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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 죽이고 기업에 복종… 진보주의자의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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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 죽이고 기업에 복종… 진보주의자의 '자살'

[프레시안 books] 크리스 헤지스의 <누가 내 생계를 위협하는가>

저자 크리스 헤지스는 20여 년 중동을 누빈 종군기자다. <누가 내 생계를 위협하는가>(노정태 옮김, 프런티어 펴냄)에서 그는, 지구촌 곳곳에서 미국이 개입하는 '영원한 전쟁'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지, 끝나지 않는 전쟁을 통해 기업권력이 민주주의와 국가를 어떻게 집어 삼켰는지, 그 과정에서 진보(Liberals)가 때로 앞장서고 때로 침묵하면서 어떤 기여를 했는지에 관해 기록한다.

그의 글에는 '허울 좋은 객관성과 전문성'을 띠려는 노력이 전혀(!) 없다. 대신 끝장을 보려는 집요한 기자의 글쓰기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읽는 이를 적잖이 당혹스럽게 한다. 특히 아무런 유보나 조건이 없이, '자칭 진보라는 당신! 아직 몰랐나? 당신들 때문에 민주주의는 벌∼써 막 내렸다!'고 과감히 선언할 때는, 정말이지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여러모로…남 일 같지 않아서다.

기업권력은 민주주의를 이렇게 삼켰다!

저자에게 2012년의 미국이라는 나라는 '기업국가'다. 기업권력의 이익을 대변하는 파워엘리트들이 경제뿐 아니라 정치와 문화, 학문, 언론의 세계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국가는 그들에게 필요한 법과 제도, 권력기관을 제공한다. 미국사회 다수자인 노동자들에게, 기업권력과 그들의 의지대로 움직이거나 최소한 침묵으로 동조하는 지식인, 언론,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논리, 이미지, 대중문화의 덫에서 빠져나올 방법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이란 나라가 처음부터 이렇진 않았다. 저자가 보기에 불행의 시작은 1차 세계대전이었다. 미국의 참전과 함께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급진주의자, 자유주의자, 종교적 평화주의자 등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주창하던 사람들은, 독일 나치를 이롭게 하는 반(反)국가적이고 비(非)애국적인 존재로 매도당하면서 고립되어 갔다.

▲ <누가 내 생계를 위협하는가>(크리스 헤지스 지음, 노정태 옮김, 프런티어 펴냄). ⓒ프런티어
전쟁은 전쟁이 필요한 기업과 전쟁을 옹호하는 정치인들에게, 미국사회의 다양한 집단과 의견을 단 두 개의 집단-애국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눌 수 있는 힘을 쥐어주었다. 기업권력과 파워엘리트의 눈에 거슬리는 집단과 개인들은 손쉽게 비(非)애국자로 몰렸고 선택을 강요받았다. 평화를 말했던 지식인과 언론인, 예술가들은 '양심을 팔아' 전쟁을 지지함으로써 애국자임을 인증 받고 기업권력이 제공하는 일자리를 얻을 것인가, 아니면 강단과 극장, 언론사에서 영원히 퇴출당할 것인가의 기로에 서야 했다.

전쟁이 만들어낸 미국사회의 군사화와 획일화는 종전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전시에 만들어진 사상과 양심에 대한 검열제도, 국가기관에 의한 일상적인 권리침해, 전시동원을 위한 대중선동의 기술은 평시에 더 확장되고 세련된 형태로 재생산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시작되어 1950년대 미국을 잠식했던 반공주의 열풍은 가히 그 종합판이라 할 만 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만들어진 '나치를 이롭게 할 것인가, 조국을 지킬 것인가?'의 이분법은, 냉전체제에서 '소비에트를 이롭게 할 것인가, 조국을 지킬 것인가?'로 대체되었다. 애국주의와 국가주의의 논리 아래, 기업권력을 견제하고 정치체제를 건강하게 했던 다양한 이견과 저항의 목소리는 점차 제거되어 나갔다.

그리고 1980년 집권한 레이건 정부는 본격적인 '기업국가' 건설에 나섰다. 노골적으로 기업권력을 위해 제도를 정비하고, 세제를 개편하며, 기업권력에 저항하는 국가기관을 폐기처분하거나 변형시켰고, 점점 더 많은 재정을 국방비에 쏟아 부었다. 민주주의와 국가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 '규제 없는 자본주의'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섰다. 이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노동자들을 지원하면서 기업권력과 싸웠어야 할 그들-진보주의자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기업국가의 등장에 진보는 어떻게 기여했나?

<누가 내 생계를 위협하는가>의 원제는 '진보의 죽음(Death of the Liberal Class)'이다. 누가 진보를 죽였나? 저자에게 대답한 명료하다. 진보주의자는 동료들을 죽이고 스스로 죽었다!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미국에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급진주의자, 전쟁에 반대하는 근본적 평화주의자들이 공존했다. 전쟁 산업과 전쟁 옹호 세력들이 반전주의자들을 애국주의와 국가주의로 매도했을 때, 진보는 가장 먼저 전쟁을 지지했고 전쟁을 위한 대중동원에 나섰다. 이들은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다양한 반전주의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나고 미국사회 곳곳에서 암약하는 공산주의자와 친(親)소비에트주의자들의 색출작업이 벌어졌을 때, 진보주의자는 급진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의 편에 서서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옹호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침묵했고 곧 동조했다. 한때 자본주의 체제의 위험성을 함께 경고하고 민주주의를 옹호했던 동료들을 정치와 문화와 강단에서 제거하는데 앞장섰다. '나는 저들과 다르다'고 끊임없이 외치며 기업권력에 인정을 받고 일자리를 지켰으며 더 나은 사회경제적 지위를 보장받았다.

