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헤밍웨이가 반 유대 감정의 원조인 것은 결코 아니다. <베니스의 상인>조차 원조는 아닐 것이다. 대체 유대인이 뭘 어쨌기에, 어떻기에 이렇게 씹혀대는 것인가?
<영국 남자의 문제>(하워드 제이콥슨 지음, 윤정숙 옮김, 은행나무 펴냄)의 원제는
'핑클러 퀘스천'은 곧 '유대인 퀘스천'이다. 트레스러브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어쩌다 보니 그의 가장 친한 두 벗은 유대인이다. 트레스러브는 '유대인이라는 것', '유대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궁금해 하다, 급기야 자기도 유대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리보르의 초대로 그의 집안 사람들이 모이는 유대인들의 명절 행사에 참석하기까지 한다.
핑클러는 방송에 출연해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서는 정말 부끄럽습니다."라고 말하고, 이 발언은 화제가 된다. 그는 급기야 '부끄러운 유대인들'이라는 모임의 일원이 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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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남자의 문제>(하워드 제이콥슨 지음, 윤정숙 옮김, 은행나무 펴냄). ⓒ은행나무 |
가브리엘은 이스라엘 사람이었다. 그는 주변 국가에 대한 이스라엘 정부의 무력 정책에 반대하여 양심적 병역 거부를 하고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갔다가, 그 곳에서 스코틀랜드 여자를 만나 함께 스코틀랜드에 갔는데 거기서 밴드를 하게 되었다는 파란만장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말수가 적고 늘 미소를 짓는 인상 좋은 사람이었다. 기타도 잘 쳤다. 이스라엘에 돌아가면 병역 문제 때문에 공항에서 바로 체포될 거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가브리엘 역시 '핑클러의 문제'를 꽤나 고민했던 모양이다.
이 소설을 쓴 하워드 제이콥슨 역시 유대인이다. 주로 다루는 주제가 유대계 영국인들의 문제라고 한다. 문득 다른 작가가 떠올랐다. 미국의 거장 필립 로스다. 로스 역시 '유대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주제를 즐겨 다룬다. 앗! '위키피디아'에서 검색해 보니 과연 제이콥슨은 '영국의 필립 로스'라 불린다고 한다(그러나 본인은 스스로 '유대인 제인 오스틴'이라고 한다는데…글쎄 그건 좀…).
유대인 로버트 짐머만은 영국 시인 딜런 토마스의 이름을 따서 밥 딜런으로 개명하고 20세기 최고의 뮤지션 반열에 올랐다. 나는 한창 뽀글뽀글한 머리를 하던 시절의 밥 딜런의 사진을 보며 예수와 닮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내가 여행 중에 만났던 베트남 계 미국인 여자는 "내 여동생이 배낭 여행 중에 만난 이스라엘 남자와 사귀고 있는데, 어디가 좋으냐고 물었더니 예수와 닮아서 섹시하다고 했다"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유대인 앨런 긴스버그는 대학 시절 반 유대 운동을 했다고 한다. 후에 그는 비트 제너레이션 최고의 시인이 된다.
유대인 뮤지션 레너드 코언은 자신의 히트곡 'I'm Your Man'을 라이브에서 부를 때 '만약 당신에게 의사가 필요하다면'이라는 대목을 굳이 '만약 당신에게 유대인 의사가 필요하다면'이라고 바꾸어 부르곤 한다.
내가 어렸을 적엔 '고향에서 쫓겨나 오랜 세월 전 세계에 흩어져 핍박을 받으면서도 전통과 교육의 힘으로 강력한 민족이 된 유대인이야말로 우리 한민족의 롤 모델'이라며 선생과 부모들이 어린아이들에게 <탈무드>를 읽히곤 했다. 나도 억지로 읽었다.
뉴욕에 오래 살았던 나의 사촌 형은 "나는 인종 차별주의자는 아니지만 유대인은 정말 싫다"고 했다(뉴욕은 쥬욕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유대인 비율이 높다).
나치의 반 유대 선동에 크게 공감해 자살한 유대인이 있었다고 한다.
대체 유대인이 뭐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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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례들을 보면 유대인들은 꽤나 'self-conscious'한 것 같다(번역가로서 부끄럽지만 아직 여기에 완벽하게 대응되는 한글 단어를 찾지 못했다). 그런데 그것이 유대인만의 특징인가? 유대인이 self-conscious하다면, 흑인은? 일본인은? 한국인은? 핀란드 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자문하지 않는 민족, 인종, 국민이 있기는 한가? 그러면 대체 유대인이라는 건 어떤 것인가?
유대인들 역시 '대체 (내가) 유대인이라는 게 뭘까'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질문이라는 것은, 하나의 주제에 대해 수없이 많은 각도에서 던진 질문이 쌓이면 질문의 무더기 자체가 답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는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가-자신은 앉는 법조차 모른다고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 주듯이. 그런 점에서 결코 짧지 않은 이 소설은 유대인들의 정체성에 대한 흥미로운 보고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책의 판매를 생각하면 영국에서 살아가는 유대인들의 삶이 어떠한지 궁금해 하는 한국 독자가 얼마나 있을까, 하는 걱정은 든다.
'유대인의 문제'와 함께 이 소설의 다른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성인 (이성애자) 남자의 외로움'이다. 트레스러브와 핑클러는 내일모레면 쉰, 리보르는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다. 리보르는 너무나 사랑했던 평생의 반려자와 사별했고, 핑클러 역시 비슷한 시기에 아내와 사별했다.
트레스러브는 사별할 아내조차 없는 처지이다. 런던-런던을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는 런던 자체가 어느 캐릭터 못지않게 큰 비중을 갖는 것 같다-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이 세 남자는 툭하면 만난다. 달리 만날 사람이 없어서, 라는 말은 너무 잔인할까. 하지만 그들에게 여자가 있었다면 그렇게 뻔질나게 만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순정남 트레스러브는 과거의 여자들을 끊임없이 그리워하고, 쉴 새 없이 미래의 여자(들)을 꿈을 꾼다. 외도를 일삼았던 핑클러는 과거의 여자들을 꺼림칙한 마음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리보르는 아내를 잃은 뒤 주위 사람들의 부추김으로 손녀뻘 되는 여자와 데이트를 하기도 하고, 갑자기 연락해 온 수십 년 전 알았던 여자를 다시 만나기도 하지만…더 이상 이야기하면 스포일러가 될 테니 그만두자.
그러나 이 소설에서 '핑클러의 문제'에 비하면 외로움의 문제의 비중은 미미하다는 느낌이다. 결국 열한 자로 요약할 수 있으니까. '남자에겐 여자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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