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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율표의 추억, "닥치고 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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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율표의 추억, "닥치고 암기!"

[프레시안 books] 샘 킨의 <사라진 스푼>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하시는 분들이 아주 많~이 계실 테지만, 고백하건데 내가 신의 존재를 고백한 곳은 강남의 한 고등학교 교실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종교의 자유를 박탈당한 채 모태 신앙인으로 자란 내게 신의 존재는 그저 가문의 풍습이거나 버릇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화학 수업 시간에 주기율표를 배운 것이다. 이렇게 완벽한 질서가 있을 수 있을까? 이건 우연이 아니야! (당시 나는 '빅뱅', '초신성' 따위의 단어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외할머니가 말씀하시는 신은 계셨구나! 주기율표에!

다른 훌륭한 사람들처럼 나도 고등학교 졸업 후 종로학원에 진학했다. 우리 학급의 화학 담당 강사는 '조용호' 선생님.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었다. 학생 가운데 3분의 2 정도는 그의 강의를 매우 힘들어 했다. 그리고 나머지 3분의 1은 그에게 환호했다. 조용호 선생님은 주기율표를 암기하라고 강요하셨다. 외우지 못하면 (감히 재수생들의) 머리통을 내리치셨다. (선생님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김혜자 지음, 오래된미래 펴냄)를 선물하고 싶다.) 나야 재수생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전형적인 모범생이었으니 정말 열심히 외었지만, 아무리 재수생이라지만 나름 공부 좀 한다는 '놈'들이 이유도 모르고 그 복잡한 표를 외우자니 꽤나 심란했던 모양이다.

20년 전에 들었던 선생님의 말씀을 지금 그대로 옮길 수는 없지만 요약하자면 "화학은 주기율표에서 시작해서 주기율표에서 끝나는 거야. 그러니까 닥치고 암기!"였다. 나는 열 달 동안 그분에게서 화학을 배웠다. 다시 한 번 고백하건대, 내 화학 지식의 90퍼센트는 그때 얻은 것이다. 대학에서 생화학을 전공했고 독일에 유학 가서는 유기화학을 공부했지만 이건 모두 종로학원 수업의 복습 내지 약간의 확장에 불과했다. 화학은 주기율표에서 시작해서 주기율표로 끝난다!

화학을 공부하고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원소와 주기율표에 관한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주기율표를 배경으로 한 원소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러다가 <원소의 왕국 : 피터 앳킨스가 들려주는 화학 원소 이야기>(피터 앳킨스 지음, 김동광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를 만났다. 이 책의 원서는 이라는 제목으로 1995년에 나왔다.

책을 읽고 난 내 기분은 이랬다. "더 쓸 게 없네!" 피터 앳킨스에게 주기율표는 산맥과 들판과 강이 흐르는 원소의 입체 지도였다. 지도가 한두 장이 아니다. 원소의 크기, 전기음성도, 반응성 등 다양한 성질이 다양한 입체성으로 각각의 지도에 표현된다. 평면적인 주기율표를 입체적으로 그려준 <원소의 왕국>이 있는데 무슨 얘기를 더 해서 사람들을 복잡하게 한단 말인가?

다행히 <원소의 왕국>에는 빠진 게 있었다. 휴머니즘! "그래, 이거야! 원소가 의미가 있는 것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지. 원소에 사람의 이야기를 엮어 보자." 요런 생각을 할 즈음 한 편집자로부터 번역 감수 요청을 받았다. 이탈리아어로 쓰였지만 영어 번역본이 있으니 화학적인 내용만 봐주면 된다는 것이었다.

감수의 기본은 원문 대조. 이상하다. 영어판과 한글판의 내용이 너무 다르다. 처음에는 우리말 번역가에 대해 의심을 품었다. 절반쯤 읽은 다음에야 깨달았다. 영어 번역본이 개판이다. 그 후에는 영어판을 접고 오로지 번역본만 보면서 화학적인 내용만 살폈다. 뭐, 고쳐줄 것도 없었다. 그 책은 나중에 <주기율표>(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돌베개 펴냄)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프리모 레비는 토리노 대학에 들어가서 화학을 전공하기 이전에 이미 화학자였다. 유년 시절 그는 형과 함께 다양한 화학 실험을 한다. 하지만 잘못된 시절에 유대인으로 태어난 그는 화학자가 아닌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으로, 그리고 결국 스스로 삶을 중지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주기율표>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회고록이다. 각 챕터는 원소 한 개의 이름으로 제목을 단 것처럼 독립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마치 원소들이 모여 주기율표를 이루는 것처럼 조각난 이야기들이 모여서 한 개인의 삶과 시대를 완성한다. (한글판 <주기율표>를 읽고 난 느낌은 독일어로 읽을 때와 많이 달랐다. 모국어의 위대함이여!)

아~, 안 되겠다. 휴머니즘을 내세우려고 했더니 <주기율표>가 있었다. "원소를 다 다루려고 하지 말고 특징적인 성질의 원소들을 묶어서 마치 원소에 관한 책이 아닌 것처럼 포장을 해야겠어."라고 고민을 할 즈음 <세상을 바꾼 독약 한 방울 : 죽음을 부르는 독극물의 화학사>(전2권, 존 엠슬리 지음, 김명남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가 나왔다.

