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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망친 원흉은 이명박 아닌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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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대한민국 망친 원흉은 이명박 아닌 박정희!"

[인터뷰] <박정희의 맨얼굴> 펴낸 유종일 KDI 교수

여의도는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수많은 시민들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저지를 위해 국회 앞으로, 또 월가 발 '점령(occupation)' 열풍을 받아 여의도 증권가로 쏟아져 나왔다.

지금 거리로 분출되는 에너지는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정치인을 심판대로 밀어 올릴 것이다. 누구나 자칫하면 도시 빈곤층으로 굴러 떨어질 수 있는 불안정한 세상, 사람들의 관심이 '먹고사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정치인은 너도나도 복지 담론을 꺼내고 있다.

정권 탈취를 노리는 민주당은 '보편적 복지'와 함께, 하나의 카드를 더 꺼내들었다. '경제 민주화'다. 지난 7월 헌법 119조 2항("국가가 경제력 남용 방지와 경제 주체 간 조화를 통한 경제 민주화를 위해 규제·조정을 할 수 있다")에 근거해 재벌 개혁과 양극화 문제 해법 모색에 주안점을 둔 '경제 민주화 특별 위원회'를 만들었다.

그 핵심 설계자는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다. 라디오 방송 진행자, 칼럼니스트로도 친숙한 유종일 교수는 "경제 민주화야말로 내 입에 밥이 들어오는 문제"라며 민주당의 대국민 메시지 측면에서도 이 어젠다를 앞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야권 통합 역시 경제 민주화로 모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 <박정희의 맨얼굴>(유종일·이정우·박헌주·김상조·박섭·윤진호·조석곤·신동면 지음, 유종일 엮음, 시사인북 펴냄). ⓒ시사인북

한편, 유종일 교수는 최근 이정우 경북대학교 교수, 김상조 한성대학교 교수 등 개혁 성향의 경제학자와 함께 <박정희의 맨얼굴>(시사인북 펴냄)을 펴냈다. 박정희 전 대통령 30주기였던 2009년 10월 26일을 앞두고 함세웅 신부가 이사장으로 있는 '10·26 재평가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추진위원회'에서 박정희 재평가 연구 지원을 선언했고, 이 책은 그 연구 결과 중 하나다.

박정희 경제 성장 신화 그 자체를 따져보는 총론(1장)부터 성장의 그늘이었던 노동·농업·사회 복지 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논의(6~8장)에 이르기까지, 여덟 명의 학자는 충실한 실증 자료를 통해 현재까지 건재한 신화로 덧칠된 박정희의 화장을 지운다. 제목처럼 '맨얼굴'로 만드는 작업이다. 책에는 양극화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김대중·노무현 정부에게 던지는 쓴 소리도 적지 않다.

그런데 왜 지금 경제 민주화이며, 박정희인가? 1997년 외환 위기와 현재 양극화의 원인을 밝히는 데서, 또 앞으로 시장과 관료의 역할 범위를 설정하는 논의에서 의견 대립을 보이고 있는 진보 진영의 학자들도 던지는 물음이다. 지난 9일 서울 동대문구 회기로에 위치한 KDI의 연구실에서 유종일 교수를 만났다.

"박정희가 '경제는' 잘 했다고?"

프레시안 : 함세웅 신부 측으로부터 연구 제안을 받지 않았더라도 박정희를 재평가하려는 계획이 있었을 듯하다. 박정희를 재평가한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밝히고 싶었나?

유종일 :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박정희의 유산'을 내려 받은 이명박 대통령이 있고, 그 대통령을 강력하게 견제하는 유일한 정치인이 박정희의 딸뿐이라는 현 상황에 대한 우려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 2008년 새해 첫 신문 칼럼에서 나는 이 대통령이 시장 경제가 아니라 관치 경제를 할 거라고 썼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4년간 이명박 대통령은 외환 시장에 대한 노골적인 개입은 물론, 'MB 물가 지수'를 만드는 등 정부 압력으로 가격에 영향을 미치려는 발상을 반복적으로 표출하며 박정희 식 관치 경제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금리 정책에 대해서도 한국은행을 압박하면서 한국은행이 독립성을 상실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금융 시장에 대한 개입도 도를 지나쳤다.

