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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주술적 사유를 비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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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주술적 사유를 비판하는가?

[나는 반론한다] 박동천에게 답한다

<사회과학의 빈곤>(피터 윈치 지음, 박동천 옮김, 모티브북 펴냄)을 놓고 박동천 전북대학교 교수와 서규환 인하대학교 교수 사이의 논쟁이 진행 중이다. 서 교수의 서평, 박 교수의 반론, 서 교수의 재반론, 박 교수의 재반론에 이어서 서 교수가 다시 답변을 보내왔다. '프레시안 books'는 이 논쟁을 계속 지상 중계할 예정이다. <편집자>

☞관련 기사 : ①서규환(
현대인은 과연 원시인보다 더 합리적인가?) ②박동천(마이클 샌델이 대통령? 그럼, 한국 정치가 나아질까?) ③서규환(이론, '생각'에 대해 생각하는 것) ④박동천(식인 풍습의 원시 사회는 정말로 열등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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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동천은 2011년 9월 9일자 '프레시안 books'에 발표한 논고 "식인 풍습의 원시 사회는 정말로 열등한가?"에서 자신의 "입장에 대한 해명"을 시도했다.

그는 자신의 입장이 "충분히 전달되지 못"하게 한 "조급"하거나 "경솔한" 표현들이 있었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그렇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프레시안>이라는 대중 매체에서도 그렇게 말하는 태도를 보면, 박동천의 진솔한 인품을 알 수 있다. 그는 학자로서 깊이 있는 성찰에 열려 있고, 그런 가운데 우리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서 용기 있게 발언해 왔던 것이다. 냉정한 논리적 분석이 돋보이는 그의 시사 평론 <깨어있는 시민을 위한 정치학 특강>이 그런 예증이다.

그런데 이번 그의 "해명" 논고 역시 조급함이나 경솔함에서 벗어나서 신중하게 집필된 것 같지 않다. 그는 해명 논고를 집필하면서는, <프레시안>에 곽노현 교육감 사건에 대해서 시사 칼럼을 발표하느라 시간적 여유가 더욱 부족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2) 내가 말하는 비판적 합리성의 이론이란, 어느 정도의 합리성만 있으면 사용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모든 금기를 비판하는 이론적 입장을 말한다. 원시 사회에서도 사유가 있고, 성찰이 있을 것이고, 그런 한에서 "비판"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그것을 두고 비판적 합리성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의 개념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나는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 이론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하려고 시도해왔다. 나의 비판 개념에 대해서는 <비판적 시대정신>(다인아트 펴냄) 제5부 비판을 읽어주길 바란다.)

원시 사회의 주술적 사유에서는 비판의 구조적 한계가 있다. 달리 말해, 금기가 있다.

나의 비판적 합리성 이론은 인과적 합리성을 중심으로 하는 합리성론을 비판한다. 박동천은 윈치가 1958년 당시의 실증주의 철학에서 나타나는 "인과적 합리성"을 비판했던 시대 상황을 역사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근대 이후의 과학 개념이 모두 이런 인과적 합리성에 근거해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그런 한에서 비판하려 한다면, 잘못이다. 현상학, 해석학, 비판 이론 등에서 보여주듯이 다른 과학 개념, 다른 합리성 개념이 있다. (비판적 합리성 개념 자체는 이미 실증주의적 인과론에 대한 비판에서 그 의의가 있다. 그런 인과론에서는 즉물성의 강제(이른바 "순수객관법칙성의 강제")만 있다.)

박동천이 "현실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구체적인 특정 주제에 집착하는 이유를 이해해 보자. 그는 나의 재반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해명하고 응답했다.

"여전히 보편적인 이치를 탐구하기보다는 구체적인 특정 주제에 관해 각자 옳다고 믿는 바를 표명하는 것이 학문이 현실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 단, 이때 특정 주제라는 것이 시사적인 정책 현안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고, 예컨대 자유와 평등의 관계를 파고 들어가는 개념적인 탐구라든지, 일정한 생활 형식이 시간에 따라 변천하는 모습을 추적하는 역사적 탐구, 또는 민주주의나 사회주의 같은 이념이 그 본래적 의미에 충실하게 작동하려면 주위에 어떤 문화적 정신적 배경이 갖춰져야 할지를 다루는 체제 연구 등, 말하자면 이론적인 연구라 할 수 있는 것들도 당연히 "현실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주제 안에 포함되어야 한다. 이런 점들을 언급하지 않고 경솔하게 정책 현안들만을 열거함으로써 오해를 부른 것은 내 잘못이 맞다." (강조는 서규환)

박동천이 자신의 이 해명 논고에서 이론적 연구의 현실적 의의를 인정한다고 명시적으로 밝히는데, 여전히 "보편적 이치를 탐구하기"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자연과학의 논리가 사회 연구 영역으로 확장되는 것에 대한 염려이자 비판 같은 것이다.

"실존과 담론 사이, 다시 말해 삶과 앎 사이, 다시 말해 정치와 철학 사이에서 발생하기 쉬운 소외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마르크스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세심한 지성의 소유자였던 존 스튜어트 밀과 막스 베버조차도, 계몽주의라는 사조의 우산 아래서 인간 세계를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자연과학의 이론에 버금가는 사회과학, 정치경제과학, 정신과학의 이론이 정립되어야 하고, 그 이론에 따라서 세계를 변경하는 것이 역사의 진보라고 믿었다. 윈치는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실존의 차원과 관찰의 차원이 혼동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 자연과학의 논리는 본질적으로 연구 대상의 내면성으로부터 초연한 제3자적 시각 위주로 구성된다. 반면에 인간 사회를 이해하려면 외부적 범주만으로는 안 되고, 반드시 해당 사회의 구성원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지를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이 차이는 이미 <사회과학의 빈곤>에서 집요하게 발굴해 들어가는 주제고, 나도 이미 여러 번 반복한 사항이다." (강조는 서규환)

박동천은 "제3차적 시각", 관찰의 방법 같은 것을 겨냥하고 있다. 몇 가지 의문이 있다.

