망과 절망을 교차시키는 변화입니다. 여덟 명의 필자가 이 '5년'을 마주하며 책 한두 권씩을 꺼내 들었습니다. <편집자> |
"제가 살아있지 않다는 걸 처음 안 건 열두 살 때였어요."
터키의 어느 감옥. 새로 들어온 빼빼마른 죄수.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주인공 야샤르 야샤마즈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열두 살 때 마을에 새로 생긴 공립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으러 간 야샤르는 주민등록증을 발급해줄 수 없다는 공무원들의 대답을 듣는다. 호적대장에 이미 죽은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주민등록증을 발급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어린 야샤르는 울음을 터뜨린다.
"아버지, 제가 죽었대요. 왜 진작 말해주지 않았어요?"
호적대장에 나와 있는 야샤르의 죽음. 야샤르가 1915년 차낙칼레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기록을 보고 그의 아버지가 이렇게 따져 묻는다.
"여보쇼, 호적대장에는 내가 1911년에 하제르 양과 결혼했다고 쓰여 있다면서요? 그럼 어디 생각해 봅시다. 내가 결혼한 날 애가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1915년이면 그 애는 네 살밖에 되지 않소. 네 살짜리 애가 전쟁터에 나가서 전사했단 말이오?"
국가는 대답한다. 야샤르는 1896년에 태어났다고. 그러자 1897년생인 아버지가 되묻는다.
"내가 아들보다 일 년 늦게 태어났다는 게 말이 돼요, 지금?"
터키 소설가 아지즈 네신의 소설 <생사불명 야샤르>(이난아 옮김, 푸른숲 펴냄)는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기 위한 한 남자의 처절한 삶에 관한 이야기다. 무슨 수를 써도 생존을 인정해 주지 않는 국가, 그 국가라는 정글 속 여기저기를 헤매며 생존을 인정받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야샤르 야샤마즈의 삶. 그런데 이 과정이 생각보다 훨씬 더 처절하다. 학교, 군대, 법정, 납세, 정신병원, 선거, 청탁, 교도소에 이르기까지, 상상할 수 있는 국가의 모든 전장을 한 번씩 다 넘나들며 끝도 없이 이어지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 <생사불명 야샤르>(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푸른숲 펴냄). ⓒ푸른숲 |
그런데 놀라운 건 이 처절하고 비극적인 인간 대 국가의 대결이, 비장미 넘치는 사회고발소설이 아니라 한 번 붙들면 다음 에피소드가 궁금해서 자꾸만 책을 펼치게 되는 기막힌 코미디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낭만적이고 코믹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이야기.
그러니까 이 소설은 웃기는 이야기다. 웃으면서 이 정글을 헤쳐 나가자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할 때면 마음 한편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오곤 한다. '지금 이 분위기에서 이렇게 막 웃어도 되는 건가? 웃자고 권유해도 괜찮은 걸까? 긍정적으로 마음을 먹기만 하면 상황이 갑자기 확 좋아지는 건가? 무엇보다, 지금 이 상황이 장난이야?'
물론 국가가 만들어내는 비극은 장난이 아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국가가 좋은 것을 주로 생산해 내다가 가끔씩 정책 실패나 사고로 안 좋은 부산물들이 만들어지기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국가는 일부러 나쁜 것을 생산해 내기도 한다. 그것도 생각보다 대규모로 생산한다.
어떤 때 보면 가장 중요한 생산품이 죽음인 것 같기도 하다. 근대국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전쟁수행능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1차 세계대전 이후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총동원체제와 대량살상은,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지극히 정상적인 국가의 생산 활동이다. 야샤르 야샤마르의 죽음 역시 1915년 차낙칼레 전투에서 생산된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느 곳에서 발생한 죽음의 행렬, 그 일을 촉발시킨 해고와 탄압. 누군가는 이게 어떤 공동체의 실패한 통치 활동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으나, 누군가는 그런 일을 하면 칭찬을 받고 승진을 할지도 모른다. 의도한 대로 일을 잘 처리했기 때문이다. 개인은, 그리고 그런 개인들이 모여서 만든 연대체는, 종종 그런 국가를 상대해야 한다. 실수한 게 아니므로 바로잡을 수도 없는, 지금 저 상태가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인 거대한 악재 생산라인을 맨몸으로 상대해야 한다. 그 일은 결코 장난일 수가 없다.
