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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덫에 갇힌 슬픈 짐승" 스파르타쿠스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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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덫에 갇힌 슬픈 짐승" 스파르타쿠스의 진실

[철학자의 서재] 베리 스트라우스의 <스파르타쿠스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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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주 영화와 역사 그리고 건축 사이의 유사성에 대해 언급해 왔다. 이 세 가지는 언뜻 보면 서로 무척 다르지만 딱 한 가지 점에서는 공통된다. 영화 미학의 개념을 차용하자면, 이것들은 모두 주관적 시선을 담고 있다고 보겠다.

영화는 사건을 객관적 시점이 아니라 주관적 시점에서 묘사할 수 있다. 영화가 등장인물의 시선으로 사건을 보여줄 때 관객은 등장인물과 자기를 동일시하면서 사건을 직접 체험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건축도 마찬가지다. 건축은 결코 멀리서 관찰되는 대상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건축 속에 들어가서 건축을 에워싸고 있는 환경을 바라볼 수 있다. 그 순간 우리는 조금 전에 자신이 서있던 곳을 바라보면서 마치 나 자신을 거꾸로 바라보는 듯한 감정을 느낀다.

그렇다면 역사는 어떤가? 많은 역사책은 교과서적이다. 그런 책은 현재의 시점에서 그리고 일반적인 사람의 관점에서 역사적 사건을 돌아본다. 이런 교과서적 역사는 역사 속에서 현재에 대한 교훈을 찾으려는 입장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최근의 많은 역사책은 이런 교과서와 구분된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너무나도 널리 알려진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한길사 펴냄)를 들 수 있겠다.

이런 역사책은 역사를 과거의 시점에서 그리고 그때 그 사건을 경험했던 인물을 통해서 생생하게 경험하게 하려고 시도한다. 이런 역사책은 독자가 역사를 통해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 기여한다. 이런 생생한 역사책들을 놓고 볼 때 역사가 영화나 건축과 마찬가지로 주관적 시선을 담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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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파르타쿠스 전쟁>(배리 스트라우스 지음, 최파일 옮김, 글항아리 펴냄). ⓒ글항아리
<스파르타쿠스 전쟁>(최파일 옮김, 글항아리 펴냄)은 바로 이처럼 주관적 시선을 담고 있는 생생한 역사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미국 코넬 대학교 교수 배리 스트라우스다. 그는 이 책 외에도 <살라미스 해전>, <트로이 전쟁>과 같은 책을 지었다고 한다. 역사학계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이 책에 소개된 저자의 약력을 가지고서는 그저 아, 미국의 일류 대학 교수네, 주로 고대의 전쟁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정도밖에는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 책 <스파르타쿠스 전쟁>을 읽다 보면, 학자로서 스트라우스의 성품이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는 냉정하게 느껴질 정도로 밝혀진 사실만을 언급한다. 그는 문학, 예술과 같은 다양한 기록은 물론이거니와 최근의 고고학적인 증거를 충분히 끌어 모은다. 그런데 기원전 73년 로마에서 일어난 사건, 그것도 지배자의 역사에서 본다면 그저 주변적인 사건에 지나지 않는 노예 반란에 관한 증거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

스트라우스는 이 정말 제한된 증거들을 가지고 독자들을 역사 속으로 끌어 들인다. 그는 말을 가능한 한 아끼면서 당시의 상황을 직접 느낄 수 있도록 복원한다. 그는 독자들이 전대미문의 노예 반란을 이끌었던 스파르타쿠스가 그 당시에 어떤 상황에 처했고 또 무엇을 느꼈으며, 어떻게 고민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렇다고 그는 흔히 성급한 역사가들이 그렇듯이 어떤 윤리적 판단이나 전술적인 평가에 빠지지 않는다. 그는 지극히 담담하게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스파르타쿠스의 복수와 좌절에 대하여 정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어떤 신경 강박증에서 느껴지는 듯한 쾌감과 죄책감이 뒤섞인 기묘한 감정이었다. 냉정하고 담담한 역사적 서술이 독자에게 이런 감정을 줄 수 있다니! 정말 놀라운 역사책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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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다 읽은 다음 당장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찾아 스파르타쿠스와 관련된 부분을 다시 읽었다. 그야말로 내가 만난 최초의 경이로운 역사가가 아니었던가?