첫째, 인간이 인식할 때 순수한 관찰의 지위에 있을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 있다. 현상학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워왔는데, 현상학의 생활 세계론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존재 자체가 세계 속에서 있는 것이고 이 세계 자체가 인간들의 생활 세계라는 것이다. 내가 헌정 개념을 사용할 때 현상학에서 사용해온 헌정이라는 말을 내가 수용한 것이라고 (다시) 밝혔을 때 이미 순수한 관찰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적어도 간접적으로는) 논증한 셈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현상학의 생활 세계론과 비트겐슈타인의 생활 형식론은 순수한 관찰의 불가능성을 논증한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으며, 이 맥락에서, 나는 이 양자를 부정하지 않는다.

둘째, 학문사적으로 마르크스나 베버가 박동천이 지금 지적하고 있듯이 이해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아니, 이미 나는 나의 책 <현대성의 정치적 상상력> 등 다른 논고들에서 밝혔지만 마르크스나 베버 모두 그렇게 이해될 수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아마도 짧은 논고 형식을 통해서는 논박하기 어려운 점이 있음을 인정해야겠다.

셋째, 문화인류학의 발전 과정에서도 그렇지만 상징적 상호 작용론, 민속 방법론, 슈츠의 현상학적 사회학 등등이 낯선 문화권을 이해하려면 그 문화권을 내부적 논리, 내재적 논리에 따라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을 나 역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이 이해에서 곧바로 그 문화를 현재 있는 그대로의 인정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비판적 합리성의 매개가 필요하다고 나는 주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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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과학의 빈곤>(피터 윈치 지음, 박동천 옮김, 모티브북 펴냄). ⓒ모티브북
1) 다시 말하지만, 내가 헌정(constitution)이라는 용어가 후설의 현상학에서 차용한 것이라고 밝히면서 구성 개념과 동일한 것이 아님을 굳이 밝힌 까닭이 있었다. 내가 현상학의 번역 관례에 따라 구성이라 말하면, 인간의 인식 활동에서 데카르트적 주관성의 작용이 일차적으로 있는 것으로 내가 파악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할 지도 모르겠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런 맥락이 아니면 나는 (이론적) 구성이라는 말을 사용했고, 하고 있다.

철학적 논의에서의 "헌정"이 헌법학에서의 "헌정"과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헌법학에서 법으로서의 헌정, 곧 헌법은 진리를 인식하는 인간의 사유 과정과 반드시 일치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로 연관되어 있으나 논의 맥락이 다르다. 각 국가에서 그리고 구체적 역사에서 국제 사회에서 법은 역사적 구체적 상황에서 구체화되는 제도이며, 국가와 사회를 구조화하는 매개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헌정이라는 용어를 헌법학에서 사용하는 맥락을 살려 은유적으로 사용한다고 말했다. 그 까닭은, 진리는 확정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한에서 정치성(정치적인 것)이 작동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2) 그런데 내가 헌법 문제에 구체적으로 얘기하면서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 사례에 대해서 짚었던 것은, 다음 아니라 박동천이 '법의 적용'과 관련하여 그 예로서 사사오입 개헌 사례를 먼저 얘기했기 때문이었다. 즉, 사사오입 계산법에 의한 법 실행 사례를 지적하면서 그 문제의 "사사오입 계산법"은 "법의 구체적 실행 과정에서 정당한 법을 지키지 못한 것의 문제"의 사례에 해당한다고 나는 판단하고 말했다. 사사오입 계산법 역시 정당한 법 실행의 하나라고 박동천이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이제 박동천이 주장했던 것 가운데 이론적 논의가 필요해 보이는 부분을 다시 읽어보자.

"그런데 원칙을 어떻게 정하더라도 그 원칙 안에 결코 포섭될 수 없는 양상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한 시점에서 어떤 원칙이 제정되더라도 장차 어떤 새로운 원칙이 등장해서 헌장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될지는 그 헌장에 의해 규율될 수 없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헌장에 규정된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원칙들이 실제 상황에서 어떻게 적용될 것인지 역시 헌장에 정해진 원칙에 따라서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떤 헌법도 언제 어떻게 새로운 헌법이 등장할지를 결정하지 못한다."

첫째는 헌법 개정과 관련된 주장이다. 기존의 헌법에서 어느 조항(들)이 개정되는(폐기되는 것을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한다) 사례가 있을 것인데, 아무런 규칙도 없이 개정하지는 않는다. 민주주의적 법치 국가라면, 개정의 규칙을 정하고 있으며 현재의 그 규칙에 따라 개정해야 한다.

둘째는 헌법의 적용 문제와 관련된 주장이다. 헌장에 정해진 원칙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헌장에 정해진 원칙들 가운데 그 어느 하나에 근거해서 결정되지 않는 사례가 발생할 때가 있는데, 다수의 원칙들 사이에서 결정이 이루어지는 경우, 구체적 사례의 해석이 논박될 수는 있다.

"어떤 헌법도 언제 어떻게 새로운 헌법이 등장할지를 결정하지 못한다"고 박동천은 주장하는데, 의문이 있다. 지금 우리가 헌법을 제정하면서 언제 어떻게 새로운 헌법이 등장할 것을 예상한다면 지금 우리는 헌법을 제정하면서 헌법 속에 예상되는 새로운 헌법에 대해 적시할 것이다. 헌법 개정 법은, 헌법의 형식을 규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내용도 규정한다. 헌법의 미래를 완전히 열어놓지도 완전히 닫아 놓는 것도 아니다.

헌법을 제정할 때의 역사적인 구체적 상황이 있다. 그 구체적 상황에서 과거의 경험과 미래의 기대를 담아 헌법을 제정한다. 헌법은 사례에 대한 구체적 해석과 더불어 법의 해석이 적용되는데, 헌법의 언어들의 의미는 역사적으로 규정되는 것이지,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매우 복잡한 논의가 필요하지만, 일단, 헌법 언어를 해석하는 언어 공동체의 역사적인 해석력도 작용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박동천은 법과 그 적용에 대해서 얘기했을 때, 언어의 해석 문제에 대한 충분한 이론적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있어서 오해가 발생하는 것 같다. 왜 적용이 문제가 되는가에 대해서는 그동안 충분하게 논의되어왔다. 적어도 독일의 철학자 가다머 이래의 해석학적 사유의 발전은 바로 언어와 해석에 관한 이 문제와 관련된다. 법도 언어로 표현되는 한에서, 구체적 역사적 상황에서 적용, 즉 해석이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박동천이 언어로 표현된 법을 각 법 해석자가 마음대로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인가? 그렇다면 윈치와 박동천 사이의 거리는 매우 멀다. (가상적 예술 세계의 절대적 자율성을 주장하려는 해체주의자가 예술 언어를 해석할 때 작가, 저자, 주체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나는 <열린 총체성의 해석과 정치>(다인아트)에서 충분히 비판한 바 있고 여기에서는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텍스트들이 동일하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예컨대, 실천적 행위 규범에 관한 법 언어와 미학적 예술 언어, 즉물적 처리를 말하는 행정 텍스트와 가상 세계를 얘기하는 문학 텍스트는 질적으로 서로 다른 종류의 것이다. 장르별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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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동천은 언어의 사용에서 의미가 구체화되고 전달된다는 것을 마치 그때마다의 즉시적 상황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것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박동천이 들었던 예를 그대로 사용해서 얘기해보자.