이런 이명박 대통령의 관치 경제는 행정력에 의존해 기업을 압박하고 시장을 통제하는 구시대적 방식이다. 역사가 거꾸로 가고 있다. 경제는 더 어렵고 양극화는 더 심해졌는데 "그래도 경제는 박정희가 잘 했지" 이런 평가가 나온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박정희 식 관치 경제를 잇는 이명박도 낳은 것이다.

또 하나는 소위 진보 진영 내부에서도 모든 문제의 원인을 신자유주의에 고정시키는 데 대한 문제의식이다. 박정희 시대 때 안 일어나던 문제가 신자유주의, 시장 독재 때문에 일어난다는 인식이 존재한다. 나도 누구보다 신자유주의를 강력히 비판하는 사람이지만, 우리 사회는 신자유주의로 설명되는 사회가 아니다.

물론 외환 위기를 계기로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가 되고 나서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을 강요당해왔고, 그 부작용이 심화되어 온 건 맞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모든 문제가 신자유주의 때문에 생긴 것처럼 이야기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문제의 핵심은 박정희 시대에 잘못 만들어진 구조적 문제들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데 있다.

프레시안 : 매우 일반적인 평가 중 하나로, 많은 사람들이 "그래도 경제는 박정희가 잘 했지" 하고 말한다. 민주주의는 후퇴시켰을지언정 경제는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박정희에게 비판적인 사람도 민주주의와 경제 분야를 따로 놓고 얘기하자고 한다. 이렇게 나누어 보는 관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 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유종일 :
분리해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분리해서 생각했을 때) 어디다 가중치를 둘 것인가 하는 문제다. 나는 희생을 수반하는 경제 성장보단 인권과 자유라는 가치에 더 무게를 둔다. 또 하나는 '박정희가 민주주의를 후퇴시켰을망정 경제 면에선 잘 했다'는 평가 자체에 내포하는 문제인데, 당시 한국이 고도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근거는 있다. 그런데 그 성장이 얼마만큼 박정희의 공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때는 한국만 고도성장을 한 게 아니고 동아시아 나라들이 전부 고도성장을 이뤘다. 동아시아는 서구 제국주의의 침입이 있기 전 16세기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앞선 문명을 발전시켰던 지역이었고, 당시 60년대는 미국의 역할을 포함해 아시아 개발도상국이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시대적 조건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리보다 앞서 일본이, 동시대에는 타이완·홍콩·싱가포르 등 아시아 신흥 공업국이, 뒤따라서는 중국이 고도성장을 했다. 뛰어난 리더십이 있어서가 아니라, 환경적·역사적 요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같은 기간 크게 성장한 이 국가에 공통적으로 '토지 문제'가 없었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많은 개발도상국은 소수 엘리트에게 토지와 부(富)가 집중된 것이 발전의 중대 장애물이었다. 한국, 일본, 타이완, 중국, 베트남 등은 이미 토지 개혁이 이뤄진 상태였기에 이 문제가 크지 않았다. 그러니 이걸 어떻게 박정희의 공이라 할 수 있겠는가. 나라마다 토지 개혁의 사정은 달랐지만(특히 일본의 경우), 대중 운동과 농민 운동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들의 공을 더 높이 사야 한다.

프레시안 : 그러나 결과적으로 박정희 시대는 그 전에 비해 많은 사람들이 빈곤에서 해방되고, 나라는 대외 지향적인 발전의 길을 닦은 시기였다. 평가할 부분이 전혀 없는가.

