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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남자의 절규 "나는 악마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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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남자의 절규 "나는 악마를 보았다!"

[박수현의 '연애 상담소'] 마르케스의 <사랑과 다른 악마들>

의사는 델라우라를 설득하려 했다. 사랑은 두 사람의 타인을 불행하고 건전하지 못한 예속 관계, 그것도 강렬한 사랑일수록 덧없는 예속 관계로 만들기 때문에 자연의 법칙에 반하는 감정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델라우라는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183쪽)

스무 살인가 그 언저리, 소녀 연은 사랑에 빠졌다. 이 사실은 그러나 그 사랑이 끝났을 때 알려졌다. 그녀는 끊임없이 사소한 일을 빌미로 남자를 구박하고 공격했으며, 실제로 이용하기조차 했다. 리포트를 대신 써 달라, 불러낼 때마다 나와서 밥과 술을 사 달라는 것은 약과였다.

언젠가 남자가 중요한 시험을 앞둔 전날 그녀는 울면서 전화했다. 남자는 허둥지둥 나갔다. 아무리 물어도 왜 슬픈지 그녀는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단지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만 했다. 남자는 정동진 행 새벽 기차표를 끊었다. 시험은 물론 물 건너갔다. 남자가 전적으로 비용을 지불한 이박삼일의 여행 끝에 그녀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바보야. 난 단지 여행만을 원했을 뿐이야." 팜므파탈이 따로 없었다.

사람들은 남자만이 연을 사랑하고 연은 그 사랑을 이용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남자는 놀라운 인내심을 발휘하며 꿋꿋하게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그들은 헤어졌다.

이별 이후 그녀는 식음을 전폐한 채 오랫동안 아파해야 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미워하기만 했던 그가 떠났는데 왜 이토록 슬픈지, 혹시 그를 사랑했는지 아닌지, 왜 그를 그토록 구박해야만 했는지.

▲ <사랑과 다른 악마들>(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우석균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자리에 누운 채 대답 없는 물음 사이를 떠돌던 그녀, <사랑과 다른 악마들>(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우석균 옮김, 민음사 펴냄)을 읽는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그녀는 오장이 끊어지도록 오열한다.

그대 때문에 태어났고, 그대 때문에 살아가고, 그대 때문에 죽을 것이며, 그대 때문에 죽어 가노라. (112쪽)

가던 길을 멈추고 나 자신을 돌아보고 당신이 나를 이끌고 온 발자국을 바라볼 때 / 내 목숨이 다하리. 나를 망치고 죽음에 이르게 할 이에게 온전히 나 자신을 바쳤으니. (160쪽)

마침내 나는 당신의 손길에 이르렀습니다. / 내가 최후를 맞으리라는 걸 알고 있는 그곳에. / 칼이 항복한 자를 얼마나 깊이 찌르는지 오직 나에게만 시험하도록. (161쪽)

이 책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이런 아름다운 시구(詩句)들이다. 옛 시인 가르실라소의 이 시구들은 소설 전체의 분위기를 축약한다. 사랑 때문에 죽고 살고, 연인을 "나를 망치고 죽음에 이르게 할 이"라고 부르면서도 그에게 모든 것을 다 바치겠다고 하고, 연인의 손길에서 최후를 맞으리라고 단언하고, 연인을 위해 무한한 눈물을 흘리고. 정말 고색창연하게 낭만적인 사랑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사랑이 낭만적이기는 하나,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다. 소설의 연인들은 무시무시한 칼부림 또한 주고받는다. 어쩌면 극단적으로 낭만적인 사랑은 그 자체로 안에 칼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연은 이 소설에서 자신과 비슷한 증상을 발견했고, 자기 감정의 정체를 파악하게 되었다.

순결하게 살아가던 서른여섯 살의 신부가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녀 열두 살 소녀를 사랑한다. 소녀는 광견병에 걸린 개에게 물려 악마에 씌웠다는 의혹을 받고 수도원에 갇힌다. 신부는 소녀에게서 악마를 쫓아내라는 엑소시스트로서의 명을 받는다.

