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따르면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와 유럽으로 도주해 프랑스 메로빙거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마이클 베이전트 등의 <성혈과 성배>(이정임·정미나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 1970년대에 출간된 이 책은 <다빈치 코드> 등 서구 비교 전통을 파헤친 수많은 소설과 연구서의 원조 격인 작품이다)는 이 '비밀'을 둘러싼 서구의 '역사적 권력 투쟁'을 추적한 책이다.
베이전트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는 '비밀'이야말로 서구 역사에서 "가장 소름끼치는 지식"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4세기 초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서구 봉건 권력 구조의 가장 밑바닥을 지탱했던 것이 바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이었으니까.
아우구스티누스나 아퀴나스 등 중세 신학자들이 한 일은 이런 믿음과 그리스 철학을 결합시켜 당대의 지배-피지배 권력 관계를 학문적으로 정당화한 것이다. 민중들은 모든 권력의 원천인 하나님으로부터 교황, 왕, 귀족으로 내려오는 지배권을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지금 이 세계(중세나 서구가 아니라)의 가장 밑바닥에서 우리의 생각과 행위를 제어하고 있는 '믿음'은 과연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국가와 산업, 개인, 그리고 국제 사회가 '돈 가진 자'(=투자자)의 요구에 부응해야 세계가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찬근의 저서 <금융 경제학 사용 설명서>는 이 '믿음'의 형성 과정과 그 결과를 추적하고, 이를 이해하기 위한 '팁'으로서 다양한 금융 제도를 설명해놓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돈 가진 자'(투자자)는 단지 부자만 가리키는 개념이 아니다. 은행에 1000만 원의 예금을 가진 당신, 3000만 원 상당의 주식을 보유한 그녀가 모두 해당된다. 이렇게 부자들뿐 아니라 대중들까지 이해관계의 망으로 포섭하고 있기에 '현대 사회의 믿음'은 실제로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로 자리 잡을 수 있었으리라.
이 '현대 사회의 믿음'은 흔히 '신자유주의'라고 불린다. 어떻게 보면 신자유주의는 투자자 측의 요구를 제도화한 것이다. 그러니 아주 오래 전에 나타난 것도 아니다. <금융 경제학 사용 설명서>에 따르면 이 믿음은 1950년대부터 서서히 형성되었고, 1980년대에 급성장했으며,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로 한풀 죽었지만 앞으로도 한동안 위세를 이어갈 지식 체계이며 이데올로기다.
저자인 이찬근이 '금융 경제학'으로 명명한 이 지식 체계를 이해하면, 세계의 정부와 자본들이 금융·무역 자유화와 부유층에 유리한 세제 개편을 강행하는 내적 논리를 간파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결국 금융(투자자의 요구)의 논리에 맞춰 세상을 바꾸는 것이 효율적일 뿐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옳다는 정치·경제 사상이며 실천인 것이다.
주주는 언제부터 기업의 주인이었나
▲ <금융 경제학 사용 설명서>(이찬근 지음, 부키 펴냄). ⓒ부키 |
1980년대 중반의 스웨덴. 영민하기로 이름 높았던 총리 올로프 팔메는 당시 재무부 장관으로부터 '외환 시장 자유화'를 끈질기게 요구 당하고 있었다. 끝내 팔메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고작 머리를 감싸 안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원하는 대로 하시오. 나는 지금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소."
그러나 팔메의 이런 '몰이해'는 결국 국가적 재앙으로 이어진다. 이때 단행된 외환 자유화는 1990년대 초 스웨덴 외환 위기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이렇게 복잡하지만 중요하기도 한 현대 금융에 접근하는 데 <금융 경제학 사용 설명서>는 좋은 길잡이 노릇을 해줄 것이다. 그럼 이찬근의 안내를 받아, 그리고 '돈 가진 자'(투자자)의 눈을 빌려 '금융 경제학'의 논리를 탐구해 보자.
