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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 '생각'에 대해 생각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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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이론, '생각'에 대해 생각하는 것

[나는 반론한다] 박동천에게 답한다

'프레시안 books'의 청탁에 따라 박동천이 번역한 피터 윈치의 <사회과학의 빈곤>(모티브북 펴냄)에 대해 서평 논고를 탈고하여 보냈다. 내가 원래 붙인 제목은 "다시 읽는 사회연구의 문제작"이었는데, "현대인은 과연 원시인보다 더 합리적인가?"라는 현재의 제목이 붙었다. 잘못된 제목이었다. 박동천은 반론을 집필하면서 그 서평의 이 제목과 본문 사이의 불일치에 약간은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이 제목에 빗대어 말하여, 나의 주장은 하나의 현대인 유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유형이 있으며 그 가운데 모든 금기를 비판하는 "비판적 현대성"의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유형은 분명 원시인보다 더 합리적이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의 비판적 현대성 이론이 무엇인지 자세하게 다시 반복할 수는 없다.

짧게 핵심을 밝히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데카르트의 고독한 주체도 주체 없는 구조적 과정도 진리헌정의 출발점이 될 수 없고, 서로 대화하는 주체들의 대화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명제, 둘째 순수한 시원(arche)과 궁극적 목적(telos) 사이의 단선적 연속성을 가정하는 이른바 역사 철학을 비판하면서도 인간은 역사적 존재임을 주장하는 명제 그리고 하나의 진리가 있으며 이를 본체로 설정하고 그것으로 환원시키려는 모든 환원주의의 닫힌 총체성을 부정하고, 급진적으로 이질적인 단편성들(양상이든, 시스템이든, 양식이든 간에)의 절대적 자율성을 가정하는 것도 비판하고, 진리의 개방성을 인정하는, 내가 열린 총체성이라 부르는 명제를 여러 논고들을 통해 주장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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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과학의 빈곤>(피터 윈치 지음, 박동천 옮김, 모티브북 펴냄). ⓒ모티브북

박동천과 나 사이의 논쟁이 본격화되는 듯하다. 다시 말하여, 윈치의 이 책에 대한 이해보다는 박동천과 나 사이에서 논쟁의 불이 일어나고 있다. 박동천은 그가 번역한 윈치의 저술에 대한 나의 서평을 읽고서 매우 포괄적인 반론을 예고하는 가운데 내가 주장하는 이론적 헌정이라는 언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반론한다.

"이론적 헌정(憲政)이라는 문구는 정치 사회의 조직 원리, 즉 정치 사회 구성원들의 행태를 규율하는 기본적인 규범을 가리키는 헌법 또는 헌정이라는 개념을 담론의 영역에 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응용과 관련해서 누구나 받아들여야 할 진리 두 가지를 적시하고 싶다. 첫째는 정치 사회 구성원들의 행태 전반을 규율하는 규범이든 이론의 영역만을 다스리는 규범이든 간에, 규범이 작동함으로써 빚어지는 결과는 일률적인 복종이 아니라 규범에 따른 행동과 규범에 어긋나는 행동 사이의 구분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둘째는 정치 사회를 규율하는 헌정은 유사시 일탈 행위를 강제로라도 제재한다는 의미를 필수적으로 포함하는 반면에, 이론적 헌정의 경우에는 강제가 가해지는 순간 그것을 굳이 이론적 헌정이라고 분별해서 불러야 할 모든 이유가 사라져 버린다는 점이다."

1) 나의 "이론적 헌정" 개념 혹은 주장은 일차적으로 헌법론의 그 "헌법"(Verfassung, constitution)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이론"에 대해서도 박동천은 강하게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데, 우선 여기에서 헌정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해명해야 할 것 같다.