여주인공 시에르바 마리아의 성격은 대단히 독특하다. 그녀는 일부러 묻는 말에 거짓으로만 대답하고 하인들에게서 배운 아프리카 말을 사용하며 위협을 느낄 때면 감당할 수 없게 광포해진다. 이런 성격으로 결국 그녀는 자신을 악마로 몰아가는 모함에 스스로를 더욱 깊게 빠뜨린 셈이다.

사랑이여, 너를 악마라고 부르리

처음 만난 날, 신부는 소녀의 몸에 난 상처를 치료해준다. 소녀는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고 시종일관 무관심하기만 하다. 이 모습에 신부의 가슴이 이유 없이 찢어지기 시작한다. 이유 없이 슬픈 마음, 이것이 사랑의 신호탄이었다. 그녀를 그리워하는데 신부라는 지위 때문에 다가갈 수 없어 고통스러운 마음은 그를 지옥에 빠트린다.

오랜 세월 동안 델라우라에게 안식처였던 도서관은 그가 시에르바 마리아를 알게 된 후부터는 지옥으로 변했다. (107쪽)

한시라도 소녀를 생각하지 않는 때가 없다. 생각하면 할수록 더 간절히 생각난다. 기도를 하면서도 그녀를 더 생생하게 떠올리려고 부러 눈을 감는다. 그는 먹고 마시는 것마다 소녀의 체취를 느낀다. 그러면서 그는 소녀의 환영을 '진짜로' 본다. 환영 속에서 소녀가 들고 있던 치자나무 꽃의 향기는 '진짜로' 도서관에 가득 차 있다.

사랑하는 대상의 편재(遍在). 사랑에 빠진 자는 그/그녀를 언제 어디서나 본다. 반대도 가능하다. 언제 어디서나 그/그녀가 홀로 있는 자신을 굽어보고 자기의 은밀한 중얼거림을 들으며 자신을 쓰다듬는다고, 사랑에 빠진 자는 착각한다. 착각만 할 뿐인가. 그렇게 믿기까지 한다. 그러나 환영 속에서 행복했던 순간도 잠시, 곧이어 나락으로 떨어진다. 열망과 그리움의 유황불이 이글거리는.

지옥에서 헤매던 델라우라는 소녀를 보아야 한다는 압박감을 주체하지 못하여 찾아간다. 그런데 그를 기다리는 것은 소녀의 환대가 아니다.

델라우라는 소녀가 좋아하리라 믿고 성한 복사뼈의 가죽 끈을 풀어주려 했다.
"놔두세요, 나 좀 건드리지 마세요."
신부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러자 소녀가 얼굴에 가래침을 탁 뱉었다. 델라우라는 끄떡도 하지 않고 다른 뺨을 내밀었다. 시에르바 마리아는 금지된 쾌락에 취해 다시 뺨을 바꾸었다. 신부가 눈을 감고 영혼을 다해 기도하는 동안 소녀는 계속 침을 뱉었다. 그가 즐기면 즐길수록 더 사납게 침을 뱉다가 마침내 자신의 광기가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때 델라우라는 정말로 악마에 씐 여인의 섬뜩한 모습을 목격했다. 시에르바 마리아의 머리카락이 마치 메두사의 뱀처럼 곤두서고, 입에서 초록색 침이 흘러내리고, 우상 숭배자들의 언어로 쉼 없이 욕설이 튀어나왔다. 델라우라는 십자가를 휘두르며 소녀의 얼굴에 들이대고 공포에 질려 소리쳤다.
"지옥의 악귀야, 어떤 놈인지 당장 그 몸에서 나오너라." (148~149쪽)

원체 다루기 어려운 성격을 가진 소녀는 무언가 화가 나서 신부에게 함부로 대했을 뿐이다. 그녀가 진짜로 악마로 변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신부의 눈에 악마 소녀의 환영이 보인 것이다. 그토록 애달프게 그리워했던 그녀에게서 악마의 환영을 보다니. 자신을 그토록 열망의 유황불에 빠트렸으니, 그 원흉을 악마로 여기는 것이다.