존 엠슬리는 <화학의 변명>(전 3권, 존 엠슬리 지음, 허훈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을 통해서 원소보다는 향수, 감미료, 알코올, PVC 다이옥신, 질소비료, 콜레스테롤, 진통제, 이산화탄소 같은 화학물질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풀어주던 사람이었다. 그가 이번에는 수은, 비소, 안티몬(안티모니), 납, 탈륨이라는 다섯 가지 유독성 원소들의 이야기를 역사적인 암살 사건을 매개로 풀어냈다. <세상을 바꾼 독약 한 방울>은 내게 희망을 주었다.

"단 다섯 개의 원소로 책을 두 권 쓸 수 있으니, 이야기만 잘 엮으면 열 권도 더 쓸 수 있겠구나. 하지만 나는 착하니까 한 권으로 써야지. 순전한 과학책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창한 휴머니즘을 담을 필요도 없어. 사람 사는 이야기를 엮으면 재미있는 원소 책이 될 거야. 이제 내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시간'뿐이지."


▲ <사라진 스푼 : 주기율표에 얽힌 광기와 사랑, 그리고 세계사>(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해나무 펴냄). ⓒ해나무
그러나 뭐든지 때가 있는 법. 기획은 기회를 놓치면 기획이 아니다. (이렇게 표현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원소'에 관한 종결자가 등장했다. 샘 킨의 <사라진 스푼 : 주기율표에 얽힌 광기와 사랑, 그리고 세계사>(이충호 옮김, 해나무 펴냄)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는 더 이상 '원소'에 관한 책을 쓸 마음을 접었다.

이쑤시개를 하키 스틱처럼 사용해 물렁물렁한 공들을 서로 가까이 다가가게 하자, 두 공이 닿는 순간 갑자기 한 공이 다른 공을 집어삼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두 공이 있던 자리에는 하나의 공이 흠집 하나 없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머리말 첫 쪽에 나오는 문장이다. 원소 번호 80번인 수은에 관한 이야기다. 어린 시절 깨진 온도계에서 새어나온 수은을 가지로 놀았던 그 기억이 생생히 살아났다. 수은의 영어 이름은 태양계 첫 번째 행성과 같은 머큐리(Mercury)다. 그런데 원소기호는 Hg는 어디서 왔을까? 그리스어로 물(水)을 뜻하는 'hydr'와 은(銀)을 뜻하는 'argyros'가 합쳐진 말이란다.

이 책은 단순히 에피소드를 통해 원소을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원소를 빙자하여 생물학에서 천문학에 이르기까지 자연과학 전반을 소개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원자는 어디서 왔을까 : "우리는 모두 별의 물질로 이루어졌다"' 챕터는 초신성이 폭발하면서 원소가 생성되는 과정을 아름답게 그렸다. 흔히 B2FH라고 통용되는 제프리 버비지, 마거릿 버비지, 윌리엄 파울러, 프레드 호일의 1957년 논문을 이처럼 간명하고 재밌게 설명한 책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가슴 아픈 챕터도 있다. '분쟁을 부추기는 탄탈(탄탈럼)과 니오브(나이오븀)'가 그것이다. 휴대 전화에 쓰이는 탄탈과 니오브는 전 세계 공급량 중 60퍼센트가 콩고에서 나오는데 두 금속은 콜탄이라는 광물에 함께 섞여 산출된다. 본문을 좀 길게 인용해 보자.

그저 삽 한 자루와 튼튼한 허리만 있으면 개울 바닥을 파내 걸쭉한 진흙처럼 보이는 콜탄을 채취할 수 있었다. 몇 시간만 노력하면 이웃 농부가 한 해 동안 버는 것보다 스무 배나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너도나도 농사를 내팽개치고 콜탄 채취에 뛰어들었다. 그러자 그러지 않아도 부족한 식량 공급이 악화되었고, 사람들은 고기를 얻으려고 고릴라를 사냥해 멸종 직전에 이르게 했다. 그렇지만 고릴라의 죽음은 사람들이 저지른 잔학 행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제대로 된 정부가 없는 나라에 돈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보다 나쁜 것도 없다. 그러면 무자비한 자본주의가 판을 쳐서 생명을 포함해 모든 것을 돈으로 사고팔 수 있게 된다. 노예처럼 살아가는 매춘부들을 수용하는 거대한 '캠프'들이 곳곳에 들어섰고, 피비린내 나는 살인을 위한 막대한 금액이 지불되었다. 승자가 승리의 기분에 도취해 시신에서 꺼낸 창자를 몸에 두르고 춤을 추면서 희생자의 신체를 능욕하는 것을 비롯해 섬뜩한 이야기들이 나돌았다. (126~127쪽)

내가 사용하는 휴대 전화가 콩고의 식량 부족과 고릴라 멸종 그리고 인간에 대한 잔혹 행위까지 연결된다. 샘 킨의 원소 이야기들은 드라마틱하다. 샘 킨은 주기율표가 지루한 과학 교과서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의 책을 읽다보면 상상력만 충분히 발휘한다면 누구나 주기율표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사라진 스푼>이라는 제목이 궁금하신가? 책을 보시라. 73~74쪽에 나온다. 조용호 선생님의 강의를 이해하지 못했던 종로학원 동창들에게는 이 책에 관한 빌 맥기번의 평을 전하고 싶다.

"만약 고교 시절 화학 실험실 벽에 걸린 주기율표를 다소 무기력하게 응시해야 했다면, 이 책은 바로 당신을 위한 책이다. 이 책은 화학 원소의 기호와 숫자에 담긴 의미와 영광을 간단명료하면서도 신속하게 전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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