유종일 : 이승만 시대 경제는 '원조 극대화 정책'으로 요약된다. 미국한테 어떻게든 원조를 많이 받아내려 했고, 극단적인 수출입 배제 정책을 폈다. 그 결과 정부 재정이 완전히 미국에 종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원조 과정에서 부정부패도 많이 일어났다. 그런데 박정희 시대에 이 기조가 바뀌었다. 박정희 식 민족주의는 미국의 원조를 탈피하는 것이었다.

미국에서도 한국 정부에 어느 정도 시장 원리에 맞추라는, 일본과 관계를 잘 풀어서 교역을 하라는 압박도 있었다. 그래서 외화를 많이 벌고자 했고, 열심히 수출하고 그만큼 수입도 하면서 좀 더 세계 시장을 향해 적극적인 발전을 한 거다. 이런 선택은 옳았다고 본다. 이승만 정부 당시의 말도 안 되게 폐쇄적인 상태에서 효율성과 역동성을 끌어올려주는 힘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박정희의 혜안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장면 정부가 만들었던 계획을 이름만 바꾸어 갖다 쓴 것이었다. 또 한편으론 앞서 말한 미국의 압력과 같은, 시대적으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배경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경제가 나아졌다 하더라도, 그게 박정희의 공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프레시안(최형락)

김대중·노무현, 이걸 못해서 실패했다!

프레시안 : 그동안 강조해 온 '경제 민주화' 얘기를 해보자. 일단 어떤 내용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많은 이들이 경제 민주화가 '좋은 얘기'란 사실엔 공감하면서도 당장 먹고사는 게, 내 목에 밥이 들어오는 게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 경제 민주화가 가장 시급하고 절실하다는 건가?

유종일 : 경제 민주화가 곧 '먹고살자'는 얘기다. 나라가 부유해졌다고 하는데 그 과실이 소수 1퍼센트에 집중되고 대다수 국민은 제대로 못 산다. 20대가 연애, 결혼, 출산 등 인생의 중요한 것을 포기할 정도로 살기 힘든 게 현실이다. 왜 우리가 돈을 버나. 죽도록 고생하지 않고 여유롭게,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려고 하는 것 아닌가.

뭐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돌아봐야 한다. 성장의 과실이 골고루 나눠지도록, 특히 실제 '삶의 질'이 상승하도록 하기 위해선 지금과 같은 경제 구조론 안 된다. 시스템을 바꾸어야 하는데 그 방법이 바로 경제 민주화다.

프레시안 : 경제 민주화와 관련해서, 박정희를 다시 보는 작업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유종일 : 박정희는 우리에게 '성장 지상주의'라는 강력한 유산을 남겼다.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밥부터 먹고 봐야지'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자유와 인권을 억압하는 경제 성장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본다. 사람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경제 성장이 필요한 건데, 경제 성장을 위해 사람이 죽는다면 주객이 전도된 것 아닌가.

박정희는 이 주객전도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냈다. 사실 누구나 이 이데올로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한 유산으로 남은 이유는, 한국 경제의 지배적 존재인 재벌이 언론과 각종 연구소,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통해 '모든 문제가 성장을 해야 해결될 수 있다'는 식의 관점을 강화해 왔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도 관료, 정치권에 영향을 행사하면서 정책도 그쪽으로 몰고 갔다. 박정희의 유산이 이렇게 정신적, 구조적으로 맞물려 있기 때문에 한국이 경제 성장은 하는데 국민은 오히려 더 불행한, 근본적인 모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프레시안 : 그런데 현재의 가장 절실한 문제, 즉 청년 실업과 비정규직, 극심한 양극화 등은 박정희 식 관치 경제가 아니라 김대중·노무현 정부 당시 펼친 신자유주의 정책에 기인한 바가 더 크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유종일 :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특히 외환 위기 직후 노동 시장 유연화나 공기업 민영화 등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의한 과오를 저지른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전 세계적인 신자유주의적인 흐름과 외환 위기 이후 IMF와 미국의 압력 때문에 이뤄진 부분이 크다.