우선 '돈 가진 자'(투자자)의 입장이라면 당연히 어떻게 돈을 불릴 수 있는지 고민할 것이다. 당장 은행에 돈을 예치해서 이자를 받거나 채권을 사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금리도 낮고 불릴 수 있는 규모도 뻔하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 즉 투자자가 사는 나라나 해외에 주식회사가 존재하고, 주식 거래 자유화 및 금융 개방이라는 조건이 충족된다면 이런 기업에 투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투자자는 기업을 투자의 대상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 기업은 투자의 대상이 되는 순간, 존재 방식이 바뀐다. 당초의 기업은 부와 고용을 창출하는 사회적 단위에 불과(!)하다. 그러나 투자자의 관점 혹은 금융의 관점에 포섭된 기업은 이미 금융 수익을 창출하는 '재료'로 작동한다. 금융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면 부와 고용의 사회적 의미는 부차화되어도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1970년대까지도 기업 입장에서 투자자들은 그냥 외부인이었다. 주식을 매입해서 해당 기업에 자금을 공급하지만 경영엔 영향을 미치려 하지 않았다. 주식을 사놓고 주가가 오르기를 기다리는 것이 투자자(주주)가 주로 하는 일이었다.
당시엔 기업 경영의 목표로 '사회적 책임'이 중시되기도 했다. 예컨대 기업은 고용을 창출하고 더 많은 부를 생산해서 경제 발전에 이바지하면 된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 경영자의 주요 역할 중 하나는 기업에 얽힌 이해관계자들, 즉 노동자-주주-채권자-소비자-지역 사회 등의 이익을 조율하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주주와 채권자는 기업에 자본을 조달하는 방법으로, 노동자는 상품을 생산하고 소비자는 소비하는 방법으로 해당 기업의 유지에 기여하고 있지 않은가. 이중 누구를 감히 기업의 '주인'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런 상황은 1970년대 후반 들어 급격하게 바뀌고 만다. 그 효시가 바로 1976년에 나온 마이클 젠선의 논문 '기업 이론 : 경영자 행동, 대리인 비용 및 소유 구조'이다. 이 논문에서 젠선은 "기업의 주인은 주주"라고 딱 잘라 말한다.
예컨대 해당 기업이 망해서 빚잔치 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해관계자 중 소비자나 지역 사회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채권자와 노동자는 오히려 그들이 못 받은 빚과 임금을 어느 정도까지 챙겨간다. 그러고 나서 남는 돈이 있다면 주주에게 돌아가지만 얼마나 되겠는가. 한 푼도 건지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렇다면 주주야말로 "기업 경영의 최종 위험을 부담"하는 자이며 주인이 아니겠냐는 것이 젠선의 설명이다. (그런데 최근 금융 위기나 예전의 외환 위기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은행이나 대기업들이 위태로워지거나 망할 때 공적 자금으로 '최종 위험'을 부담한 것은 국가 아니었던가.)
당시 미국 사회에서, '기업의 주인'을 밝혀낸 젠선의 논리는 매우 혁명적인 것이었다. 이후 기업의 질서를 바꿨다. 주주가 '주인'이라면 경영자는 한낱 '대리인'에 불과하다. 그런데 1970년대까지의 '대리인'들은 '주인'을 배신해오지 않았는가. 경영자들은 기업 가치(=주식 가치)를 올려 주주에게 봉사하기보다 '쓸데없이' 기업 규모나 매출 늘리는 데만 주력하면서 자신의 명예욕을 채우고 노동자들에게 아부했다는 것. (주주 입장에서는 자산 규모 100억 원으로 10억 원의 수익을 내는 기업보다 자산 규모 10억 원으로 5억 원의 수익을 내는 기업이 훨씬 낫다. 전자의 수익률은 10%에 불과하지만 후자는 50%에 달한다. 물론 고용 규모는 전자가 훨씬 크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더 이상 주주가 넋 놓고 있을 것이 아니라 기업 경영에 적극 개입해서 기업 가치, 즉 주식 가치를 올리도록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 젠선의 논리였다. 이를 위해 젠선은 주주가 적극적으로 경영 방향을 제시하고, 주주들의 대표(이사)를 통해 경영자가 기업 가치를 올리는 방향으로 경영하는지 감시하자고 주장했다.