<생사불명 야샤르>에 등장하는 야샤르의 삶이 딱 그렇다. 이름 그대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싸움이다.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근대국가 체제가 19세기와 20세기를 걸쳐 결국 전세계로 퍼져나가고 말았으니, 우리라고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작년 말의 상황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런데도 왜 나는 웃음을 권해야 하는 걸까. 이 고달픈 현실을 어떻게든 잘 견뎌내기 위한 진통제를 살포하려는 음모인 걸까.
삶 곳곳에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버린 곳에서 진통제를 권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 나는 그냥, 이 국가라는 현상의 중요한 한 단면을 직시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뿐이다. 국가는 거대한 코미디 덩어리다. 국가는 평균적이고 선량한 인간을 만들어낸 다음, 그 사람에게 지극히 평범하고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라고 권한다. 국민이라는 이름의 "국가 캐릭터"다.
그런 명령을 내면화하고 세상에 나온 야샤르 같은 사람은, 입력된 대로 정말 별것도 아닌 평범한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욕망이랄 것도 없고 사치랄 것도 없이, 정말로 상식적이고 소박한 행복들을 내면화한 채 별 특이할 것도 없는 경로로 천천히 걸어간다. 그런데 그가 걸어가는 삶의 궤적은, 국가가 만들어낸 일그러진 권력장 앞에서 여지없이 이상한 방향으로 꺾이고 만다.
무슨 무슨 서류에 들어갈 무슨 무슨 번호가 없어서, 혹은 무슨 무슨 경력을 입증하기 위한 누구 누구의 추천이 분명하지 않아서. 혹은 남들이 다 하는 대로, 현관문을 열 때 왼발 뒤꿈치를 들고 콧노래를 부르며 오른손 새끼손가락으로 비밀번호를 누르지 않아서. 혹은 그보다 더 웃기는 이유로. 그 아이러니가 코미디를 만든다. 끊임없이 자연 발생하는 근대국가의 아이러니다.
그러니까 국가를 향해 튀어나오는 웃음은 진통제가 아니라 현상 그 자체다. 웃기지 않으면 오히려 비정상이라는 말이다. 웃긴데 웃지 말라니,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 아닐까. 그래서 나는 외친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그런데 왜 하필 아지즈 네신의 웃음이어야 하는 걸까. 그것은 그의 웃음이 건강하기 때문이다. 자연 발생하는 국가의 코미디를 냉소나 비아냥거림이나 패러디로 흘려보내지 않고 끝까지 긍정적인 웃음으로 마무리해내는 어느 성숙한 개인의 정신작용을 가만히 옆에서 지켜보라는 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머감각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웃음이나 권할 수는 없는 노릇. 그렇게 웃음을 되찾아가는 와중에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다면, 그건 현실을 도피하거나, 고통을 외면한 채 마냥 즐거워지려는 마음이 아니라, 그 속에서 만나게 되는 누군가의 건강한 정신 때문이 아닐까.
책에 실려 있는 터키 작가 쉠넴 이쉬규젤의 추천사에는, 남편을 잃은 이쉬규젤의 이모 이야기가 나온다. 병원에서 임종을 앞둔 이모부가 이모에게 집에서 평소에 아끼던 물건을 가지고 오라고 했는데, 그 중에 아지즈 네신의 책이 끼어있었단다. 병원으로 돌아와 남편의 임종 소식을 들은 이모는 너무나 슬픈 나머지 어쩔 줄을 모르고 구석에 털썩 주저앉아, 손에 들려 있던 책을 아무 생각 없이 펼쳐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킬킬거리며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쉬규젤은 또 이렇게 말한다.
"아지즈 네신은 단순히 작가로서의 정체성만 갖고 펜대를 쥐지 않았습니다. 실천적인 지식인으로서 국가가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날카로운 비판을 서슴지 않으며 사회의 부조리에 맞섰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터키인들은 세대를 거듭하면서도 끊임없이 그의 작품을 찾아 읽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을 해냈습니다. 터키 사회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터키 국민을 배꼽 잡게 만들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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