(1) "Constitution"은 후설 이래 현상학에서 사용하는 학술어이다. 한국 현상학계에서는 대개는 구성으로 번역한다. 구성이라는 번역어를 택하지 않았던 까닭은, 무엇보다 일차적으로는, 그것이 "construction"을 구성이라 번역하는 범례와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구성(construction)은, 인간의 주관성을 중심으로 사유하는 언어로서, 때로는 주관성이 원칙에서 파생하는 차원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입장에서는 헌정(constitution)과는 다른 개념으로 이해된다. 후설의 현상학에서는 이른바 지향성 개념이 핵심적인 한에서, "constitution"을 구성으로 그동안 번역해왔던 것 같다.

(2) 또한 수사법적 이유도 있었다. 헌정이라는 언어를 택했던 까닭은, "constitution"을 헌정이라 번역해온 용례를 은유적으로 내가 사용해 보려는 의도를 담고 있는 때문이었다. 민주주의적 법치국가라는 이념이 내가 주장하는 "비판적 현대성"의 한 요소인 한에서, 현대적 구체적 법의 이념으로서 "헌정"이 행위의 판단의 척도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3) 그리고 헌정이라는 말은, 구성이라는 말처럼 "헌정하다"라는 동사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리는 헌정하는 것과 헌정되는 것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 속에 있다고 나는 주장한다.

2) 그렇지만, 그가 말하는 헌법 문제에 대해서 논의를 해 볼 필요성은 있어 보인다.

"헌장을 제정한다는 것은 어떤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원칙을 표명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원칙을 어떻게 정하더라도 그 원칙 안에 결코 포섭될 수 없는 양상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한 시점에서 어떤 원칙이 제정되더라도 장차 어떤 새로운 원칙이 등장해서 헌장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될지는 그 헌장에 의해 규율될 수 없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헌장에 규정된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원칙들이 실제 상황에서 어떻게 적용될 것인지 역시 헌장에 정해진 원칙에 따라서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두 논점은 사실 동일한 이치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한국 헌정사에서 1954년의 사사오입이라는 황당한 계산법에 의한 개헌을 헌법 조문이 막아내지는 못했다. 현행 헌법 아래서도 예컨대 21조 2항에서 집회, 결사에 대한 허가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하위 법률 및 사법기관의 관행에서는 허가제가 버젓이 득세하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무엇이 합헌이고 무엇이 위헌인지에 관한 논란은 헌법이라는 개념을 가진 모든 나라에서 발견된다. 다시 말해 헌법이 존재하는 곳이란 곧 모든 사람들의 행태가 합헌으로 통일되는 곳이 아니라, 합헌과 위헌에 관한 논쟁이 존재하는 곳이다."


박동천이 관찰하고 있듯이, 합헌과 위헌에 관한 논쟁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다. 여기에서는 합헌인가 위헌인가를 가름하는 척도인 헌법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물음이 핵심적이다. 박동천은 구별해야 할 맥락들을 뒤섞고 있다. 헌법 개정의 문제와 법의 구체적 실행 과정에서 정당한 법을 지키지 못한 것의 문제를 구별해야 한다. 한국 헌정사에서 이른바 사사오입 계산법의 법 실행은 후자의 사례이다. 모든 규칙이 그렇지만 규칙 개념은 규칙을 지키는 힘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힘 없는 정의는 무기력하고, 정의 없는 힘은 전제적이다"라는 파스칼의 말은 정의의 규칙 실체를 얘기한 것이다.

