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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의 소수자여, '다미가요'로 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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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의 소수자여, '다미가요'로 단결하라!

[프레시안 books] 정영혜의 <다미가요 제창>

2, 3년 전부터 나는 하위 제국주의 양상을 띠는 동아시아의 강국들이 아니라, 버마, 방글라데시, 네팔, 부탄, 우즈베키스탄,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전체에 흩어져 있는 소수 국가들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동아시아 상상을 비판하고 벗어나게 하는 가야트리 스피박의 <다른 여러 아시아(Other Asias)>, 육상효의 영화 <방가? 방가!>의 영향도 있었고 이번 봄 학기 수업 시간에 조지 오웰의 <버마 시절>(1934년)을 읽은 탓도 있다. 버마는 영국 제국주의와 일본 제국주의를 동시에 경험한 나라인데, 오웰이 그린 1930년대의 식민화된 버마인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참담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면서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일본의 지배를 받으며 조선인들이 겪었던 고통과 참상이 불현듯 떠올랐다.

식민 지배의 경험들에 대한 기억들을 기억할 계기들이 '한류'의 영향 하에,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강한 침투력 하에 사라지고 있는 요즈음, 내게 일본이란 무엇인가? 나에게 일본은 예전에 아시아를 마구 휩쓸며 2000만 명 내지 3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제국이었다는 점에서, 패전국에서 한국전쟁의 특수 경기로 경제 대국으로 올라선 변신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강렬한 적대감을 표출하게 한다.

적대감에 뒤이어 그러한 일본에 영합한 친일파들을 제대로 척결하지 못해 오늘날 많은 한국인들이 온갖 양상으로 도처에서 겪고 있는 불행과 비참함에 대한 안타까움이 교차한다. 그런데 그 일본에서도 서로 복잡하게 얽히는 성, 계급, 인종, 민족, 섹슈얼리티의 축에 따른 갖가지 형태의 수모와 차별이 전 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에 걸맞게 더 가열하게 더 잔인하게 벌어지고 있었고, 거기에 대항하며 성찰하는 소수자 지식인들, 운동가들, 보통 사람들이 있었다. 정영혜의 <다미가요 제창>(후지이 다케시 옮김, 삼인 펴냄)은 바로 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줌으로써 일면 갇혀 있던 나의 인식적 지평을 넓혀 주었다.

▲ <다미가요 제창>(정영혜 지음, 후지이 다케시 옮김, 삼인 펴냄). ⓒ삼인
<다미가요 제창>은 일본 동화 정책의 결과로 일본어 밖에 못하게 된 재일 한국·조선인 2.5세인 정영혜가 1993년부터 2002년에 이르기까지 일본어로 쓴 글들을 함께 묶어낸 책을 일본인 후지이 다케시가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역자는 대학생이던 1993년쯤 재일 한국·조선인에 대한 차별 반대 운동을 하던 중에 "소수자로서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식의 서사를 거부하고, '소수자'를 존중하겠다는 '다수자'의 관대함은 오히려 '소수자'에게 위험한 함정일 수 있음"을 경고하는 저자 정영혜에게서 신선한 자극을 받았다고 회상한다.

역자는 1999년에 일본의 국가로 정해진 다음부터 일본 학교에서 반강제로 합창되었던 '기미가요(君が代)'를 언급하면서 '기미(君)'는 천황을 가리키므로 '기미가요'는 천황의 시대가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바라는 노래라고 설명한다. 이런 배경에 맞서 역자는 '기미'를 '민(民)'의 의미를 담은 '다미'로 바꾸어 '민중의 시대'를 노래하자는 뜻에서 책의 제목을 좀 낯설지만 '다미가요(民が代)'로 정하였다고 한다.

