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대한민국을 설명하는 열쇳말 중 하나는 이른바 '○빠' 현상이라고 불리는 극단적인 쏠림 현상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막론하고 일단 "끌리고 쏠리고 들끓기" 시작하면 합리적인 토론은 불가능하다. 그 폐해가 수차례에 걸쳐서 드러났음에도 심지어 언론, 지식인, 정치인이 나서서 이런 "끌리고 쏠리고 들끓는" 현상을 부추기고 대중은 이에 반응한다. '프레시안 books'는 파시즘, 매카시즘 등 전체주의의 광기가 세계를 옥죄던 1951년 대중의 쏠림 현상의 위험을 경고한 에릭 호퍼의 <맹신자들>(이민아 옮김, 궁리 펴냄)에 주목했다. 열정과 연대에 기반을 둔 대중운동은 세상을 바꾸는 동력이지만, 맹신에 빠진 대중은 공동체는 물론이고 자기 파괴도 서슴지 않는다. 반세기 전에 나온 <맹신자들>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심리학자 김태형 씨, 문화평론가 이택광 경희대학교 교수가 다른 관점에서 안내자로 나섰다. (☞관련 기사 : 황빠, 노빠, ○빠…대한민국은 '광신자'가 지배한다!?) |
소박하기에 명쾌한 책이 있는데, 에릭 호퍼의 <맹신자들>(이민아 옮김, 궁리 펴냄)이 그렇다.
이 책의 부제는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이다. 부제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단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상이라는 형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글을 쓴 이들은 많다. 니체가 있고, 아도르노가 있다. 이들에게 단상은 총체성을 달성하기 어려운 현실을 파악하기 위한 최고의 무기였다.
<맹신자들> 역시 단상의 위력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촌철살인의 결기가 곳곳에 묻어난다. 이를 통해 호퍼가 도모하는 것은 명확하다. 기존의 상식을 뒤집는 것. 호퍼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책은 권위 있는 교과서가 아니라 나 개인의 생각을 담은 것으로, 불완전한 사실이라도 새로운 접근법을 찾아내기 위한 실마리가 되거나 새로운 의제를 설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으면 애써 피하지 않았다. (94쪽)
한 마디로 이 책은 '용기'의 산물이다. 글 쓰는 이에게 가장 중요한 미덕이 바로 "애써 피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담대함이다.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이 바로 말해야할 것을 말할 수 있는 태도이다. 호퍼의 <맹신자들>은 바로 이런 용감한 결심을 통해 세상에 나온 결과물이다. 책은 수많은 통찰로 가득 차 있다. 오히려 호퍼가 '현재'라고 지칭하고 있는 1951년보다도 2011년 오늘날 우리에게 더욱 설득력 있는 이야기들이 책장마다 빼곡하다.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자.
주위 환경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아무리 비참한 처지에도 변화를 생각하지 않는다. 생활양식이 너무나 위태로워서 삶의 환경을 제어할 수 없다는 생각이 굳어지면 우리는 검증된 것, 익숙한 것을 고수하는 경향을 보인다. 우리는 정해진 삶을 따름으로써 내면 깊숙한 불안감을 중화시킨다. 우리는 이 방법으로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길들였다는 환상을 얻는다. (…) 비참하게 가난한 사람들도 자기를 둘러싼 세계를 두려워하여 변화에 호의적이지 않다. 추위와 굶주림이 뒤따를 때 우리네 인생은 위험하다. 따라서 빈민층의 보수성은 특권층의 보수성만큼이나 뿌리 깊으며, 전자는 후자만큼이나 사회 질서를 영속하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한다. (23쪽)
▲ <맹신자들>(에릭 호퍼 지음, 이민아 옮김, 궁리 펴냄). ⓒ궁리 |
물론 호퍼가 좌파적인 입장에서 이데올로기라는 물질적 재생산의 구조까지 고찰의 대상을 확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1951년이라는 시대적 한계에서도 상당히 경청할 만한 내용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대중운동의 동력이 불평불만이라기보다 희망을 불어넣는 것이라는 통찰은 지금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이해하기에도 적절한 것이라고 하겠다. 상황에 따라서 그 희망은 달라지겠지만, 여하튼 불만을 자극하고 증오를 퍼뜨리는 것만으로 결코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없다는 것은 이제 자명하지 않은가? 문제는 희망을 설득할 수 있는 것.