사랑이 처음으로 뿌리는 씨앗은 공포이다. 이 말이 과장스러운가? 응답 받기 전 홀로 타오르는 열망은 끔찍하게 고통스럽다. 옆에 없는 사람을 그리워하는데 다가가지 못하니 괴롭고, 하루 종일 그에 대한 생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서 괴롭고, 그토록 열망을 없애버리려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괴롭고, 열망의 열도(熱度)를 감당할 수 없어서 괴롭고, 자신이 한없이 모자라 보여서 괴롭고, 모자란 자신을 그가 사랑해줄 리가 없을 것이라고 우울하게 확신하기에 괴롭다.

지옥이 따로 없다. 이러니 사랑 곧 지옥으로 끌고 간 상대를 공포스러워 할밖에. 이러니 상대를 악마로 생각할 수밖에. 문제는 그를 악마로 몰아간다고 해서 사랑이 식지 않는다는 지엄한 사실이다. 그가 악마로 변해갈수록 그에 대한 열망은 주체 못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예의 악마에게서 받는 고통은 동시에 쾌락이다. 그래서 델라우라는 소녀가 끝없이 내뱉는 침을 맞으면서 희열을 느낀다. 사랑에 빠진 자는 사랑에 빠진 죄로 상대로부터 죽도록 수모를 겪지만, 모욕은 쾌락의 아궁이에서 타오르는 불에 부채질한다.

델라우라가 소녀에게서 악마를 본 이후, 일은 더 심각해진다. 소녀와 단둘이 있을 때 그녀에게 악마라고 소리친 것은 약과였다. 그는 이후 주교에게 소녀가 악마라고 고백한다. 사건은 이렇게 일어난다. 우선 소녀에게서 도망친 그는 악마 소녀의 끔찍한 영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그 끔찍한 영상은 열망과 그리움을 희석하기는커녕 부풀릴 뿐이다.

(델라우라는) 시에르바 마리아의 손가방을 열고 그 안에 든 것을 하나씩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델라우라는 내용물을 살펴보고, 육욕에 굶주려 냄새를 맡고, 사랑을 나누고, 음탕한 육보격 시로 대화를 나누다가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상의를 홀딱 벗고, 결코 한 번도 건드려 보지 않았던 체벌용 쇠몽둥이를 책상 서랍에서 꺼냈다. 그러고는 끝없는 증오심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매질하기 시작했다. 시에르바 마리아의 마지막 흔적을 오장육부에서 뿌리 뽑을 때까지 결코 매질을 중단하지 않을 만큼의 증오심이었다. 델라우라를 계속 염려하던 주교는 피와 눈물로 뒤범벅된 웅덩이에서 나뒹굴고 있는 그를 발견했다.
"소녀는 악마입니다, 주교님."
델라우라가 말했다.
"악마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악마예요." (149~150쪽)

소녀의 영상을 지우기 위해서 피범벅이 되도록 쇠몽둥이로 자신을 매질하는 신부. 그는 사랑하면 안 될 사람을 사랑하기에 이토록 금기와 욕망 사이에서 끔찍하게 번민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랑에 빠지는 과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매혹이라는 사건이 발생하면, 우리는 종종 그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우리를 매혹의 함정에서 구출하기 위해 닦달한다. 매질로도 소녀를 지우지 못해 절망에 빠진 신부는 결국 소녀가 "악마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악마"라고 고백하고 만다.

물론 이것은 신부가 사랑에 빠졌다는 고백이었지만, 대외적 의미는 그 이상이었다. 신부는 지위를 박탈당한다.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소녀를 위험에 빠뜨린다. 알다시피 소녀는 악마라는 누명을 쓰고 있었고, 신부는 누명을 벗기려고 처절히 노력해 왔다. 그런데 신부의 고백은 그녀가 진짜 악마라는 공공연한 천명으로 인정된다.