이 책은 재일 한국·조선인을 비롯한 일본의 민족적 소수자의 인권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에서, 지금도 일본 사회를 추동하는 '제국주의'를 살펴본 것이다. 여기서 제국주의란 일본 사회의 전반적인 차별적 권력 구조를 재생산하는 기제이다. 정영혜에 따르면 일본의 역사를 관통하는 권력 구조는 조선인, 중국인과 같은 구 식민지 출신자뿐만 아니라 대일본 제국 신민, 즉 일본 국민들까지도 가혹한 억압과 착취의 대상으로 삼아 왔다.

일본은 '국익'이라는 이름하에 기실 일부 지배자들의 권익에 지나지 않는 것을 지키느라, 민초들을 국가의 소유물인양 철저하게 이용하고 소비하다가 버렸다(8쪽). 이러한 일본의 권력 구조와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 하는 중요한 화두를 놓고, 이 책은 다수자와 소수자 사이의 관계, 해방이란 무엇인가, 다중 국적/새로운 시민권/다문화주의에 대한 의미 있는 통찰들을 제시함으로써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영혜는 먼저 최근 탈식민주의 이론들을 경유해 다수자와 소수자 사이의 관계를 새로 규명한다. 중심 사회의 차별과 억압을 고발하는 소수자의 말하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다수자에게 소수자는 마냥 고마울 따름이다. 그래서 소수자 자신도 차별을 하나하나 설명하며 다수자의 무지를 해소시키는 것을 마치 자신의 역할인양 어느덧 오해하기 십상이다.

그리하여 다수자는 소수자의 차별에 대해 소수자가 말해 주지 않으면 모른다고, 설명해 달라고 하며 다수자의 무지 해소를 마치 차별받는 소수자의 책임인양 그 책임을 소수자에게 완전히 떠넘긴다. 그 순간, 다수자들의 사회적 책임은 교묘하게 소수자들에게 전가되고, 그들 사이에 '해주기'와 '받기'라는 상하 관계가 형성되고 만다. 그러한 관계는 다수자들을 전혀 변하지 않게 하며 자신들의 책임과 의무를 회피하게 한다.

그럼에도 소수자가 차별을 고발하고 말해야 하는 것은 차별을 방치하지 않고 스스로 내면화하지 않기 위함이다. 다수자와의 관계에서 소수자의 역할은 다수자에 의한 정형화를 허용하지 말고, 소수자들 사이에 있는 차이에 대해 말하는 계기들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소수자는 다수자에게보다 소수자에게 더 많이 말해야 한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소수자로서 엮인 사람들 사이에 엄연히 있는 차이를 부각시켜 나가고, 그 차이를 지렛대 삼아 차별에 의해 묻힌 자기를 발굴해 나가면서 나 자신을 위해 나/우리에게 말하는(51쪽) 것이야말로 다수자와 소수자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주춧돌이 된다.

다수자와 소수자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규명은 1985년에 정점에 이른, 재일 한국·조선인의 지문 날인 거부 운동과 외국인 등록법에 반대하는 운동을 일본과 일본 국민에게 비판의 화살을 돌리는 데서부터, 등잔불이 어둡듯 잘 보이지 않는 자신의 '발 밑'을 더 직시하는 데로 나아가게 한다. 여기서 소수자의 '발 밑'이란 일본 제국주의 구조 하에서 차별받는 아버지의 노예로서 어머니 혹은 여자가 스스로를 희생시키는 것을 제도나 도덕으로 강요하는 가부장주의를 말한다.

그리하여 소수자로서 재일 한국·조선인은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데 급급하거나 반제국주의적 정체성의 회복/확립 운운에 머무를 게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가 어떻게 사는지 다시 묻고, 차별을 묵인하고 허용해온 민족의식을 문제 삼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이 가진 민족의식의 구조까지도 다시 문제 삼아야 할 것이다"(36쪽). 말하자면 가부장적 의식으로 점철된 자기를 해방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윤곽 지어진 정체성을 가지라는 강요를 거슬러, 주어진 사회적 경계를 넘나들고 왕복할 권리를 요구하는, 나날의 지속적인 실천으로 가능해진다.