예컨대, "사과와 오렌지는 다른가?"라고 물으면, 대개는 "다르다"고 답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사과를 먹을지 오렌지를 먹을지를 선택하는 상황이라면, "나는 사과가 좋다" 또는 "나는 오렌지가 좋다"뿐만이 아니라, "사과나 오렌지나 상관없다"는 대답도 완벽하게 정당한 답변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사과와 오렌지의 차이를 혼동하고 있다"는 이유로 비판한다면 어불성설이 된다. 다시 말해, 어떤 두 항목을 서로 다른 것으로 구분해야 할지 아니면 하나의 동일한 집합에 포함시킬지는 누가 어떤 구분을 왜 하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일상 언어, 일상적 소통 과정에서, 의미는 구체적 상황에서 전달된다. "사과와 오렌지는 다른가?"라는 진술의 의미는 예컨대 어느 것을 먹겠는가? 하는 의미로 물었다면, 이 진술의 의미는 그렇게 사용되는 것이고 그렇게 전달되는 것이다. 이 진술의 의미가 상황이 달라진다고 해서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동일한 표현을 다른 의미에서 사용했다면 그 때 역시 그 다른 의미가 소통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이상적 언어"는, 발화자가 청자에게 가장 정확하게 자신의 의도를 전달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이 있다는 것이다. 단지, 비트겐슈타인이 이상적 언어를 말하면서도 그것이 마치 언어 진리가 그 자체로 확정되는 것인 양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 논리에서, 그 언어는 일상 언어와 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다.

2) 보편성과 수행성의 이해에 대해서도 박동천과 나는 달리 설명한다. "사람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윤리 규범은, 보편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규범 언어는 역시 수행성의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고, 그런 한에서, 보편성 주장이다. 박동천은 앞에서 "사과와 오렌지는 다른가?"라는 문장의 이해에서는 수행성을 살려 이 문장은 진술로서 구체적 상황에서 그 의미가 소통된다고 말했는데, 여기에서는 이 문장을 절대적 명제로, 축자적으로 기계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반증할 수 있는 사례를 말하고 있다.

또한 원시인의 식인 행위를 예로 내가 들었던 것을 두고 박동천은 논제의 회피라고 말한다. 논제의 회피란,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입장에 대해 이 주장 자체가 진리가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증이라고 맞받아 칠 때 사용하는 형식논리학적 수사법이다. 형식논리학 내에서의 수사법적 논박인데, 나는 형식논리학자는 아니다. 내가 비판 대상으로 삼는 것은, 주술적 사유이다. 왜 그것이 문제인가? 원시 사회의 식인 습속이 인류(Menschengattung)로서의 인간의 자기 정체성을 합리적으로 정초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종족 부족 이외의 다른 종족 인간을 그들이 잡아먹었던 동물들과 동질적 차원에 있다고 잘못 판단했기 때문이다.

동물 사냥에서 동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사유는 식인 습속의 논리를 설명해준다. 예를 들어 부시맨의 사냥과 의례를 보자. 사람과 동물은 이 사유에서 차이가 나지 않는다. 심지어는 동물에게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이 있다고 상상한다. 신화학자 캠벨은 <신화의 힘>에서 이렇게 보고한다.

"대초원 사냥꾼들이 짐승을 보는 시각은 하등하게 보는 오늘날의 우리 시각과 다릅니다. 오히려 이들에게 짐승은 적어도 동등한 존재, 때로는 상등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짐승에게는 사람에게는 없는 힘이 있지요. 가령 샤만은 자주 짐승의 영을 수호령으로 삼습니다. 이것은 샤만이 특정 짐승의 혼령을 자기 보호자, 혹은 스승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물론 식인 행위는 이런 종류의 예만 있는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가 <토템과 타부>에서 논술하고 있는 예는, 아버지의 권능을 아들들이 육화하기 위해서 아버지를 살해하고 그 피와 살을 마시고 먹는 의례에 관한 것이다. 원시 사회에서 식인 습속은 하나로 일치되어 있지 않지만, 주술적 사고라는 범주 안에 있다.

주술적 사유의 범주적 실수를 보여주는 사례는 이외에도 많다. 한 예만 더 들면, 쌍둥이 살해 사례이다. 사람은 한 명만 출산하고 동물이 다수를 출산한다고 생각했고, 살해가 의례와 함께 일어났다. 동물은 다수를 출산하고 인간은 한 명만 출산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그들은 사유했던 것이다. 이 예에서 우리는 왜 쌍둥이를 살해했는지를, 그 주술적 사유를 그들의 생활 형식을 이해함으로써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주술적 사유가 정당하다고 말해야 하는가? 오늘날 발전된 과학적인, 합리적인 사유는 쌍둥이, 나아가 다수 출산을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극단 상황의 실례를 들어서 진리의 보편성을 부정하려는 시도야말로 논제의 회피가 될 수도 있다. 박동천이 들었던 극단 상황 실례는, 보편성이 역사적 맥락 속에서 그 실체적 의미가 있다고 파악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는다면. 나는 이미 나의 반론에서 탈역사철학적 역사성을 주장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보편적 진리 주장이 역사적 맥락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박동천은 나의 사유에 대해 잘못 추론한다. 즉, 박동천은 "섹스, 음식 섭취, 수면" 등의 예를 말하면서 내가 본능으로 보아 생활 형식에서 핵심이 아니라고 아마도 치부할 것 같다고 추론하는데, 그렇지 않다. 식인 습속의 예가 음식 섭취의 한 예가 아닌가. 여기에서도 섹스, 음식 섭취, 수면과 생활 형식 사이의 관계로 이해해야 하지, '섹스라는 생활 형식'은 바른 표현이 아니다.