앞서 말했듯 한국은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아니다. 나도 누구보다 강하게 신자유주의를 비판해왔지만, 핵심적인 문제가 거기 없는데 자꾸 그쪽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게 문제다.

아직도 정부가 기업들을 불러다 투자니 고용이니 안 하냐고 야단치는데, 4대강 사업 같은 건설 재벌 도와주는 공사를 하는데, 이게 어떻게 신자유주의인가? 한국이 주주 자본주의인가? 재벌이 왕국처럼 지배하는 총수 자본주의다. 한국에선 재벌 독식 구조와 불공정한 시장, 그래서 부가 한쪽으로 집중되는 게 더 큰 문제다.

프레시안 : 하지만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노무현 대통령의 말대로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고, 그것은 애초에 '시장 개혁'을 강하게 내세운 정책 기조 자체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유종일 : 그들 정부가 하려고 했던 개혁의 기본적인 방향을 신자유주의와 혼동해선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개혁의 큰 그림은 박정희 식의 관치 경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으로부터, 관료들 혹은 배후에 있는 정치권력이 자원 배분에 입김을 불어넣는 시스템에서 '시장 원리'에 의해 자원이 배분되도록 하는 시스템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동안 자원이 정치 관료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배분되던 것이 굉장히 비효율·비민주적이고 정의롭지 못했기 때문에, 그 해결법으로서 시장 원리에 추를 얹는 것은 옳은 방향이다.

하지만 그냥 시장에 맡겨버리자는 게 아니다. 시장 역시 완전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처럼 이미 재벌 구조가 공고하게 형성된 상태에서 당사자들 마음대로 경쟁하라고 하면 당연히 불공정한 경쟁이 일어난다. 거기서 경쟁이 공정하게 이뤄지도록 돕는 여러 규제와 제도가 필요했다. 한편으론 시장에 진입하기 이전에 교육 등 인적 자본 형성 과정에 있어서 최대한 기회가 평등하게 돌아가도록 해주어야 하고, 경쟁 과정에서 낙오된 이들에게 제공하는 안전망도 필요하다.

결국 문제는 시장 자유화 그 자체가 아니라, 공정한 시장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나 시장 실패를 보완하는 정책들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은 것이다. 시장의 자유와 더불어 이러한 제도적 보완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경제 민주화의 요체다. 거기서 강조되는 게 '시장에 대한 민주적 통제'다. 민주적 통제란 국민이 뽑은 대표자들이 만든 합당한 제도와 투명한 절차에 입각해 각각의 시장을 도와주거나 규제하는 것으로, 관치와는 다르다.

프레시안 : 큰 그림은 옳았을지언정, 결국 민주 정부도 양극화 극복에 실패했다.

ⓒ프레시안(최형락)
유종일 :
두 정부가 추진했던 경제 정책 속에는 다양한 요소가 복합적으로 드러난다. 그들이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펼친 것도 물론 잘못이었지만, 그것보다 근본적인 잘못은 재벌 개혁의 실패였다고 본다. 그랬기에 경제 구조의 양극화를 막지 못했다.

김대중 정부의 경우 2000년에 벌써 재벌 개혁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 1998년 정부와 재계가 합의한 재벌 개혁 5대 원칙은 재벌들의 다양한 회피 전략에 의해 거의 무력화되었고, 1999년 출자 총액 제한 등 추가 3원칙을 발표했지만 2000년 총선과 남북정상회담 이후엔 재벌 개혁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노무현 정부의 경우, 취임 6개월 만인 8·15 경축사에서 국민소득 2만 달러를 국정 목표로 내세웠다. 개혁과 분배를 하라고 뽑아놓았더니 또 '성장'이었던 것이다. 또 뼈아픈 부분이긴 하지만, 재벌 개혁엔 손도 안 댔다고 봐야 한다. 거기엔 정권과 삼성 사이에 나로선 알 수 없는 유착 관계가 큰 영향을 미쳤다.

근본적 문제는 점점 커져 가는데, 부작용에 약을 바르기 위해 사회 복지나 안전망을 조금 넓힌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그래서 정권도 빼앗겼다고 본다.