진보주의자들은 노동하는 다수에게 등을 돌렸으며, 기업권력이 그어놓은 경계선을 넘지 않는 다양한 논리와 신념을 체계화했다. 어느 편도 들지 않음으로써 기득 권력을 이롭게 하는 객관성과 중립성의 논리,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미래의 언젠가는 모든 인간을 해방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신념, 시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시장지상주의…저자는 이것들을 '진보주의자들이 앓고 있는 질병'이라고 부른다.

지식인들은 강단에 숨어들어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급진주의를 설파했을 뿐, 기업권력에 잠식된 국가와 사회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진실을 말하고 정의를 수호하는 자가 아니라, 기업권력이 필요로 하는 '전문가'의 자리로 옮겨 앉았다. 세계와 사회, 인간의 어두운 단면을 드러내 비판하고 풍자했던 예술가들은, 기업가들의 후원을 받으면서 그들의 친구와 이웃이 되었다. 진실을 쫒아 고발했던 언론인들은, 기업광고가 끊어질까 두려워하는 언론사 데스크로부터 기사를 거부당하고 마침내 해고되어 나갔다.

이성적 토론과 대화가 가능했던 공론장은 사라지고, 할리우드 영화와 기업광고, 인터넷과 전자매체를 통한 감성적 이미지와 상징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제 기업국가의 지배 아래 신음하는 노동자들에게, 진실에 기초한 정보를 제공하고 판단을 갖게 하며 삶을 바꿀 수 있는 선택을 가능하게 했던 모든 장치들은 사라졌다….

한국, 이미 와 있는 미래

미국의 '영원한 전쟁' 체제를 한반도의 '남북대결' 체제로 바꾸어 읽는다면, 기업권력에 순치되고 노동자를 배신한 미국의 진보주의자들의 자리에 한국의 '그들'을 대입한다면, <누가 내 생계를 위협하는가>는 법 위에 군림하며 세금과 국가기관, 언론과 학계, 예술과 종교계까지 주무르는 한국 기업권력과 출구를 찾지 못하는 한국 노동자에 관한 이야기다.

물론 모르지 않았다. 모를 수 없다. 휠체어를 탄 재벌 총수가 검찰청을 나올 때, 그가 죄에 합당한 대가를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국민은 없어졌다. 그들이 '관리'하는 검사, 판사, 관료, 정치인, 교수, 언론인, 예술가, 연예계 종사자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이제는 안다. 루머가 아니고, 일회성도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폭로한 누군가만 다치게 된다는 것을.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고 철탑을 오르며 죽어나가도, 그들을 위해 싸워줄 힘 있는 정치세력이 없다는 걸 모르는 이는 이제 없다. 한국의 자칭 '진보'들이 노동하는 다수가 내민 손을 어떻게 외면해 왔는지, 그 길고 긴 외면과 배신의 역사 때문에 노동자들이 '진보'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걸 알 사람은 다 안다.

그래서 이 책은 남의 이야기일 수가 없게 되었다. 한국은? 지금 한국의 기업권력은 대체 국가와 정치와 삶을 어디까지 삼켰을까? 미국의 진보보다 한국의 그들은 역사적으로 훨씬 더 약했고 약한데, 지금 한국에서 기업권력을 견제할 힘이 남아 있는 곳이 과연 있을까…. 한 장이 넘어갈 때마다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누가 내 생계를 위협하는가>의 결론은 암울하다. '규제 없는 자본주의'는 돌이킬 수 없이 폭주할 것이며, '기업국가'를 제어할 수 있는 정치적 장치는 사라졌고, 환경파괴로 인한 재난은 가속화될 것이다. 폭력에 기댄 혁명이나 무정부주의는 대안일 수 없다.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 폭력에 의존하는 것은, 사악한 인간본성을 일깨우고 그나마 남아 있는 휴머니즘조차 파괴하게 될 것이다. 인류는 이미 지구가 곧 선사할 환경적 재앙을 막아낼 마지막 기회조차 걷어차 버렸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지구의 재앙 이후에 살아남을 후대에게 인류가 만들어낸 문명을 그나마 보존해서 넘겨주는 일, 거창하고 큰 명분에 얽매이지 말고 작은 저항이라도 포기하지 말고 실천하는 일, 직접 땅으로부터 먹거리를 얻고 파괴하지 않으며 공존하는 법을 터득해서 전수하는 일…정도만이 남아있는 것 같다.

이 책은 세련됨을 가장하지 않아 거칠다. 하지만 전쟁과 전쟁 산업의 피해자들, 분노에 차 있는 노동자들, 아직도 미련하게 진실과 정의에 편에 서고자 하는 소수 지식인들의 목소리가 곳곳에 날 것 그대로 살아 있다. 인류의 미래를 구원할 대안을 찾는 독자가 아니라면, 윤색되고 채색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현실을 보게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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