또 주가를 올리는 경우 큰 수익을 얻게 되는 스톡옵션 등의 인센티브를 경영자에게 제공해서, 주인과 대리인의 이익을 '기업 가치 올리기'로 일치시키는 방법도 고안되었다. 이렇게 기업의 주인이 '주주'로 확정되자, 경영의 목표 역시 '기업 가치 높이기'로 고정되었다.
'기업 가치'란 개념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경영자가 높여야 하는 '기업 가치'가 뭐냐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보면 기업 가치는 굉장히 중립적이고 애매한 용어다. 많은 고용을 창출하거나, 국내총생산(GDP)을 높이거나, 수출을 많이 하는 기업이 '가치'가 있는 것으로 불릴 수 있다. (실제로 1990년대 이전의 한국에서는 그랬다.)
그러나 금융 경제학에서 말하는 기업 가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금융 경제학 사용 설명서>에서는 해리 마코위츠의 포트폴리오 선택 이론, 윌리엄 샤프의 '자본 자산 가격 결정 모델' 등을 동원해서 기업 가치 평가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금융 경제학에 따르면, 기업 가치는 '기업이 앞으로 투자자에게 돌려줄 수 있는 돈(캐시플로)'을 '투자자가 요구하는 수익률(자본 비용)'로 '할인'해 현재 가치화한 것이다.
이 글은 서평인 만큼 이를 자세히 설명할 지면은 없다. 그러나 분명히 할 것은 기업 가치를 구하는 공식에서 투자자에게 돌아가는 캐시플로는 '분자'이고, '투자자가 요구하는 수익률'은 분모이다.
즉, 캐시플로는 '기업이 벌어들일 돈 전체'가 아니다. 이중에서 노동자 임금, 경영자 보수, 세금, 설비 투자 지출 등을 뺀, 그야말로 투자자들에게만 가게 될 돈이다. 말하자면 기업 가치를 계산하는 공식에서는, 기업이 얼마나 많이 투자하고 고용해서 국민 경제 성장에 기여하는지, 얼마나 많은 세금을 내서 복지 재원을 충당하는지 등은 중요하지 않다.
즉, 기업 가치를 평가하는 공식에서, 분자는 '투자자가 받을 수 있는 돈'이고, 분모는 '투자자가 바라는 수익률'이다. 분자에도 분모에도 투자자만 있다. 바꿔 말하면 분자는 '투자자에게 보상할 기업의 캐시 창출 능력'이고, 분모는 투자자의 욕망이다. 결국 기업 가치는 '해당 기업이 투자자의 요구 수준에 비해 얼마나 많은 돈으로 보답할 수 있는가'로 평가되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금융 혹은 투자자의 관점에서 기업의 가치를 평가하는 사고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기업 가치는, 자연스럽게 존재해온 것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정교하게 직조된 개념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다시 현실에 적용되면서 세계를 재창조한다. 기업이 만든 상품 뿐 아니라 기업 그 자체에 가격을 매기는 방법이 개발된 것이다. 이에 따라 기업을 사고파는 새로운 시장(M&A 시장)이 열린다.
주가가 오르내리는 것에 따라 경영자의 성적이 평가되고 이에 따라 진퇴가 좌우된다. 경영자들은 기업 가치(주가)를 올리기 위해 고용을 유연화하고, 해외 부품 업체로 거래선을 옳기고자(아웃소싱) 노력한다. 애널리스트들은 기업 가치 이론으로 산출한 '이론적 주가'를 투자 지침으로 배포하고, 이에 따라 자금 흐름이 결정된다.
그리고 이런 활동들은 국가 단위가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 행해진다. 금융 자본의 활동 영역이 지구적 차원으로 확대된 것이다. 1997년 환란 이후 국제통화기금(IMF)의 개혁은 사실 '기업 가치 평가가 가능하고 이에 따라 기업 그 자체의 거래가 이뤄지는 환경'을 국내에 창출하는 대역사이기도 했다.