특정한 정체성의 확립이 아니라 자기 결정권의 획득을 목표로 삼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투쟁의 연대를 향해 계속 나아가는 것이 해방이다. 해방은 "언젠가 이를 수 있는 도달점이 아니라 가는 방향이 틀리지 않았는지 끊임없이 자문자답을 계속 하면서 무한히 이 한 걸음 한 걸음을 반복하는, 그 과정 자체이다"(29쪽). 그렇다면 재일 한국·조선인의 해방이란 순혈의 신화를 깨고 나와 자기 속에 있는 다원성, 복합성, 외부와의 연속성을 받아들인 불순한 '일본인'을 통해 하나의 정체성으로 수렴되지 않는 자기 내부의 어떤 복잡한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러한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생성되는 새로운 관계성에서 모색되는 것이다. 즉 자기 속의 타자들을 말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말하기의 내용은 '국가 주권'에 기반을 둔 근대 국가에서 '주권 재민'에 기반을 둔 포스트 근대 국가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성찰을 요하는 다중 국적/새로운 시민권/다문화주의를 살펴보는 가운데 채워진다. 우리는 순혈 혈통주의를 따르는 국적에 기반을 둔 근대 국민 국가 체제를 그 근간에서부터 흔들 수 있는 잠재력을 다중 국적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재일 한국·조선인의 다중 국적을 막아온 '귀화 제도'는 패전 후 재일 한국·조선인들의 일본 국적을 일방적으로 빼앗은 일본국이, 그것으로 인해 차별을 받고 있는 재일 한국·조선인들에게 "순순히 말을 듣는다면 은혜로서 일본 국적을 주어도 된다"(149쪽)고 하는 것이다. 저자는 귀화 제도에 의하지 않고 일본 국적을 회복하여 이중 국적자, 다중 국적자로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가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임을 거듭 강조한다.

저자의 '재일 한국·조선인'이라는 소수자의 위치는 일본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니라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라, 일본인이기도 하고 한국·조선인이기도 한 이중적 존재이다. 여러 정체성들의 경계선을 드나들며 살아가는 이중 국적자들은 생존과 공존의 새로운 양식을 실험하고 실천할 수 있다.

국적이란 "개인보다는 국가 주권을 위해 필요한 개념"(180쪽)이다. 그러므로 국적법, 국적 유일의 원칙, 혈통주의를 거부하고 출생지주의에 따라 국경을 넘어 인권은 존중되어야 한다. 국적 유일의 원칙이라는 신화에 따라 국적을 조건으로 하는 시민권(177쪽)이 아니라, 거주지 중심주의로써 "정주 외국인을 포함한 국내에 거주하는 주민의 권리"(181쪽)를 중시하는 것은, 국적과 시민권을 분리하고 다중 국적자를 증가하게 할 것이다.