3) 박동천은 "해명" 논고에서, 두 범주를 교차하여 서로 다른 네 가지 유형을 그리고서는 나의 논리적 무지를 짚고, 가르치려 한다. "두 변수의 조합은 항상 네 가지 가능성을 낳는다"는 박동천의 주장은 형식논리상으로는 틀린 말이 아니지만 의미 있는 진술을 고려하는 구체적 역사적 경험맥락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네 가지가 아닐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 변수의 구별 기준에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경험 사례가 있을 수 있고, 두 변수의 교차(조합)에서도 경험상으로 발견되지 않는 범주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다. 첫째, 사실상의(de facto) 실재와 환영적, 환상적, 허구적 실재 모두 나는 실재의 종류로 이해한다. 용이 사실상으로 실재하는 동물의 하나가 아니지만 환영적 실재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 박동천이 들고 있는 네 가지 유형에 공통된 것은 모두 개별적 낱말(단어)에 조응하는 개념과 실재(지시대상) 사이의 관련성 여부에 관한 논리적 분석이다. 셋째, 내가 말하려는 것은 낱말과 실재 사이의 관계를 넘어서는 논술과 실재 이해에 관한 것이었다. (언어분석철학에서 논의되는 단칭 명사의 예를 논의해야 명명과 실재 사이의 관계조차 더 잘 조망되겠지만 더 이상 논의하지는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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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천이 제기한 한 이누이트 부족의 바다사자 사냥과 그 분배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첫째, 이누이트 족이 사냥할 때에도 그 사회와 관련하여 파악되어야 할 일종의 분업 체계가 있고, 그에 따라 잡은 고기를 배분할 때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가장 위험한 사냥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자에게 그들이 보기에 가장 소중한 부위의 고기를 할당하는 등 사냥과 분배의 규칙이 있다. (이 규칙을 위반할 때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도 섬세한 연구가 필요하다.) 이 규칙이 있는 한에서, 소유권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오늘날 사적 소유권 개념과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둘째, 소유권을 이해할 때 사적 소유권 이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소유권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국가 소유, 공동체 소유, 집단 소유도 있지만, 다양한 종류의 점유권과 전유권도 있다.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이누이트 족이 바다사자 사냥의 경우에는 그와 같이 사냥의 분업 시스템과 사냥물 배분 규칙을 적용하지만, 다른 경우에도 항상 그렇게 했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그 개별 사례에만 주목해서 주석해서는 안 된다. 곧, "소유권이라는 개념이 없는 사회에 대해 도둑질의 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이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진술했을 때 박동천은, 소유권이나 도둑질 논의에서 그 주체를 개인으로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셋째, 절도 행위를 논의하는 까닭은, 윤리적이거나 법적인 처벌 때문이다. 명시적인 법치 국가 형식을 갖추고 있는 현대적 생활 형식에서 절도 행위를 처벌하는 것과 완전히 동일하게 원시 사회에서 처벌하지는 않지만 절도 행위를 처벌하는 규범은 있다.

그리고 개념이 없다고 하는 말은, 해당하는 개별 낱말이 없다는 것과 동일하게 파악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요컨대, 이누이트 족의 원시 사회에서 도둑질이 없었다면, 그것은 그들의 윤리 의식이, 인륜성이 그곳에서 작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윤리 의식은 그 사회의 총체성, 예컨대 물적 조건들과 무관하게 처음부터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원시 사회의 총체성과 관련하여 윤리 의식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오늘의 관점에서 보자면, 원시 사회로 회귀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공상이다.

박동천이 "외생적 개념을 서술어로 사용하려면 해당 사회의 내면에 침투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을 때, 이른바 문화상대주의자들이 주장해온 바와 같이 원시 사회의 문화를 그 원시 사회의 "내적 논리"(internal logic)(내재적 논리로 번역할 수도 있다)에 의해 이해할 것을 요청한 것에 다가 서는 것 같다. 나는 원시 사회의 주술적 사유를 이해해야 하며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여기에서 나의 주장 요지는 개별 낱말에 조응하는 개념에 묶여 있을 때는 원시적 사유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워프는 자신의 책 <언어, 사고 그리고 실재>에서 "언어학적 상대성" 명제 논쟁을 촉발시켰는데, 그가 이전의 유럽인들과는 달리 워프가 호피 부족의 문법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들의 생활 형식과 그들의 말의 사용 사이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쟁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얘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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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박동천이 그가 사용해온 "보편적 이치"라는 표현을 두고 무엇을 염두에 두었는지 가장 명백하게 밝히는 곳은, 마르크스의 포이에르바흐 제11번 명제에 대한 해석을 끌어들이는 맥락이다. 우선, 박동천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그러나 여전히 서규환과 나 사이, 또는 서규환과 윈치 사이에는 상당히 심각한 견해 차이가 있다고 생각된다. "생활 형식의 창안"을 위한 "이론적 헌정"에 윈치가 소홀하다는 서규환의 비판을 나는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의 유명한 명제,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이런 저런 방식으로 해석만 했는데, 중요한 일은 바꾸는 것이다"와 같은 관점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8월 19일의 내 답변은 바로 그와 같은 발상이 왜 잘못인지를 밝히려는 시도였다. 그랬는데, 경솔한 표현으로 말미암아, 서규환으로 하여금 오히려 내가 그에게 마르크스식 비판을 가하는 것처럼 느끼도록 만들고야 말았다. 따라서 그때보다 훨씬 신중한 방식으로 내가 생각하는 바를 다시 개진해본다.