이런 모든 변화는 1950년대 이후 금융 경제학의 성과가 없었다면 이뤄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은 이미 숨 쉬는 공기처럼 느껴지고 있는 금융 경제학의 사고 체계가 어떤 내용이고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비교적 쉽고 간단하며 일목요연하게 제시해 놓았다는 것이 <금융 경제학 사용 설명서>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투자은행? 언더라이팅? 증권화?
<금융 경제학 사용 설명서>의 다른 미덕은, 어렵지만 금융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개념들을 쉽게 풀어 놓았다는 데 있다. 예컨대 최근 나온 미국 다큐멘터리 영화 <인사이드 잡>은 '미국 투자은행 쇠망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30년대부터 2008년의 서브프라임 위기, 이후의 오바마 금융 개혁까지 연대기적으로 투자은행업의 역사를 그리고 있는 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엔 금융 비전공자들에게 낯선 금융 용어들이 끊임없이 돌출한다. 투자은행(investment bank)부터 시작해서 상업은행(commercial bank), 언더라이팅, 증권화, 브로커와 딜러, 선물, 옵션, 글래스-스티걸 법, 그램 리치 블라일리 법….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난 당신은 상당수의 금융 용어들을 친숙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3장(자본 시장의 주역, 투자은행)에서 저자는 상업은행과의 비교를 통해 투자은행의 개념을 굉장히 명료하게 서술한다. 예컨대 상업은행(commercial bank)은 "예금 수신 기능과 대출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금융기관"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한국인들이 흔히 은행이라고 부르는 업태의 정확한 명칭이 '상업은행'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투자은행은 "기업이 증권 시장에서 주식이나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도록 도와주는 금융 기관"이다. 저자의 투자은행 설명을 요약해서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한 기업이 주식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려 한다고 가정하자. 이 회사는 먼저(10억 원이든 100억 원이든) 자사의 시장 가치부터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래야 적정한 '발행 주식가'를 산정할 수 있다. 투자은행은 이 단계부터 개입해 해당 기업의 시장 가치를 평가해주고 이에 맞춰 주식 발행 절차를 대행해준다.
그런데 이 회사가 신규 주식 물량의 가치를 10억 원으로 평가받아 5000원권 20만 장을 발행하기로 했다고 가정하자. 그러나 기업이 주식을 직접 시장에 팔기는 힘들다. 투자자를 찾기도 힘들고 한꺼번에 20만 장을 내놓으면 주가가 폭락할 수도 있다. 그래서 주식 20만 장을 투자은행에 일괄해 넘기는 것이 보통이다.
현재 주식 20만 장이 시장에서 10억 원으로 평가되어 있다면 9억 원에 투자은행으로 넘길 수 있다. 차액인 1억 원은 투자은행에 돌아가는 인수 수수료다. 이런 과정을 가리켜 증권 인수(언더라이팅)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투자은행이 하는 일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그래서 저자는 투자은행의 역사적 발전을 따라가며, 투자은행의 개념을 자연스럽게 확장해준다. 예컨대 투자은행이 작은 '파트너십 회사'에서 거대 주식회사로 변화한 이유가 무엇인지, 기업과 투자자를 중개하는 것에 불과한 증권인수업에서 어떻게 '고유 계정 거래'(proprietary trading)나 지배 주주형 투자(principal trading)로 업태를 넓혔는지 친절하게 알려준다.
다른 복잡다단한 개념들에도 마찬가지다. 3장을 읽으면 현재 정부와 금융권에서 뜨겁게 진행 중인 메가뱅크 논쟁의 배경을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 함의
<금융 경제학 사용 설명서>는 일종의 금융 경제학 개론서지만 사실은 대단히 강력한 정치적 함의를 품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왜 그런가. 1990년대 이후 미국 민주당과 영국 노동당의 '신진보 노선'은 기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금융 경제학의 지식 체계에 기반을 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빌 클린턴과 토니 블레어는 파격적 규제 완화로 금융 산업을 성장 동력으로 채택했던 것이다. 이들은 지구화를 되돌릴 수 없는 경향으로 받아들이면서 자국 금융 산업의 업무 영역을 전 세계로 확장시키기 위해 IMF 등 국제기구를 통해 사실상 강제로 다른 나라의 금융 시장을 개방시키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한국이다!)