헌정된 헌법이 사유가 발생하여 개정될 수 있으며, 민주주의적 법치국가는 헌법 개정 조항을 헌법에 명시하고, 다시 말해 헌정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헌법(헌정) 개념을 독일의 법학자이자 정치학자였던 헤르만 헬러에 준거하여 "개방적 헌법(헌정)"이라 부른다. 닫힌 헌법(헌정) 이론에서 열린 헌정(헌법) 이론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어야 한다고 나는 주장해왔는데, 그 근거는 헌법론에서 이런 개정론 수준을 넘어서 진리 이론의 맥락 그 자체에 있다. 곧, 진리는 확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2

박동천은 윈치의 정통파임을 자임하려는 것 같다. 윈치/박동천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겠다. 그의 스승 윈치를 적극 변호하는 그의 입장이 반론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서규환이 헌법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헌정이라고 말한 데에는 아마도 올바른 성문법을 하나 제정하는 것만으로 말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개선할 수는 없으리라는 (내가 보기에 옳은) 성찰이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론적 헌정의 필요성에 대한 강조는 윈치에 대한 비판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윈치의 비판에 취약하다는 점을 노정할 뿐이다. 왜냐하면 바로 앞 문단에 인용한 윈치의 언명, 즉 "논리의 핵심 부분에 해당하는 실제 추론 과정을 어떤 논리 공식으로 표상할 수는 없다"는 말이 서규환의 "이론적 헌정"이라는 발상에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박동천에 의하면, 나는 확정적 "논리 공식"을 기능적으로 적용하는 실증주의자이거나 기계론적 철학의 계몽주의자로서 윈치/박동천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그것에 빠져 있는 셈이다. 물론 서평에서 이미 진술한 바 있지만, 윈치가 그런 실증주의나 계몽주의의 한계를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읽고서 비판하는 점에서는 나 역시 반대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윈치가 비트겐슈타인을 수용하여 개진하는 주장은, 이론적 헌정을 낡은 계몽주의의 논리에 따라 모색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지, 이론적 헌정 그 자체를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윈치의 그 책도 매우 이론적이다.

이 맥락에서 논의가 필요한 주제는 윈치도 논의했던 비트겐슈타인의 "규칙을 따르기(following the rule)" 주제이다. 나의 서평에서 이미 논술한 바 있지만, 비트겐슈타인의 이 주제를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입장은 이미 분명하게 밝혔다. 비트겐슈타인이 "생활 형식(Lebensform)"을 왜 논의했는지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이른바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특히 <철학적 탐구들>은, 언어의 사용이 언어의 본질에 중요함을 통찰하게 되었으며, 그리고 언어의 사용은 그가 말하는 생활 형식과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했으며 나 역시 이런 이론적 전통을 수용하고 있다. ("Lebensform"을 삶의 양식, 혹은 방식이라 번역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형식이라 번역하는 것은 형식과 내용 사이의 긴장관계가 비트겐슈타인에서도 그러하지만 중요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이 "규칙을 따르기" 주제에서 주장하려는 내용은, 언어의 "문법"이 생활 형식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며, 이 또한 윈치가 확인하려 했다. 원시적 부족의 언어 문법이 서구의 그것과 매우 다른 것임을, 또한 그들의 생활 형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논증한 바 있는데, 그것은 상대적으로 매우 장대한 시간에서 일어나는 변동론이었다. 그리고 원시적 부족의 그 언어도 현대인이 배울 수 있으며, 유럽어로, 한국어로 번역될 수 있다.

나는 매일 일어나는 시사적 쟁점보다는 장대한 역사 변동론의 이론에 더 깊은 관심이 있다. 이 이론, 이 학문에 학자의 일차적 과제의 하나가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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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동천은 "반론"에서 나의 "이론적 헌정"론과 관련하여 나 자신과 다른 자신의 입장을 더욱 명백하게 밝히는 곳은 예컨대 다음이다.

"정치철학자 또는 정치이론가가 어떤 구체적인 실제 공동체가 직면한 선택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거기에 도움을 주기 원한다면, 온갖 종류의 정치적 논쟁들을 관통하는 보편적 이치의 표준을 구하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논쟁에 참여해서 자신이 믿는 이치에 따라 그 사안을 바라 볼 때 어떤 결론이 나오는지를 한 사람의 사회 구성원의 자격으로서 피력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박동천은 여기에서 사안별 임시방편적 진단과 대안 제시 같은 것은 주장하려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윈치가 상대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박동천은 여기에서도 윈치 정통파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 윈치가 "보편적 이치"를 부정하면서도 상대주의자가 아니라면 "자신이 믿는 이치"는 어떠한 종류의 것인가?

