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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진실…"이제 여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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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진실…"이제 여름은 없다!"

[프레시안 books] 다이앤 듀마노스키의 <긴 여름의 끝>

'긴 여름'이 끝나가고 있다

'기상 관측 이래 최대(최고)'라는 수사(修辭)에 어느덧 둔감해질 만큼 최근 '이상 기후'에 따른 재해가 세계적으로 잇따르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잦은 비와 일조량의 절대적인 부족으로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벼 대흉작이 예상된다고 농민들은 우려하고 있다. 물론 정부는 작황이 '양호'하다고 아직도 우기고 있지만(<한겨레> 2011년 8월 20일자). 물난리와 산사태 같은 기습적인 재해도 문제이지만, 각종 농작물의 연이은 흉작에 따른 사회적 불안이 갈수록 높아지면서, 기후 변화의 문제가 바야흐로 우리 생활에 어두운 그림자를 뚜렷이 드리우기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출간된 <긴 여름의 끝>은 이러한 상황이 일시적이거나 비정상적인 '이변'이 아니라, 21세기의 '일상'이 될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다. 물론 처음 듣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러나 이 책의 메시지가 특별히 묵직하고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이 책의 저자인 다이앤 듀마노스키가 철저한 과학적 탐사를 통해 환경 호르몬의 위험성을 경고함으로써 '현대의 고전' 반열에 오른 <도둑맞은 미래>(권복규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의 공저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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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여름의 끝>(다이앤 듀마노스키 지음, 황성원 옮김, 아카이브 펴냄). ⓒ아카이브
'긴 여름'(The Long Summer)은 미국의 선사학 권위자 브라이언 페이건이 처음 쓴 말로서 과학자들에게는 '홀로세'라고 알려진 "비정상적일 정도로 길고 안정된 간빙기(間氷期)"를 일컫는 말이다. 약 1만2000년간 지속된 이 예외적으로 온후하고 은혜로운 시기 동안 인류는 지금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지구적 규모의 '실험'을 이어올 수 있었다. 특히 듀마노스키가 이 책에서 여러 번 강조하고 있듯이 현재 70억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을 만한 규모로 확대된 '농업'이야말로 이 '긴 여름'의 축복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과학의 발달과 현대 산업 문명, 인구의 증가 등은 말할 것도 없다.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이진우 외 옮김, 한길사 펴냄)에서 "지구는 인간 조건에 있어 핵심적 본질이며,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지구의 자연은 인류에게 노력하지 않고도, 또 도구가 없이도 움직이고 숨 쉴 수 있는 주거지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주에서도 독특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바로 그 인간 조건의 '핵심적 본질'이자 '우주에서도 독특한 곳'의 조건은 바로 '긴 여름'의 온후함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예외적인 간빙기는 '전체로서의 지구'가 거대한 "물질대사를 통해 스스로를 생성해 내고 꾸준히 유지하는 과정에서 생명의 근원이 되는 행위"를 지속해 온 과정의 일부이다. 대기의 진화를 비롯한 지구 행성의 물질대사의 역사를 방대한 과학 지식을 동원해 묘사하고 있는 이 책의 전반부는 마치 한 편의 대서사시를 읽는 듯 장엄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인류가 이 행성 전체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 이제 이 온후한 시기는 끝나가고 있다. 오늘날 산업 자본주의의 지나친 성장과 인구 증가에서 비롯된 부담은 그 파괴력에서 지구의 역사를 뒤바꿔 놓았던 소행성 충돌과 빙하기에 비견될 만한 '행성 수준의 힘'을 발휘하고 있다." 바야흐로 '문명의 세기'에서 '행성의 세기'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 눈앞에 연일 등장하고 있는 기상 이변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세기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전조들에 불과하다. "우리는 앞으로 몇 십 년 안에, 20만 년 인류의 진화에서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조건과 마주칠 것"이라고 저자는 경고한다.

진부한 선내 방송?

재일(在日) 정치학자 더글러스 러미스는 <경제 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김종철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에서 현대 문명 시스템 속의 인류를 '타이타닉 호'에 타고 있는 승객들에 비유하면서도, 실제 일어난 타이타닉 호의 재난과 비유로서의 타이타닉 얘기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덧붙인다. 오늘날 타이타닉 호에 타고 있는 우리들은 빙산을 향해서 가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다.