외환 위기·땅값·불균형 발전, 그가 남긴 유산

프레시안 : 이 책은 8명의 논자가 쓴 각기 다른 글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엔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4장, 외환 위기를 다룬 김상조 교수의 글에서는 그 뿌리를 박정희 체제에서 찾는다.

그런데 많은 외국 학자들은 한국 외환 위기의 원인을 재벌이나 관치 금융이 아니라 김영삼 정부가 추진했던 세계화 정책이라고 말한다. 재벌의 지배력이나 관치 금융 문제는 1960년대부터 시작된 건데, 왜 과거에는 안 터졌다가 1990년대에 와서 터졌을까 하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유종일 : 세상일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원인이 있다. 감기를 예로 들어보자. 감기에 걸린 이유를 누군가 묻는다면 기초 체력과 면역력이 떨어졌다고 말할 수도 있고, 사람이 밀집된 곳에 갔다 와서 손을 씻지 않았다거나 하는 부주의한 위생 문제를 들 수도 있다. 또 감기 바이러스가 온갖 곳에 퍼져 있는 환경 탓을 할 수도 있다. 셋 다 맞는 얘기다. 그리고 아무리 감기 바이러스가 돌아다녀도 기초 체력이 튼튼하면 안 걸릴 것이고, 손을 안 씻고 다녀도 감기 바이러스 자체가 없다면 또 괜찮다.

이것을 외환 위기로 생각해 보면, 부주의한 태도 차원에서 잘못한 것이 김영삼 정부가 우리 실력에 맞지 않게 금융 시장을 무리하게 개방한 것이다. 국민소득 1만 달러 달성을 정치적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환율을 인위적으로 고평가시켰다. 독감이 대유행 중인데 영화관 갔다가 손도 안 씻은 셈이다.

여기서 '독감 대유행'은 뭔가. 전 세계 금융 시스템 자체가 불안정했고, 특히 아시아 금융 시장에 위기가 일어났다는 '환경'의 문제다. 거기에 우리는 '기초 체력'도 나빴다. 당시 상황을 보면, 아시아에서도 모든 나라가 당한 건 아니지 않나. 체력이 좋다면 큰 위기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 체력에 해당되는 것이 재벌 금융 문제다.

그런 면에서 김영삼 정부의 섣부른 개방 정책을 지적하는 얘기가 틀리진 않았지만, 그것은 행동 차원에서 원인을 찾은 거라고 볼 수 있다. 그 밑에는 체력, 즉 경제의 구조적 문제가 있었고 그게 바로 재벌과 관치 금융이다. 1990년대 전반 한국은 투자율 40퍼센트에 이르는 엄청난 과잉 투자 상태였다. (정부가) 엉터리 금융 시스템에 돈을 쏟았고, 부채 비율이 치솟았던 것이다.

프레시안 : 이번엔 지가(地價)에 대한 의문이다. 이정우 교수는 2장에서 한국의 높은 지가와 물가 수준이 개발 독재 시대가 키운 괴물이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독재 시대에 부동산가가 굉장히 높이 오르긴 했지만, 당시 소득 수준도 그만큼 오르지 않았나 하는 지적이 있다.

박정희 시절엔 고용과 소득이 동시에 올랐기 때문에 지가가 폭등했어도 부동산 보유율도 함께 올랐고, 지금처럼 집 없는 문제 때문에 힘들진 않았다. 오히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야말로 부동산 버블이 극성을 부리지 않았나. 따라서 지가 앙등의 거의 모든 책임이 박정희에 있다는 이정우 교수의 비판이 과장되었다는 생각은 없나.