박동천은 윈치의 삶을, 그리고 윈치가 해설한 시몬 베유의 삶을, 하나의 모범적 사례로 판단한다.(시몬 베유의 삶 역시 윈치가 해설하는 식으로 이해되고 그런 한에서 베유의 삶이 있다.) 윈치의 삶이 모범적 사례라고 판단하는 한에서 그것은 타자에게 규범이기를 요청하고 있는 셈이다. 임시방편적 진단과 대안 제시가 아니라 베유의 삶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그리고 윈치의 삶에 그것이, 보편적이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원치가 <사회과학의 빈곤>에서 자신의 주장을 보편적이기를 바라면서도 상대주의를 넘어서지 못했다고 나는 본다. 그 까닭은, 그가 생활 형식들 사이의 차이를 지배와 권력의 관점에서 이론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90년 제2판 서문에서 윈치가 진술한 자기비판은 이 문제 틀과 관련되어 있는 듯하다.

2) 박동천은 반론에서 내가 사용한 "이론적 헌정"이라는 언어에 주로 주목하여 내가 이론 연구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또 책들을 내는 것을 겨냥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예컨대 4대강 사업이라든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라든지, 정리 해고라든지, 무상 급식이라든지, 대북 정책, 기타 등의 현안에 관해 실제 그렇듯이, 그리고 다른 나라들에서도 예외 없이 그렇듯이, 정책과 제도의 선택이라는 주제는 정치적 이해를 달리하는 세력들 사이에 온갖 동기와 책략과 수사와 오해들이 뒤엉켜서 복잡하기 짝이 없는 논쟁과 때로는 투쟁을 확대 재생산하기 쉬운 영역이다. 이론적 헌정을 정립함으로써 새로운 생활 방식의 창안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서규환이 제안하는 데에는 아마도 이런 주제에 관한 복잡한 논란이 단순히 시세의 동향에 의존해서 무작위적인 결론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먼저 말의 질서가 정립되어야 한다고 보는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컨대 4대강 사업에 관해 정치인들이 논쟁을 벌일 때에 비해서 공학이나 정치경제학이나 도덕철학의 이론가들이 논쟁을 벌인다면 논란의 정도가 줄어드리라고 본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치열한 경쟁의 요소를 함유할 수밖에 없는 실존의 문제를 어렵다는 이유로 회피하는 도피주의의 유혹에 빠진 결과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론이나 학문이나 철학이 그런 도피처를 제공할 수 있다고 보는 기대는 좋게 봐주면 순진함의 발로이며, 꼬집어 말하자면 이론적 담론의 책무를 방기하는 직무유기에 해당한다고 나는 믿는다. 물론 실제적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점들을 고려해야할 것인지에 관해 이론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여지는 대단히 많다. 그렇지만 그 이론 자체가 불완전했을 가능성은 절대로 그 이론 자체에 의해서 봉쇄될 수 있는 항목이 아니다. 게다가 이론에 의해 부각된 고려 사항들 각각에 얼마만큼의 무게를 줘서 어떤 균형점에서 최종 선택을 내릴 것이냐고 하는 실존과 관련된 진짜 문제에 관해서는 어떤 이론도 표준적인 지침을 제공할 수가 없다." (강조는 서규환)


이 맥락에 대해서는 매우 당황스럽다고 고백해야겠다. 박동천은 전반적으로 윈치의 철학을 추종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 같은데, 여기에서는 "최종 선택"의 긴박한 순간 같은 것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상적으로는 "이론에 대한 저항"(The Resistance to Theory, 폴 드 만의 말이다)이라는 탈현대적 미국 해체주의의 언어나 칼 슈미트의 결단주의가 연상되기도 했다. 이런 또 하나의 결단주의를 주장하려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윈치의 정통파임을 여기에서는 스스로 포기하고 있는 셈이다.