포스트 근대 국가에서 혈통이 아니라 거주지에 기반을 둔 다중 국적자들이 표상하는 다문화주의란, 문화들을 병렬적으로 나열하고 진열하는 형식 그 자체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식의 기반이 될 대등한 공존에 대한 지향성, 또는 공존 방식을 둘러싼 이념"(218쪽)을 가리킨다. 좀 더 근본적으로 "정치적 약자의 권리가 얼마만큼 보장되어 있느냐 하는 것은 단순한 시혜나 허가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권리가 권리로서 기능할 수 있는 여부를 가늠하는 시금석"(220쪽)이기 때문에 중요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권리가 권리로서 기능할 수 있는 여부는 전 지구화 시대에 내셔널리즘 비판을 지구적 자본의 권력, 논리로 수렴시킬 위험, 즉 내셔널리즘 비판에 있는 국가 주권, 국민 주권의 위험을 경계하면서 국적을 이탈할 권리를 갖고 국가에 대한 충성 의무를 반환하고 주권 재민의 내실을 지닌 권리 획득을 위해 싸우는 데서 간파될 수 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러한 싸움에서 현재 일본이 처한 저출산, 인구 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부족을 심각한 장애로 꼽는다. 또한 만혼화, 비혼화, 싱글화의 만연으로 노동력 공급은 더욱 큰 어려움에 처하여 이제 산업 고도화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노심초사한 일본이라는 '국가'는 여성과 고령자의 취업을 추진해 저임금으로 돌봄 서비스 노동을 보충하게 하려는 '노약남녀 협동 참여 사회,' '남녀 공동 참여 사회'라는 새로운 총동원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동원령은 여성과 노약자를 구조 조정 대상 1순위로서 노동 조건의 악화에 방치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여성, 노약자 외에 청년 세대, 외국인 노동자들도 이 악순환의 고리에 얽혀 있다. 그리하여 이러한 현실은 저자로 하여금 일본 페미니즘 안의 자민족 중심주의, 백인 페미니즘 안의 백인 지상주의 혹은 인종 차별주의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게 하고, "계급, 국적, 인종 또는 종족(ethnicity), 섹슈얼리티에 의해 누군가를 차별하지 않는"(206쪽) 페미니즘을, 성 차별뿐만 아니라 인종 차별, 계급 차별, 강제적 이성애, 환경오염, 세계 자본주의로 인한 모든 억압과 싸우는 페미니즘을 주장하게 한다.

말하자면 저자에게 페미니즘은 여성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노약자, 청년, 이주 노동자들, 난민을 아우르는 정치적 이론이자 실천인 셈이다. 따라서 차별, 착취, 식민화에서 벗어나 탈식민으로, 해방으로 나아가는 걸음들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지향을 비판할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깊숙이 자리 잡은 여성 차별, 민족 차별, 인종 차별, 외국인 차별 의식을 없애려는 부단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다미가요 제창>이 드러내고 비판하는, 얼마 안 되는 지배자들의 권익에 지나지 않는 것을 '국익'이라는 미명 하에 필요할 때 민초들을 이용하고는 사용 가치가 떨어지면 폐기물처럼 버려온, 비정한 국가주의는 비단 일본에 그치지 않는다. 19세기 영국 소설 <제인 에어>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로체스터의 자메이카 태생인 부인 버사는 태생부터 미친 여자로 재현되며 영국 백인 여성인 주인공 제인의 행복한 결혼을 위해 불타 죽음으로써 편리하게 제거된다.

제인의 짝으로 로체스터보다 더 잘 어울리는 세인트 존이라는 젊은 남성은 조국에서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찾지 못하자 인도에 선교사로 갔다가 객지에서 쓸쓸히 죽는다. 영국 제국은 비백인 여성뿐만 아니라 하위층 백인 남성도 조국에서 몰아낼 정도로 인간다운 삶의 기회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는다.

<버마 시절>에 나오는 목재상인 백인 남성 플로리(Flory)도 영국 제국주의로 인한 버마 자연과 민족 문화의 파괴를 고발하며 영국이 자임한 문명화, 근대화 미션의 거짓과 위선이 자국민을 타락시키고 죽게 하는 현실을 자신의 자살로써 몸으로 보여준다.

이제 전 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에 부의 서열에서 상위 10%의 사람들이 온갖 좋고 화려한 것들을 마음껏 누리고 독차지하기 위해 그들만의 리그를 결성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라는 구호를 써 먹는다. 그 구호는 평범한 인간의 얼굴을 한 사람들을 좀 더 착취하기 위한 거짓말인데도 여전히 먹힌다. 그만큼 국가와 민족이라는 덫은 강고하기 때문이다.

그 강력한 덫에서 빠져 나오는 데 필요한 예지들을 일본의 예를 통해 언뜻 언뜻 보여주는 <다미가요 제창>은 그 덫에서부터 해방되기를 꿈꾸는 여러 국가들의 다양한 사람들에게 띠처럼 지구를 에워싸는 가운데 해방의 합창을 부를 것을 촉구한다. 만국의 온갖 소수자들이여, 국가의 경계를 넘어 서로 협력하자고,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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