유종일 : 박정희 시절 '과속 성장'을 했기 때문에 뒤따르는 문제들도 많았다. 그 중 하나가 높은 인플레이션이었다. 지적한 대로 소득은 올랐지만 물가와 지가 역시 가파르게 올랐다. 물론 그 이후로도 부동산가는 여러 번 뛰었고 소득 대비 지가 상승률은 계산해 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지금 문제가 되는 엄청난 투기 바람이 이때부터 구조적으로 시작됐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강남에서 한나라당 득표수가 높은 이유가 꼭 부자의 이익을 대변해서만이 아니라 경상도 사람이 많아서라는 얘기도 있다. 1970년대 고급 정보를 한마디라도 얻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던 사람 혹은 기업들이 강남땅을 사들일 수 있었단 거다. 대기업들이 여기저기 땅을 사 두고, 겉으론 공장이나 학교를 짓는다면서 실은 그냥 앉아서 지가 상승으로 돈 벌어들이는 행태가 다 이 때 시작됐다.

물론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부동산 버블에 대한 책임이 있는 건 사실이다. 관료들한테 놀아난 부분이 크다. 김대중 정부의 경우, 외환 위기로 망가진 경기를 부양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거기서 "일자리 늘리려면 건설 경기 띄우는 게 최곱니다. 그럼 규제를 완화해야 합니다" 하는 목소리가 나온 거다. 그래서 경기는 회복되었지만 정부 말기에 투기 붐이 시작됐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는 부동산 투기 문제에 대해 세게 나왔는데, 또 관료들 가운데 "카드 채 문제 때문에 금융 기관도 어렵고 경기 안 좋은데, 집값 떨어지면 더 큰일난다" 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처음에 시장은 (노 대통령이) 세게 나오니까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어영부영하다 보니 어느새 '이 정권도 토건 세력이 잡았다'는 생각이 퍼졌고 그때부터 부동산가가 마음 놓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여기에 '균형 발전'을 내놓았는데 정작 제일 중요한 분권과 재정적 지원은 쏙 빠지고, 혁신 도시니 뭐니 해서 또 다시 부동산 규제를 완화하는 쪽으로 갔다. 여기에도 큰 책임이 있다. 재벌-토건의 연결 고리를 잡아끊어야 했던 건데 오히려 다 살려줘 버린 셈이 됐다.

프레시안 : 조석곤 상지대학교 교수는 7장에서 박정희 시대의 농업에 대해 '압축 성장 속의 압축 쇠퇴'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박정희 시대에 농산물 수입이 거의 금지되다시피 했기 때문에, 차라리 그때가 농산물 개방 압력에 시달리는 지금보다 나았다고 하는 목소리도 있다. 세계무역기구(WTO) 가입과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농산물 시장이 열렸렸고, 그래서 농민들이 양극화 되었다는 지적이다.

유종일 : 개방이 물론 큰 문제다. 하지만 개방화 압력이 오기 전에 농업 생산 구조가 튼튼하고 우리 농업의 경쟁력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박정희 시절부터 농촌은 굉장히 살기 어렵고 사람들이 다 떠나는 곳이 되어버렸다. 박정희에게 있어 농업은 철저하게 산업화와 고도성장 정책의 종속 변수였다. 대대적으로 산업화를 하려면 그만큼 (대도시에) 값싼 노동력 제공되어야 하는데, 농촌이 그 전초기지 역할을 한 거다. 국가의 모든 투자가 도시에 집중되었고, 사람들은 교육 기회나 일자리를 얻으려 다 농촌을 뒤로 했다.

당시 농촌이 살기 어려워졌다는 증거가 1971년 대통령 선거 결과 아닐까. 당시 박정희는 김대중에게 거의 질 뻔했다. 그전까지 한국 선거의 기본적인 패턴 중 하나가 '여촌야도(與村野都)' 즉 농촌에선 여당이 우세하고 도시에선 야당이 우세한 현상이었는데, 농촌에서 김대중을 찍은 표가 더 많이 나온 거다. '농민의 아들'을 표방하며 집권 초기부터 중농주의적 모습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미 쇠퇴를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석곤 교수가 강조한 건 농업 생산 구조와 농업 경쟁력인데, 박정희는 이런 부분에 있어 새로운 대안을 만드는 걸 포기하고 단순한 가격 조정으로 임기 내 큰 불만 잠재우려 했다. 그래서 농업은 영원히 경쟁력 없는 산업이 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의 개방 압력이 밀려들어오니까 감당할 수 없게 된 것 아닐까.