이론이란 무엇인가? 지속성,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객관성을 논증하려는 논술로서 사유에 대한 사유이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 정체성의 맥락과 연결된다. 시사 논평에서도 이론은 있으며, 있어야 한다. 시사 논평에서는 이론이 학문적 논술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을 때가 많다고 말할 수는 있다.

시사 논평이든 학술 논고이든 저자의 이론적 사유가 있으며, 바로 이런 까닭에 나는 시사 논평이라는 형식 자체를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잡문"이라 폄훼하지 않는다. 사실, 박동천도 잘 알고 있듯이, 최근에 낸 나의 책 <비판적 시대정신>(다인아트 펴냄)에서는 시사 논평이 강한 논고가 대부분이다.

이론의 층들이 있다. 구체적 사실들을 수집하는 단계에서부터 추상성이 높은 본격적인 이론화 작업을 거쳐 이념에 이르기까지 추상도가 다른 이론의 층위들이 있는데, 추상도가 낮다고 말할 수 있는 자료 수집 단계에서도 저자의 이론화는 작동하고 있다. 이론의 눈이 없으면, 자료의 중요성을 통찰하지 못하고 간과한다.

한국 사회의 구체적 현실 문제들이 시사적 쟁점으로 떠올라서 논박되고 있을 때, 학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박동천은 내가 시사적 쟁점과는 동떨어져서 일종의 상아탑주의에 갇혀 있으며, 상아탑주의를 주장하기까지 한다고 말하려는 듯하다. 박동천이 반론에서 반박하는 식으로 이론 정립이 시사적 쟁점 논의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나는 주장하지는 않는다. 새로운 구체적 사례들을 경험함으로써 이론의 재구성이 일어날 수 있으며, 이론 없이 그 구체적 사례들을 인식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경험과 이론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론과 학문을 연구하는 노동으로써 현실의 변화에 나는 참여하고 있다.

3) 시사적 쟁점들 모두가 학문적으로 새롭다고, 학문적으로, 인식론적으로 연구해야 할 만큼의 새로운 사안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

학자가 시사적 쟁점에 발언하지 않고 보편성을 탐색하는 아카데믹한 학문을 연구하고 있는데, "어렵다는 이유로 도피하는" 것으로 판단하고서 비난해서는 안 된다. "도피"가 아니라 다른 판단을 하고 있다고 오히려 말해야 하지 않을까. 박동천이 오직 좋은 책들을 번역, 출간만 했다고 해도 나는 칭찬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고대 희랍어나 라틴어나 한문을 힘들게 배워서 고전들을 일생 동안 연구하고 번역하는 과제에 몰두하는 학문 활동은 한국 사회가, 한국 정치가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나는 믿고 있다. 또한 학문 발전이 사회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오히려, 교수가 학문 연구는 등한시한 채 매일 일어나는 시사적 쟁점을 따라가면서 논평하는 일을 일차적 활동으로 삼는다면, 더구나 돋보이는 전문성마저 없는 아마추어 수준의 그것이라면, 비난받아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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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평에서 주목했던 쟁점들 중의 하나는 윈치가 원시적 삶의 방식, 예컨대 아잔데 족의 생활 형식에 대한 논평이었다.