최근 한국에서 벌어진 '안철수 현상'도 이런 호퍼의 주장을 제대로 증명해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오랜 민주화의 '역군들'인 민주당이나 진보 정당이 아니라 안철수나 박원순 같은 '시민의 우상'을 지지하는 대중의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 호퍼의 분석은 유용하다. 정부와 여당에 대한 증오와 분노만을 조장하는 것만으로 대중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기는 어려운 것이다. 안철수와 박원순이 보여주듯이, 문제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이런 관점에서 호퍼는 '대중들'이라는 '아무나'에 대한 명쾌한 해명도 내어놓는다. 그에게 '대중들'은 "희망을 품은 사람들"이다. 희망에 사로잡혔다면, "열정적인 지식인이건 땅을 갈망하는 농부건 일확천금을 바라는 투기꾼이건 냉철한 상인이건 자본가건 맨손의 노동자건 귀족 지주건" 모두 대중운동이라는 용광로에서 하나의 덩어리로 변신한다(26쪽).
지당한 말이지만 이 희망의 대가는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소심한 사람들이라면 희망을 피해 대문을 걸어 잠그고 안에 숨는 것이 현명하다. "아무리 고상하고 온화한 것일지언정 희망과 그로 인해서 빚어지는 실상"은 맞아 떨어지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27쪽). 선언적인 어투이지만, 호퍼의 말을 틀렸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변화의 임무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사람들"은 불만 세력이긴 하지만, "극빈 상태는 아니어야 하며, 어떤 강력한 강령이나 절대적인 지도자 혹은 어떤 신기술을 얻을 때 압도적인 힘의 원천에 접근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는 진술에 이르면 무릎을 칠 수밖에 없다.
호퍼가 말하는 '맹신'의 의미가 여기에서 전모를 드러낸다. 그에게 맹신은 희망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다. 희망은 현실을 부정하고 미래를 향해 사람들을 질주하게 한다. 이 '대중들'은 자신의 희망으로 인해 빚어질 현실에 대해 알지 못한다. 이 '알지 못하는 상태'야말로 '대중들'로 하여금 공동체의 윤리를 벗어나게 만드는 상황이다. 다분히 이런 상황을 바라보는 호퍼의 시선은 부정적이지만, 그 고찰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호퍼의 주장은 지금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제 상황에 상당히 들어맞는다. 재미있는 일이다. 1951년이라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전후 복구가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면서 점차 냉전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새로운 세계 체제가 구성되어 갈 무렵이다. 호퍼는 유럽을 강타한 파시즘과 현실 사회주의라는 역사적 현실을 염두에 두면서 독자적인 관점으로 대중운동을 정의하고자 한다.
호퍼의 입장에서 본다면 대중운동은 단순한 불만 세력의 준동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 대중운동을 위해 필요한 것은 희망에 눈이 먼 맹신자들이다. 이들이야말로 대중운동의 중심 동력이다. 그리고 이 맹신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가난한 사람들'이나 '소심한 사람들' 같은 약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사회 내에서 일정하게 권력에 접근해갈 수 있는 구성원들이다.
마르크스 역시 비슷한 관점을 내비쳤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라고 부른 이들은 도시 빈민이라기보다 임금 노동자들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단결하면 부르주아세력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력과 경제력을 가진 존재이다. 이런 관점에서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의 '매장자'인 셈이다. 부르주아는 생산을 위해 이 두려운 매장자의 수를 갈수록 늘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부르주아는 생산력을 높이면서도 노동 계급을 통제하기 위한 다양한 장치들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중운동의 주도 세력을 희망이라는 몫을 나눠 가진 자들에서 찾았다는 점은 높이 살 대목이다. 이런 까닭에 호퍼는 "대중운동이 추종자들을 끌어들이고 붙들어둘 수 있는 것은 자기 발전 욕구를 충족"시켜서 그렇다기보다, "자기 부정 열망"을 충족시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29쪽). 이 자기 부정 열망을 가진 당사자는 "좌절한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좌절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호퍼에게 좌절한 사람은 "자기 혼자 힘으로 이끌어낼 수 없는 것"을 갈망하는 존재이다. 좌절했다는 것은 '자기'를 잃어버렸다는 의미이다. 자아의 의미를 상실한 주체는 누구인가? 바로 '대중운동'이라는 대타자의 욕망에 자신을 일치시키려는 히스테리적 주체이다.