프레시안 : 책 마지막 장에서는 신동면 경희대학교 교수가 박정희 시대의 사회 복지를 다루었다. 박정희 정권은 사회 복지의 발전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사회 보장 제도의 근간이 되는 생활보호법·산업재해보상보험법·의료보험법·국민복지연금법·사회보장에 관한 법 등 사회 복지 관련 법률을 제정했다. 그가 만든 사회 복지 기틀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는가.

유종일 : 우리는 지금도 경제 수준에 비해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복지 수준이 낮은 나라다. 무조건 성장에 '올인'하고 경제 개발 예산은 엄청나게 편성하면서 복지는 최소화하는 정책 기조가 박정희의 성장 제일주의로부터 나온 거라고 본다. 기본적인 틀을 마련하긴 했지만 워낙 성장이 우선이고 복지는 사치라는 정책 기조가 강했다. 사각지대도 많았고, '용돈 연금'이란 말도 있듯 급여 수준이 굉장히 낮지 않았나. 제대로 된 복지였다고 볼 수 없다.

ⓒ프레시안(최형락)

'反 MB'는 끝난 구호, 야권 통합하려면 지금 당장…

프레시안 : 복지는 현재 정치권 최대 화두이기도 하다. 민주당 역시 경제 민주화와 함께 '보편적 복지'를 차기 집권 플랜의 열쇳말로 내세웠다.

그런데 지난 7월 나온 이 발표를 놓고, 복지를 강조하는 일각에서는 '보편적 복지가 경제 민주화보다 먼저다' 혹은, '경제 민주화는 보편적 복지 안에 종속된 문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워낙 복지 문제가 커다란 화두여서인지 경제 민주화가 덜 부각되는 경향도 있는데….

유종일 : 종속된 문제라니, 그건 큰 착각이다. 얼마 전 복지국가소사이어티 후원회에서 연설을 요청받았는데, 아주 간단히 이렇게 말했다.

"나 역시 복지 국가 운동을 하고 있으며, 나만큼 일찍부터 복지를 강조한 경제학자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복지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지금 월스트리트 시위가 다 어디서 나온 건가. 1대 99의 격차 사회가 눈앞에 있는데, 그걸 복지로 치유하는 방법은 없다. 더 중요한 건 경제 시스템을 공정하게 만드는 거다."

그날 청중들의 반응은 압도적이었다. 나는 경제 민주화와 복지의 관계를 이렇게 본다. 먼저 모든 사람이 '자유'를 '평등'하게 누리도록 만드는 것이 민주주의 이상이다. 그리고 시장 경제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경제가 조직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유로운 선택과 실질적 자유의 최대 평등이다.

그러기 위해선 (시장 진입 이전의) 기회와 (경제 활동) 과정, 의사 결정 참여에 있어서 평등해야 하고, 결과적인 분배 역시 지나치게 불평등하면 안 된다. 기회는 잠재력 개발을 위한 교육 등의 평등을 말하고, 과정의 경우는 시장에서 경쟁할 때 규칙의 문제다. 또 기업에서든 정치 기구에서든 의사 결정에 참여할 때도 민주적 절차가 필요하다.

여기서 '결과적인 분배' 얘기를 했는데, 아무리 시장이 공정해도 그것만 갖고도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사람마다 능력과 운이 다른데, 거기서 벌어지는 위험을 최소화시켜주어야 한다. 이 재분배에 있어서 중요한 건 조세 정의의 확립과 보편적 복지다. 이런 구도로 보면, 오히려 보편적 복지가 경제 민주화의 일부분이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종속 관계로 생각하기보다 일종의 '연결 고리'로 보고 싶다. 경제 민주화라는 관점에서 생애 주기에 따른 지원이나 보편적 사회권 차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거다.