"선내 방송에서 몇 번이나 '빙산에 부딪힙니다'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모두가 귀에 못이 박힐 만큼 들어왔습니다. 그 말이 진부할 정도로, 더 듣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 말을 하면 사람들은 '또 그 얘기?'라고 말합니다."

나아가 더글러스 러미스는 타이타닉 호의 비유가 갖는 한계를 지적한다.

"타이타닉 호의 경우는 하나의 빙산이 있고, 거기에 부딪힌다는 것입니다. 비유적인 타이타닉 호, 즉 우리들의 정치 경제 시스템의 경우, 빙산은 장래에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닙니다. 재난은 이미 시작되었고, 말하자면 차례차례 빙산에 부딪히기 시작하고 있는 셈입니다."

<긴 여름의 끝>은 바로 우리가 탄 타이타닉 호(이 책이 묘사하고 있는 장구한 지구의 역사와 행성의 거대한 물질대사의 규모를 읽다 보면, 우리의 타이타닉 호는 그야말로 망망대해에 떠있는 가랑잎 같은 배라는 실감이 든다)가 이미 부딪히고 있는 수많은 빙산들에 대한 보고서이자, 임박한 충돌과 좌초를 경고하는 다급한 '선내 방송'인 셈이다.

경제 성장의 '성대한 잔치'와도 같았던 최근 20년간, 우리는 "오존층 파괴, 기후 변화, 세계적인 규모의 종의 상실, 해양에 대한 위협의 증가, 지구의 모든 곳에서 광범위하게 펼쳐지는 먹이 사슬에 대한 화학적인 오염"과 같은 빙산들에 끊임없이 부딪혀 왔다. (이 책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의 핵 참사로 인한 '행성적 규모'의 방사능 대재앙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듀마노스키는 "이런 것들은 더 폭넓은 행성 수준의 고통 가운데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근본적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혀내고,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런 특정 증세 이상의 것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관점이야말로 이 책에 '진부한 선내 방송' 이상의 의미를 부여한다고 할 수 있다.

왜 타이타닉 호의 엔진을 멈추지 못하는가

무엇이 "엔진을 멈추고 이 배를 세워야 한다"는 경고를 무시하게 만드는가. 비근한 예로 "북극의 얼음이 예상보다 세 배나 빨리 사라지"고 있는데도 "1992년 기후변화협약 이래로 탄소 배출 총량은 연간 61억 톤에서 2007년 85억 톤으로 오히려 증가"했다. 여기에는 근원적으로 "낡고 위험한 두 가지 오해가 자리 잡고 있다." 첫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힘의 범위"에 대한 오해이고, 두 번째는 "우리가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 자연의 성격"에 대한 오해이다.

과학기술의 힘이 자연의 위기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오래된 통념은 우리가 상황을 직시할 수 있는 눈을 여전히 가로막고 있다. 그 때문에 온갖 지구 공학적 처방들(가령 햇볕 차단이나 공기 중의 탄소 포집 같은 거대한 계획들)이 끊임없이 제기되면서 사태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공학적 프로그램들을 "경솔하고 무책임하며 비도덕적"인 것이라고 일축한다. 무엇보다도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절반을 차지하는 부유한 5억 명이 가장 큰 부담을" 지는 정치적 노력이 앞서야 함에도, 국제 정치의 현실은 이러한 합의를 끝없이 유보하고 있다.

기후 변화에 대한 '상식' 역시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 가령 "지구 온난화가 에스컬레이터처럼 진행"될 것이기 때문에 이에 '적응'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더 합당하다는 오래된 주장은 저자가 보기에 '자연의 성격'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고기후학(古氣候學)의 최신 연구 결과들은 지구의 기후가 "점진적으로 변화한 것이 아니라 급격하게 바뀌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여기서 '급격하다'는 표현은 지구의 시간대, 즉 '지질학적 시간대'에 비추어 급격하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애라는 시간 폭에서 급격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10년 이내' 정도로 아주 갑작스러울 수도 있다."

후쿠시마

이 지점에서 잠시 의문을 하나 제기해야겠다.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전체로서의 지구'(살아있는 유기체와 유사한 물질대사를 통해 스스로를 유지하는 지구 시스템)라는 아이디어는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이론'에 바탕을 둔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 책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학자 중 한 사람도 역시 제임스 러브록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시피 러브록은 꽤 오래 전부터 핵 발전의 불가피성을 역설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가 핵 발전을 옹호하는 논리는 단순하다. "(비록 여전히 위험하긴 하지만) 핵 발전이 온실 기체를 방출하지 않으므로, 지구 온난화가 초래하는 기후변화를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길게 말할 여유는 없지만, 이 문제는 이미 완전한 '난센스'라고 비판받고 있는 논리이다(강양구, "원자력을 둘러싼 일곱 가지 신화",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사이언스북스 펴냄), 294~313쪽)). 아니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이야말로 듀마노스키가 비판하고 있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힘의 범위"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오해가 아닌가.