스트라우스의 <스파르타쿠스 전쟁>을 읽었을 때 과거의 역사를 독자 앞에 생생하게 복원해주는 역사 서술 방식이 시오노와 너무나도 흡사해서 혹 그녀가 지은 것을 스트라우스가 영어로 번역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을 정도였다. 그러기에 나는 두 사람의 서술을 당장 비교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시오노는 스파르타쿠스에 관해 약 한 쪽 정도로 가볍게 묘사하고 지나쳤다. 그녀의 서술은 마치 백과사전의 인물 란에서 발견되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더구나 그녀는 스파르타쿠스의 노예 반란이 로마사에 미치는 영향은 전혀 없는 것처럼 단정하는 듯하다. 시오노의 그 냉담함 아니 차라리 무관심은 오히려 작가 자신에 의해 의도된 듯하게 느껴졌다.

물론 <로마인 이야기>가 로마사의 통사이므로, 사건을 다루는 비중이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너무 심하지 않을까? 특히 술라에 관한 서술과 비교해 보면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술라는 누구인가? 자신의 조국 로마를 향하여 최초로 군대를 진군시킨 쿠데타의 주역, 로마 공화정을 개혁하려던 민중파의 시도를 무산시키고 귀족 지배 체제를 확립시킨 독재관이 아니었던가? 이 부분에 대한 시오노의 장황한 서술, 지저분한 변명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필요했던 것일까?

결국 스파르타쿠스에 대한 그녀의 역사 서술은 귀족 체제를 지향하는 보수주의자 시오노의 관점이 역설적으로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시오노의 서술에 역겨움을 느낀 나는 차라리 영국의 탁월한 영화 감독 스탠리 큐브릭이 만든 영화 <스파르타쿠스>를 보면 어떨까 싶었다. 스파르타쿠스의 자유에 대한 갈망과 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이 영화 전체에 흘러 넘쳤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영화는 역사적 사실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영화 속의 스파르타쿠스는 근대 혁명가의 이미지를 너무 닮았다. 자주 TV 드라마에서 보듯이 실제 역사가 아닌 상상에 바탕을 둔 역사 드라마는 박진감을 주기는 하지만, 현재를 넘어서 실재에 접근하려는 치열한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무의식적인 실재에 대한 접근 없이 최면술로 심리적 상흔을 처리하려는 심리요법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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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이런 저런 비교를 통해서 비로소 스트라우스의 역사 서술이 왜 그토록 내 가슴을 미어지도록 만들었는지가 어렴풋이 짐작되었다. 이제 스트라우스가 그려낸 스파르타쿠스의 형상을 살펴보자.

'독 안에 든 쥐'라는 속담이 있다. 의미는 다들 잘 알 것이다. 그런데 만일 역사라는 것이 그런 덫이라면 어떻게 될까? 내가 느끼기에 스트라우스가 그려낸 스파르타쿠스는 바로 고대 세계라는 역사의 덫에 사로잡혀 울부짖는 짐승이라는 이미지였다.

군사적인 역량만을 가지고 본다면, 한낱 트라키아 출신 검투사 노예인 스파르타쿠스는 로마의 대장군에 결코 미치지 못했다. 그는 기원전 73년 봄 검투사 양성소를 탈출했다. 그 이후 그는 그를 추격하는 두 명의 프라이토르(법무관)를 격파했으며 이어서 파견된 두 명의 콘술(집정관)을 양면에서 상대하면서 궁지로 몰아넣었다.

그는 갈리아 속주 총독(전 집정관)의 군단을 돌파했다. 최후로 그는 로마가 파견한 독재관(프로콘술 임페리움) 크라수스를 맞아 싸웠다. 그를 바다로 쓸어 넣으려는 크라수스와 그는 맞섰다. 기원전 71년 봄, 돌연 크라수스를 향하여 정면에서 최후의 돌격을 감행하기까지 그는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이렇게 탁월한 군사적 능력을 지녔음에도 그에게는 길이 없었다. 탈출한 그에게 두 가지 길이 있었다. 아마도 그가 가장 원했던 길은 알프스를 넘거나 시실리 섬을 통해 아프리카로 탈출하는 길이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의 동지인 크릭수스가 고집한 대로 유격전을 벌이다가 마침내 로마를 향해 진군하는 길이었다.