프레시안 : 오늘(9일) 오전 민주당 경제 민주화 특별위원회에서 10대 핵심 정책을 발표하려고 했는데 발표 일정이 1주 미뤄졌다. 어떤 내용인가.

유종일 : 구체적 내용은 밝힐 수 없지만 지금까지 나눈 얘기들과 같다고 보면 된다. 민주당 내에서도 한미 FTA에 대해서도 드러나듯 다양한 관점과 의견이 있지 않나. 내가 세게 나갈 경우 생길지 모를 저항이랄까 잡음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하루 이틀 여유를 두면 좋겠다고 해서 발표 일정을 미뤘다. 내용은 바뀌지 않는다.

프레시안 : 민주당의 재벌 개혁 설계자로 복귀한 것도 현실 정치에 밀접한 활동인데, 2012년 선거의 해를 앞두고 더 구체적인 계획은 없는가.

유종일 : 개인적인 정치적 플랜은 없다. 지금 맡은 일, 즉 경제 민주화 방향을 잘 잡는 게 백 배 더 중요하다. 경제 민주화 추진을 위한 야권 통합의 길을 만들어내는 것이 이 시점에 내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라 생각하고 헌신적으로 일하고 있다. 선거에 나가느냐 마느냐는 매우 부차적 문제다. 역사가 (출마라는) 미션을 주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 가서 수용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거다.

정권 교체를 위한 야권 통합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무엇을 위한 야권 통합인지가 분명치 않다. 그 내용이 '반(反) MB 단일 전선 구축' 외엔 별로 없는 것 같다. 그걸 노골적으로 내세우고 야권 통합 운동을 하는 세력도 있는데, 그건 국민에 대한 모독이다. 그럼 권력 잡으면 뭐 할 건가? 전에 무엇을 잘못했고, 앞으로 뭘 할 수 있을지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나는 야권 통합이 '경제 민주화 추진 동맹'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주노총과 진보 정당 쪽에도 경제 민주화 운동은 같이 해야 한다고 분명히 이야기 했다. 야권 통합에 간여하는 사람들이 경제 민주화의 구체적 정책에 대해 모두 동의할 순 없겠지만, 큰 방향에 뜻이 맞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기조를 따라 야권 통합을 하는 게 맞다. 경제 민주화에 동의한다면, 파당적 이유를 내세워 다른 살림을 차리겠단 것도 잘못된 거다. 한나라당 내에서도 경제 민주화와 다를 바 없는 이야기를 하는 의원이 있는데, 그렇다면 이쪽으로 와야 맞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마지막 질문이다. 과거 박정희·전두환 정부 때 청춘을 보낸 60대 이상 노인들은 대개 빈부를 막론하고 한나라당을 지지한다. 그분들에겐 박정희 시절에 대한 막연한 향수도 크지만, 당시만 해도 소득은 늘었고 노력만 하면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었다는 분명한 인식도 있는 것 같다. 그분들이 박정희 시절에 대해 '그래도 살기 좋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환상에 지나지 않을까?

유종일 : 모든 사람은 자기의 경험 속에서 개념 틀을 만들고 거기에 맞춰 해석하다 보니까, 앞서 말했던 역사적 맥락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그래도 그때 보릿고개는 없어졌지"하며 끄덕일 수 있다. 게다가 박정희는 서민적 풍모를 많이 보여준 대통령이기도 하다. 그때만 해도 권력자가 농민들과 함께 바지 걷고 모 심고, 막걸리 마시는 건 대단히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상당 부분은 허상이다. 지금 재벌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 세력이 자신들의 특권 구조를 온존시키기 위해 재생산해내는 이데올로기의 일부로서의 허상. 하지만 아마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엔 큰 부분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개인에겐 소박한 일일지 모르겠지만 사회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책이 그 신화를 깨는 데 작게나마 기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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