포이에르바흐에 대한 마르크스의 11번 명제는 해석과 변경을 대비하는 바탕 위에 서 있다. 이 대비에서 해석이란 현장에서 한발 물러난 제3자적 관찰자의 입장에서 행하는 일이고, 변경이란 현장에 뛰어 들어가 사태의 타개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구경꾼의 시각이 실존적 주체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중요한 진리에 관심을 환기한다는 점에서 이 대비 자체는 건강한 의의를 가진다. 극한 상황의 인간 행동에 대해 평시의 도덕률이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고 내가 위에 적은 말 역시, 실존적 선택의 상황과 제3자적 도덕 담론이 접촉점을 상실할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실존과 담론 사이, 다시 말해 삶과 앎 사이, 다시 말해 정치와 철학 사이에서 발생하기 쉬운 소외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마르크스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세심한 지성의 소유자였던 존 스튜어트 밀과 막스 베버조차도, 계몽주의라는 사조의 우산 아래서 인간 세계를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자연과학의 이론에 버금가는 사회과학, 정치경제과학, 정신과학의 이론이 정립되어야 하고, 그 이론에 따라서 세계를 변경하는 것이 역사의 진보라고 믿었다. 윈치는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실존의 차원과 관찰의 차원이 혼동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자연과학의 논리는 본질적으로 연구 대상의 내면성으로부터 초연한 제3자적 시각 위주로 구성된다. 반면에 인간 사회를 이해하려면 외부적 범주만으로는 안 되고, 반드시 해당 사회의 구성원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지를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이 차이는 이미 <사회과학의 빈곤>에서 집요하게 발굴해 들어가는 주제고, 나도 이미 여러 번 반복한 사항이다."

박동천은 마르크스의 11번 명제를 많은 학자들이 그렇듯이 오독했다. 그 오독 위에서 새로운 문제제기를 한 셈이다.

우선 원문을 읽어보자.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만해 왔다. 그런데 관건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독일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Die Philosophen haben die Welt nur verschieden interpretieren ; es kömmt darauf an, sie zu verändern."

우선 유명한 이 명제적 표현에 대해서 잘 읽어보자. 해석과 "해석"(원문의 이탤릭 체)은 그 의미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곧, 마르크스가 지금까지 "세계를 해석만 해왔다"고 진술했을 때, 존재론적으로 확정되어 있는 그 진리를 "해석하는" 데 지금까지의 철학이, 진리 이론이, 머물러 있다고 확인하고, 그것을 비판했다. 이것은, 해석 일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플라톤 이래의 다양한 형태의 형이상학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이었고, 진리 이론에 대한, 철학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포이에르바흐가 플라톤주의를 근본적으로 재생산하는 헤겔을 비판하고 있지만 여전히 헤겔의 사유 틀 내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다는 비판이었다. 마르크스는 "세계의 변화"를 말하면서 진리 이론의 패러다임 전환을 주장했다. 그것은 새로운 해석론, 새로운 변화론이었다.

이 오독을 일단 접어두고서, 박동천의 주장에 대해서 논의해 보자. 박동천이 "실존의 차원"과 "관찰의 차원"을 구분할 때, 이론적 헌정의 차원에서 관찰이 가능한가 아니면 참여, 박동천식으로 말해 실존의 차원에 있는가 하는 문제의식이 작동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적 헌정의 차원이다.

실천적 차원에서 내가 정치적인 참여 (혹은 사회적 참여)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물음은 이론적 헌정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참여 논의와 다른 것이다. 박동천은 여기에서도 구별되어야 할 맥락들을 뒤섞고 있다.

인간이 인식할 때 모든 종류의 주관성(주체성)이 완전히 배제된 채 오직 객관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서 현상학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답했던 것이다. 현상학에서 배웠던 하이데거의 실존 철학이 말하는 실존이라는 말은 인간의 인식이 박동천이 말하는 실존, 인간의 주관성(주체성)이 함께 참여하는 것임을 정초했다. 이제 존재 자체가 순수하지 않고 "세계 내 존재"(Sein in der Welt)이다.

나는 윈치가 이러한 입장과 강한 친화성을 가진다고 읽었고 나의 서평에서 이렇게 말했다.

"윈치는 피터 라즐렛을 비판하면서 과학철학 등과 인식론 및 형이상학 사이의 관계에 주목할 것을 요청한다. 바른 방법을 세우고 그 다음 그 방법을 가지고 분석할 수 있는 개별 대상들이 있는 양 사유하는 태도를 그는 비판한다. 이 비판은 그가 사회과학과 철학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는 데에도 해당한다. 사회과학과 철학이 각기 완전 분리된 채 별도로 있고, 그런 분리 상태에서, 사회과학이 철학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과학과 철학의 본질에 대해서 (그 당시) 새로운 의문을 던졌던 셈이다. 양자는 분리되지 않고 처음부터 결합되고 뒤섞인 채 발전한다."

그리고 자연과학조차도 온전히 순수히 "관찰의 차원"에서만 움직인다고 주장할 수 없다. 이에 대해서도 후설은 예컨대 <기하학의 기원>이라는 논고에서 주장한 바 있다. 또한 영국의 사회이론가 기든스가 "이중의 해석학"이라고 말했을 때 자연과학의 "참여" 차원을 파악할 수 있다.

6

1) 역사를 파악할 때 오늘의 관점에서 역사를 파악해야 한다. 앞에서 얘기했던 식으로 말하면 오늘의 관점에 "참여"의 맥락이 미리 작용하고 있고, 우리는 미래에 대한 규범적 기대를 하면서 과거의 경험들을 (재)서술해 나간다. 이러한 역사서술은 가치판단이 내재하고, 그런 한에서 규범적이다.

생활 형식들 사이의 질적 차이, 혹은 평가를 나는 주장하는 데에 대해서 박동천은 다음과 같이 반론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질적 우열이라는 개념의 일차적인 의미는 생활 형식 사이에서가 아니라 특정 생활 형식 내부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보인다. 가령 원예라는 생활 형식 또는 스포츠라는 생활 형식 안에서 더 나은 기술이나 성과를 운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질적 구분의 척도가 있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원예와 스포츠 사이에서 질적 우열을 가리겠다고 하면 이상해진다는 말이다. 스포츠라는 생활 형식 안에서도 가령 야구 선수들의 기량을 비교하는 것이 야구 선수와 수영 선수의 기량을 비교하는 것보다 말이 되며, 야구 선수 가운데서도 투수의 기량을 비교하는 것이 투수와 타자를 비교하는 것보다 말이 되며, 투수의 기량을 비교할 때에도 가령 평균 자책점이라든지 승수 등의 개별적 차원에서 비교하는 편이 평균 자책점보다 승수가 더 우월한 기준이라는 식으로 비교하는 것보다 말이 더 잘 된다."