우선 탈출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것은 알프스가 웅장하거나 메시나 해협이 깊기 때문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 너머의 세계에서조차 도망 노예인 그가 안식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결국 그는 알프스와 메시나 해협 앞에서 다시 뒤로 돌아섰다.

그렇다면 로마 진군은 가능했을까? 그가 탈출하자 수많은 도망 노예들이 그의 반란에 가담했다. 처음 검투사 74명과 한 명의 여인으로 이루어졌던 집단은 곧바로 수만 명(기원전 72년 말에는 6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에 이르는 대부대로 성장했다. 당시 로마의 인구 가운데 노예가 20퍼센트였고, 그 숫자는 100~150만 명이었다 하니 충분한 예비 부대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부대로도 로마를 이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로마의 시민이 노예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이미 고대 로마의 시민 공화국 체제는 무너졌다. 공화국의 주축인 자유 시민(자영농)은 대부분 몰락하여 노예와 다름없는 처지에 떨어졌다. 일부는 채무 노예가 되었지만 대다수 몰락 시민들은 다른 길을 택했다. 그들은 병사가 되었다. 그들은 전리품을 통해서 살아갔고 은퇴해서는 로마가 건설한 식민지에 토지를 얻었다. 결국 그들은 장군의 사병이 되어서 로마의 공화국 체제를 유린했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으로부터 머지않아 로마 제국이 세워지는 과정을 본다면 로마 시민이 전락하는 모습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로마 시민은 반란을 일으킨 노예들을 외면했다. 그러니 노예만으로 일으킨 반란으로 무엇이 가능했던 것인가? 스파르타쿠스의 로마 진군은 유혈이 낭자한 복수일 수 있었으나, 그 이상은 아니었다.

길은 없었다. 스파르타쿠스를 중심으로 고대 노예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묶고 있는 차꼬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더구나 그들은 이 차꼬를 어떻게 벗어던질 수 있는지는 더더욱 몰랐다. 그들은 심지어 '노예 해방'이라는 구호조차 외칠 줄을 몰랐던 것이다. 그들은 다만 이탈리아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짐승같이 싸우고 또 싸울 뿐이었다. 역사라는 덫 안에 든 짐승의 절망적인 거친 숨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마침내 스파르타쿠스는 자신이 타고 있던 말을 베고, 그를 추적한 크라수스를 향해 최후의 돌격을 감행한다. 로마군이 던진 창이 그의 무릎을 관통했으나 그는 결코 무릎을 굽히지 않았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크라수스는 그의 시체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크라수스는 잔존한 반란군 6000여 명을 십자가에 매달았으나 스파르타쿠스를 매달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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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우스는 스파르타쿠스의 아내로 보이는 여인에 주목한다. 그녀는 스파르타쿠스와 마찬가지로 트라키아의 여인이었다.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그녀는 디오니소스 무녀로 보인다. 트라키아 여인은 스파르타쿠스를 신이 점지한 사내로 예언했다고 한다. 스파르타쿠스가 주로 활동한 무대는 남부 이탈리아의 산악 지대였는데 이곳은 대규모 농장이 많아 무장한 목축 노예들이 많았고, 또 디오니소스 신앙이 널리 퍼진 곳이라 한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에 디오니소스 신앙이 개입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스파르타쿠스와 디오니소스 신앙의 관계는 또 하나의 종교를 상기시킨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실패로 돌아간 뒤 고대 세계에 찾아온 것이 바로 기독교이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자기의식' 장에서 노예가 노동을 통해 자기의식을 찾았으나 현실에서 실현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자 노예는 불행한 의식에 빠지고 그것이 기독교의 기원이라 말한다.

자유를 찾으려던 노예들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기억은 남아있다. 그 역사적 기억은 인류 역사의 트라우마이다. 그러기에 그 기억은 항상 되풀이 돌아온다. 반란의 쾌감과 좌절의 죄책감이 그 기억을 둘러싸고 있다. 저 멀리 부산 한진중공업의 크레인 위에서 또 한 명의 스파르타쿠스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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