또한 자본 이동이 자유로운 국제 환경에서는 자국 내에 고급 인력을 육성하는 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고용 정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자본이 인력을 찾아올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클린턴과 블레어 그리고 오바마가 그토록 교육을 강조하는 지적 배경이다. 나름대로 이는 '평등' 정책이기도 했다. 이러한 정치·경제·사회 노선은 흔히 '제3의 길' '사회투자국가론' 등으로 불린다.
한국에서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이 노선을 수용했다. 국민참여당 대표 유시민은 사회투자국가론으로 책을 쓴 바도 있다. 그러나 이 노선의 다른 이름은 신자유주의다. 그렇게 해석될 수밖에 없는 이론적, 사회운동적 배경도 있다. 이런 측면에서 <금융 경제학 사용 설명서>는, 흔히 신자유주의의 종말로 해석되는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의 상황에서 신자유주의를 다시 성찰하는 책이기도 하다.
더욱이 저자인 이찬근은 IMF 개혁이 한국 경제를 저투자-저성장-고실업 체질로 전락시킬 것이라며, 1997년 환란 직후부터 '신자유주의 비판'에 나섰던 인물이다. 사회운동권에서마저 'IMF가 부패한 한국 자본주의를 개혁한다' '환란은 위장된 축복'이라며 IMF 개혁을 찬양할 때였다. 당시 그의 얼마 안 되는 '동지'들이 바로 장하준(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정승일(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 조원희(국민대학교 교수) 등이다.
이랬던 이찬근이 자신의 예측(저투자-저성장-고실업)이 상당 부분 한국 사회에 고착한 시점(2011년)에서 신자유주의의 사고 형태를 다시 성찰하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한국에서 진행된 '신자유주의 변혁'이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심화되었다고 판단하게 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예전에 비판만 퍼붓느라 보지 못했던 긍정적 측면을 신자유주의에서 발견한 것일까. 혹은 '신자유주의 반대'에서는 대안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가 그의 '변화'로 인해 새삼스레 느끼는 것은 '긍정적 변혁의 난관'이다.
예컨대 현재 진행 중인 야권 통합 과정에서 진보 세력 일각에서는 민주당이나 국민참여당을 '신자유주의 본류'라 부르며 연대를 거부한다. 그러나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이 추진하던 그 신자유주의를 반대하기만 하면, '민중 세상'이 도래할 것인가. 주식 거래를 억제하고(이렇게 하면 최고 수혜자는 재벌일 것이다!), 대기업의 아웃소싱을 막고, 노동 시장을 경직적으로 재구성하면 '신자유주의 반대'란 정치적 목표는 일단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야말로 진정한 신자유주의 반대자'라며 선명성을 과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곧이어 외국 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국내 기업들의 주가가 폭락하고, 원화 가치가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폭락함에 따라 소비자 물가가 급등하고, 실업률이 도리어 크게 올라가는 사태가 실제로 도래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는 전 세계적으로 촘촘하게 깔린 신자유주의 네트워크에서 홀로 이탈하는 국가가 치를 수 있는 대가로, '길은 복잡하지 않다'고 역설하거나 노동자 계급성을 강조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런 진퇴양난의 상황이라면 '신자유주의 반대'에 앞서 신자유주의 그 자체를 객관적으로 성찰해보는 건 어떨까. 더욱 진보적인 시스템이란, 앞선 체제의 장점만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얽혀있는 장단점 전체를 다만 '진보적'으로 전유하고 소화해낸 결과일 터이므로…. 이런 독자들에게 <금융 경제학 사용 설명서>는 신자유주의의 영혼과 가죽을 단시간에 훑을 수 있는 매우 유용한 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정치적 함의 중 일부를 취하거나 버리는 것은 독자의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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