사람들은 신부의 고백을 빌미로, 소녀가 악마라는 의혹을 사실로 믿어 버린다. 델라우라는 난관에 빠진 그녀를 구출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가장 피하고 싶었던 파국을 초래한다. 악마로 단정된 그녀는 치명적인 위험에 처한다.

사랑에 빠져서 위태로워진 그가 사랑에 빠뜨린 그녀를 더욱 위태롭게 만든 셈이다. 사랑이 몰아넣은 지옥 속으로, 그는 그녀의 손을 이끌고 함께 빨려 들어간다.

이런 바보짓, 혹은 미친 짓. 넘쳐나는 사랑에 겨워 고통스러운 자는 지극히 사랑하는 상대를 악마로 내몰며 함정에 빠뜨리기도 한다. 델라우라만 그런가? 간혹 우리 역시 우리를 사랑의 고통으로 몰아넣은 자를 원망한 나머지 증오한다. 그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하여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는 헤로데 왕을 유혹하여 세례자 요한의 목을 얻어낸다. 요한이 자신의 키스를 거부했기 때문에. 영화 <음란서생>의 정빈은 사랑하는 윤서를 잔인하게 고문한다. 배반한 연인에 대한 증오를 참을 수가 없어서, 그럼에도 진정으로 사랑했다는 한 마디를 듣고 싶어서.

이런 광기는 어쩌면 고통으로 내몰린 자가 고통의 원흉, 사랑의 시원(始原) 다시 말해 '악마'를 향해 시도하는 반격이거나, 혹은 괴로움을 보상받으려는 복수인지도 모른다. 드물지 않게, 사랑에 빠진 자는 상대에게 강렬하게 끌릴수록 깊은 마음 한 곳에서 미움을 은밀하게 키운다. 그 공격성이 상대를 해칠까봐 두려워 한 나머지 사랑의 결실을 눈앞에 두고 갑작스레 그만 두기도 한다. (사랑과 공격성의 관계에 대한 더 다양한 분석을 보고 싶은 분들은 <백 년 동안의 고독>에 관한 나의 앞선 글을 참고하길.)

이쯤에서 이 소설의 제목의 의미를 살펴보자. 스페인어 원서 제목은 "Del Amor y Otros Demonios." 영어로 직역하면 "Of Love and Other Demons"이다. 영어 제목을 직역하면, '사랑과 그 밖에 다른 악마들에 관하여' 쯤 되겠다. '사랑과 다른 악마들'은 사랑과 악마가 별개라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원제에 쓰인 '사랑과 그 밖에 다른 악마들', 이 말은 '사랑=악마'라는 전언을 내포한다. 작가는 사랑의 악마적 성격에 대해 그토록 이야기하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악마도 원래는 천사였다.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랑을 악마로 단죄할 수밖에 없는 그런 지극한 사랑은 일상의 사건이 아니다. 한없이 낭만적인 천상(天上)의 사건이지만, 이는 옛 시인 가르실라소의 시대에나 해당하는 이야기다. 아마도 지금의 현실에서는 병증으로 치부될 따름일 터이다.

실상 수백 년 전 시인들이 자연스럽게 노래했던 지극한 열정은 현대에 종종 질병으로 치부된다. (물론 살로메 같은 경우까지 자연스럽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물질주의적, 실용주의적 가치관이 대세를 이루기 때문일까. 사회 전반에 걸쳐 수행된 탈낭만화 기획 때문일까. 현대 사회에서 열정에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은 그 억압의 당위 때문에 진짜 질병에 빠져들기도 한다.

연이 왜 오장이 끊어지도록 오열했는지 이번 회에서 밝히지 못했다. 소설의 줄거리 순서대로 써 나가다 보니, 그리고 지면 관계상 그리 되었다. 궁금하신 분들은 다음 회를 기대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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