(1) 박동천은 위 문단에서 매우 의미 있는 판단을 제시하고 있다. 곧 생활 형식들 사이가 아니라 특정 생활 형식 내부에서 질적 우열을 판단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 이 판단에 대해 나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 좋겠다. 나의 비판적 현대성 이론에 의하면, 현대적 인간은 유적존재(Menschengattung)로 파악된다. 다시 말해, "현대성" 속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차이를 분명하게 통찰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은 모든 독단을 비판하는 비판적 현대성의 사유 때문이다. 민주주의적 법치 국가에서는 인간의 기본권들을 규정하고 있다. 성, 종교, 계급, 사상, 종족 등등에서 발견되는 차이가 있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차별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특별한 종족이 원래부터 우월하다거나 반대로 특정한 종족이 인종적으로 열등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종족중심주의를 넘어서는 인간의 보편성을 주장한다.

나는 인류 전체라는 범주에서 생활 형식론을 주장한다. 그런데 오해를 피하기 위해 미리 말해 두지만, 어느 하나의 특정 생활 형식이 다른 그것들에 비해 원래부터 우월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나는 문화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 명제가 어떠한 실천적이고 이론적인 맥락에서 주장되었는지 잘 알고 있다. 또 그런 학문사적 배경을 시사한 바 있는데, 여기에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그 배경을 잠시 회고해 보아도 좋을 것 같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이른바 종족중심주의(enthnocentrism)를 비판하는 문화상대주의 명제를 말한다.

문화인류학자들 가운데 문화상대주의를 주장하는 학자가 많았던 근거가 있었다. 종족중심주의의 편견에 그들은 주목했던 것이다. 종속중심주의는 자신의 사회의 문화적인 관습과 가정이 '표준적'이며, 나아가 가장 훌륭하다고 판단하는 믿음이다. 물론 이 믿음에는 자신의 문화적 관습이나 가정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철저하게 가하지 않았던 오류가 있었다. 이 종족중심주의는 다른 문화들의 관행들과 믿음 형태들을 일탈적이며 비인간적인 것으로 판단하고서 '야만적인 것'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제국주의시대에 접어들면서 이 종족중심주의는 자신과 다른 문화들을 부정하고, 다른 문화들이 그들 자신의 고유의 믿음과 관행 형태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제국주의적 권력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 권력과 지배의 행사는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였다. 포스트식민주의 시대에서도 종족중심주의의 편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지배적인 종족적인 또는 종교적인 문화 권력이 소수 민족 문화들을 전향시키려는 의식적인 무의식적인 시도가 일어나고 있다. "문명화"의 이름으로 말이다.

문화상대주의 명제는, 이러한 종족중심주의에 대항하여, 어떠한 문화나 사회 조직도 다른 문화나 사회 조직보다 우월하지 않다는 주장을 피력했다. 이 문화상대주의 명제는 각각의 문화를 내부에서 이해하려는 겸손한 이해의 태도를 가지고 있다. 특정 사회들과 그 사회들의 문화적인 사유를 이해할 때 이른바 내부적 논리(internal logic), 그 사회에 내재하는 논리를 부각시킨다. (이 문화상대주의 명제에 대해서 그동안 다양한 비판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문화상대주의자 내에서도 강한 문화상대주의에서 약한 문화상대주의로 이동하는 모습도 보였다.)

나는 서평에서 원치가 문화를 파악할 때 권력과 지배의 관계를 이론화하지 못하여 문제가 있다고 비판했다. 문화의 가치와 믿음은 온전히 자율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구조와 관련되어 그것들을 정당화한다. 그것은 진화 과정과 때로는 혁신 과정을 거친다. 문화 변동은 경제적, 정치적 변화와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박동천의 반론에 대해 반론하는 논고에서 외국어를 배울 수 있으며 번역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나의 책 <열린 총체성의 해석과 정치>(다인아트)에서 논술했듯이 언어의 보편성을 다르게 표현한 것에 다름 아니다.

내가 "열린 총체성"이라 부르고 그 이론화를 시도해온 것은, 생활 형식들 사이의 공존을 이론화하려는 기획인데, 그 공존은 있는 그대로의 생활 형식들 그 자체로 정당하다고 소박하게 믿는 태도와는 거리가 매우 멀다. 내가 비판적 합리성을 강조하는 이론적 실천적 맥락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의 생활 형식론은 일차적으로 언어의 "문법", 언어 본질의 근본적 이해와 관련되어 철학적으로 논의되었다.

문화상대주의 명제는 한 문화권 내에서 문화 변동도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 못한다. 한국의 경우, 기독교 문화가 수용되기 이전으로 이를테면 샤머니즘으로 회귀해야 한다는 주장을 피력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현대 한국 사회에 남아 있는 샤머니즘은 한국 문화의 원형으로서 앞으로도 지켜가야 한다고 논술하려는 것인가? 그리고, 문화는 고립된 채 있는 것이 아니라 총체성과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변동한다.

이 맥락에서 박동천이 예로 설명하고 있는 "원예라는 생활 형식", "스포츠라는 생활 형식"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정당하게 표현하자면, 원예와 생활 형식, 스포츠와 생활 형식 등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박동천이 바르게 주장하고 있듯이 동일 범주 아래에 있는 것들을 비교, 평가할 수 있다. (비교, 평가는 가치판단에 속한다. 주술적 사유에 비해서 비판적 현대성의 사유가 더 합리적이라고 말할 때 가치판단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원예와 스포츠가 사회의 총체성과 절대적으로 분리시켜 놓고서는 서로 다른 범주의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예컨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한정된 시간을 원예, 스포츠 가운데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 틀을 도외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사람들이 어떠한 물적 조건 아래 있는가에 따라 원예, 스포츠 가운데 선택할 수 있는 판단을 할 수 있다. 오늘날 생활 형식을 국가적으로, 범지구적으로 어떻게 결정하는가에 따라 사람들이 이를테면 원예, 스포츠를 선택하는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원예와 스포츠는 완전히 별도의 것이라 판단할 수는 없다.

2)

(1) 박동천은 원시적 삶의 형태와 현대적 삶의 형태를 총체적으로 비교할 때 질적 차이를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 예증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을 들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박동천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살해된 자의 숫자가 원시적 고대의 어느 원시 부족 사회에서 살해된 그것에 비해서 단순 계산하여 더 많았다는 논거를 제시한다. 나는 이와 달리 생각한다. 물론, 이 사실을 논거로 하여 현대성이 원시성과 비교해서 질적으로 더 저급하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첫째, 그 원시적 삶의 공간이 현대적 삶의 공간과 비교해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좁은 조건 하에서, 그들은 타 민족(들)을 살해했던 것이다. 둘째, 원시적 부족은 현대인들과 비교해서, 그 직접적인 간접적인 경험이 매우 적었다는 점에서, 성찰의 기회가 적었다. 생활 영역이 상대적으로 좁았다. 셋째, 나는 사유에 대해서 말하는데, 박동천은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말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사회사에 대해서 그동안 많은 연구들이 있었다. 히틀러의 전체주의가 그 발발 원인이었다. 경제사적 연구의 논거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유를 얘기하는 맥락이어서 파시즘의 전체주의를 가능케 하는 사유를 거론하고자 할 뿐이다.