그런데 이 책에서 듀마노스키는 시종일관 제임스 러브록의 이론과 언급들에 기대고 있으면서도, 러브록의 이러한 치명적 오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고 있지 않다. 혹시 이 책의 원서가 '후쿠시마 이전'의 시대에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굳이 주목할 필요가 없었던 것일까? '후쿠시마'야말로 지구 행성에 대한 인간의 과도한 개입이 얼마나 무서운 비극을 '기습적으로' 불러올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극명한 사태가 아닌가? 듀마노스키든 러브록이든 이제 이런 의문에 대해 해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종말은 시간문제?

우리의 '항로 수정'을 가로막는 또 다른 장애는 "인간과 인류의 미래에 대한 절망과 숙명론"이다. 이러한 인식은 환경 문제에 관한 연구와 실천에서 상당한 업적을 쌓아온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난다.

환경의 가치에 관한 하버드 세미나에서 "인간은 자멸할 운명인가?"라는 질문이 튀어나왔을 때, 한 저명한 생물학자는 "묘한 만족감을 드러내며 인간의 종말은 시간문제"라고 예견했다. 또 어떤 사람은 호모 사피엔스가 '잡초 같은 종'이며 인간은 '지구상의 암' 같은 치명적인 질병이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이러한 풍경은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저자도 말하듯이 "그런 어두운 생각의 유혹"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거니와, 실제로 이러한 방향으로 논의가 전개되곤 하는 장면을 자주 보게 된다.

듀마노스키가 동시에 비판하는 장밋빛 낙관이나 숙명론(또는 환경 종말론)은 따지고 보면 모두 엘리트주의의 산물이다. 그것은 결코 '책임' 있는 태도가 아니다. 이 책의 결론부에 해당하는 제9장의 제목처럼, 아이를 낳고 키우며 일상을 영위해 가는 전 세계의 풀뿌리들에게 무엇보다 절실한 문제는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안락하고 친숙한 세계의 문은 이미 우리 뒤에서 쾅 하고 닫혀버렸다. 지구 온난화를 '예방'하거나 기후 위기를 '해결'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그러나,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공포, 절망, 부정 따위"는 지금 "우리에게 걸맞지 않은 사치다. 이제 고개를 들고 눈앞의 미래를 바로 볼 때가" 온 것이다.

정직한 희망, 희망의 근거

이 책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메시지는 '희망의 근거'에 관한 것이다. 물론 이때 '희망'은 '타이타닉 현실주의'(더글러스 러미스)가 아닌 '냉철한 현실주의'에 바탕을 둔, '정직한 희망'이다.

듀마노스키는 25년간 수많은 환경 문제의 현장을 취재하면서 절망이라는 '어두운 생각의 유혹'에 익숙할 만큼 참담한 현실들을 수없이 경험해 왔다. "하지만 동시에 아주 폭넓은 인간의 행적과 문화들을 접하다 보니 '인간 종'에 대한 판단에 더욱 신중을 기하게 되었다"고 한다. 즉 인류의 진화사(進化史)를 통해 보건대, 지금의 인류는 급격한 기후 변화와 같은 위기에 대처해 가면서, 온갖 시련에 굴하지 않음으로써 진화하고, 단련되고, 살아남아 온 저력(복원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저자는 종말 운운하는 "본질적인 숙명론에 굴복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전례 없는 도전에 대응하는 능력이 우리 안에 있다. 그것은 우리의 진화 유산의 일부이다."

특수한 환경에 이미 적응해 있는 '적자(適者)'보다는 '유연성'을 갖춘 종이 '기후 지옥'의 여러 사건을 견디고 살아남는 데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생물학과 인류학의 연구 결과들은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미 행성 차원의 위기라는 급격한 환경변화 앞에서 도시화·산업화·기계화된 현대 문명에 '적응'한 존재로서 안주하고 거기에 집착하는 것은 생존의 가능성 측면에서 너무나도 취약한 태도이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세상이 바뀌었으며 현 상황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짓인지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리고 경제 성장과 같은 "현대 문화의 실험이 근거하고 있는 가치와 목적을 문제 삼기를 꺼린다."

