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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벗은 욕망'의 이곳…'탈북자'란 유령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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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벗은 욕망'의 이곳…'탈북자'란 유령이 산다!

[프레시안 books] 강희진의 <유령>

<유령>(은행나무 펴냄)을 쓴 작가 강희진의 프로필을 곰곰이 들여다보니, 언젠가 내가 어떤 문학상 심사위원이었을 때 그의 작품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키스방'에서 일하는 북한 출신 고학력 여성의 이야기였다. 백석의 시를 잘 알고 있던 여대생의 이야기가 시종일관 진지하게 펼쳐졌다.

마지막 순간이었지만 결국 당선작이 되지 못했던 것은 소설이 너무 "무겁다"는 평가 때문이었다. '무겁다'는 것은 훌륭한 비평적 출발점이 될 수 있는 한편, 대중적 호감도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양날의 칼인 셈인데 대개 장편 소설 공모에서는 대중성과 문학성을 고루 겸비한 작가를 찾기 마련이기에 아쉬움 끝에 작품의 선정을 유보했다.

<유령>은, 그런 점에서 전의 작품이 가지고 있던 문제적 의식의 둔중함에 대중적 감각을 확충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대중적 감각은 살인 사건의 발생이라는 추리 소설적 구조에 근간을 두고 있다. 이야기는 '백석 공원'에서 훼손된 신체의 일부가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누군가의 것이 분명한 안구가 발견되고 그 다음엔 손가락 두 개가 없는 잘린 손이 발견된다.

<유령>의 두 번째 대중적 요소는 바로 '리니지'라는 온라인 게임을 추리의 중요한 근거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설의 주요 인물들은 탈북자로서의 오프라인 삶과 리니지 게임 유저로서의 온라인 삶을 병행하고 있다. 마치 평행우주처럼 그들은 하나의 삶을 두 개로 나누어 산다. 전투, 전리품, 반란과 혁명, 전선 같은 어휘로 이루어진 온라인 세계는 오프라인 세계의 잔혹함을 증폭시킨다. 매트릭스 상의 일들이라 안전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더 위험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 <유령>(강희진 지음, 은행나무 펴냄). ⓒ은행나무
<유령>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우리 사회의 제 3자, 최근 유행하는 사회철학적 용어를 빌리자면, '호모 사케르'의 처지에 놓여 있는 탈북자를 서술자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강희진은 이 인물의 시선, 판단, 언어를 통해 우리가 '일상'으로 삼고 있는 대한민국, 서울의 현재적 삶을 객관화한다. 객관화는 거울을 보며 만족을 느끼는 나르시시즘과 달리 거울 속 자기 자신을 부정성의 대상으로 삼아야만 가능해진다. 즉, 거울 속 나를 타자로 볼 때 나는 객관적 실체로 규명될 수 있다.

탈북자는 그런 의미에서 거울 속 '나'를 타자로 바라보는 다른 '나'라고 할 수 있다. 그 시선을 통해 재현된 남한, 우리의 서울은 우선 "제법 많은 양의 흰 쌀밥"을 버리는 곳으로 묘사된다. 그들이 보기에 남한은 낭비에 길들여지다 못해 무감각해져 있다.

낭비는 무절제와 탕진을 의미한다. 무절제와 탕진은 비단 먹는 것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이는 성욕의 소비 구조에서도 반복된다. 버려지는 흰 쌀 밥처럼, "동네 어딜 가나" "엄지" 같은 여자들의 사진이 붙어 있다. "커피숍, 전봇대, 편의점 유리문, 전철역, 백석의 시비, 노숙자들이 웅크리고 자는 지하도, 남자 화장실에서도 그녀가 웃고 있다." '그녀'라고 불리는 욕망의 배출구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해소할 욕망이 있어서 대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대상이 있기에 생성되는 욕망처럼 남한은 인과관계가 전도된 나라인 셈이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여자의 알몸을 합성하고 일명 '핸플'이라고 불리는 기이한 욕망 해소에 매달리는 남한의 욕망 체계는 도착된 배설 구조로 그려진다. 남한 사회가 충족하고 싶은 것은 삶의 욕망과 연결된 섹스가 아니라 자아를 지워내기 위한 배설적 도취에 불과하다.

문제적인 것은 이러한 모순적 삶의 구조가 온라인, 게임 상에서도 반복된다는 것이다. 시저라고 불리는 게임 속 영주는 점점 세력을 키워 독재자로 변한다. 백성의 말을 듣지 않는 독재자와 싸우기 위해 혈맹을 조직하지만 조직 역시 불온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유령>에 재현되어 있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삶은 그 어디에서도 원본성이나 윤리를 찾을 수 없는 혼돈이다.

도착된 욕망의 공간에서 '진짜'는 필요 없다. '대딸방'에서 해소하는 것이 가짜 성교에 대한 욕망이듯이 남한 사회는 가짜 욕망으로 끊임없이 환유될 뿐이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탈북자를 가장 강렬하게 끌어들이는 남한의 매력 역시 벌거벗은 욕망이다. 심지어 '나'는 "어머니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드를 보기 위해 두만강을 건넜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고백한다.

탈북자 혹은 남한 출신, 조선족, 외국인 노동자와 같은 호명의 차별성이 성욕과 배설의 차원에서 역설적으로 동일해진다. 그들이 추상적으로 찾아왔던 '자유'라는 개념은 여기저기에 산재한 도착적 이미지의 연쇄로 전도되며 사라진다. 오히려 그들은 남한 사회에서 '유령'처럼 이방인으로 떠 돌 뿐이다. 백석의 시가 거듭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잃어버린 고향이 너무 그리워서" 세상을 떠났다고 말하는 백석은, 상실의 기억을 원초적 체험으로 간직한 채 살아가야 하는 탈북자의 정서적 공백을 보여준다.

<유령>은 탈북자들이 남한 사회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흡수되지 못하고 유령으로 떠도는 풍경을 게임과 살인 사건이라는 흥미로운 소재로 재현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아쉬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탈북자들이 남한 사회 욕망의 배설구 쪽으로 모여들게 된 구조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지금 이 곳의 현실을 취재파일처럼 상세하게 전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떤 점에서는 이러한 상세화가 선정성과 닿아 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아쉬움은 살인 사건이 어떤 메시지나 상징이 되지 못하고 단순한 사건으로 등장하고 해결된다는 데서도 발견된다. 그들이 왜 살인을 저지르고 범죄자가 되어야만 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서사적 완결성을 위한 내적 필연성 이상의 사회적 의미로 확장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유령>이 탈북자라는 동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소설로 사건화해 독자의 시선을 끄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사람들은 일어난 일들만 믿는다. 여기서 일어난 일은 문자화되거나 이미지화 되어 예술적 구조물로 구체화된다는 것을 뜻한다. 말하자면 <유령>은 탈북자 및 이주 노동자와 같은 수많은 기호적 타자들을 우리가 진짜 주목하거나 제대로 타자로 여겨 본 적이 있는가라고 질문하고 있다.

타자로 여긴다는 것은 그들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논외의 대상처럼, 불법 체류자에게 권리뿐만 아니라 의무도 묻지 않는 것처럼 아예 그 존재를 보이지 않는 양 외면하고 살아왔을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령>이라는 하나의 증상을 갖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남한의 환부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냄새나는 상처, 상처를 확인하는 방식으로서 <유령>은 그 존재의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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