(2) 우리는 주술적 사유와 현대적 사유를 비교, 평가하는 여기에서 사상의 맥락에서 전체주의 문제를 다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원시적 사회의 서사가 전체주의적임을 지적할 수 있다. 원시적 사회에서는 서사는 너무도 정합적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이 정합성은 서사가 전달되는 방식에 따라 더욱 강화되어서 그 서사 구조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얘기는 거의 차단된다. 원시적 사회는 닫힌 총체성의 문화 속에 있다. 닫힌 동일화는 절대적이며 정체성은 닫힌 구조 안에서만 확인된다. 닫힌 서사 구조 밖으로 벗어나는 해방되는 길은 없다. 프랑스 탈현대주의자 리오타르는 원시인인 카시나와 인들은, 어떤 이야기(신화, 동화, 전설, 혹은 전통적 이야기)를 할 때 항상 도식적 형식으로 시작하여, 변함없이 정해진 도식에 따라 끝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리오타르가 정확하게 짚었듯이 원시적 사회의 서사 구조, 서사 배열 장치와 리오타르가 해체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계몽주의적 현대성이 차이가 없지는 않다. 지배를 정당화하는 거대서사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후자는 칸트적 의미에서 세계주의적인 것이다. 이 현대성에서 거대 이야기는 개별적 문화 동일성에서 보편적 시민 동일성으로 '넘어가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이런 넘어감이 어떻게 가능하지에 대한 문제는 불투명하게 남아 있다.

한편, 원시 사회 속에는 자신의 원시 사회를 '시민 사회'로 지양시킬 수 있는 그 어떤 대안적인 것의, 이질적인 것의 허용도 있지 않다. 리오타르가 <지식인의 종언>에서 지적하듯이, 계몽주의적 "현대성"의 거대 담화는 원시적 닫힌 문화를 세계주의적으로 재생산할 뿐이다. 구조적 문화인류학에서 후기구조주의로 넘어가는 학문사에 정통한 자라면 그가 무엇을 겨냥하는지를 벌써 간파했을 것이다. 원시적 사회를 분석했던 레비-스트로스이다. 리오타르는 레비-스트로스를 해체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인류학자는 원시인들의 서사와 그 규칙들을 묘사한다. 이때 그 자신은 원시인들의 서사 규칙과 이에 고유한 담론 양식 간에 연속성을 상정함이 없이 인지적 장르의 규칙들에 따라 묘사한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적인 설명에서는 인류학자는 신화와 이것의 해명 사이에 기능적인 다시 말해 구조적인 동일성을 상정할 수 있지만, 그 대가로 이들 중의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의 지적 이행을 발견하려는 시도는 좌절되고 만다. 동일성만 있을 뿐,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혹시 내가 리오타르를 이론적으로 추종하는 것으로 오해할지 모르겠다. 오해를 미리 피하기 위해 밝히자면, 나는 보편사 일반사를 부정하는 리오타르를 비판해 왔다. 다양한 보편사들이 가능하다. 문제는 그것들 사이에 확정적인 모순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원시적 사회는 범시간성(초시간성)을 보장하고 공간은 유한하다고 보장한다. 그것은 왜 역사적 변동이 일어나기 어려웠는지를 설명해 준다. 이 범시간성을 보장해 주는 작용은 다음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그 수가 한정되어 있고, 시간에 의존하지 않는 체계에 따라 개인들에게 분배되어 있는 이름들의 불변성이다. 다른 하나는 이야기 방식에서 세 가지 서사적 심급들, 즉 이야기하는 사람, 이야기를 듣는 사람 그리고 주인공 내에서 이름이 붙여진 개인들이 자리를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리오타르는 이런 언어적 장치는 우리의 첫 번째 통치 형식, 즉 칸트가 전제적이라고 부른 체제에 대한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규범적 기능의 정당화에 대한 예증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해석했다. 리오타르를 더 들어볼 가치가 있다.

"명사들, 혹은 크립케(Kripke)가 말하듯이 '엄격한 지시자들'(désignateurs rigides)은 문화적 세계와 다름 아닌 이름세계(monde de noms)를 규정한다. 이 세계는 유한하다. 여기서 사용 가능한 명사의 수는 유한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옛날부터 항상 그런 세계였다. 인간 각자는 다른 이름들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어떤 이름을 갖고 이 세계 속에 자리하고 있다."

카시나와 인은 스스로 자신을 '참된 인간'이라고 부르는 한편, 자연의 사건이든 인간의 사건이든, 자신의 전통에 벗어나는 것이면 모두 참된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그런 것들은 허가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참된" 것이 아니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카시나와 종족은 자신의 서사를 전달함으로써 법을 제정하며, 서사를 행함으로써(명사들이 모든 종류의 의무를 야기하기 때문에) 집행권을 행사한다. 이런 서사적 실천은 다음 아니라 정치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정치는 서사에 의해 확립된 삶의 총체성 속에 갇혀 있다. 그런 한에서 그것은 일종의 전체주의적 정치이다.

3) 우리는 원시적 사회의 원시적 사유, 주술적 사유를 비판해야 한다. 주술적 사유는 오늘날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공적 공간에서 공적 이성의 공간보다는 사적 공간에서 여전히 주술적 사유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7

박동천은 내가 규범은 인간의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제약적 조건이라고 진술하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윈치를 읽었던 그가 왜 이렇게 말할까, 한참 생각했다.