문화권의 차이를 가장 쉽게 관찰할 수 있는 것의 하나가 음식이다.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의 유형화가 문화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이 금지된 음식의 유형화에 의해서 문화권들 사이의 경계를 설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로서 김치와 치즈를 비교하는 것은, 한국인들도 치즈를 먹고 있고 서구인을 비롯한 외국인들로 김치를 먹고 있으며 최소한 음식으로 인정하고 있는 현재의 시점에서는, 최선의 선택은 아닌 듯싶다. 김치와 치즈가 같은 발효 음식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범주에 있지만, 김치와 치즈가 대립되어야 할 합리적 이유가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못한다면, 음식으로서 김치와 치즈는 대립적으로 간주해야 할 근거가 없다. 논쟁점을 예리하게 세우려면, 식인을 했던 원시 부족의 예가 더 좋겠다. 동물과 인간을 동일시하는 사유의 한 자락에 인간 동물이 있었고 인간을 먹는 원시인들이 있었다. (혹은 질병 치유나 가뭄, 지진, 화산 폭발, 대홍수 등의 자연재해와 관련한 희생 제의의 예를 논의하는 것이 더 좋겠다.) 나는 김치와 치즈를 좋아하지만, 사람을 먹지는 않는다.

주술적 사유는 합리성을 헌정하는 세계가 객관적 세계, 사회적 세계, 주관적 세계로 분화되기 이전의 사유이다. 그런 사유는 아잔데 족에게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 모든 문화권의 원시적 단계에 나타난다. 그 구체적 내용은 문화마다 다르게 나타났다. 예컨대, 금지된 음식이 문화마다 다르듯이. 한국의 경우는 샤머니즘이라는 주술적 사유이다. 내가 서평에서 생활 형식들 사이의 질적 차이를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주술적 사유가 서구가 앞서 발전시켜온 합리적 사유에 비해 질적으로 열등하다고 나는 주장했던 셈이다. 왜 주술적 사유와 그 생활 형식을 넘어서야 하는가? 또한 왜 막스 베버 식으로 말하여, 왜 서구 문화가 먼저 주술적 사유를 넘어설 수 있게 되었는가? 내가 새로운 생활 형식의 창안에 대해 말했을 때,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나는 <현대성의 정치적 상상력>(민음사 펴냄) 등의 저술들을 통하여 비판의 철저성(radicality)이 그 본질적 특징인 비판적 현대성의 이론화를 추구해왔다. 이 이론화 내에서 나는 윈치와 비교해 볼 때 "논리성"이나 "과학성"보다는 합리성이라는 말을 더 선호한다. 합리성개념이 대화하는 주체들 사이의 윤리적 생활형식을 담아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이론화에서 "신화적 상상력"이 실현되어 있는 다양한 원시적 사회들의 다양한 신화들 속에서 배울 점이 있다면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5

박동천의 반론에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쟁점은 "도둑질이 발생하지 않는 사회"에 대해 논술하는 부분이다. 그런 사회는 "도둑질이라는 개념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고 박동천은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주장에 의문이 있다. 개념이 없다고 해서, 곧 실재가 없다고 단정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개념이 없지만 실재는 있다고 말해야 할 경우도 있다. 문화라는 개념은 없었던 조선 시대에서도 문화는 있었다. 개념들만으로 인간과 그 사회가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언어의 단위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윈치에게 제기했던 근거는 이 맥락과 연관된다. 나는 언어의 단위가 단어나 문장이 아니라 논술이라 주장해 왔다.

또한 개념이 있다고 해서 실재가 있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문화라는 개념은 있지만 문화 상실을 얘기할 수 있으며, 하고 있지 않은가. "도둑질이 발생하지 않는 사회"는, 그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도덕규범을 윤리적으로 인정하고 실천하는 경우에 가능하다. 실제로 가능할 것인가, 하고 물을 수는 있겠다. 이 물음은 유토피아와 관련되어 있다. 유토피아는 세계를 헌정하는 지평이다.

규범이란 무엇인가? 박동천은 규범을 규제, 제약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규범을 헌정하는 나의 이론은 이와 다르다. 규범은 인간 행위에 관한 일종의 규칙으로서 인간의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제약적 조건이다. 나는 규범을 제약, 규제로서만 이해하지 않는다. 규범은 자유의 조건이기도 하다. 인간의 행위에는 미래에 대한 기대로서의 규범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나는 판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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