이 주체는 기꺼이 "자기희생을 각오하는 열정"을 대중운동에 쏟아 붓는다(31쪽). 이런 주체가 만들어놓은 그 대중운동의 열매를 가져가는 이들은 "개인의 성공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대중운동을 점령하면 운동의 사명은 끝나는 것이라고 호퍼는 말한다. 이런 진술을 운동의 타락이라는 관점에서 볼 수 있겠지만, 사르트르가 이야기한 상황의 제도화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도 있겠다.
모든 운동은 궁극적으로 제도화한다. 이것이 진보의 문제라고 한다면, 호퍼의 주장은 대중운동의 생성과 소멸이라는 일반적인 법칙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에게 대중운동은 자발성의 문제이다. "선전 선동만으로 내키지 않는 마음을 억지로 움직이지는 못하며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주입시키지도 못하고 이미 믿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설득하지도 못한다"는 것이 호퍼의 생각이다(156면). 따라서 대중운동의 죽음은 곧 자발성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중운동에 헌신하는 것은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행동이다. 이런 행동 중 하나가 광신이다. 광신자는 "자신이 지지하는 대의가 영원히 그 하나뿐"이라고 믿는 존재이다. 대의의 내용은 상관없다. 그 대의에 매달린다는 그 자체에서 광신자는 만족을 얻는다. 광기라는 것이 합리성의 범주에 따른 상대적 개념이라고 본다면, 호퍼의 지적은 상당히 흥미롭다.
다양한 경향의 광신자들은 서로에 대해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으며 언제든 상대방의 목을 조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웃사촌이요 한 가족에 가깝다. 그들의 증오는 근친 증오다. 그들은 사울과 바울만큼이나 가까우면서도 먼 사이다. 광신적 공산주의자는 냉정한 자유주의자가 되기보다는 광신적 애국주의자로 전향하거나 광신적 가톨릭 신도로 개종하는 경우가 더 많다. (129쪽)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전향'의 실상이다. 1980년대를 풍미했던 노동 운동가가 열렬한 '반공주의자'로 변신하는 광경을 우리는 심심찮게 목격했다. 광신적 공산주의자는 광신적 애국주의자로 전향하기 쉽다. 그래야 '광신'이라는 열정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호퍼가 하는 이야기들이 1951년의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물론 군데군데 억지스러운 주장도 있고, 엄밀하지 못한 분석도 있지만, 눈에 거슬릴 정도는 아니다. 대중운동의 '양가성'에 대한 접근이 진술을 애매모호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대상에 대한 시차적 분석은 대상의 양가적 측면을 부각함으로써 인식을 혼란에 빠트린다. 마치 종합을 위한 총체화의 달성이 실천의 공간을 소멸시키는 것과 비슷하다. 실천적인 관점에서 난국을 조성할지언정, 호퍼의 통찰이 여전히 유효한 문제의식을 던져주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긴 어렵다.
호퍼는 거리의 철학자에 가깝다. 보들레르가 노래한 '압생트 취객'처럼 은유로서 다가오는 거리의 철학자가 아니라, 막일을 마다하지 않고 일하면서 틈틈이 철학 공부를 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래서 <맹신자들>은 경험적인 통찰로 가득한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이유로 그의 책은 충분히 일독할 가치를 가진다고 하겠다.
노동자 출신의 철학자가 탄생했음을 알렸던 <맹신자들>을 읽으면서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리의 상황을 되돌아보는 것은 분명 흥미진진한 일일 것이다. 그의 시선이야말로, 소박하게 세상을 보되, 단순하게 판단하지 않는 미덕을 보여주는 모범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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