규범은 인간들 사이의 행위 이론적 조건으로서, 인간의 자유의 조건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구조론자와 행위론자 사이의 논쟁을 말하자. 이 논쟁에서 기든스는 구조는 인간의 행위를 가능케 하는 조건이라고 논술했다. 요점은 여기에서 규범의 차원에서는 구조는 확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조화 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규범의 인식론적 의의는 다음 아니라 윈치가 1990년 제2판 서문에서 자기비판을 개진했을 때 어느 정도 시사되어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Philosophische Untersuchungen)>, 제81문단과 제82문단에서 논리학이 일종의 규범적 학문(eine normative Wissenschaft)이라는 램지의 말을 회고하고서 언어와 놀이 사이의 비유(Analogie)를 진술했는데, 이 진술에 대하여 윈치는 뒤늦게 1990년의 그 자기비판적 서문에서 다시 주목하고 있다. 윈치의 말을 들어보자.

"#81. 램지는 언젠가 나와의 대화에서, 논리학은 일종의 '규범적 학문'이라고 강조했다. 그 때 그에게 어떤 생각이 그렇게 말하도록 했는지 정확하게는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 나중에서야 비로소 떠오른 생각, 즉 철학에서 종종 우리는 낱말들의 사용을 확정적 규칙들에 따르는 놀이들, 계산들과 비교하지만,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그러한 놀이를 놀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생각과 의심할 바 없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 그러나 이제 만일 우리가, 우리의 언어적 표현은 그러한 계산들에 단지 근접해 갈 뿐이라고 말한다면, 이로써 우리는 곧 어떤 오해 직전에 있다. 왜냐하면 마치 우리는 논리학에서 어떤 하나의 이상적 언어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듯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의 논리학은 말하자면 진공을 위한 논리학인 듯이. 하지만 논리학은 자연과학이 자연현상을 다루는 것과 같은 뜻에서 언어-및 사유-를 다루지는 않으며,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우리는 이상적 언어들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상적'이라는 낱말은 오해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치 이러한 언어들이 우리의 일상 언어보다 더 낫고 더 완전하다는 듯한 소리로 들리며, 또 마치 올바른 문장이란 어떻게 보이는 것인지를 사람들에게 최종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논리학자가 필요하다는 듯한 소리로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이해한다, 뜻한다, 생각한다라는 개념들에 관해서 더 큰 명료성을 획득했을 때에야 비로소 올바른 빛 속에서 드러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때는 또한, 어떤 하나의 문장을 발언하고 그것을 뜻하거나 이해하는 사람은 정해진 규칙들에 따라서 어떤 하나의 계산을 행하고 있다고 생각하도록 우리를 미혹할 수 있는 (그리고 나를 미혹한 바 있는) 것이 무엇인가도 분명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Wittgenstein, Philosophische Untersuchungen, Sukrkamp, #81, #82, 그리고 영어판,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Basil Blackwell Oxford, 1978 3rd edtition, translated by G.E.M.Anscombe,를 참조하여, 비트겐슈타인, 이영철역, <철학적 탐구>, 서광사, 1994. 번역을 수정했다.)

윈치가 이렇게 이 문단들에 주목했어야 했다고 1990년 제2판 서문에서 자기비판을 고백한 이론적 맥락에 주목해야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 생활에 있어서 사고가 적용될 수 있는 여러 양상들이 모두 동일한 평면 위에 자리 잡고 있다고 보는 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과학과 도덕을 마치 서로 대등한" 활동의 형식으로 말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과학과 종교에 관해서도 비슷한 점이 지적될 수 있다는 것이다. 동일한 방식은 아니지만.

셋째, "서로 다른 사회생활의 양식 사이에 각 특성들이 중첩"될 수 있다고 말했지만 "그것으로는 사회생활의 여러 양식들이 각기 나름대로 자율적이라는 시사에 맞서 균형을 이루기에는 불충분하다. 사회생활의 여러 양상들이 단순히 '중첩'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들은 상호 간에 내면적으로 연관되어 있어서 그 중 하나가 나머지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으로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경우가 자주 있다." 윈치가의 이 자기비판은 충분하게 개진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종교에 대한 인간의 사유와 과학에 대한 인간의 사유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통찰에 이른 것이 아닌가 싶다.

박동천은 윈치의 이 자기비판의 논지를 통찰하고 있지 못하고 있고, 자신이 이해하는 식의 "1958년"의 그 윈치 품안에 있으려 하는 것 같다.

8

나는 생활 형식의 합리성을 말할 때 고정된 하나의 (종족중심주의적) 표준을 확정짓고 있지는 않다. 내가 '열린 총체성'이라 명명하고 그 이론을 주장하는 논거의 하나도 사실 어느 하나의 표준을 확정짓고서 이 표준으로 환원시키려는 사유를 비판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생활 형식의 총체성을 합리성을 헌정하는 어느 개별적인 요소나 측면(이를테면 객관적 세계의 객관성)을 기준으로 삼아 판단하면 분명 문제가 될 수 있다. 객관적 세계, 주관적 세계, 사회적 세계 사이의 "기우뚱한 균형"(아도르노)의 조화로운 합주가 필요하다.

윈치(적어도 1990년 자기비판 이전의)는 일종의 문화주의적 편향에 갇혀 있다. 객관적 세계, 곧 인간이 대상을 인지하는 차원과 사회적 세계, 곧 인간들 사이의 관계의 차원이 상대적으로 제한되고, 오직 주관적 세계만이 강하게 재생산되는 원시적 사유를 각 문화의 고유한 문화를 변동 불가능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문화주의의 논리로 변론한다.

총체성들 사이의 비교, 평가해야 하고, 각 세계 내에서의 가치 평가는 사회의 총체성 이해에 도움을 주지만 그 자체로 온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각 세계의 맥락에서 주술적 세계와 현대적 세계를 비교,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배제할 수는 없다. 이를테면 객관적 세계에서 인간의 인지적 활동은 두 세계에서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둘째, 1990년 제2판 서문에서 윈치가 불확실하게 시사했듯이, 이들 각 세계가 중첩되고 있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원시적 사회에서 식인 습속은 원시적 사회의 주술적 사유의 총체성과 무관하지 않다. 생산력의 발전, 민주주의적 법치 국가, 문화적 다원성과 그 관용 등의 관점에서 비교, 판단할 수 있고, 그것들 사이와 그것의 종합과 관련한 총체성의 판단이 있어야 한다. 셋째, 인간 삶의 경험들에서 비판적 현대성의 사유가 원시적 삶에서 배울 지혜가 있다면 배울 수는 있는데, 여기에서 배운다는 것의 의미는 그것을 단순하게 모방한다는 것은 아니다. 학습 개념은 비트겐슈타인이 "규칙을 따르기" 론에서 얘기했던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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