그러나 인간의 진화 유산 속에는 "곤경을 피할 수 있는 유연성, 상상력, 창의력 같은 내재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정직한 희망'은 무엇보다도 소중한 자산이다. '희망의 근거'를 당위나 신념, 종교적 열망이 아닌 인류 진화의 역사 속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대목들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숙연함과 감동을 준다.

길게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러한 '희망'은 때가 되면 저절로 현실로 드러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듀마노스키가 강조하는 '정직한 희망'은 우리의 '용기'와 '선택'에 달린 것이다. 이 대목에서 몇 해 전 출간된 리베커 쏘울닛의 <어둠 속의 희망>(설준규 옮김, 창비 펴냄)의 한 대목을 다시 떠올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전쟁이 터질 것이고, 지구의 온도가 올라갈 것이며, 종들이 죽어 없어질 것이다. 그렇지만 얼마나 많은 전쟁이 터지고, 얼마나 지구가 뜨거워지고, 무엇이 살아남을 것인가는 우리의 행동 여부에 달려 있다. 미래는 어둡지만, 그 어둠은 무덤의 어둠인 동시에 자궁의 어둠이다.

당연히 새로운 항로를 모색하는 '생존 가능성 전략'이 필요하다. 듀마노스키는 "오로지 효율만을 추구하는 세계화"에서 시급히 탈출할 것을 권한다. "진화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런 식의 세계화는 특히나 요즘처럼 불안정과 불확실성이 증가하는 시대에 위험"하기 짝이 없다. 그것은 "국지적 위기가 단 일주일 만에 전 지구를 마비시킬 수도 있는 위험한 통합"인 것이다. 특히 그는 에너지 고갈과 아울러 세계화된 농업과 식량체계의 위험성에 대해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 경고하고 있다. "문화적 다양성은 점점 줄어들고 수천 년의 시험을 견뎌온 국지적인 생존 전략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듀마노스키는 "기능적 잉여와 다양성, 모듈식 구조(구획화)" 같은 생태계의 생존 비법이야말로 '행성의 세기'에 우리가 다시 주목하고 선택해야 할 방책이라고 강조한다. 생태계 안에서는 다양한 종들이 똑같거나 서로 비슷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기능적 잉여', 즉 일종의 보험 역할을 한다. 만일 주요한 행위자였던 어떤 종이 기후가 변해 쇠퇴하면 새로운 조건에 더 잘 견디는 종들이 그 역할을 맡아 같은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다.

또 생태계의 종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완전히 단일한 시스템 속에 통합되지 않고, 다른 무리와의 연결을 어느 정도 범위 내에서 제한한다. 마치 선박의 하부를 여러 개의 구획으로 나누어, 한 곳에 물이 새 들어오더라도 다른 칸까지 쉽게 잠기지는 않도록 하는 원리와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전략은 세계화의 추진력과는 정반대의 해법이다.

이것은 아래에 인용하는 시 속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전 세계의 가난한 소농과 풀뿌리들이 자신과 후손의 생존을 위해 취했던 전략, 즉 "계란을 결코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오래된 지혜와 "농사꾼은 굶어 죽더라도 씨앗자루를 베고 죽는다"는 도저(到底)한 희망의 원리를 닮은 것이다.

인디오의 감자

윤재철

텔레비전을 통해 본 안데스산맥
고산지대 인디오의 생활
스페인 정복자들에 쫓겨
깊은 산 꼭대기로 숨어든 잉카의 후예들
주식이라며 자루에서 꺼내 보이는
잘디잔 감자가 형형색색
종자가 십여 종이다

왜 그렇게 뒤섞여 있느냐고 물으니
이놈은 가뭄에 강하고
이놈은 추위에 강하고
이놈은 벌레에 강하고
그래서 아무리 큰 가뭄이 오고
때아니게 추위가 몰아닥쳐도
망치는 법은 없어
먹을 것은 그래도 건질 수 있다니

전제적인 이 문명의 질주가
스스로도 전멸을 입에 올리는 시대
우리가 다시 가야 할 집은 거기 인디오의
잘디잘은 것이 형형색색 제각각인
씨감자 속에 있었다

(<세상에 새로 온 꽃>(윤재철 지음, 창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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